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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2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이스라엘 하마스의 가자기구 땅굴에 수몰작전 개시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무장테러단체 하마스를 완전 소탕하기 위해 가자지구 지하땅굴에 바닷물을 들이 붓는 침수작전을 개시했다
하마스는 전시를 대비하여 가자지구에 500km가 넘는 땅굴을 구축해 놓고 있으며 이는 터널을 침수시켜 지하에 있는 하마스 요원 등이 지상으로 올라오게 하려는 작전이다.
202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월드서밋 평창 알펜시아에서 개최
전 세계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정상회담인 ‘2022 노벨평화상 수상자 월드서밋 강원’이 12일 평창 알펜시아 리조트 컨벤션센터에서 개막했다.
이날 노벨평화상 월드서밋 강원 개회식에는 무슬림 여성들의 권익 증진에 헌신해 200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란의 여성 인권변호사 시린 에바디, ‘아랍의 봄’ 민주화운동을 이끈 201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예멘 인권운동가 타와쿨 카르만, 라이베리아 내전 종식에 기여해 201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평화운동가 리마 보위, 10만명 이상의 아동 노예 해방에 기여한 201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인도 아동인권 운동가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등 역대 수상자들과 위데드 보차마오이(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이라 헬펜드(핵무기폐기국제운동), 루스 미첼(핵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의사기구) 등 노벨평화상 수상단체 대표 등 전 세계 47개국 1,000여명이 참석했다.
또 예카테리나 자글라디나 노벨평화상 월드서밋 사무총장, 심재국 평창군수, 유승민 2018평창기념재단 이사장, 박진오 강원일보 사장 등 주최 기관 대표도 함께했다.
개막식은 예카테리나 자글라디나 노벨평화상 수상자 서밋 사무총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 추모 영상 관람, 태권도 공연 등 순으로 이어졌다
2020년 스파이소설의 거장 영국 작가 존 르 카레 세상 떠남(89세)
2019년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집단발병
2017년 검찰 과거사위원회(위원장 김갑배) 출범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 제3회 지방선거에서 건국 이후 처음으로 여성참정권 허용
201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장성택 사형집행
장성택(張成澤, 주체35 1946년 1월 22일 ~ 주체102 2013년 12월 12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가, 군인이자, 조선로동당의 고급 간부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며 2009년부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자,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이었으나, 2013년 12월 3일 모든 직위에서 배제되고 출당 조치를 당했으며, 같은달 12일 특별군사재판 후 사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사형 방식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기관총과 같은 화기를 이용해 총살형을 집행하였을 가능성과 교수형을 집행하였을 가능성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보당국은 총살형 뒤 시신을 불태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항일활동을 하던 아버지의 덕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로 진학했으며, 대학 재학 중 김경희와 만나 결혼하였다. 1970년 김일성종합대학교에서 학사 학위 취득 이후 조선로동당 중앙당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김정일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장성택의 친형인 장성우와 장성길은 인민군 장성이다. 자녀로는 딸인 장금송이 있었으나 2006년에 결혼 반대를 비관하며 프랑스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북한 장거리 로켓 은하 3호 발사
2011년 미국종합격투기 대회 UFC에서 정찬성 선수 7초 만에 KO승, 최단기록
2005년 F-15K 도입 및 슬램이글 명명식
미국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 프로그램에 따라서 개발되어 1972년 7월 27일 첫 비행한 보잉사(社)의 F-15를 변형한 기종이다. K는 KOREA의 머릿글자로 한국 수출용을 뜻한다. 한국 공군이 보유한 구식 전투기 F-4와 F-5를 대체하기 위하여 마련한 FX 사업에서 프랑스 다소사의 라팔, 러시아 로스브로제니아사의 수호이-35 등과 경쟁하여 2002년 4월 19일 한국의 차세대전투기로 선정되었다.
