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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배(빌 길버트) 16
글렌 코와트 (Glenn C. Cowart)가 1992년에 쓴 그의 저서 <한국에서의 기적(Miracle in Korea)>에는 이런 기술이 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바람이 휘몰아치는 능선, 굶으며, 잠도 못 자며, 무엇보다도 죽거나 포로가 될 끊임없는 위협의 고통을 극복한 사람들에게 흥남철수는 그야말로 최절정의 거대한 기적이었다."
당시 철수한 인원과 장비의 규모가 그 작전의 거대함을 증명하고 있다.
105,000명의 UN군.
98,100명의 북한 민간인
17,500대의 차량
350,000톤의 화물
매튜 릿지웨이(Matthew B.Ridgewa)장군이 홍남의 미 8군사령관으로 새로 부임해 왔다. 그는 4개월 뒤 맥아더장군(트루먼에 의해 해임됨) 후임으로 UN군 총사령관이 되었다가, 후일에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란 자신의 회고록에서 말했다: "105,000명의 군인. 91,000명의 피난민(98,100명이란 집계가 더 유력하다). 17,000대의 차량과 수십만 톤의 화물을 빼내 갔다는 그 사실 자체가 엄청난 규모의 군 작전상의 대승리였다."
철수작전이 완결되자 미 제10공병대대와 해군 폭파대는 쾌속 수송선 베고(Begor)의 지원을 받아 공산군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해변에 남기고 온 모든 군 장비와 물자를 폭파하려고 부두로 들어왔다. 굉장한 폭파의 충격파는 큰 파고를 일게 하여 여러 배가 뒤집혀지게 했다. 흥남부두가 납작해지도록 모두 폭파해 버렸다.
미조리(Missouri) 호가 거대한 40밀리 함포로 162발의 함포를 쏘아 폭파를 지원하는 한편, 400톤의 다이너마이트, 1천 파운드짜리 폭탄 500개와 200개의 휘발유 드럼통을 다 태워버렸다. 어마어마한 미군의 화력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폭파하기란 어려웠다. 결국 해군 구축함들이 해안에 접근하여 군 장비와 탄약더미에 함포를 쏴서 폭파했다.
부두 폭파작전 동안 제 3사단 소속의 군인들은 46,000발 이상의 탄알을 쏘아댔고, 해군은 또 해군대로 12,000발 이상의 함포를 해변에 쏘아댔다. 이제 흥남부두에 있던 UN군과 피난민만 사라진 것이 아니고 해변 자체도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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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보병사단의 보고서는 100,000명의 군인들을 배에 태우는 일이 98,100명의 피난민을 태우는 작업과 겹쳐서 매우 복잡했다고 썼다.
"피난민들은 공산군을 피해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서 부두와 하역장으로 몰려들었다. 피난 보따리를 등에 메고 바다만 쳐다보며 서 있는 수천수만의 피난민들, 부모의 손을 놓칠세라 꽉 잡고 있는 아이들. 굶주림과 공포와 절망으로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민간구조대도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최선을 다 했지만, 그들을 처절한 운명으로부터 구하는 유일한 길은 그들이 태어났지만 '악마의 땅'으로 변한 그곳에서 구출하는 일이었다. 도와달라는 그들의 애걸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홍남 해변을 끝까지 방어한 3사단 용사들의 무용담이 다른 부대의 영웅적 전과 보고에 의해 상당히 가려진 점이 있었다.
육군 보고서는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하룻밤 사이에 급성장해 간 과정을 묘사했다. 소년티를 벗고 성인으로, 새파란 신병에서 전투에 익숙한 강인한 군인으로, 심한 단련을 통해 철없는 아이가 청년으로 급성장하여
1차 2차 세계대전의 노장들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에 큰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들이 본국의 가정생활을 떠나온 지 불과 몇 주밖에 안 되었지만 수십 년이 지난 것 같이 느껴졌다. 그들 대부분이 신병이었으나 이제는 노병 같이 느껴졌다. 전투경험을 쌓아 앞으로 더 싸우라면 더 싸울 수도 있다. 그때엔 전투가 생소할 리도 없고 어떻게 싸울 줄도 안다. 이제 그들 중에서 영웅도 태어난 반면, 예비군 소집령에 응할 수 없는 전몰용사도 있다.
