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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주는 구한말 때 남원 지방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하다가, 이 고장 구례로 와서 젊은이들을 교육하면서 민족정신을 심어 준 사람이다.
그는 1858년(철종 9년)에 남원에서 태어났는데 호를 경당(警堂)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 하였으며, 옳지 않는 일을 미워하고 그릇된 일을 저지른 사람을 아주 싫어 하였다.
임현주는
일찍이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제자가 되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학문에 뛰어났고 대사헌(大司憲)과 공조 판서 등 높은 벼슬을 지내다가 친일파
간신들의 모함에 빠져 제주도로 귀양을 갔던 분이다. 귀양에서 풀려 나온 최익현은, 고향에 돌아와 후진 교육에 힘쓰면서도 나라에 옳지 못한 일이
있을 때에는 목숨을 걸고 임금께 상소하는 충신이었다.
이런 최익현의 가르침을 받은 임현주는 언제나 정의감과 충성심에 불타고 있었다.
1905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보호해 준다는 핑계로 주권을 빼앗는 을사보호 조약을 강제로 맺자, 최익현은 친일파 간신 다섯명을 목 벨 것을 임금께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최익현은 임병찬(林炳瓚) 등 80여명의 애국지사들과 함께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대하여 일본이 약속을 어겨 배신한 행위 16가지를 따지는 글을 발표하고, 순창 등지에서 4백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 때에 임현주는 최익현을 따를 것을 결심하였다. 임현주가 의병을 일으킬 뜻을 최익현 에게 전하자, 그는 크게 기뻐하며 임현주에게 힘을 합하여 싸우자고 말해 왔다.
임현주는 곧 남원으로 내려와 의병을 모았다. 3백 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최익현의 휘하 로 들어갔다.
이렇게 힘을 합친 최익현 의병 부대가 처음 쳐들어 간 곳은 전라북도 순창이었다. 당시 순창에는 3백여명의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의병들은 순창에 주둔한 일본군의 부대를 습격하여 무기고를 부수고 많은 무기를 빼앗았다. 임현주도 70여 명을 이끌고 용감히 싸웠다.
이 싸움에서 크게 이겨 무기를 빼앗아 든 의병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남원으로 쳐들어 갔다. 남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임현주는 선봉장이 되어 남원 일본군 부대로 진격하였다.
갑자기 습격을 받은 일본군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허둥대기만 하였다. 의병들은 마음껏 일본군들을 무찔렀다. 어쩔 줄을 모르던 일본군들은 모두 달아나 버리거나 의병들의 칼에 맞아 숨졌다. 이 싸움도 의병들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승리를 기뻐하며 쉴 수만은 없었다. 서울을 비롯한 우리나라 각 지방에는 수 많은 일본군들이 있었으므로 그들이 복수하기 위하여 몰려 올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최익현이 거느린 의병들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다시 곡성으로 치달았다.
한편 최익현 의병 부대에게 두 번씩이나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군 본부에서는 깜짝 놀랐다. 70살이 넘은 늙은 최익현이 거느린 의병들이 큰 힘을 쓸 수 있을까 하고 크게 생각 하지 않았는데 훈련된 일본군을 계속 이겼기 때문이었다. 즉시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군 대부대를 의병들의 진격을 막고 쳐부수기 위하여 곡성으로 출동시켰다.
드디어 1906년 4월 23일 최익현 의병 부대와 일본군 부대는 곡성에서 맞부딪쳤다.
의병들의 형편은 매우 불리하였다. 의병부대는 무기나 장비도 잘 갖추어져 있지 못 했으며, 의병의 수도 겨우 1천 명에 가까운데 비해 일본군은 무기도 우수하였을 뿐 아니라 그 수효도 의병들보다도 훨씬 많았다.
그러나 우리 의병들은 끝까지 죽을힘을 다하여 싸웠다. 임현주 역시 자기에게 딸린 의병 들을 지휘하며 밀려오는 일본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다.
적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졌다. 싸움이 계속되어 갈수록 의병들의 수효는 줄어들기만 하였다. 용감한 행동과 애국심만을 가지고는 우수한 무기로 무장되고 잘 훈련된 수 많은 일본군 들을 도저히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하늘을 향하여 통탄하였으나, 의병들에게 불리한 전투의 형편은 뒤바꾸어지지 않았다. 끝 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총탄이 다하여 더 싸우지 못한 의병들은 일본군들에게 잡 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최익현과 임현주를 포함한 장수격인 열 두사람의 의병장들도 모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포로가 된 임현주는 다른 의병들과 함께 서울에 있는 일본군 헌병본부로 끌려갔다. 그리 고 한 사람 한 사람씩 그들에게 불려나가 문초를 당하였다. 임현주 차례가 되었다.
헌병 대장은 임현주에게,
"당신이 다시는 의병 활동을 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일본의 말을 잘 듣도록 권유하겠다고 약속한다면 목숨을 살려주겠오."
하면서 일본의 편이 되라고 꾀었다.