2005년 10월 7일 시험 평가용으로 만들어진 1호기와 2호기에 앞서 3호기와 4호기 2대가 한국에 처음 도착하여 10월 18일부터 23일 열린 서울에어쇼에서 일반에 공개된 뒤, 한국 공군에 인도되었다. 한국 공군은 2005년 12월 12일 대구공군기지에서 명명식을 갖고 슬램 이글(Slam Eagl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05년 12월 6일에는 5호기와 6호기가 한국에 도착하였는데, 5호기가 2006년 6월 7일 포항 북동쪽 48㎞ 바다 위에서 야간요격훈련을 하던 중 추락하여 조종사 2명이 사망하였다.
제원은 F-15E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AIM-9X, AIM-120, AMRAAM 등 공대공미사일 외에 장거리 공대지미사일인 SLAM-ER, 정밀 폭격이 가능한 유도폭탄 JDAM 등을 장착할 수 있도록 전투력을 높이고 레이더 성능을 개선하였다. 기체 수명은 8,000 비행시간이다.
2002년 前 국회의장 황낙주 사망
황낙주 前 국회의장이 2002년 12월 12일 새벽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황낙주씨는 경남 진해 출신으로 1971년 경남 진해·창원에서 8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정치규제에 묶인 11대를 제외하고 내리 당선, 7선 의원을 지냈다. 김영삼 정권 때인 14대 국회 후반기에는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마산상고, 서울 상대를 졸업한 황 전 의장은 1955년 진해 서여중·고교를 설립, 교육자 생활을 하다 1967년 신민당 정책위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줄곧 YS계로 분류됐다. 1979년 YH 여공사건 때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와 함께 경찰의 무력진압에 항거하다 병원신세를 졌고, 1980년 5·17 계엄 때는 군인들이 점령한 국회의사당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국회 기록사진으로 남아있다.
구 민주계에선 독서량이 많고 입담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났다. 풍수에 따라 국회의장실 집기 배치를 모두 바꾸고 점치는 것을 즐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YS와 정치적으로 거리를 두고 이회창 후보 진영에 섰다
2000년 북한-영국 국교 수립
북한과 영국이 2000년 12월 12일 국교를 수립했다고 북한 방송과 영국 외무부가 동시에 발표했다.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이날 "지난 7일부터 런던에서 열린 회담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영국 사이에 외교관계를 즉시 설정하는 데 대하여 합의하였다"며 "쌍방은 각국 수도에 상주대표부를 개설할 수 있는 조건들이 마련되는대로 대사급 외교대표부를 교환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양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당분간 `비상주 대사대리` 체제로 운영하기로 했으며, 영국의 대사대리는 서울에, 북한의 대사대리는 스톡홀름이나 제네바에 각각 두기로 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2000년 이탈리아에 이어 영국과 수교를 맺음으로써 서방선진 7개국(G7) 국가 중 2개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2000년 부시 미국 대통령후보, 35일 만에 연방대법원에 의해 대통령으로 사실상 확정
미국 연방대법원이 2000년 12월 12일 "플로리다주의 수개표 재개를 명령한 주대법원의 결정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 선거 35일 만에 조지 부시 공화당후보가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으로 사실상 확정됐다. 연방대법원 9명 중 7명은 "플로리다주 대법원의 재개표 허용 결정이 헌법상 문제를 안고 있어 주대법원의 판결을 파기하고 환송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미국 제43대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와 낙선자인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13일 각각 TV로 생중계된 연설을 통해 국민통합과 초당적 협력을 다짐했다. 부시 당선자는 이날 오후 10시 텍사스주 하원의사당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 후의 나라를 치유하는 데 함께 최선을 다하기로 고어와 의견을 같이했다"며 "우리는 이제 `정치`를 뒤로 하고 `미국의 번영`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어 부통령은 한 시간 전인 오후 9시 부통령 집무실이 있는 워싱턴 백악관의 아이젠하워 빌딩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연방대법원의(수작업 재개표 위헌) 판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국민통합과 튼튼한 민주주의를 위해 승복한다"며 선거 패배를 인정했다.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 열림, 히로히토 일 전왕에게 유죄선고
1997년 유럽연합(EU) 15개국 정상 ‘유로(EURO)회의’ 창설 합의
유럽연합(EU) 15개국 정상들이 1997년 12월 12일 단일통화 가입국끼리 경제정책을 조정하기 위한 ‘유로(EURO)회의’ 창설 및 세부 기능 등에 합의했다.
