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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모였을까?
초기 기독교, 예배당 없이 성도의 가정에서 ‘가정교회’로 모였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기원에서부터 기독교회의 지역적 확산, 그리고 급성장한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제부터는 초기 기독교회의 모임, 집회소, 혹은 집회공간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추적해 보고자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며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누었을까? 오늘의 예배당과 같은 집회소로서의 교회당은 언제부터 생겨나게 되었으며 어떤 발전의 과정을 거쳐 갔을까? 몇 회에 걸쳐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답해 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오늘 우리가 말하는 공식적인 집회소로서 예배당 건물이 처음 발견된 것은 256년 유프라데스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에서였다. 고대도시 두라(Dura)를 헬라인들은 유로포스(Δοῦρα Εὐρωπός, Europos)라고 불렀는데, 이곳은 영국군에 의해 1920년 발굴되었다. 그 후 프랑스와 미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했는데, 이 발굴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발굴로 간주되고 있다. 필자가 호주 매쿼리대학교 초기기독교연구소에서 연구할 당시 두라-유로포스 발굴에 관한 화보로 된 발굴보고서를 보았으니 서지사항을 기록해 두지 못한 일을 늘 후회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로 판단되는 교회당이 최초로 발굴된 것이다. 이 교회당 건물은 256년 이전에 건축되었는데, 칼 볼츠나 베인톤은 230년 혹은 232년경 건축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건물의 규모는 5x13m의 크기로 약 60명 정도까지 수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건물에는 욕조가 딸린 작은 세례실이 있어 이곳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 유적은 현재는 미국 예일대학 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1932년에는 이곳에서 미국 미시간대학교 고고학 교수였던 클라크 홉킨스(Clark Hopkins) 박사에 의해 선명한 형태의 유대인 회당이 발굴되었다. 이런 발굴은 두라-유로포스에 유대교와 기독교가 공존했다는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처음 발견된 이 교회당이 230년경에 예배처소로 개조된 것으로 본다하더라도 이것은 일반화된 것은 아니므로 적어도 예루살렘에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30년경) 이래 약 2백년 간 독립된 집회소로서의 교회당 건물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사실을 보여준다. 수녀이자 천주교 학자인 케롤린 오섹(Carolyn Osiek)이나 데이비드 발취(David L. Balch) 같은 학자는 예루살렘교회의 설립 이후 적어도 첫 150여 년 간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예배를 위한 독립된 별도의 건물을 소유하지 않았으며, 단지 필요한 경우 기존의 이용가능한 장소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오늘 우리가 고린도전후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이고, 로마서는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라고 말할 때 고린도 지역이나 로마에 교회당 건물이 있고, 그 건물에 회집하는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바울 서신이 기록될 당시 별도의 교회당 건물이 없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후서 혹은 로마서는 어떤 책인가? 고린도나 로마지역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일 뿐이다. 사실 로마서 서두에는 ‘교회’라는 용어도 나오지 않는다. 단지,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보낸 편지일 뿐이다. 당시에는 성도의 가정에서 회집하는 가정교회가 있었을 뿐이다.
‘제자 삼는 일’이 더 중요했던 초기 성도들, 건물은 중요치 않아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은 개인의 가정집에서 회집했다. 바울의 개종자들이 가정 중심의 공동체를 형성해 간 것은 회집할 다른 장소가 없었다는 불가피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은밀한 회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가정집에는 주방이 있어 공동식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건축사학자인 리차드 크라우다이머(Richard Krautheimer)는 예루살렘에 교회가 설립된 이후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을 받는 4세기 초까지(30~313)의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세 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쳐 왔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시기는 대략 30년부터 150년까지인데, 이 시기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신자들의 가정집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 시기는 대략 150년부터 250년 어간인데, 이 시기는 가정집을 개조하여 전적으로 집회소로 사용하는 시기였다고 보았다. 세 번째 시기는 대략 250년에서 313년까지인데, 콘스탄틴에 의한 바실리카 형태의 예배당이 세워지기 전으로서 사적이든 공적이든 큰 건물이나 홀이 집회소로 대두된 시기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개인의 가정집에서, 개조된 가정집으로, 보다 넓은 홀이나 건물로, 그리고 바실리카 교회당으로의 변천을 거쳐 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첫 3세기 동안의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 변천 과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상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별도의 집회소를 생각하지 않았고, 별도의 건물을 소유하지도 않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믿는 자들로 구성되는 모임(會)이지 건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별도의 집회소에 무관심했던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들에게 시급한 과제는 제자 삼는 일, 곧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증거하는 것이었지 외적인 건물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 종교처럼 신전(temple)과 같은 건물 취득을 추구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도 이런 의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별도의 예배 처소에 대한 암시나 요구가 없다.