배 갑판을 가득 메운 수많은 군인들 중에는 일본 벱푸(Beppu)에서 3사단에 합류한 한국 군인들도 있었다. 그들 역시 GI들과 같은 레이션(rations)을 타먹고, 같은 위험에 처했으며, 작은 위안거리도 같이 나누었다. 그들도 쓰러진 전우들을 묻었으며, 그들에게도 영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안치오(Anzio), 마르느(Marne), 지그프리드 전선(Siegfried Line)에서의 영웅들의 후배들이었다. ("마르는 1차대전 격전지. 안치오와 지그프리드 전선은 2차대전 격전지-역자)
신참자들의 자리는 모두 잘 채워졌고, 이들은 그들 자신이 하였던 영웅적인 행위들로 기억될 것이다."
라뤼선장은 그의 비교적 크지 않은 화물선으로 14,000명의 피난민을 우겨 집어넣는 작업을 직접 보면서도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어떻게 했는지, 무슨 수를 썼는지, 8천 톤의 강철이 늘어났는지 올라온 사람들을 다 태웠다.
러니의 기억에 의하면, 피난민들을 직접 차곡차곡 쟁여 태우는 작업을 했던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관들은 한국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우선 그들과 말이 안 통했다. 그들은 조용하니 말도 없이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들 같았다. 그들 대부분은 가난한 농사꾼으로서 보다 낳은 세상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더 이상 자세히는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자기들을 잡아 죽이려는 중공군을 피해 도망치려고 지금 빼곡하게 뱃속에 들어차 있지만, 실은 그들 자신의 나라의 공산독재정권의 학정(虐政)에 신물이 나서 도망친 것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사관들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문제가 하나 있다 가족은 가족끼리 같이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피난민을 태울 때 무조건 남녀를 분리한 것이 문제였다. 뒤늦게 깨달은 것은 그들이 가족들을 갈라놓았다는 것이었다. 이토록 복잡한 아수라장에서 서로 찾지 못해 가족을 영 갈라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가족이 같이 있게 한들 처음 분리 수용할 때 갈라진 가족은 그대로 갈라져 있을 것이다. 갈라진 가족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부산에 도착하여 하선하게 될 때 상층 갑판선창 사람부터 내리게 될것이다. 제일 먼저 탄 맨 밑바닥 선창 사람들은 맨 나중에 갑판으로 걸어 올라와 하선할 것이다. 몇 시간 걸려 14,000명의 피난민들이 다 내리고 난 뒤 서로 찾지 못한다면 가족이 영영 헤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멀스미스는 오늘날까지 그때 전쟁의 기구한 운명으로 서로 떨어지게 된 가족들이 몇이나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항해 중 라뤼 선장은 침착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1등사관 러니는 말했다:
"그는 명석하고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두뇌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가려 올바른 선택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과 문제도 그를 얽어매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가 그의 배와 사관과 선원들 그리고 14,000명의 피난민들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그는 자신이 결정한 구출작전은 바른 선택이었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라뤼의 사관들은 그의 지도력과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러니는 말했다:
"우리는 전쟁의 찬반(贊反)이나, 우리가 왜 여기 와 있는지 따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한 주권국가인 남한을 구출하려고 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전 세계가 크게 우려하던 공산주의 침략전쟁에 대해 미국이 국익을 보호하기 위해 결전의 태세로 참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정당한 일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헤이그 장군도 같은 생각을 했다. 내가 피난민의 철수작전이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감행할 가치가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한 치의주저함도 없이 강한 어조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피난민 철수가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것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일은 전례를 찾기 힘든 상당히 중요한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문제라고 느꼈습니다. 그 불쌍한 사람들, 젠장, 우리가 어떤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조건 구출했어야지요. 내게는 하나도 문제 될 것이 없었어요. 나는 구출해야 된다고 강력히 주창(主唱)했습니다. 내가 최후의 결정권자는 아니었지만 나는 몇 번 진언(進言)을 했습니다."
러니는 작전의 위험부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구출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다 취했다고 자신했습니다. 우리가 실패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의 선장님, 1등기관사, 1등 선원, 1등기사(士), 선임사관들 모두 2차대전 참전용사들이었지요.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폈지만 우리가 제해 제공권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사히 탈출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스미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2차대전 승전국으로서 우리는 무적(無敵)의 군대라고 믿었지요."
러니와 스미스는 자신감에 차서, 만약 자신들이 적에게 잡히더라도 별로 걱정할 게 없었다고 큰소리쳤다. 배에는 웡윈(Wong Win)이라는 중국인 요리사가 있었는데, 그에게 농담조로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문제없다고 잡혀도 그들이 우리를 신사와 사관처럼 대우해 줄 텐데...당신만 빼놓고 말이야."
선장은 물론 전 사관과 선원들은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피난민들이 처신하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러니는 물론이고 다들 감동을 받았다. 14,000명의 생명을 구하여 배에 태웠지만, 그들은 모두 미국이 할 일이 더 있다고 생각했다. 멀 스미스는 말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공산당놈들을 만주(북한 땅에 붙어 있는 중국 영토)까지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 했어요."