경제통화동맹(EMU) 가맹국들은 1999년 1월부터 발효되는 단일통화 ‘유로’에 관한 모든 사항을 이 유로회의를 통해 논의하기로 결정했고, EU 회원국 중 영국 덴마크 스웨덴 그리스 등 유로 비가입국 네 나라는 제외됐다. 하지만 이들 네 나라도 EU 공동의 이익이 관련됐을 경우 ‘유로회의’에 참가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EU 정상회의는 유로회의 창설합의 과정을 통해 편의상 가입 대상국을 ‘인’, 비가입국을 ‘아웃’이라고 분류해왔다. 스트로스 칸 프랑스 경제장관은 “지금까지 존속해온 기존의 EU 경제재무장관회의에서는 주로 ‘결정’을 내리게 되고, 유로회의에서는 주로 논의, 정보 교환, 정책 입안 등의 작업을 하게 된다”고 발표했다
1996년 한국,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96년 10월 11일 OECD 이사회는 회의를 열어 한국을 OECD 회원국으로 공식 초청하기로 결정했다고 사무국이 1996년 10월 25일 발표했다. OECD 사무국은 발표문에서 "한국의 OECD 참가를 위한 가입 조건들에 대해 심사가 완료됐으며 그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고 밝혔다. OECD는 모든 의견 결정에 대해 만장일치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국은 김영삼 대통령 재가를 거쳐 공식 협정안 서명절차를 10월 25일 공로명 외무장관과 도널드 존스턴 OECD사무총장 사이에 맺었다. 한국은 국회에서 비준 동의안이 통과되고 비준서를 프랑스 정부에 기탁함으로써 12월 12일 OECD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한국 정부는 1997년 1월부터 경제전문가를 중심으로 OECD 주재 대표부를 구성해 OECD회원국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한국의 OECD 가입은 1996년에 체코-헝가리-폴란드 등 동구 3개국에 이어 4번째이며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 그리고 OECD 전체로는 29번째 회원국이 됐다.
1995년 산악인 허영호 남극대륙의 최고봉 빈슨 매시프 정복
산악인 허영호씨가 남극 대륙 최고봉인 빈슨 매시프(해발 5천1백40m) 등정에 성공, 세계 최초로 3대 극점과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밟은 산악인이 됐다.
`95한국 빈슨 매시프 원정대 대장인 허씨는 1995년 12월 12일 오전 2시20분 김승환.박쾌돈 대원 등과 함께 빈슨 매시프봉 남쪽 루트를 통해 정상에 올랐다. 빈슨 매시프원정대는 지난 7일 이 산 남쪽 브란스콤 클라시어(해발 2천1백m) 베이스 캠프를 떠나 초속 20~30m와 영하 30도의 강풍과 혹한을 극복하고 이날 3백m의 수직빙벽 공략에 성공했다.
대장 허씨는 지난 1987년 12월 세계 최고봉이자 3대 극점중의 하나인 에베레스트(해발 8천8백48m)에 오른 것을 비롯 1991년 5월 북극점, 1992년 2월 남미 대륙 최고봉 아콩가과(6천9백59M), 1992년 5월 북미대륙 최고봉 매킨리(6천1백94m)를 각각 정복했다. 또 1992년 12월에는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 킬리만자로(5천8백95m), 1994년 1월 남극점, 1994년 11월 오세아니아 대륙 최고봉 칼스텐츠(4천8백84m), 1995년 9월 유럽 대륙 최고봉 엘부르즈(5천6백42m)를 차례로 등정했다.
