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길게 남았어도 오늘은 출근을 하려고 한다.
손님이 올 확률은 90% 이상 오지 않을 것이라도 나가려고 한다.
돈에 환장병이 걸렸느냐고?
아니다, 손주 녀석 때문이다.
손주 녀석의 등쌀에 견디기 힘들어서이다.
아직 손목이 시원찮은 아내는 잘 놀아주지 못하니 내게만 매달려 영화 한 편 제대로 볼 수 없다.
한동안 보지 못해 보고 싶던 녀석이라 3~4일 함께 놀아주었더니 내가 제일 좋다고 한다.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함께 놀아주지 않는다고 조금만 등한시 해도 떼를 쓰며 울음보를 터뜨린다.
긴 연휴에 재충전 하려던 내 기(氣)를 다 빼앗아가벼렸다.
열흘 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고, 속도 다스리고, 외모도 가꾸려 했다.
거금을 들여 피부미용에 좋다는 각종 화장품(콜라겐, 알로에, 아이크림, 미백, 주름완화 내지 제거제 등)을 잔뜩 사들였다
벌써 술을 멀리 한 지 열흘 ㅡ
하루 세 번 세수와 피부관리를 했다.
세수를 하고 무려 7가지 좋다는 것을 바른다.
"애인 생겼어?"
"갑자기 웬일이야?!"
아내가 얼굴에 정성들이는 나를 보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며 퉁명스레 말했다.
무슨 말을 해도 나는 한 번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면 하고야 만다.
알콜이 떠나지 않던 내 몸에 드디어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붉은 얼굴이 사라지고 서서히 뽀얀 피부로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군 입대 전, 사람들은 나를 폐병환자라 부를 만큼 하얀 얼굴의 미소년이었다.
살아온 세월의 흔적일까?
이제는 세파에 시달리고, 음주가무에 시달리고, 아내의 잔소리에 시달려 망가진 얼굴 ㅡ
그래서 피부과를 갔다.
부끄러움도 없고, 술도 마시지 않았음에도 왜 얼굴이 항상 빨갛냐는 증상을 말했다.
피부과 의사가 말했다.
"안면홍조"로서 나이가 많아지면 피부가 얇아져 혈관이 드러나면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나?
나는 속으로 말했다.
"얌마! 나처럼 얼굴에 철판 깐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나이 많아 '안면홍조'가 온다면 내 또래는 다 빨개야지!"
"여자는 화운데이션으로 커버한다 해도 남자는 다 빨갛다면 내가 왜 왔겠냐!"
녀석의 처방을 받아 바르는 로션제와 먹는 항생제를 받아왔지만, 실로 나는 두꺼운 철판이 깔린 건 맞다.
부끄러워 좋아하는 여자 아이에게 고백도 못했고, 닭 한 마리 잡지 못해 벌벌 떨었던 소심한 성격이었다.
그 순진한 아이가 군대를 다녀오면서 180도 변한 것이다.
'임전무퇴'의 기상, '필승의 신념'으로 악에 받쳐 36개 월 가까이 생활하다 보니 변한 내 모습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군대를 갔다와야 완성된다는 지론을 주장하곤 한다.
각설하고!
그렇게 억척스레 살아온 막강하던 나도 손주 녀석은 당할 수 없어 사무실을 나가려 한다.
아내의 잔소리가 가장 무서웠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옛날 아이들에게 '호랑이보다 무서운 게 곶감'이라는 말이 있었다.
호랑이 온다 하면 울음을 그치지 않아도 곶감을 주니 그쳤다 해서 나온 말이다.
아내의 잔소리는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인데, 손주의 요구는 끝이 없다.
이젠 다시 오지 않는다는 손주 녀석의 협박도 두렵지 않다.
처음에는 '다시 안 온다.'는 협박에 절절매며 받아주었어도, 이젠 다시 안 와도 좋다는 각오를 다진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 피곤에 쩔은 '독재자'가 잠을 자고 있다.
두렵다!
잠에 깨면서부터 나를 찾고 같이 놀자는 말이 나올까 두렵다.
어서 서둘러 먹고 나가 이 공포에서 해방되고 싶다.
추석 즐겁게 지내시라!
사무실 나가 피부관리에 들어간다.
술 마시자는 전화가 와도 절대 응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가 둘째를 가지겠다는 며느리의 말에 미온적인 것이 실감난다.
아이의 심성은 키워준 사람을 닮는다 했다.
내 아내의 표독스러움이 손주 녀석에게 옮은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우리나라 인구정책에 내 두려움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첫댓글 마음만 풍성인가요?
실례했다면 용서 바랍니다.
허나 모두 즐거운 비명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푸념이야 왜 못하고 살겠어요.
오늘 잘 보내시고 내일은 출근하셔요.
엄살 떨어봤습니다.
없으면 한없이 보고 싶은 녀석이지요.
약속 때문에 문을 열었지만, 곧 들어갈 겁니다.
나머지 연휴, 잘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빈사무실에 혹시 강남 아줌마 찾아가
횡재할지도 예고없는. 행운은.
기대해 봅니다.
강남 복부인이 미쳤다고 추석 다음 날 돈꾸러미 들고 저를 찾겠습니까?
돈 되는 물건도 없습니다.
어서 벌어서 방장님 모시고 종로에서 술 한 번 대접해야 하는데, 잘 안 됩니다.
무슨 일 있어도 금년 안에 자리 한 번 만들겠습니다. 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