둘째, 가정집은 사적 공간이었으므로 회집자들의 안전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개인 주택은 신앙의 자유가 주어져 있지 않았던 시대에 회집하기 좋은 공간이었다. 이 당시 ‘가문’이라고 할 때 그 가속(家屬)은 직계 가족만이 아니라 노예나 해방된 노예, 일꾼, 때로는 소작인이나 동업자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조직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정집은 그리스도인들의 안전한 회집, 공동식사와 교제의 유용한 환경이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선교활동에서 이런 가정 중심의 복음운동의 여러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셋째, 당시 기독교는 불법의 종교였으므로 합법적인 재산 취득이 불가능했다. 이들은 흔히 정치적인 집단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ός)으로 불렸는데, 이것은 라틴어로 그리스도당파(partisan of Christ)라는 정치적인 용어였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라틴어에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로마인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만일 이 용어가 그리스어였다면 그리스도(christos)의 형용사형은 christesios나 christites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문법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그런데 christianos로 된 것을 보면 로마식(라틴어) 표기임을 알 수 있다. 아우구스트스(Augustus)를 따르는 이들을 아우구스티아노스(Augustianos, 혹은 Augustianus), 곧 아우구스트스의 정파(a political partisan of Augustus)라고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란 용어는 정치적인 용어였기에 신자들은 이 용어를 좋아하지 않았고, 이 말은 신약성경에도 오직 3번 사용되었다(행 11:26, 26:28, 벧전 4:16). 어떻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불확실한 법적 지위 때문에 별도의 집회소로서의 예배당을 확보하는 일은 시급한 요청이 아니었다. 이런 현실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개인주택이었다.
모든 가정교회는 하나의 교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oikos ekkesiae)를 ‘가정교회’(domus ecclesiae)라고 명명한 첫 인물은 독일의 아돌프 하르나크였다. 그 이후 이 용어가 보편화 되었는데, 가정교회는 비밀이 보장되는 안전함 때문에 공개적으로 회집할 수 없는 시대에 교회가 생존할 수 있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초기 기독교회는 가정교회로 출발했다는 점이다.
신약성경과 가버나움, 로마, 켄트(Kent)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흔적은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신약성경에는 여러 지역에 가정교회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여러 흔적들이 있는데, 이 점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먼저 예루살렘에서의 가정교회에 대해 살펴보자. 사도행전 1장에서 5장 사이에 보면 예루살렘교회는 가정교회로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데, 특히 2:43~47, 4:32~37, 5:12~16, 5:42을 보면 이들은 개인 집에서 모였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예수의 제자들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들어가… 다락에 올라가니… 그 모임에는(ἐπὶ τὸ αὐτό, in one place) 약 120명이 모였다”고 했다(행 1:13~15). 누가는 이곳을 마가라고도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했는데, 이곳이 예수님의 승천 후 11제자들과 여인들,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모였던 다락방(행 1:13)이었고, 맛디아를 선출하고(행 1:26)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던 바로 그 ‘가정 집’이었다(행 2:2).