1995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협상 완전 타결
1993년 이봉주, 호놀룰루 마라톤서 우승
1992년 영종도 국제공항 기공식
1992년 한국-베트남 수교
1991년 국방과학연구소 KT-1 기분훈련기 시제기 초도비행 성공
순수 우리나라 기술로 제작된 KT-1 기본훈련기가 1991년 12월12일 10시50분 40분간의 초도비행을 마치고 활주로에 안착하였다
이후 KT-1은 2000년 1호기를 시작으로 2004년 최종호기가 공군에 인도 되었으며 이후 무장을 갖춘 KA-1 전술통제기로 성능이 개량되었다
1990년 미크로네시아, 유엔안보리 신탁통치로부터 독립
1989년 정부, 증시안정화 대책 발표
1989년 4월 종합주가지수 1,007.77을 정점으로 증시는 하락국면에 들어서면서 12월 들어서는 연속 9일동안 주가가 폭락했다. 정부는 12월 12일 ‘증시안정화 대책’을 발표했다. 즉, 증시가 안정될 때까지 투신사들에게 주식을 무제한 사들이도록 한 조치였다.
당시 이규성 재무부 장관은 투신사가 주식을 살 수 있도록 은행이 돈을 대주게 했고, 은행의 부족 자금은 한국은행에서 지원하도록 하는 특별조치를 내렸다.
한국-대한-국민 등 3대투신은 대책발표 후 불과 2주동안 2조7천억원어치의 주식을 사들였는데 이후 주가가 하락하고 은행에서 빌린 돈에 대한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투신사 부실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1988년 언론청문회
1985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발족
구속자 가족의 민주화 실천을 위한 연합모임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가 1985년 12월 12일 발족됐다. 민가협을 구성하는 단체로는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장기수가족협의회, 양심수후원회 등이 있다.
민가협은 그동안 각 부문으로 분산되어 활동해 왔던 구속자가족들의 힘을 한데 모아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민주화 대열에 함께 서기 위해 각종 기도회와 집회에 적극 참가하고 구속자들의 재판도 적극적으로 방청, 법정투쟁을 도움과 동시에 항의시위를 벌이는 등의 활동을 해왔다.
1985년 DC-10 미군전세기 뉴펀들랜드 켄더 공항 이륙직후 폭발 승무원 등 256명 전원 사망
1984년 모리타니에 무혈쿠데타 발생
1983년 국회 재무위 `독립공채 상환에 관한 특조법` 의결
1983년 쿠웨이트 주재 미국대사관 등 7개소에서 연쇄폭발테러 발생
1979년 12·12 사태. 전두환 노태우 등 권력 장악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월 12일 대규모 병력을 동원, 쿠데타를 일으켜 정승화 계엄사령관 등을 강제로 연행했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되자 군부는 동요했고,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정치군인을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접한 전두환, 노태우 등은 신변불안을 느끼고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쿠테타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12일 밤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을 중심으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소속 신군부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병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과 연관하여 강제 연행·구속하였다.
계속하여 국방부·육군본부·수도경비사령부 등을 장악하고, 신문·방송·통신사 등 언론을 장악하였다.
13일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통해 최규하 대통령의 사후 재가를 얻어 14일 군수뇌부 인사를 단행, 당시 9사단장 노태우 소장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정호용 소장을 특전사령관으로 임명하며 정국을 장악했다.
이 사건은 신군부가 전면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대장을 임명하는 등 군요직을 개편했다.
12월 24일 군수사당국은 12.12사태의 수사결과를 발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내란방조죄로 구속되었고 전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전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전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등은 죄상에 따라 처리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측은 1980년 5월 17일 '5.17 계엄확대조치'를 발표하고, 이에 항거한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계엄군을 통해 무력진압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5월 24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격과 관련하여 김재규 등이 즉결심판으로 처형되고, 8월 최규하 대통령은 사임하게 된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를 득표해 31.7%를 얻은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앞섰다. 그러나 전체 231석 가운데 정당별 의석수는 민주공화당 68석, 신민당 61석, 민주통일당 3석, 무소속 22석, 유신정우회 77석으로 지역구 국회의원선거 득표율에서 앞선 신민당이 전체의석의 3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1선거구에서 2인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와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선거제도 때문이었다.