그들은 맥아더가 중국까지의 확전을 고집했을 때 그를 지지하였는가? 스미스는 대답했다: "나는 맥아더가 만주로 쳐들어가려고 했을 때 그가 옳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런 주장을 막후에서 비밀히 했어야지요. 결국 트루먼 대통령을 거역한 것은 잘못입니다. 군통수권자의 명령인데 따라야지요."
그때 본국에서나 전 세계적으로 널리 공론화된 중요한 문제, 즉 한국전쟁이 3차대전으로 확대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대하여, 러니는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리고는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집에 전화를 걸었지요. 부모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내가 코넬법대의 가을학기를 놓쳐서는 안 될 텐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 모두 군대생활 잠시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지요."라고 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러니는 말했다."우리가 누굽니까.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입니다. 북한쯤이야 식은 죽먹기였지요. 우리가 전쟁에 이기거나 성공할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어요.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 여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반대여론도 없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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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항해일 경우 사관들은 "담화실(saloon)"에서 체스를 두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번에는 비번(非番)일 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4시간 감시근무를 하고 8시간 휴무에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감시근무 사이사이에는 군대 속어로 대개 "색 타임(sack time)" (잠자는 시간-역자)을 취했다. 그들의 숙사(宿舍)는 배 앞머리 중앙의 사령탑 안에 자리 잡았는데, 그들이 숙사를 출입하기 위해서는 매번 피난민들을 밀어서 그들과 벌어지도록 해야만 했다.
근무실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항해사들이 배의 진로와 속력을 조정해 가며 항진하면서 어떤 위험 요소라도 포착하려고 망을 보는 함교(艦橋)만을 통해서 갈 수 있었는데, 함교의 사관들이 갑판으로 나가야 할 경우에는 피난민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야만 했다.
멀 스미스가 협소한 자기 방에 들어와 있을 때, 누가 현창(舷窓)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계속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그 창을 열었어요. 그러자 손과 팔이 불쑥 튀어 나오는 거예요. 기겁을 했습니다. 마치 그 팔과 손이 국수다발처럼 현창에 축 늘어져 있더라고요. 목이 말라 애타게 물을 달라는 손이었어요. 그에게 물을 줬지만 그들의 갈증을 다 면해줄 수는 없었지요. 동료 사관이 와서 도와 주어서야 그 현창을 닫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실수를 더 할 수는 없어서 스미스는 자기 동료 상급 사관의 도움을 받아 그 현창의 쇠빗장을 잠궈 버렸다고 했다. "나는 다시 어떤 피난민이 내 방속을 들여다보도록 할 수는 없었어요. 놀래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어떻게 그들이 사흘간의 긴 항해를 물 한 방울 못 마시고 견뎠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됩니다."
피난민들의 처절한 상황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에 대해 애슐리 홀시(Ashley Halsey Jr.)는 그 다음 해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지에 그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했다. "사망자가 속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공포, 추위, 탈진, 신체가 마비되어 쓰러지는 사람, 갑작스런 전염병. 그 사흘간의 지옥 같은 항해 중 무슨 불상사든지 벌어질 수 있었다.
한 헐벗고 굶주린 사람은 배의 취사실 옆에 서 있다가 삶은 계란 한 개를 손에 쥘 수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없어 껍질을 깔 새도 없이 통째로 꿀꺽 삼켜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딱하게 본 선원이 오렌지를 주자 그것을 껍질째 통째로 삼켜버렸다.
북한 사람들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참아내야만 했다. 러니의 말을 들어보자. "그들의 얼굴에서 겁을 집어먹은 표정은 별로 띠지 않았습니다. 화물칸 내에 변소라고는 전혀 없었고, 그 악취란 참을 수가 없었지요. 나중에 일본에 가서 배 전체를 닦아내야 했습니다. 시애틀로 돌아와서 정박을 했는데, 부두의 인부들이 구린내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달 후에도 그 냄새는 여전히 지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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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탄 피난민들 중에 29살 난 이금순(영세명 막달레나)와 그녀의 세 자녀들 - 여덟 살 먹은 강순화(마리아), 여섯 살짜리 강순일(안드레)과 8개월 된 안톤이라고 영세명을 지은 아기가 있었다. 이들 가족은 반시간 거리의 함흥에서 트럭을 타고 홍남으로 왔다.
