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
‘The Buck Stops Here’ 팻말이 보고 있다
“巨野 입법에 막혀 제도 정비 못했다”
취임 1년 되도록 야당 탓하는 대통령
민주당에 국정 협조 요청한 적도 없고
국민의힘도 ‘꼰대 정당’으로 변해버린 듯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2023.05.09. 뉴시스 |
취임 1주년 하루 전인 9일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1년 전 이맘때를 생각하면 외교 안보만큼 큰 변화가 이뤄진 분야도 없다”고 말했다. 동의한다. 북한 김정은 요구대로 다 갖다 바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윤 대통령은 나라를 구했다는 보수층이 적지 않다.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대한민국 근간을 복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국민도 없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거야(巨野)입법에 가로막혀 필요한 제도를 정비하기 어려웠던 점도 솔직히 있다”고 말한 건 실수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첫째, 대통령실 책상 위 ‘The Buck Stops Here’ 팻말이 보고 있어서다.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1년 전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 대통령에게 선물한 것이 바로 그거였다. 모든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는 의미. 대통령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고 따라서 누구 탓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백악관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는 팻말이 지켜보고 있는데, 대선 후보 시절부터 당선되면 그 팻말을 책상 위에 놓고 싶다던 사람이 윤 대통령 자신이었는데, 취임 1년이나 됐는데도 남 탓이나 하는 건 대통령답지 않다.
심지어 거야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윤 대통령도 없었을지 모른다. 2020년 총선에서 위성정당 포함 180석의 거야가 탄생하는 바람에 기고만장 더불어민주당은 야당 몫 국회 법제사법위원장까지 차고앉아 오만불손 입법독재를 자행했다. ‘20년 집권’을 자신했던 그들은 ‘살권수’(살아 있는 권력 수사)를 하려던 검찰총장 윤석열에게 온갖 수모를 주며 사퇴를 압박했다.
2021년 총장 자리에서 떨치고 나올 때까지 방어막이 돼준 보수야당이 국민의힘이었다. 그해 4월 서울과 부산시장 선거에서 이겼고, 6월엔 젊은 당 대표로 쇄신했으며 그 힘으로 윤석열은 야당 대선후보로 나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거다.
윤 대통령이 거야 탓을 해선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거야입법에 막혀 제도 정비를 못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교육·연금 개혁이 안 되고 있는 건 무능과 준비 부족 탓은 아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새겨볼 필요가 있다.
제일 먼저 파투 난 ‘5세 취학’은 2022년 7월 29일 전임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업무 보고 때 들고나왔던 얘기다. 그때 윤 대통령도 “취학연령을 1년 앞당기는 방안을 신속히 강구하라”고 분명히 지시했다. 그런데 졸지에 아이들을 일찍 학교에 보내게 생긴 학부모와 교육단체들이 일제히 반발하자 당시 부총리가 취임 34일 만에 사퇴하며 없었던 일이 됐던 거다.
노동개혁도 MZ세대 노조인 ‘새로고침’이 “역사적 발전에 역행한다”며 거세게 반대해 윤 대통령이 3월 재검토를 지시한 것이지, 거야입법에 막힌 게 아니다. 굳이 거야입법에 막힌 걸 찾자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1호 법안’인 양곡관리법 개정안이다. ‘쌀 썩어 문드러지는 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악법임에도 갤럽 여론조사에서 찬성이 60%나 나왔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윤 대통령에 대한 부정 평가와 일치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그토록 국정 홍보를 못했음에도 대통령이 1호 거부권을 통해 제도적으로 막아내 차라리 다행이라고 봐야 한다.
