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注〕 權哲賢 한나라당 의원은 교육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금성출판사刊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34개 항목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일부에서는 『權의원이 교과서를 임의로 발췌하고 해석을 붙여 교과서의 진의를 왜곡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權의원이 문제점으로 지적했던 항목을 중심으로 이 교과서의 내용을 발췌해서 소개한다.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남북에 들어온 미군과 소련군 (257쪽)]
38도선 이남과 이북에 각각 들어온 미군과 소련군의 포고령을 통해 두 나라 군대의 주둔 정책을 알아보자.
<자료 1> 태평양 방면 미 육군 총 사령관 맥아더 포고령 1호
(제1조)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하에 시행한다.
(제2조) 정부 등 모든 공공 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중요한 제반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 보존하여야 한다.
(제4조) 주민의 재산권은 이를 존중한다. 주민은 본관의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일상적인 직무에 종사하라.
(제5조) 군정 기간 동안 영어를 모든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시사 연구소, 광복 30년사)
<자료 2>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포고문
“…조선 인민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여러분들 수중에 있다. 여러분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렸다.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 조선 인민은 반드시 스스로 자기 행복을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를 회복시켜라! 새 생산 기업체를 개시하라! 붉은 군대 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김준엽 외, 북한 연구 자료 총서 제1집)
[일장기가 내려진 자리에 성조기가 올라가다 (256쪽)]
1945년 9월 9일 오후 3시 45분 조선 총독부 제1 회의실에서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과 제7함대 사령관 킨 케이드 제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에가쓰 일본군 제17방면 사령관, 야마구치 진해 경비부 사령관, 아베 총독은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항복 조인식은 30분 만에 끝나고 일본 국기가 내려졌다. 그러나 일장기 대신 올라간 것은 태극기가 아니었다. 일장기가 걸려 있던 그 자리에 펄럭이는 것은 이제 성조기였다. 광복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역사적 순간은 자주 독립을 위한 시련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멀어지는 통일 정부의 길 (261쪽)]
세계 곳곳에서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도 충돌하였다. 두 나라는 한반도 정세를 뜻대로 만들지 못한다면 점령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자신들의 세계 정책에 들어 맞는 적합한 정부를 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남북의 정치 지도자들은 통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중단되자 곧바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미·소 공동 위원회가 깨어지자 미국은 자신들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유엔에 한국의 문제를 넘겼다. 유엔은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한국에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은 이에 반대하여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북한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였다. 남북한 총선거가 불가능해지자 유엔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이라도 우선 선거를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을 바꾸었다. 남한에서 정부가 세워진다면 이는 북한 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였다. 이제 남과 북은 분단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264쪽)]
출범 직후 이승만 정부는 여러 가지 도전에 부딪혔다. 권력의 분배를 둘러싸고 한민당과 갈등을 빚었으며, 단독 정부에 반대하면서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김구나 김규식 등과도 대립하였다.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들도 주한 미군의 철수, 친일파 처벌, 토지개혁 등을 주장하면서 이승만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국회 안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반공 체제를 강화함으로써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북한에 또 다른 정부가 들어서다 (265쪽)]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단독 정부 수립의 과정을 밟아 나갔다. 북한은 1946년 2월부터 ‘민주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일제의 식민 지배를 창산하고 사회 체제를 바꾸는 일련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친일파를 숙청하는 한편,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였다. 또한 대주지의 땅을 몰수하여 농민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남한에서 단독 정부 수립의 움직임이 표면화되자, 북한도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1948년 초에는 헌법 초안을 만들고, 군대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단독 정부 수립을 비판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1948년 4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남북 정당과 사회 단체들이 정부 수립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4월의 회의에는 남한의 민족주의자들도 참가하였으나, 6월의 회의는 민족주의자들이 빠지고 실제로는 북한을 지지하는 정당이나 단체만이 참가하였다.
이렇게 명분을 쌓아 가던 북한은 남쪽에 정부가 들어서자, 그 다음 달인 9월 초 곧바로 남한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거쳐 조선 민주주의인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좌절된 친일파 청산 (266쪽)]
그러나 행정부나 경찰 곳곳의 주요 자리에 친일 행위를 한 인물들을 등용하고 있던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의 처벌에 소극적이었다. 더 나아가 반민 특위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비난하는 한편, 노골적인 방해에 나섰다. 경찰을 동원하여 반민 특위를 습격하고 직원들을 연행하였다. 그리고 반민족 행위자의 범위를 크게 좁히고, 친일파 처벌의 기한을 줄임으로써 반민 특위의 활동을 사실상 막아버렸다. 이로 인해 친일파 처벌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민족 정신에 토대를 둔 새로운 나라의 출발은 수포로 돌아갔다.