필자는 그때의 아기가 자라서 서울에서 베네딕트 수도사가 된 강안톤 신부에게 부탁해서 이제 79세 된 그의 어머니가 죽음에서 탈출한 그때의 일을 회상하도록 했다. 노인이 된 어머니가 아들 신부에게 한 이야기는 이렇다:
"공산당들은 우리 천주교인들을 특히 심하게 박해했단다. 천주교인들이 공산정권을 반대하고 그들의 인민에 대한 탄압에 반항하고 있었거든, 1945년 해방 이후 이북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었지. 특히 천주교인으로서는 더욱 힘들었단다."
베네딕트 피정센터의 원장인 안톤 신부는 어머니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공포에 떨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홍남 가는 길이 피난민들로 메워진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북한정부의 공무원이었는데 천주교인이란 이유로 항상 감사를 받아오다가 한국전쟁이 벌어지기 바로 전에 비공개 궐석재판에서 총살형 인도를 받
았어요. 그 사실을 아버님의 친구가 귀띔을 해줘서 사변 전 산속으로 3~4개월 피신하셨다가 결국 남하하셨지요."
강 신부의 모친이 기억을 되살려 자기 집은 폭격을 맞아서 흥남으로 올 때 물건을 하나도 꺼내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안톤 신부는 이어서 말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바닥 선장에 콩나물시루처럼 빼곡이 들어앉았을 때, 어머님은 너무 겁에 질려 있었기에 그때 정확히 어떤 지경에 처해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하셔요. 뱃속에서 시달리면서도 어머님은 딸과 아들을 안고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이별한 가족과 친척들을 생각하며 천주님께 밤낮 열심히 기도만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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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을 떠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라뤼 선장은 러니로부터 피난민들이 제트기 연료 드럼통 주위에서 체온을 덥히고 있거나 음식을 하려고 불을 때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대경실색(大驚失色)했다. 러니가 급히 조사를 해보니 어떤 이들은 아예 드럼통 위에다 불을 지피고 있었다. 자칫하면 폭발하여 배고 사람이고 다 터지고 불에 타 죽을 판이었다. 역사적인 생명구출을 하려다가 역사상 가장 끔찍한 해상 재난사고로 이어져 14,000
명의 생명을 앗아갈 찰나였다.
러니는 피난민들과 언어가 서로 소통이 안 돼서 온몸으로 의사를 전달하며 "절대 안 돼요!" 하고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내면서 "안 돼요! 절대! 안 돼! 안 돼!" 하고 소리를 지를 때 동료 사관들이 재빨리 불을 껐다. 그 후로 피난민들이 알아차리고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았다.
항해 중에 전시 때마다 생겨나는 악성 소문이 자주 나돌았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공해상으로 멀리 나가 원자폭탄을 터뜨려 피난민들을 모두 죽일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 미 육군소위가 홍남항을 떠나기 전 뛰어와서 경고한 것처럼, 북한 첩자들이 그런 웃지 못할 괴이한 말을 퍼뜨리지 않았나 의심했다.
다른 소문은, 이미 배 한구석에 피난민 상당수가 죽어 있다는 것이었으며, 보다 신빙성 있게 들린 소문은 미국인들이 육지에서 멀리 나가 피난민들을 모두 바다로 던져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멀 스미스는 말했다: "그 불쌍한 피난민들은 세상이 다 끝장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17명의 한국군 헌병들은 메스 룸(mess room) (*병영 또는 선내의 식당-역자)에서 식사를 했다. 이틀 후 취사반장은 헌병은 17명인데 18명분 식사가 나간 것을 발견하고 조사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인민군 스파이 한 놈이 헌병 복장을 하고 밥을 먹은 것이 발각됐다. 옷을 벗겨보니 틀림없는 첩자였다. 그놈을 결박하여 항해가 끝날 때까지 감금했다.
선내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밤낮 없이 우려했다. 북한 청년 몇명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자기들을 부산으로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공포심에서 피난민들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선원실로 뛰어들었다. 배가 부산에 도착하기 전 몇 시간 앞두고 일어났던 아주 위험한 고비였다. 사관들과 한국 현병들이 몇 시간 후면 부산에 안전하게 도착할 것이라고 달래서 겨우 진정시켰다.
훗날 라뤼 선장은 그때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흠칫 놀란다고 했다.
"그때 만약 빈틈없이 꽉 들어찬 14,000명의 피난민들이 공포에 질려 난동이라도 부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배 전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겁니다. 그런 거대한 군중이 위협적으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 모두 얼굴이 창백해졌지요. 다행히도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말은 안 통했지만 좌우간 사관과 선원들은 이제 몇 시간 만 가면 부산에 닿는다고 공포에 떨며 분노해 있는 그들을 이해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