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초복이었다. 더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삼복 더위는 장마 뒤에 숨어 있었다. 장마가 끝나면 모진 무더위가 한반도를 휩쓸고 지날갈 것이다. 기상청 전문가는 올해에 경험해보지 못한 역대급 더위가 찾아 올 것이라고 지레 겁을 주고 있다. 올해도 대구는 대프리카라는 맹위를 하염없이 떨칠 것 같다.
어제는 텃밭에서 마지막 옥수수를 땄다. 옥수수를 보고 가마솥에 삶아 먹을 생각을 하면 이성 중심적이고 하모니카를 생각하면 감성중심적이라고 하던가. 하모니카를 즐겨부르지만 삶아 먹을 생각을 하는 것은 보면 나는 아마도 이성 중심적인 것 같다.
올해 작황이 좋았다. 운이 좋아 퇴직한 직원의 텃밭을 불하 받았다. 100평 정도의 텃밭이었다. 직원들은 그 땅이 소록도에 몇 안 되는 옥토라고 이야기를 했고 나는 물을 댈 수 없는 하늘 아래 천수답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올 해는 농사에 딱 맞도록 비가 내렸고 모든 작물은 풍년이었다. 어렵게 구해서 심은 자색감자도 수확량이 좋았다. 일반 사람들은 수미감자가 맛있는 줄 알지만 자색감자를 먹어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자색감자는 수확량이 적어서 마트에서 잘 팔지도 않고 비싸게 거래되는 이유다. 이번에 수확을 할 때도 자색감자는 수미감자의 반밖에 열리지 않았다.
감자꽃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좋다. 흰꽃이 피면 흰 감자가 달려있고 자색꽃이 피면 자색감자라 달린다. 사람들은 그럴듯한 감언이설로 자기 논에 물대기를 하는 것이 다반사지만 감자꽃은 그러지 않아서 좋다. 그 감자꽃처럼 정직의 꽃이 이 땅에 뿌리내렸으면 좋겠다.
참외도 모종 5개를 심었는데 30개 정도는 따먹은 것 같다. 참외는 노랗게 익었을 때 따는 것보다 파란빛과 노란빛 감돌 때 따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조금 일찍 따면 부드러운 씨까지 먹을 수 있어서좋았다. 모종 몇개 심어놓고 직원들한테 참외 선심은 다 쓰고 있으니 이 역시 텃밭이 주는 선물이 아니겠는가.
텃밭에서는 하얀 박꽃이 가는 목을 울타리에 기대고 쉬고 있었다. 몸에는 복숭아 만한 자식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자식을 키우기 위한 심호흡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단호박과 박을 심었었는데 단호박은 하나밖에 열리지 않았다. 단호박을 생각없이 나무 그늘 밑에 심은 것이 원인이었다. 울타리를 차지한 것은 자연스레 하얀 박꽃이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소설에서는 달밤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이 메밀꽃이 핀다고 하는데 소록도에서는 달밤 박꽃이 어떤 향기로 날릴까 짐짓 궁금했다.
올 해 옥수수는 굵고 다디달았다. 이웃들에게도 나눠주고도 남았다. 농약 하나 하지 않았지만 고추농사도 잘 됐다. 요즘은 매일같이 된장찌개를 끓여먹고는다. 된장찌개의 백미는 풋고추다. 풋고추를 어마어마하게 썰어놓고 호박에 된장을 풀어 한 소끔 끓이면 모든 반찬이 필요없는 맛을 낸다. 어려서부터 호박된장찌개를 좋아했는데 오십이 넘어도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게다가 소록도에서 직접 잡은 낙지를 초장에 찍어 먹으면 그맛이 일품이다. 소록도 낙지는 뻘낙지로 유명하다. 씨알도 크고 맛이 좋다. 한 마리 가지고 혼자 다 먹지를 못한다. 밤에 해루질 가서 낙지를 가장 많이 잡았을 때가 열 아홉마리까지 잡았었다. 마리수를 떠나 대형 낙지라서 어마어마한 양이다. 게다가 낙지 외에 서대, 숭어, 박하지, 감생이, 꽃게, 학꽁치, 장어까지 잡히니 해산물의 천국이 아닐 수 없다.