[프랑스의 나치 청산과 한국의 반민족 행위자 처벌 (266쪽)]
제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에서는 나치 협력자로 조사를 받은 사람이 150~200만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사형에 처해진 사람이 3~4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업을 지휘했던 드골은 반나치 세력에 속하는 인물이라면 그가 설혹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도 함께 일했다. 이 ‘반나치 연합’이 오늘날 프랑스 민주주의와 통합의 기초가 되었다.
반면에, 대한 민국에서는 1949년 9월 반민 특위가 해산할 때까지 취급한 사건은 682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 체포 305명, 미체포 173명, 자수 61명이었으며, 559명이 특별 검찰에 송치되어 221명이 기소되었다. 재판이 종결된 38명 중 사형 1명, 무기 징역 1명을 포함해 징역형이 12명, 공민권 정지 18명, 무죄 6명, 형 면죄 2명이었다. 그러나 이들조차 1950년까지는 재심 청구나 감형, 그리고 형 집행 정지 등으로 모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처럼 광복 이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오는 우리 현대사를 옥죄는 굴레가 되었다.
[전쟁의 전주곡 (268쪽)]
미국과 소련은 1948년 말에서 1949년 초에 걸쳐 일단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남과 북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계속하였으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 원조를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특히, 소련은 북한의 군사력 강화와 전쟁 준비를 도왔다.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정부를 세운 중국 또한 조선인 의용군을 북한에 편입시킴으로써 북한군을 지원하였다.
남북 사이의 무력 충돌도 적지 않았다. 지리산을 비롯한 남한 곳곳에서도 북한을 지지하는 무장 유격대의 활동이 계속되었다. 38도선 곳곳에는 국군과 북한군 간에 크고 작은 충돌이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전투는 곧이어 벌어질 본격적인 전쟁의 전주곡이었다.
[전쟁이 남긴 것 (272쪽)]
민간인 학살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남한에서는 보도 연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이 있었고, 경남 거창과 충북 영동의 노근리 등 여러 곳에서 주민들이 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후퇴하는 북한군도 대전 등지에서 많은 주민을 죽였다. 남과 북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적대감이 쌓여 갔다.
[미완의 혁명 (280쪽)]
그러나 원래 보수적 인사들로 구성된 민주당 정부는 당내 파벌 사이의 권력 다툼에만 열중한 채,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4·19 혁명의 이념을 실천에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부정 선거 책임자나 부정 축재자의 처벌에는 소극적이었으며, 오히려 각종 법을 만들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나 사회 운동을 억눌렀다. 특히, 남북 협상에 대해서는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결국 사회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은 꽃을 피우지 못하다가 5·16 군사 정변으로 꺾이고 말았으며, 4·19 혁명도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다.
[헌법 위에 존재하는 대통령 (288쪽)]
…위기에 처한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이 중요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강압적인 통치에 나섰다. 1971년 12월에는 국가 비상 사태를 선언하고 대통령에게 초법적인 비상 대권을 부여하였다. 이어 1972년 10월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언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게 집중시킨 유신 헌법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에 박정희가 취임함으로써 유신 체제가 시작되었다.
유신 헌법에서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으며, 국민의 직접 선거가 아니라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선출되었다. 이 통일 주체 국민 회의는 사실상 대통령이 통제하였다. 대통령이 될 수 있는 횟수의 제한도 없어져 영구 집권이 가능하였다.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추천함으로써 국회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 나아가 대통령에게 각종 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 조치’라는 초법적인 권리를 부여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유신 헌법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부적당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 체제로 나아간 것이 유신 체제였다.
[경제 개발과 반공을 명분으로… (286쪽)]
박정희 정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 개발과 반공을 국가 운영의 전면에 내세웠다. 한·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전 참전은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한·일 회담에서 국민들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차관을 비롯하여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데만 치중하였다. 이에 많은 학생과 시민, 언론들은 ‘굴욕적인 대일 외교’에 반대하였다. 학생들은 한·일 회담에 대한 반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1964년 6월에는 서울 시내 중심부에서 대대적으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6·3 시위). 정부는 비상 계염과 휴교령으로 반대 운동을 억눌렀다. 그리고 이듬해 대학과 고등 학교의 문을 닫고 위수령을 내려 군대를 동원한 가운데 한·일 협정을 비준하였다. 한·일 국교 정상화의 결과 동북 아시아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한·미·일 공동 안보 체제가 형성되었다.
