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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김구, 경교장에서 암살당해
▲1949년 6월 26일, 그의 거처 경교장
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목숨을 잃은 백범
김구 선생.
1949년 6월 26일 낮 12시30분, 서울
경교장(현재의 강북 삼성의료원)에 갑
자기 4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육군 소위 안두희가 조국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백범 김구 선생에게 쏜
총소리였다.
73세 노혁명가의 목숨을 앗아간 안두희
는 손에 권총을 쥔 채로 “선생은 내가
죽였어!”라고 태연하게 말하며 검거에
순순히 응했다.
범인이 확보되고 철저하게 준비된 암살
이었음도 밝혀져 사건의 전모가 곧 드러
날 것으로 예상됐으나 사건은 지금까지
도 배후설만 난무할 뿐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신병을 확보한 헌병대가 범인
을 감방에 가두기는커녕 의무실에 보호
조치한 점, 임정계열인 헌병사령관을
이튿날 춘천지구로 전격 발령한 점 등이
의문이었다.
특무대로 넘겨진 안씨에게 김창룡이
“안의사, 수고했소”라고 격려하며 술·
담배 등을 제공한 사실은 의혹을 더욱
부채질했다.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6·25 발발과
함께 특사조치로 석방돼 육군 중령으로
복귀한 점 역시 배후를 의심케 하는 대목
이었다. 배후에 대한 물증은 없고 심증만
구구한 채 55년의 세월이 흘렀다.
▶2011년 재일동포 출신 세계적 건축가 이타미 준 별세
재일동포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伊丹潤·한국명 유동룡·74)씨가 지난달 26일 일본 도쿄(東京) 시내 한 병원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고 그가 운영하던 ITM건축연구소가 1일 밝혔다. 장례식은 지난달 30일 가족장으로 치러졌다고 연구소 측은 덧붙였다.
고인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무사시공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과 일본을 무대로 활동했다. 2003년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서 생존 건축가 가운데 최초로 개인전을 열어 화제가 됐다.
돌·흙·나무·철 같은 토착적 소재와 색과 빛을 기초로 한 건축미를 강조한 작품들로 "현대미술과 건축을 아우르는 작가"라는 찬사를 얻었다.
고인은 국내에선 2001년 12월에 완공된 제주 포도호텔을 디자인했고, 제주 국제영어교육도시의 총괄 건축가(Master Architect)를 맡기도 했다. 2005년에는 프랑스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받았다. 고인이 진행해오던 프로젝트들은 건축가인 맏딸 유이화 ITM건축연구소 한국지사장에게 승계될 예정이다. 유족 측은 19일 서울에서 추모 행사를 갖기로 했다고 밝혔다.
▶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전 대한민국 vs 우루과이 (2:1 대한민국 패, 이청용 골)
http://blog.naver.com/tryxtry/220043877239
▶2010년 채문식 전 국회의장 별세
채문식(蔡汶植) 전 국회의장이 2010년 6월 26일 서울 구로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6세.
채 전 의장은 1971년 8대 국회에서 신민당 전국구 의원을 시작으로 9·10대 국회에서 신민당 경북 문경·예천 의원, 11·12대 민주정의당 경북 문경·예천 의원, 13대에선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을 지낸 6선의 정치 원로다. 11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회부의장, 후반기(1983~1985년)에는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그의 정치 인생은 여야를 넘나들었지만 항상 주류와 타협하지 않았던 '비주류 정치인'으로 기억된다. 정치 활동의 출발점도 야당이었다. 5·16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여당인 공화당의 공천 제의를 거부하고 신민당을 택했다.
야당 의원 시절에는 8~10대 내리 3선 의원을 지냈고 '야당의 꽃'으로 불리는 대변인도 맡았다. 하지만 그는 야당 주류와는 달리 박정희 정부와 대립만 하기보다는 업적을 이해하는 쪽이었다.
채 전 의장은 박 전 대통령 사망 후인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에 구야당 대표격으로 참석한 뒤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 의원으로 변신했다. 1983년 4선 의원으로 국회의장에 올랐고 1988년 당 대표까지 역임했지만, 야당 때와 마찬가지로 핵심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6공화국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당시 민자당 최고위원을 후계자로 낙점했을 때 그는 '반(反)YS' 진영에 서서 비주류의 길을 걸었다.