그런데 누가는 사도행전 2장 1절에서,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ἐπὶ τὸ αὐτό) 모였더니”라고 했는데, 이 말(ἐπὶ τὸ αὐτό)은 어떤 장소에 회집된 구릅을 칭하거나(행 1:15, 2:1, 고전 11:20, 14:23), 기독교 공동체의 모임(행 2: 47)을 칭하는 의미였다. 이들이 회집했던 ‘한곳’은 바로 개인의 가정집이었다. 스데반의 순교이후 바울의 기독교 박해를 보도하는 사도행전 8장 3절에서, “바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여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는” 기록과 바울은 “각 집마다 찾아다니며, …남여들을 끌어 갔는데”라는 기록은 남여들로 구성된 가정교회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 언급된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모였던 바로 그 ‘집’으로서, 이곳은 은밀한 가정교회였다. 이곳은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던 곳”으로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였다.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가 이곳으로 찾아간 것을 보면 이곳은 예루살렘의 주된 집회소였음을 암시하고, 천사가 이곳까지의 길을 안내한 일이나(행 12:10), 로데라는 여종이 영접하러 나온 일(12:13),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이 집에 모여 있었다는 점(12:14~15)과 베드로가 놀란 성도들을 진정시킨(12:17) 기록은 이곳이 은밀한 가정교회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헤롯 아그립바의 군대가 출옥한 베드로 수색에 실패한 것은 은밀한 가정교회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출옥과 관련한 이 본문에서 베드로가 자신의 기적적인 석방에 대해 보고한 후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12:17)는 기록은 야고보가 중심이 된 다른 가정교회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베드로가 “다른 곳으로 갔다”는 점은 또 다른 제3의 가정교회가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예루살렘에 다수의 가정교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의 교회, 곧 ‘예루살렘교회’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누가가 장로 또는 감독을 그 지역의 개별적 집단과 관련시키지 않고 그 도시에 관련시켜 말하는 것을 볼 때 분명하게 알 수 있다(행 14:23, 20:17). 바울도 그러했다(딛 1:5). 로마시의 경우에 복수의 가정교회가 있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들에게 개별적인 서신을 보내지 않고 로마에 하나의 서신을 보낸 것은 그 모든 가정교회는 오직 하나의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방 지역에서도 ‘성도의 집’이 가정교회로 사용됐다
이제 이방 지역에서의 가정교회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가정교회에 대한 흔적은 사도행전 13장 이후에도 산재해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야손의 집(17:5), 드로아에 있는 집(20:8), 에베소의 여러 집(20:20), 가이샤라 빌립의 집(21:8), 예루살렘의 나손의 집(21:16)에 기거하며 가르치고 환대를 받았는데, 이런 집들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집회 장소였을 것이다. 바울서신에는 보다 분명하게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가정 중심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에베소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중심이 된 가정교회가 있었다. 이 점은 바울의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한다”(고전 16:19)는 언급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고린도에는 여러 가정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말하고 있는데(고전 1:14), 그리스보는 회당장으로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었던 인물이었음(행 18:8)을 고려해 볼 때 자기 집이 가정교회로 제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이오는 “온 교회 식주인”(the host of the all the church, 롬 16:23)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바울에게만이 아니라 전체 교회에 후의를 베풀었던 인물로 보인다. 이 점은 가이오의 집이 또한 가정교회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또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 때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고전 1:16),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 지방의 첫 열매로서(고전 16:15),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자”였는데 그의 집이 가정교회로 제공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는 하나 이상의 가정교회(살전 5:27)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5장 27절에서 바울은,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시내에 하나 이상의 가정교회 그룹이 있었다고 인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본문에 근거하여 말허비(Malherbe)는 데살로니에는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가정교회 그룹이 있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또 라오디게아에도 하나 이상의 가정교회가 있었음(골 4:15)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큄멜(W. G. Kümmel)은 골로세서 4장 15,17절과 빌레몬 2절에 근거하여 골로새에는 두 개의 가정교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가정교회와 관련하여 바울은 로마시에 적어도 세 개 이상의 가정교회가 있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롬 16:5, 14, 15).