1975년 F-4D 5대 필승편대 도입
1974년 유엔군사령부, 미합참으로의 작전명령권 이관을 발표
1969년 일본 한국산 김 3,500만장 수입결정
1968년 한국투자개발공사 발족
1966년 한국-멕시코, 무역협정 체결
1963년 케냐,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3년 제3공화국 초대내각 조직
1962년 케네디, 소련에 직통전화가설 제의
1961년 체코, 알바니아와 단교
1960년 제3대 지방의회 의원 선거(서울시-도의회 의원 선거) 실시
제3대 지방의회는 4.19 이후 제2공화국이 발족된 뒤에 구성됐다. 제2차 지방자치법 개정 때에 3년으로 단축된 의원의 임기가 다시 4년으로 환원되어 제2대 지방의회 의원의 임기가 1960년 8월까지 연장되었던 것인데, 1960년 4.19가 일어나 헌법이 개정되고 국정 전반에 걸친 대개혁이 단행됨에 따라 지방자치법도 1960년 11월 1일 대폭 개정되어, 제3대 지방의회 선거는 개정된 법률에 따라 시-도는 동년 12월 12일에, 시-읍-면은 12월 19일에 실시됐다.
개정된 지방자치법은 종래의 관치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민주적인 요소가 대폭 강화되면서 시-도지사와 시-읍-면장은 물론 동-리장에 이르기까지 주민에 의한 직선제로 바뀌게 됐다.
지방자치 사상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됐으나, 직선된 자치단체장과 의회와의 불화, 의회의 파생적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민주적 지방자치의 이상을 살리지 못했다. 1961년 5.16으로 인해 제3대 지방의회는 불과 5개월의 단명으로 문을 닫았으며, 이후 우리나라 지방의회제도는 30여년이라는 긴 휴면기에 접어들게 됐다.
1956년 일본 국제연합(UN) 가입
1953년 판문점 정치회담. 예비회의 무기휴회
1952년 빈에서 제국민평화대회 개최
1950년 흥남 철수 시작 (24일까지)
1950년 12월 12일 6·25전쟁이 한창이던 이날 이른바 `흥남 철수`가 시작됐다. 6·25전쟁사에 기록된 `흥남 철수`는 이날부터 24일까지 흥남에서 12일간 벌어진 당시 최대규모의 철수작전을 말한다.
시작은 1950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총공세를 펴기로 하고 1만5000명의 미 해병 1사단을 원산에 상륙시켰다. 이 부대는 북진 끝에 11월 하순, 함흥 북쪽 장진호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중공군은 이미 10월 하순 한반도에 들어와 있었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지역인 장진호에도 중공군 4개 사단 12만여명이 포진해 있었다.
미군이 중공군에 포위돼 공격을 받자 유엔사령부는 철수를 명령, 11월말 1사단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이 장진호 전투(Chosin Reservoir Battle·`초신`은 장진의 일본식 표기)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양쪽에서 발생했다. 미군측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만 중공군 2만5000명, 미군 3000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탈출한 병사들은 흥남까지 철수했고, 연합군이 진격할 때 환영했던 민간인들까지 뒤섞여 흥남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흥남항에서 미 해병 1사단을 포함한 10만5000명의 지상군과 10만여명의 피란민, 1만7500대의 각종 차량과 35만t에 달하는 군수물자를 193척의 군함으로 남쪽으로 탈출시킨 과정이 `흥남철수`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이때 후송하지 못한 200t의 탄약과 같은 양의 폭약, 500개의 포탄, 200드럼의 유류는 최종철수 때 항만과 함께 폭파됐다.
1948년 유엔총회,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
기독교에선 천지가 6일만에 창조됐다지만 대한민국은 1년만에 국가로서의 골격이 갖춰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해가 1948년이었다. 1년동안 총선(5월10일) 제헌국회 구성(5월31일) 헌법공포(7월17일) 대통령선출(7월20일) 정부수립(8월15일) 등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이 숨가쁘게 진행됐다.