연금개혁은 아직 시작도 못 했지만 거야가 머릿수만 믿고 포퓰리즘 법안을 밀어붙이는 전략이 걱정스럽긴 하다. 그리하여 판판이 대통령의 거부권을 유도해 특정 계층의 분노를 유발하고, 자신들 지지층으로 결집시켜 나라가 어찌 되든 내년 총선에서 재미 볼 작전인 듯하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이 거야 탓을 해선 안 되는 이유는 야당의 협조를 구하려는 어떤 노력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여소야대는 1988년에도, 1992년에도, 1997년 대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인위적 정계 개편이 꼭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역대 대통령들은 3당 합당을 하거나 남의 당 의원 빼오기나 심지어 야당 독재를 규탄하며 입법서명운동을 하는 등 국정 운영을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야당 의원 빼오기를 인정하며 사과까지 했었다.
윤 대통령이 취임 1년이 지나도록 이재명 대표를 안 만나는 이유를 모르는 바 아니다. 대통령이 돼서도 결코 못 버리는 검찰 DNA ‘유죄 추정의 원칙’은 MZ세대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꼰대의 법칙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은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했으나 검찰이나 부인만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윤석열 정부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지만 대통령으로 인해 국민의힘은 꼰대의 힘이 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사설]
尹 취임 1년… 국정·인사 쇄신해 3대 개혁 제대로 시동 걸라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지난해 5월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오늘이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다. 검사 출신으로 충분한 정치 경험 없이 당선된 윤 대통령은 기대와 우려를 한 몸에 받으며 취임했다. 대선에서 48.56%를 득표했던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1년이 지났지만 3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윤 정부의 국정운영이 아직까지 국민들 기대에 못 미치고, 일부는 지지를 유보 또는 철회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윤 정부는 국민들에게 문재인 정부가 무너뜨린 공정과 상식을 복원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출범했다. 취임사에선 반(反)지성주의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거론하면서 ‘자유’의 가치를 역설했다. 어느덧 윤 정부가 그에 걸맞은 국정운영을 해왔는지 ‘1년 성적표’를 냉철하게 따져볼 시점이 온 것이다.
공정과 상식의 시금석은 새 정부 조각(組閣)을 포함한 인사였다. 장관 후보자들의 잇단 낙마,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검찰 출신의 요직 배치 등으로 야권을 중심으로 ‘인사 참사’ ‘검찰 공화국’ 등의 비판을 자초했다. 지난 정부의 잘못이나 국정 실패를 바로잡겠다는 의욕이 앞선 때문인 듯 거대 야당이 국회 권력을 쥔 정치 지형인데도 통합과 협치, 설득의 지혜를 발휘하기보다는 이념과 가치의 선명성을 내세운 개혁 주도권 확보에만 매달렸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는 국정 동력에도 영향을 줬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연금·노동·교육 3대 개혁은 인기가 없어도 반드시 해내겠다고 밝혔지만 이행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연금 개혁의 첫걸음을 떼기 위한 국회 차원의 논의는 결국 빈손으로 끝났다. 노동 개혁은 건설 현장의 노조 불법행위 엄단, 노조 회계 공개 요구 등으로 일단 시동을 걸었으나 노동시간 유연화 등 제도 개혁은 ‘주 69시간’ 프레임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다. 교육 개혁은 아예 밑그림조차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2055년이면 바닥나는 국민연금 등 연금 개혁은 미룰수록 미래 세대의 부담만 커질 뿐이다. 노동 방식·임금제도 개혁을 통한 생산성 제고 없인 우리 경제가 저출산·고령화가 초래할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청년들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합한 창의적 인재로 육성하기 위한 교육제도 개혁과 대학에 대한 투자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3대 개혁은 대통령의 한마디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직역별·세대별 첨예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민감하고 지난한 과제다.
이런 상황에서 윤 정부는 이념보다 실용을, 일방통행보다 소통을 앞세우는 유연한 정책 행보로 국정 스타일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1주년을 맞아 대통령실과 내각의 인적 쇄신을 통해 국정 동력을 되살려야 한다. 야당에 대해서도 이해를 구하는 소통과 협치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주춤한 3대 개혁의 시동을 제대로 걸기 위해선 국정·인사 쇄신의 고삐를 다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