▶2005년 US여자오픈 골프대회에서
김주연 선수 우승
이름 그대로였다. 마지막 홀서 벙커샷 버디. 9회말 끝내기 만루홈런의 짜릿함에 비할까. ‘버디 킴’ 김주연(24·KTF)이 LPGA(미국여자프로골프) 투어에서 최고 권위와 전통, 그리고 최대 상금을 자랑하는 US여자오픈(총상금 310만달러)에서 극적으로 정상에 올랐다.
김주연은 27일(한국시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인근 체리힐스빌리지의 체리힐스골프장(파71·6749야드)에서 벌어진 마지막 라운드서 1오버파 72타를 쳐 최종합계 3오버파 287타로 미국 여자골프의 꿈나무들인 아마추어 모건 프리셀과 브리태니 랭을 2타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이로써 김주연은 박세리(28·CJ), 박지은(26·나이키골프)에 이어 LPGA 메이저 대회에서 정상을 밟은 세번째 한국 선수가 됐다.
미국 진출 5년만에 첫 우승을, 처음 출전한 메이저 대회서 따낸 김주연은 ‘메이저 퀸’의 영예와 함께 상금 56만달러를 한꺼번에 챙겼다. 지난해 새내기로 그녀가 벌어들은 상금은 고작 9897달러. 올해도 이 대회 직전까지 누적 상금이 8만여달러에 그쳤던 그녀의 우승은 마치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보는 듯 했다.
17번홀까지 프리셀과 동타를 이뤄 대다수 사람들이 대회 규정에 따라 이튿날 벌어질 연장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 순간. 김주연이 18번홀 그린 앞 벙커에서 쏘아올린 서드샷은 그린을 몇차례 튕기더니 컵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LPGA 투어 최연소 우승을 꿈꾸던 프리셀은 거짓말같은 김주연의 벙커샷 버디에 전의를 상실한 듯 이 홀에서 보기로 무너졌다.
전날까지 공동 선두를 달렸던 미셸 위(16·위성미)는 마지막날 11오버파 82타라는 최악의 스코어를 작성하며 최종합계 12오버파 296타로 공동 23위에 그쳤다. 또 사상 초유의 그랜드슬램(단일 시즌 4개 메이저 대회 석권)에 도전했던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은 이날 6타를 더 잃어 미셸 위와 나란히 23위 그룹에 머물렀다.
▶2003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화성의 북극지역 사진공개,
화성의 물(凍土) 발견
▶2001년 탈북한 장길수군 일가족 7명,
북경 유엔판무관실 진입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그림으로 국제사회에 폭로하며 중국 내에 은신해 왔던 탈북소년 장길수(17·가명)군의 가족과 친척 7명이 2001년 6월 26일 오전 중국 베이징 시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UNHCR) 베이징 사무소에 진입, 자신들에게 난민지위를 부여하고 한국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장길수 가족이 UNHCR 사무소에 들어
가기 전에 촬영한 가족사진. 왼쪽부터
장길수, 외할머니 김춘옥, 외할아버지
정태준, 이모 정선희, 이종사촌 이화영,
이모부 이동학, 이종사촌 이민철.
길수군 가족은 요령성, 대련에 은신해 있다가 22일 밤 베이징으로 이동, 이날 UNHCR 사무소에 진입했다. 이 사무소에 들어간 사람은 길수군을 비롯, 외할아버지 정태준(69), 외할머니 김춘옥(68), 이모 정선희(49), 이모부 이동학(49), 이종사촌 이화영(여·17)·이민철(15) 등이다. 이들은 한국 NGO인 ‘길수가족 구명운동본부’ 문국한 사무국장의 안내를 받아 2∼3명씩 세 팀으로 나뉘어 잇따라 7명이 UNHCR 사무실에 들어갔으며, 진입과정에서 심각한 제지는 받지 않았다.
길수군 가족들은 자신들의 한국행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자살을 하겠다며 강력히 한국행을 희망했다. 이들은 UNHCR에서 3일간 머문 후 29일 베이징을 떠나, 싱가포르와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30일 한국에 입국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처리한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길수군 가족이 한국으로 올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라기보다 세계에서 쏟아진 비상한 관심, 2008년 올림픽 유치라는 대사를 앞두고 있는 중국의 정치적 부담 등 대외환경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국은 인천공항에 7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들었으나, 기본적인 기자회견조차 가로막고 일가족을 ‘안가’로 데려가 버렸다.