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알고 있거나 함께 일했던 26명에게 문안하고 있는데, 이 문안은 가정교회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다. 16장에는 적어도 3개 처의 가정 교회가 언급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였다(롬 16:6). 지도자가 유대인이어서, 아마도 유대인 신자들의 가정교회로 보인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처럼 장막을 만드는 사람으로서(행 18:3), 어느 한곳에 정주(定住)하지 않고 여러 지역을 순회하였다. 즉 본도에서 출생한 그는 로마에 거주하다가 클라우디우스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고린도로 이주하였고(행 18:2) 다시 에베소로 옮겨갔으나(행 18:18), 다시 로마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 부부와 접촉하게 되었고, 이집에서 가정교회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이거하여 그곳에 다시 가정교회를 세웠다(고전 16:19). 후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로 이거하였고, 그곳 자신의 집이 가정교회로 제공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아순그리도, 블레곤, 헤메, 바드로바, 허마와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을 포함하는 가정교회였다(롬 16:14). 이들의 이름이 헬라어라는 점이서 유대인이 아니었다. 앞의 세 사람은 동부 그리스 출신이고, 바드로마와 허마는 로마의 노예 이름이라는 점에서 노예이거나 해방된 노예였을 것이다. 아순그리도, 블레곤, 헤메, 바드로바, 허마로 대표되는 신자들은 다른 ‘형제들’과 함께 가정교회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정 중심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기독교를 변방까지 확산시켰다
세 번째 가정교회는 빌롤로고와 율리아, 네레오와 그의 자매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하는 모든 성도의 교회였다(롬 16:15). 율리아는 라틴 이름이고, 나머지는 모두 헬라어 이름이다. 율리아는 ‘해방’이라는 라틴 이름을 얻은 헬라인 노예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빌롤로고와 네레오는 로마에서 흔한 노예의 이름이다. 네레오와 그의 자매는 해방된 노예로 추측된다. 그래서 빌롤로고와 율리아, 네레오와 그의 자매 올름바로 대표되는 신자들은 다른 성도들과 함께 또 하나의 가정교회를 구성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상의 3개 처 가정교회 중 첫 번째 경우는 다수의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였으나, 다른 두 개 처 교회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노예나 해방된 노예들로 구성된 이방인들의 교회였음을 알 수 있다.
말허비는, 바울의 목회서신들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가정 중심의 공동체였고 가정교회 형태였다는 점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후기 서신이라고 할 수 있는 목회서신에서는 이단의 출현과 가정에로의 침입을 경계하고 있는데(딤후 3:16, 딛 1:11), 이 서신에서는 집(가정)을 의미하는 ‘오이코스’와 그 동족어가 매우 빈번히 나오고 있다(딤전 3:4, 5, 12, 15; 5:4, 8, 13, 14; 딤후 2:10; 딛 1:7, 11 등). 교회는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되고 있고(딤전 3:15, 딤후 2:20), 직분자의 자격을 말할 때마다 가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딤전 3:4~5,12, 5:4). 이런 강조가 당시 교회가 가정교회적 형태였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보고 있다.
어떻든 가정집을 집회소로 하는 가정교회 형태는 2세기 중엽이나 2세기 말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주택을 소유한 비교적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후견인(patron)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후견인의 역할이란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예배처소로 제공하고, 회집하는 성도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거나 소요경비를 부담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의미한다. 이런 후견인의 역할을 한 경우가 로마서 16장 1, 2절에 언급된 뵈뵈였다. 개역개정판 한글성경에서 “그는 사도들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번역하고 있으나 그 보호자란 후견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런 가정집의 경우, 회집할 수 있는 인원은 50여 명 미만이었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자는 플로이드 필슨(Floyd V. Filson)인데, 그는 1939년에 발표한 “초기 가정교회의 의의”(The Significance of the Early House Churches,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LVIII, 105~112)라는 논문에서 가정교회에 대한 연구는 5가지 점에서 사도시대의 교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해석했다.