베트남 파병은 6·25 전쟁 당시 우방이 우리를 지켜준 데 대해 보답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다. 그 대가로 경제 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차관을 미국에서 들여오고, 파병된 군인들의 송금과 군수품 수출, 베트남 건설 사업 참여로 어느 정도 외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에게 끼친 피해와 파병된 한국군의 희생 또한 적지 않았다. 베트남전 참전으로 한국과 미국 간의 정치·군사적 동맹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전두환 정부의 국민 회유책 (293쪽)]
국풍 81은 대중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해서 연예나 오락 등으로 돌리려는 목적을 가진 우민화(愚民化) 정책이었다. 미스 유니버스 대회의 유치, 컬러 텔레비전 방영, 프로 야구와 씨름 창설 등도 같은 맥락이었다. 1982년에는 야간 통행 금지가 해제되었다. 이와 함께 중고등 학생의 머리 모양과 교복의 자율화, 장발 단속의 완화, 해외 여행 자유화 등의 개방 정책도 뒤따랐다. 무력으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가 취약한 정치적 정통성을 다른 분야에서 보완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천리마 운동 (301쪽)]
천리마란 옛날 전설에 나오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말을 뜻한다. 천리마 운동이란 천리마를 탄 기세로 사회주의 건설에서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자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1956년 12월 노동당 전원 회의에서 김일성이 제안하면서 시작되었고,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사회주의 생산 경제 운동 형태로 전개되었으나, 사회주의 건설에서 조선 노동당의 총노선으로 자리를 잡았다. 맡은 일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룬 작업반이나 개인에게는 ‘천리마 영웅 칭호’가 주어졌다. 북한 주민의 노동력을 최대한으로 동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중의 열정을 끌어내기 위해 시행된 천리마 운동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커다란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북한 방문자들이 말하는 주체사상 (302쪽)]
주체에 대한 강조는 쇼비니즘에 가까운 북한 주민의 강렬한 자부심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이러한 자부심의 논리적 결과는 사고 방식에 있어서 편협함과 외부 세계와의 접촉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지상의 낙원을 건설했다고 자랑하면서도 북한의 당 간부, 관료, 학자 할 것 없이 모두 외래의 방문객으로부터 그들에 대한 찬사를 들으려고 급급했다. (양성철·박한식 편저, 북한기행)
김일성은 결코 이론가가 아니다. 그가 젊었을 적에는 마르크스주의를 면밀히 공부하였겠지만, 그가 받아들인 것은 그 자신의 정치적 실천에 적합한 것뿐이다.…그가 주체 사상 속에서 언급한 것은, 나름의 독특한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북한 정책의 직접적 수행 지침이 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의 교시는 곳곳에서 인용되며 거기에 인민들은 늘 귀를 기울이고 있다. (루이제 린저, 북한이야기)
[김정일 후계 체제의 강화 (304쪽)]
김정일은 대학을 졸업한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조선 노동당에서 조직, 문화 예술, 홍보 관계의 중요한 직책을 맡아 수행하였다. 1970년대 들어서는 당의 전면에 나서면서 점차 김일성의 후계자로 자리를 잡아 갔다. 주체 사상이 유일사상이 됨에 따라, 이를 가장 올바로 해석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수령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선전되었다. 김정일이 주체 사상에 대한 해석을 독점함으로써 자연히 후계자의 자리를 굳혀 나갔다.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김정일은 3대 혁명 소조 운동, 70일 전투와 같은 각종 속도전, 3대 혁명 붉은기 쟁취 운동, 숨은 영웅 따라 배우기 운동 등 당과 정부의 여러 사업을 주도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 무렵 당과 행정 부서에는 경제 관료들의 진출이 두드러지고, 혁명 2세대들이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군부와 함께 김정일 체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1980년에 열린 조선 노동당 대회에서는 김정일 후계 체제를 공식화하였다. 김정일은 당의 여러 핵심 요직을 차지하여 2인자의 위치를 확립하였으며, 북한은 ‘혁명 전통의 계승 발전’을 선언하였다. 김일성뿐 아니라 김정일에 대한 개인적 숭배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김정일의 정치적 활동도 확대되어, 단순히 김일성을 보좌하는 데서 벗어나, 경제나 군사 부분에서도 독자적인 지도를 하는 데 이르렀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우리식 사회주의''''의 제창 (306쪽)]
대내적으로는 주체 사상에 토대를 둔 ‘우리식 사회주의’를 내세워 사회적 단합의 강화를 꾀하였다. 북한이 말하는 ‘우리식 사회주의’란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고 자체의 힘으로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북한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근본적인 힘으로 ‘조선 민족 제일주의’를 들고 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창조적 활동으로 훌륭한 문화 유산을 남기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온 뛰어난 민족이라는 것이다.