▶2000년 인간 유전 정보인
게놈지도 초안 발표
인간 유전 정보인 게놈의 분석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여온 국제 공공 컨소시엄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와 미국 민간업체 `셀레라 제노믹스`가 유전자 염기의 배열 지도를 2000년 6월 26일 워싱턴에서 공동발표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기자회견을 통해 "인간 유전자 지도는 인류가 생산해 낸 가장 경이로운 지도"라며 축하했다.
이날 발표한 `인간 유전자 지도`는 생명공학의 신대륙 발견으로 평가됐다. 인간 게놈은 인체세포에 존재하는 23쌍의 염색체, 염색체를 이루는 DNA(핵산), DNA를 구성하는 30억쌍의 염기들의 이중나선형 조합으로 구성돼 있다. 이번에 규명된 것은 염기의 배열로, 이제 이 염기배열지도를 통해 개별 유전자의 기능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작업이 남게 됐다. 인간 유전자 정보의 97%를 해독했고 85%의 염기배열 순서 분석을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자들은 암 심장병 당뇨 비만 탈모 천식 파킨슨씨병 알츠하이머병 에이즈 등을 유발하는 유전자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일반인은 현재의 `진료기록`보다 훨씬 정확하고 풍부한 자신의 유전정보를 담은 극소형 DNA칩을 의사에게 제시하고 유전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https://youtu.be/bAJwke89f5s
▶2000년 국회, 이한동 총리서리를
상대로 사상 첫 인사청문회
2000년 6월 26일~27일 양일간 국회 사상 첫 인사청문회를 실시했다. 박태준 총리가 부동산 명의 신탁 파문으로 물러나 후임 총리로 임명된 자민련의 이한동 총리서리에 대한 인사청문회였다.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이한동 국무총리
서리가 선서를 하고 있다.
이 총리서리가 총선 당시 "국민회의와의 공조복원은 없다"고 몇차례나 강조한 후 말을 바꾼 점, 또 1970년대 초 포천 농지를 구입한 것은 위장전입이며 농지개혁법 위반이라는 점 등 때문에 자격 시비가 제기됐다.
이 총리 임명동의안은 6월 29일 국회 표결에서 찬성 139, 반대 130, 기권 2, 무효 1로 통과됐다. 139표는 민주당 119, 자민련 17, 민국당 2, 한국신당 1석을 모두 합친 것으로 한나라당 대 비한나라당 구도를 확인시켜 주었다.
▶ 1996년 영국서 1세기 경 자작나무에 기록된 불교 최고문서 발견
현존하는 불교기록 중 가장 오래된 문서가 발견 확인됐다. 고아시아 전문가인 미 시애틀시 워싱턴대의 리차드 살로만 교수는 1996년 6월 26일 영국국립도서관이 소장중인 불교문서가 서기 1세기쯤에 제작된 진본으로 현존하는 불교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다.
학자들은 자작나무 껍질에 고대 간다라어로 기록된 이 문서가 불교연구의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올 것이며 기독교의 사해문서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모두 60개 조각인 이 기록은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의 설교 시 인식론 등을 담고 있다. 이 문서는 북부 파키스탄과 동부 아프가니스탄에 걸쳐 있는 불교 중심지 간다라에서 나온 것으로 초기 불교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됐다.
▶1987년 네덜란드 작곡가 바딩스 사망
▶1987년 ‘6ㆍ26 대행진’,
비폭력ㆍ평화시위
6ㆍ26’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1987년 6월 26일 오후 6시를 전후해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전주 춘천 등 전국 37개 시ㆍ군 지역에서 국민운동본부, 민주당, 재야인사, 학생들에 의해 시도됐다.
이날 대행진은 6월 10일 대회에 비해 개최도시 및 시위발생지역, 시위가담인원이 훨씬 많았다. 오후 6시가 되자 서울과 지방에서 일부 차량들이 경적을 울렸고 연도의 시민, 학생들이 태극기와 손수건을 흔들거나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일부 성당, 교회, 사찰에서도 타종이 있었다.
이날 시위는 오후 7시 이후 시민들의 가세로 규모가 불어나 서울에서는 한때 서울역의 2만여명을 비롯, 동대문 영등포 일대 3만여명, 광주에서는 5만여명, 부산에서는 2만여명 등 전국적으로 20여만명이 참가했다. 6만여명을 동원해 저지에 나선 경찰은 이날 하루에만 2천9백60여명의 시위참가자를 연행했고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경찰이 버스로 강제 격리시켜 시위에 참가하지 못하기도 했다.