이에 임현주는 눈을 부릅뜨고,
"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어찌 바꾼단 말이냐? 죽일테면 어서 죽여라. 나라가 망해 가는데 내 생명을 보존하여 무엇 하겠느냐?"
하고 외친 뒤에는 일본 헌병 대장의 물음에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헌병의 무자비한 고문은 시작되었다. 몸이 터지고 찢겨 처참한 꼴이 되었다. 몸이 부러지는 듯한 아픔이 계속 되었으나 임현주는 이를 악물고 견디어내며 끝까지 그 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아주 지독한 놈이구나. 몽둥이로 백대를 쳐라. 그러면 끝장이 나겠지."
헌병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나운 짐승같은 그들의 무서운 형벌이 또 시작되었다. 여러 날의 고문으로 지칠대로 지친 임현주는 몽둥이 스무대를 맞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일본 헌병들은 찬물을 끼얹어 가면서 계속 쳐대는 것이었다.
임현주의 몸둥이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끝내는 축 늘어진 시체처럼 되어버리고 말 았다. 이를 본 헌병 대장은,
"죽었구나. 한강에 갖다 던져 버려!"
하고 외쳤다.
이렇게 하여 임현주는 강물에 버려졌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고기잡이 하던 한 노인이 그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고 구하여 주었다.
자기 집으로 임현주를 업고 간 그 노인은 그를 열심히 간호하였다. 임현주는 노인의 지극 한 간호를 받고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십여 일이 지나자 차차 몸도 많이 회복 되었다.
그러나 너무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몸이라 회복은 되었지만 반신불수의 병신이 되고 말았다. 임현주는 병신이 된 몸을 이끌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일본군의 눈을 피해 고향에까지 돌아 왔다.
그렇지만 일본 경찰과 헌병들의 감시가 너무 심하였기 때문에 그는 고향에 있을 수가 없었다. 임현주는 하는 수 없이 집을 몰래 빠져 나와 우리 고장 문척면 화정리로 몸을 피해 왔다. 그리하여 그는 이 곳에서 숨어 살게 되었다.
임현주의
마음 속에 한 번 자리 잡은 나라 위한 마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의병 활동을 하던 동지들은 죽었거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으며,
특히 그의 스승인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 귀양살이 속에서도 음식조차 왜놈의 것이라 먹지 않다가 74세로 돌아가신 것 을 생각하면 일본에 대한 강한
분노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숨어 사는 몸이지만 무엇인가 국가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려고 애를 썼다.
임현주는 이와 같은 불구의 몸으로는 의병 활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는 교육 사업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곧 고향에 연락하여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처분해와 그 돈으로 문척면 오봉산 밑 에 조그마한 집을 세웠다. 그리고 그 집을 오봉정사(五鳳精舍)라고 이름지었다. 정사(精舍) 란 학교라고 부르기에는 작은 것으로 학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운 집을 말한 다.
임현주는 이 오봉정사에 이 고장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온갖 정성 을 다하여 이들을 교육하였다. 물론 이 고장 사람 뿐 아니라 다른 고장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기꺼이 받아들여 가르쳤던 것이다.
일본의 감시가 이 곳에까지 뻗치고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는 단순히 한문학만을 가르치는 것처럼 하였지만 사실은 교육의 근본을, 민족정신을 기르는 것과 일본의 세력에 대항하는 항일 정신을 기르는 데에 두었다.
그는 늘 제자들에게,
"나라 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우리의 자손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
라고 타이르면서, 나라가 있음으로써 개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나라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근본 도리가 충성, 즉 애국이라는 것을 젊은이들의 가슴에 깊이 심어 주었다. 그는 이렇게 남은 평생을 교육 사업에 바침으로써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임현주가 죽은 뒤, 그이 제자들은 스승의 높은 정신을 받들어 모시기 위하여 '봉산계'라 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봉정사 곁에 임현주의 업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또한 제 자들은 최익현과 임현주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애국 충절의 높은 정신을 이어가기 위하 여 해마다 이 곳 문척면 화정리에 있는 오봉정사에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오봉정사 왼쪽에는 '봉산사(鳳山祠)'라는 사당이 따로 지어져 있다.
오늘날 구례사람의 정신은 경당이나,매천의 정신을 본받은 듯하여 다행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옳바르게 포용하고 아우를 때 빛을 발할 것이다.
지리산과 백운산이라는 거대한 정기 넘치는 자연을 잘 못 받아들여, 꽉 막히고 편협된 사고로 욱하는 하학적인 자질을 뛰어 넘게 되기를 바란다.
오봉정사는 구례읍에서 문척다리를 지나 간전, 광양시 다압방향으로 약2KM쯤 가다가 "간전농공단지" 못 미쳐 [화정리]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오봉정사는 정비사업은 하였으나 매천사와 마찬가지로 지키고 가꾸는 사람이 없다.
인근에는 수달서식지가 있으며, 섬진강생태공원을 건설중에 있다.
**** 인근 먹거리 : 문척면중산리 옻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