이제 국제적으로 정통·합법정부임을 승인받는 일만 남았다. 10월19일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서 맥아더를 만나 대한민국의 방위와 국제적 승인문제를 논의한다. 마침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TCOK)도 ‘5·10총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최종보고서를 유엔에 제출(10월8일)한 상태. 한국문제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 끝 무렵인 12월7일부터 정식의제로 다뤄진다. 이미 정부는 장면 수석대표를 단장으로 조병옥 정일형 김활란 등 7명의 ‘초미니 대표단’을 파견해 놓았다.
1948년 12월12일 마침내 총회는 투표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한국에 있어 유일한 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찬성41, 반대6, 기권1이라는 압도적인 지지.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은 6·25 때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됐다는 점에서 훗날 대한민국의 생존 및 발전과 직결된 더없이 중요한 외교적 승리였다.
1946년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개원, 의장에 김규식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독립자주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 국정에 반영할 목적으로 설립한 입법의원이 1946년 12월 12일 개원했다.
정식명칭은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이다. 의장에는 김규식, 부의장에는 최동오, 윤기섭이 개원 전날인 11일의 예비회담에서 선정됐다. 등록의원이 모두 74명이었으나 57명만이 개원식에 참석했고, 여운형·장택상 등 7명과 한민당 소속의 18명이 참여를 거부한 것은 복잡한 당시의 정치상황이 반영된 결과였다.
각계인사 5백여명이 참석한 개원식에는 의원 전원의 선서가 있었으며 하지 중장과 러치 소장의 메시지가 낭독됐다. 식은 김규식 의장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후 1시간 30분만에 폐회됐다.
1940년 아인슈타인 박사, 미국에 귀화
1936년 장학량, 서안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장개석 총통 감금(서안사변)
중국의 운명은 물론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시안사변(西安事變)이 1936년 12월 12일 중국 시안의 화칭츠(華淸池)에서 일어났다. 시안의 옛 이름은 장안(長安)이고 화칭츠는 당(唐)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놀음을 벌이던 온천지역.
1년간의 대장정 끝에 거의 궤멸된 상태로 연안에 도착, 한숨 돌리고 있는 마오쩌둥의 홍군(공산당 군)을 뿌리째 뽑기 위해 장제스(蔣介石)가 장쉐량(張學良)의 근거지 시안을 찾으면서 역사는 반전(反轉)을 시작한다.
장쉐량은 한때 만주지역을 호령했던 동북군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아들로, 젊어서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지만, 일본군이 아버지가 탄 열차를 폭파시키자 뒤늦게 대일 항전에 나선 사람이다. 일본군이 기세등등하게 중국 땅을 잠식해 들어와도 홍군 토벌에만 몰두하는 장제스가 그는 늘 못마땅했다. 결국 장쉐량은 장제스를 감금한 뒤 내전중단과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요구했고, 장제스는 요구를 수락하고 나서야 시안을 벗어날 수 있었다. 장제스는 약속대로 제2차 국·공합작을 체결, 일본군을 패퇴시켰으나 이 틈을 탄 홍군의 세력확대는 그를 역사의 중앙무대에서 밀쳐낸다. 장제스가 시안을 떠날 때 ‘사나이’ 장쉐량은 동행을 자청,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뻔한 드라마 후반부를 팽팽한 긴장상태로 몰아간다.
1936년 영국왕 조지6세 즉위
1936년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공포
1925년 이란 리자 샤 팔레비왕 즉위, 팔레비왕조 시작
이란의 새로운 국왕 리자 한이 1925년 12월 12일 즉위함으로써 1925년 10월 31일에 폐지된 카잔왕조(1779년-1925년)를 대신해 새로운 팔레비 왕조가 성립됐다. 47세의 새로운 국왕 리자 샤 팔레비는 무명의 이란-코사크군 병사출신으로 눈부신 군경력에 의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1921년 쿠데타로 테헤란 계엄사령관, 이어 육군대신이 되어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대관식은 1926년 4월 25일에 있었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1919-1980)왕은 1974년 이래 인상된 유가로 인해 얻은 부를 근대, 서구식의 경제를 구축하는데 사용했으나 팔레비왕은 무례한, 전체주의 정치를 펼치는 국가를 만들면서 경제를 구축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열렬한 회교도에게서, 또 새로 등장하는 서구화된 중산층에게서도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78년에 불안감이 나타났을때, 팔레비 왕의 권력은 조기에 무너졌으며, 1979년 1월 16일에 그는 쫓겨서 추방되기에 이르렀고 민과 군의 지도자들이 잇달아 등장하여 팔레비는 내전을 피할 수 있었다.