▶1986년 행정전산망
종합계획 확정 발표
▶1982년 UN, 레바논주둔 이스라엘군
전면철수 결의
▶1981년 전두환 대통령,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정상회담
▶1980년 공업진흥청, 국민생활용품의
표준규격화위해 국내최초로
국민표준체위조사 발표
▶1980년 남아프리카공화국군,
앙골라 침공
▶1978년 최초의 해양위성 시샛 발사
▶1977년 고리원자력발전 1호기
최초 발전
▶1974년 한미원자력협정 발효
▶1970년 한국-엘살바도르,
문화협정 체결
▶1970년 두브체크, 공산당적 박탈
1970년 6월26일,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체코 공산당으로부터 당적을 박탈당함으로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던 1968년 `프라하의 봄`도 역사속에 묻히고 말았다.
1968년 1월에 당 노선경쟁에서 보수파 당관료를 물리치고 제1서기에 오른 두브체크는 곧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제3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 당의 권력독점을 비판하고 집회와 결사를 허용하는 등 체코 전역에 자유화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소련이 이를 `반혁명`으로 간주한 것은 예상했던 결과였다. "자유화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이미 자유를 만끽해 본 체코인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소련군을 위시한 20만명이 탱크를 앞세우고 체코 국경을 넘었지만 국민들은 온 몸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세계는 냉담했고 침묵했다.
결국 `프라하의 봄`은 침략자 군화발에 짓밟혀 파국을 맞았고 소련에 연행된 두브체크는 자신의 행동이 반동적이었음을 시인해야 했다. 1969년 4월에 당 제1서기에서 해임되고 잠시 터키 대사로 전출됐으나 그를 기다린 것은 고향에서의 산림노동자였다.
▶1967년 전력부족으로 20시이후
TV방송 중단
▶1965년 몰디브,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62년 1940~50년대 대표 가수 남인수씨 사망
1940~50년대 우리나라 대중가요계의 최고 스타로 각광받았던 남인수(본명·강문수)씨가 1962년 6월26일 오후 3시 오랫동안 앓아왔던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열여덟 살의 나이로 가요계에 발을 디딘 후 ‘눈물의 해협’에서 ‘무너진 사랑탑’에 이르기까지 무려 1천여 곡 내외의 서정가요를 부른 ‘가요황제’였다. 한 세기에 한 번 날까말까한 미성이었다는 그는 민족의 수난과 격동기마다 서민들에게 삶의 고개를 넘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의 노래는 대부분 추억의 환기, 사랑과 청춘의 격정과 이별 그리고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채워졌다.
특히 그의 노래는 애절함이 두드러지는 곳, 감정의 기복이 교체되는 대목에서 묘미를 발휘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바로 그렇다. ‘신라의 달밤’의 작곡가 박시춘씨와 짝이 되어 공전의 대히트를 친 ‘애수의 소야곡’과 ‘가거라 38선’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명곡들이다. 그가 자신의 생명과 바꾸면서까지 녹음한 ‘무너진 사령탑’ 또한 마지막 불꽃으로 타올라 크게 히트했다.
이렇듯 27년의 세월 동안 우리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던 그였지만, 정작 본인은 45세로 눈을 감기 전까지 열여덟에 떠나온 고향 진주를 못 잊어했다고 한다. 현재 전북 김제 출신의 가수이자 그의 제자였던 신해성씨가 ‘남인수 기념사업회’를 이끌며 1991년부터 매년 ‘남인수 가요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1961년 미국,
중성자탄 개발 계획 발표
▶1960년 영국령 소마릴랜드 독립
▶1960년 마다가스카르공화국 독립
▶1959년 한국,
UN여성참정협정에 가입
▶1959년 쿠바-도미니카 외교 단절
▶1954년 문교장관, 한글간소화안
추진담, 각계에서 반대
▶1950년 UN안보리,
북괴군의 철퇴를 긴급 결의를 보도
▶1945년 유엔 설립의 근거가 되는
`유엔헌장` 조인
유엔 설립의 기초가 되는 유엔헌장 조인식이 1945년 6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50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이뤄졌다. 이로써 2차대전후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조직이 발족된 것이다.