[굳어지는 반공 체제 (308쪽)]
휴전 직후인 1954년 남북한과 6·25 전쟁 관련 국가들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회담을 열어 한국의 통일 문제를 논의하였다. 서방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주장하고, 북한은 남북한 당사자 간의 해결을 주장함으로써 회담은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휴전 이후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 대화나 타협을 시도하지 않은 채 철저한 반공·반북 정책을 고수하였다. 별다른 통일 정책이나 통일 방안이 없이 남북 자유 총선거를 내세우는 정도였다. 조봉암과 진보당 등 일부 진보 세력이 평화 통일론을 주장하였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4·19 혁명 후 집권한 민주당 정부는 북진 통일론 대신 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하였다. 또한, ‘선경제 건설, 후통일’을 내세움으로써 북한과 무력 충돌을 피하고 같이 번영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도 북한과 대화를 하거나 통일 정책을 세우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민간 차원의 통일 운동이나 남북 협상을 저지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반공’을 집권의 명분으로 삼고 강력한 반공 정책을 수행하였다.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무장 간첩이 청와대 습격을 꾀하고(1·21 사태), 울진·삼척 지구에 대량으로 무장 간첩이 침투하는 등 북한 군부 내 강경파에 의한 대남 도발이 자행되면서 남북 간의 갈등은 위험 수위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통일 운동의 성장 (312쪽)]
1980년대 접어들어 민족 민주 운동이 진척됨에 따라 통일에 대한 논의나 통일 운동은 학생층을 비롯하여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통일이 단순히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민주화를 완성하고, 민중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것이라는 인식도 뚜렷해져 갔다. 이에 따라 통일 운동을 목적으로 한 단체가 만들어지고, 사회 단체의 통일 교육도 늘어났다.
1980년대 후반 일부 대학생과 통일 운동 단체는 자주적인 통일 논의와 남북 교류를 활성화한다는 명분으로 정부의 승인 없이 북한과 접촉하고 회담을 하였다. 임의로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들의 행동은 실정법 위반과 북한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가능성을 놓고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통일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고 민간의 통일 운동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가 밀입북한 사람들을 엄히 처벌하고,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를 저지함으로써 통일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날카로워졌다. 이러한 사회적 갈등은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광복 이후의 경제적 어려움 (321쪽)]
미 군정은 남한의 경제를 살리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식량 및 생활 필수품 확보, 원조 무역으로 물자 수급의 균형을 꾀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물자의 부족은 여전하였고, 물가는 계속 상승하였다.
[불완전한 농지 개혁, 절반의 성과 (322쪽)]
1949년 6월에 농지 개혁법이 공포되고, 1950년 3월에는 일부 개정되어 시행에 들어갔다. 농지 개혁은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농지 개혁의 방식은 정부가 지주의 땅을 돈을 주고 사서, 실제 경작을 하는 농민에게 돈을 받고 나누어 주는 ‘유상 매수, 유상 분배’였다.
농민은 분배받은 토지에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1년 평균 생산량의 1.5배를 생산물로 5년에 걸쳐 나누어 내야 했다. 일부 지주들은 개혁이 시간을 질질 끄는 사이에 땅을 팔아치워, 실제 농지 개혁의 대상이 되는 토지는 크게 줄어들었다.