물때가 맞으면 밤에 해루질을 나가고는 한다. 해루질은 밤에 횃불을 들고 해안에 나가 어패류를 잡는 전통 어로 방식이다. 해루질의 매력은 해산물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좋지만 유리알처럼 투명한 소록도해수욕장 모래바닥을 밝은 서치로 들여달 볼 수 있어서 좋다. 어두운 밤에 서치로 바닷속을 들여다보며 거닐다보면 세속의 삼라만상의 고뇌가 불빛에 반사되는 모래알 사이로 사라진다.
소록도에서 누릴 수 있는 특혜가 너무 많이 있다. 공직의 동기들은 대부분 승진해서 세종과 과천의 관가에 서기관, 부이사관을 달고 있다. 나는 이 곳에서도 사무관 12년 차라고 우수개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들을 결코 부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승진을 못한 것은 두번이나 기관을 바꿨고 승진자리 없는 곳으로 인사교류했기 때문이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원망해서도 안 된다. 어찌보면 소록도에서의 사무관은 중앙부처 국장급이다. 관리하는 직원도 수 십명이고 또 개인 집무실까지 주어진다. 보고를 받는 입장이지 보고할 일은 거의 없다.
이곳에서 시간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면서 내 인생의 꿈이었던 멋진 소설로 회귀된다면 비록 승진을 못하고 사무관으로 정년 퇴직을 하더라도 결코 소록도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으리라.
첫댓글 <피터의 원리>를 생각해보게하는 글입니다.
조직안에서 승진한자 또는 이른바 높은자가 능력있거나 남보다 탁월한 것은 아니죠. 특히 이 사회에서는 더욱이.
개인적으로는 단지 승진은 사회적 그리고 집안에서의 체면, 위세라 생각해왔습니다.
내생이나 윤회를 믿지않는 나로서는 현재의 삶.
명예, 부를 자유 시간과 맞바꾼 삶에 만족합니다. 비록 진흙에 꼬리를 끌며 살더라도
진흙에님, 댓글 감사합니다.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삶이 최고의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넉넉한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글중
파란빛과 노란빛 감돌때를
보고 얼능 나가서
참외를 따왔습니다.
카페 '조은날'님의 씨앗나눔
애플참외입니다.
초록빛인데도 숙성이 되어 달기만합니다.
저녁엔 풋고추 많이 넣고
호박찌개 끓여볼까도 합니다.
파도님, 반갑습니다. 애플참외... 입가에 군침이 감돌게 합니다.
누구나...
노후에 바라는 평온하고~
여유로운 전원생활을 하고계신듯한
느낌도 들어요~^^
저 역시도 퇴직후 전원생활을 꿈꾸면서
주말마다 준비하고 있어요~^^
선생님처럼 훌륭하신분이 그곳
국립공원에 근무하셔서 아주
든든하답니다~~~~..^^
꽃편지님, 반갑습니다. 좋게 생각해주셔 고맙습니다. 주말마다 준비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퇴직 후에 멋진 전원생활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탓밭 가꾸는것 예삿일이 아닌데 대단하시네요.
소록이 주는 평온함이 전해집니다. 감사해요~
아름님, 반갑습니다. 사실 농기계를 갖고 있는 분한테 부탁해서 로타리를 쳤습니다. 나머지는 운동 삼아 소일거리로 하고 있습니다. 소록도는 정작 평온함이 가득한 곳입니다.
글을 매끄럽고
정감있게 쓰셔서 읽기 편하고 푸근한 마음이 생기네요.
잘 읽었습니다.
빛바랜님, 반갑습니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거이 아니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소소한 우리들의 일상에 깃들어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