첫째, 기독교의 예배가 유대교의 관행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정교회는 사도시대 초기부터 유대교와 뚜렷이 구분되는 그리스도교적 예배와 식탁교제를 가능케 했다는 점,
둘째, 바울서신과 초기 기독교 문서에 나타난 가정교회는 신자의 가정생활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
셋째, 한 지역에 몇 개의 가정교회가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은 사도 시대에 일종의 당파적 경향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는 점,
넷째,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의 상황에 대한 연구는 초기 기독교 신자들의 사회적 신분이 어떠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
다섯째, 교회의 제도나 그 변천과정은 가정교회에 대한 연구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플로이드 필슨은 가정교회에 대한 이해 없이는 사도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112년 경 비두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는, 기독교의 확산을 보고하면서 “이 미신의 전염성은 도시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고, 마을과 농촌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고 했는데, 블루(Brandley Blue)는 이런 가정 중심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갈릴리 해변에서 시작된 기독교 운동을 로마의 변방까지 신속하게 확장하게 했던 유효한 요인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가정집을 예배에 편리하게 발전시킨 집회소 등장
앞에서 예루살렘과 이방 지역에서의 가정교회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제 그 이후의 변화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2세기 중엽,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집회소에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변화는 개인의 가정집을 수리, 확장 혹은 개조하여 전적으로 종교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정교회(domus ecclesiae)의 대두였다. 이것은 보다 편리한 회집과 예배를 위한 자연스런 발전이었다. 이런 변화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두라 유로포스에서 발견된 가정교회였다. 이 가정교회는 두 방 사이의 벽을 허문 직사각형의 구조로서 5.15X12.9미터 크기의 65명에서 75명까지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이런 변화와 함께 기독교 예배는 공적인 예전에 따라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건물을 개조하거나 확장하여 보다 넓은 홀로 변천하는 이 시기의 집회소를 미카엘 화이트(Michael White)는 ‘교회의 홀’(aula ecclesiae, hall of the church)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교회의 집’(house of the church)이라고 불렀던 가정교회(domus ecclesiae) 그 이후 시기의 집회소를 칭하는 말이었다. 개인 집에서 보다 확장된 가정교회로 발전되는 시기의 예배는 보다 제도화 되었다. 예배 의식은 집회장소와 환경과 관련하여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2세기에 접어들면서는 기도문이 작성되었고 감독교회로의 발전을 보여주었는데, 이런 점에 대해서는 후에 별도로 소개하려고 한다.
3세기 말까지는 여전히 개조된 가정교회가 중심을 이루지만 크라우다이머(R. Krautheimer)의 지적처럼 약 250년을 경과해 가면서 별도의 집회소로서의 교회당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249년에 황제가 된 데시우스(Decius)는 기독교가 별로 전파되지 않는 다뉴브 강 유역인 북부 출신으로서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로마의 옛 명성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당시의 경제, 사회적 불안은 로마가 옛 신들을 버린 결과로 보아 이교의 부흥을 의도했다. 이것이 그의 종교정책의 기반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에 적대감을 가지고 250년부터 기독교를 혹독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가 로마제국에서 전염병이 창궐하던 때였다. 데시우스 황제의 목표는 순교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배교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증명서(libelli)를 발급하는 등 조직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했는데, 251년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데시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친구 발레리안(Valerian)이 황제가 되어 전임자의 정책을 고수했다. 그도 곧 야만인(페르시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혀갔고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가 260년 황제가 되었다.
갈리에누스는 기독교를 모질게 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확대되는 기독교의 영향력을 보면서 기독교에 대한 통제나 박해가 유효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해제함으로서 이후 40여 년간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이런 연유에서 260년 이후 약 40년, 특히 270년에서 303년까지 개종자들이 늘어났고, 여러 지역에 별도의 집회소로서 교회당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집회소로서 교회당 건축사에서 중요한 발전이었다. 260년 이후 별도의 집회소로서 교회당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데, 유세비우스는 303년 이전에도 과거의 건물에 만족하지 않고 건축기금을 사용하여 모든 도시에 보다 큰 교회당을 세우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진술이 다소 과장된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콘스탄틴 이전 시대에 이미 어느 정도의 교회당 건물, 곧 바실리카들(basilicas)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그랜트는 지적하고 있다.
이상규 교수(백석대 석좌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