농지 개혁의 결과 사회적 지배 계급으로서 지주는 사라지고, 상당수의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가지고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제 농민들은 전근대 사회부터 계속되어 온 지주의 수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배받은 토지의 가격은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 갚아 나가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결국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농민들이 분배받은 농지를 다시 팔고 소작을 하거나 도시로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북한의 토지 개혁 (322쪽)]
북한은 1946년 2월 ‘민주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토지 개혁에 대한 법령을 발표하고, 3월 이를 전격적으로 시행에 옮겼다. 북한에서 실시된 토지 개혁의 방법은 ‘무상 몰수, 무상 분배’였다. 총독부나 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의 토지는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몰수하였다. 조선인이 소유한 토지의 경우, 5정보가 넘거나 자신의 힘으로 경작하지 않으면 몰수하였다. 이렇게 몰수한 토지는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원칙에 따라 고용농, 토지가 없는 농민, 토지가 적은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토지 개혁의 결과, 북한에서는 지주가 사라졌으며, 빈농이 줄어들고 중농(中農)이 농민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토지를 빼앗긴 지주들은 북한 정권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월남을 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원조 경제의 겉과 속 (325쪽)]
미국에서 들어온 농산물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농산물이나 그 밖의 공업 원료를 가공하는 소비재 산업도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소비재 중심의 공업 발전에 비해서 생산재 부분은 여전히 부진을 면치 못하여, 공업 부분의 불균형이 심해졌다. 미국의 농산물 원조는 생산 과잉으로 자국 내에서 농업 공황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메우고 정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필요 이상으로 들여왔다. 이로 인해 농산물의 가격이 떨어져 농가 소득이 낮아지고 농민의 생산 의욕도 줄어들었다. 또한, 미국의 값싼 잉여 농산물이 공업의 원료로 사용됨으로써, 국내의 밀이나 면화 생산은 커다란 타격을 받고 점차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경제 성장, ''''한강변의 기적''''을 이루었으나… (327쪽)]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 1966)과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을 거치면서 한국의 경제는 ‘한강변의 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외형적으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이 기간 동안 연간 경제 성장률은 두 자릿수에 가까웠으며, 수출은 20배 이상 늘어났다. 1인당 국민 총생산은 2배가 되었으며, 저축률도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이 사이 한국의 경제는 더욱 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수출용 물건을 만들기 위한 원자재나 시설용 기계의 수입으로 무역 적자는 오히려 커졌으며, 곡물 수입액은 7배로 늘어났다. 저축률은 증가했으나 필요한 자본에 미치지 못해 외국 자본을 더 많이 도입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외채도 급속하게 늘어났다.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으로 (328쪽)]
1970년대의 공업화 정책에 따라 농수산업은 더욱 침체되었다. 당시 중화학 공업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공해 등의 문제로 선진국에서 쇠퇴하는 분야였다. 또한, 각종 기계나 기술을 일본에서 도입하고, 공장을 일본 자본으로 건설함에 따라 한국 경제는 자본과 기술에서 미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종속되어 갔다.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 (329쪽)]
재벌하면 우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문어발’일 것이다. 문어발을 연상할 만큼 한국의 재벌은 많은 기업들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대기업의 계열 기업수는 수십 개에 달하며, 문어발은 8개에 지나지 않으나. ‘문어발’이라는 표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셈이다.
재벌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수출에 일정한 몫을 담당하기도 했으나, 재벌 기업의 성장은 대부분 정치와 긴밀한 결탁에 따른 특혜 조치에 힘입은 것이었다. 재벌 기업들은 상호 출자에 의해 자본에서 서로 얽혀 있으며, 대체로 일가 친척에 의한 족벌 경영을 해 왔다.
이와 같은 한국의 재벌 기업은 세계 경제 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영문으로 된 책자에서 우리 나라 재벌의 영어 표기는 금융에 의한 결합을 의미하는 ‘financial combine’ 대신 보통 거대 기업군의 의미하는 ‘conglomerate’가 사용된다. 그렇지만 ‘재벌’에 해당하는 기업의 형태가 없기 때문에, 때로는 영어로도 그냥 ‘jaebul’이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농촌 사회의 변화와 농업 정책 (334쪽)]
새마을 운동은 겉으로는 민간의 자발적인 운동이었으나 실제로는 정부가 주도하였다. 그리고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나 대가를 치르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신 자세를 강조하였다. 이 때문에 새마을 운동은 박정희 정부가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장기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농촌의 생활환경을 향상시키거나 소득을 높이기보다는 농촌의 겉모양을 바꾸는 데 치중하기도 하였다.
[북한의 예술 (347쪽)]
<자료 1> 음악 예술인들은 새민주 조선 건설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한다
음악은 민족적 특성을 살리면서 혁명의 요구에 맞게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의 음악은 우리 인민의 감정과 정서에 맞고 새조국 건설에 일어선 우리 인민의 혁명적 지향에 맞아야 하며 민족적 해방을 이룩하고 새생활 창조에 일어선 우리 인민의 환희와 기쁨, 긍지와 자부심, 혁명적 열정을 반영한 참말로 인민적이며 혁명적인 음악으로 되어야 한다.(1946년 8월 8일, 김일성)● |
첫댓글 최선생님 이방대한 글올리시라 고생하셨 습니다 잘읽고감니다...........
앞으로도 무궁무진한 귀하의 지식으로 카페를 도배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