1923년 강화도 근해서 선박이 전복. 40여명 익사
1919년 구두교수법 개척한 미국의 교육자 로저스 사망
1917년 프랑스 모단느 서니스산 터널서 열차가 충돌. 543명 사망
1916년 독일, 윌슨을 통해 휴전 제의
1915년 최초의 금속제 비행기 융커스 J-1 첫 비행 성공
1915년 미국의 가수 겸 배우 프랭크 시나트라 출생
1901년 마르코니, 최초의 대서양횡단 무선통신에 성공
1901년 12월 12일 당시 22살의 이탈리아인 발명가 귈레모 마르코니 (1874∼1937)가 캐나다 뉴 펀들랜드 부근에서 스스로 고안한 무선 수신기로 무선통신에 성공했다.
약속된 영국 그리니치 표준시각 정오. 숨막히는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기계에 반응이 왔다. "톡톡톡." 수초도 걸리지 않은 짤막한 신호였다. 2~3m 떨어진 곳에서라면 들리지 않았을 작은 소리였지만 마르코니에겐 지축을 흔드는 굉음으로 들렸다. 그곳에서 1,600마일 떨어진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 보낸 전파였기 때문이었다. 이날 마르코니가 수신한 전파는 모르스부호로 S자. 역사상 최초로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서 선 없이 신호를 보낼 수 있게 되면서 물리적인 `거리`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무선시대는 사실 모르스에 의해 열렸다. 그러나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하면서 유선전신은 급속하게 무선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무선이 아니면 안되는 곳이 딱 한 곳 있었다. 항해중인 선박과 선박간 통신이었다. 마르코니는 바로 이점에 착안했고, 실제로 마르코니는 자신의 발명품을 영국 해군에 팔았다. 처음에 무선통신은 해저전신사업으로부터 심한 저항을 받았으나 대(對) 선박 또는 선박 대 선박 통신에서 획기적인 효과를 올려 무선전신의 독무대가 되었다. 190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마르코니의 업적은 무선통신의 기반이 됐고 위성과 지구간 통신에 활용되면서 우주개발이 가능해졌다.
1937년 마르코니가 세상을 떠났을때 전세계 방송사들은 이례적으로 2분동안 침묵을 지켰다. 무선전신과 3극 진공관이 결합된 라디오 대중화로 세상이 온통 전파잡음으로 뒤덮여 있었던 시대였다. `전파의 아버지`에 대한 최대의 추모였다.
1894년 총리대신 김홍집, 고종의 명을 받아 홍범 14조 발표
1889년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 사망
테니슨과 함께 빅토리아조를 대표하는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1889년 12월 12일 사망했다. 런던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브라우닝은 어려서부터 이미 문학적 재질을 인정받아 시에 몰두했다.
20대 초반 자서전적 시집 ‘폴린’과 극시집 ‘파라셀서스’ 등을 출간했다. 브라우닝은 그보다 여섯 살 연상이며 여류시인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과의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그녀의 결혼 전 이름은 엘리자베스 버레트이다. 1846년 결혼한 브라우닝은 처가의 반대를 피해 이탈리아로 도주, 부인이 죽은 해인 1861년까지 16년간을 주로 피렌체에서 지냈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은 8세 때 고대 그리스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정도로 천재성을 보였으나 어려서부터 병약하고 고독했다. 그녀는 1850년 ‘포르투갈인의 소네트’라는 번역시를 통해 남편 로버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노래했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가장 유명한 시는 2만행이 넘는 ‘반지와 책’(1869)이다.
1879년 아프가니스탄, 영국령으로 됨
1863년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크 뭉크 출생
1821년 프랑스 작가 플로베르 출생
1800년 미국 워싱턴시를 수도로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