4월 25일에 개최된 샌프란시스코 회의는 2개월동안 헌장을 심의했다. 심의가 진행되는 동안 독일이 항복했고 동서대립도 심화됐지만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이 오히려 연합국의 결속력을 강화시킴에 따라 회의성공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후 10월 24일에는 유엔헌장을 토대로 유엔이 정식으로 발족됐다. 24일은 소련이 유엔헌장을 비준한 날로 전체 50개 조인국가중에서 26번째였다. 결국 비준국이 과반수가 넘게 된 바로 이날이 유엔 창설일이 된 것이다.
레슬리 비플 미국 대표(가운데)가
1945년 유엔헌장에 서명하고 있다.
▶1943년 란트슈타이너 사망 -
ABO식 혈액형분류법 개발로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1941년 그리스 언어학자
하드지다키스 사망
▶1938년 총독부, 근로보국대조직
▶1926년 여운형,
광동에서 한인혁명군조직
▶1919년 미국 `데일리뉴스`지 창간
▶1918년 이동휘 등, 하바로프스크
에서 한인사회당 조직,
뒤에 고려공산당으로 개칭
▶1909년 폴 에를리히,
매독 치료약 개발
매독
독일의 세균학자 폴 에를리히가 매독의 병원체인 스피로헤타에 대한 치료약을 개발했다. 이 약은 근대의학에 화학요법을 접목시킨 최초의 성공사례였다. 치료약이 개발당시, 매독은 파리에서만 연 3천명 이상이 사망할 정도로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성관계를 통해 감염되는 이 병을 불치의 병으로 생각했다.
폴 에를리히는 매독에 감염된 토끼에 여러종류의 합성 유기화합물을 수차례 주사해 성공을 거두자 자신감을 갖고 사람에게도 실험했다. 1910년 이 `마법의 약`은 1만명의 매독환자를 치료했고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에를리히는 이 약을 `살바르산(Salvarsan)`으로 명명했다.
엘리히는 명예와 많은 상을 수상했고 한 대중지는 그를 가리켜 `과학계의 왕자`라 했다. 살바르산은 1940년대 중반까지 매독의 초기치료에 이용되었지만 이후 페니실린이 주요 치료제가 되었다.
▶1892년 미국 소설가 펄 벅 출생
1892.6.26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인권운동가 펄 벅 태어나다
19세기 말 중국에서 10여 년간의 기독교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Absalom Sydenstricker)는 만삭의 아내 캐리를 데리고 웨스트버지니아 힐스버러로 돌아왔다. 남북전쟁 당시 남과 북 사이에 끼어 가장 피해를 많이 보았던 지역인 힐스버러는 캐리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캐리 시던스트라이커는 딸을 낳았다. 첫째 아들 에드거 이후 중국에서 낳은 세 아이를 모두 잃고서 미국으로 돌아와 낳은 아이였다. 부부는 딸아이의 이름을 펄(Pearl) 이라고 지었다. 이 딸아이는 훗날 소설 [대지]를 써 미국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하였고, 동양과 서양, 여성과 아이, 인종을 아우르는 열정적인 사회 인권운동가로 활동하였다.
푸른 눈의 중국인으로 산 반평생
생후 3개월 만에 아기 펄은 그녀의 부모와 함께 미국을 떠나 중국으로 간다. 아버지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가 다시 중국선교활동을 재개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펄은 중국에서 자랐다. 펄에게 생후 3개월 만에 떠나온 미국은 그저 모국일 뿐 피상적인 이미지의 나라였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중국이 발 디딜 수 있는 굳센 땅으로 느껴졌고 중국 사람들의 삶이 더욱 친숙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가 중국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중국을 가까이 느낀다고 하여도 중국인들에게 그녀는 벽안(碧眼)의 서양인이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는 근본주의 기독교를 포교하는 엄격한 선교사로서 중국인들과 자신들의 삶을 확실히 분리하였다. 서양인으로서의 자각도 완전하지 못하고 중국인으로 동화될 수도 없는 사춘기를 보낸 펄은 18세에 어머니 캐리의 강력한 원조로 미국 랜돌프-메이컨 여대에 진학했다. 이때의 4년이 그녀가 1934년 중국을 완전히 떠나기 전 가장 긴 시간 미국에 머문 기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펄은 3년 뒤 미국인 농학자인 로싱 벅(John Lossing Buck)과 결혼하고 벅이라는 성을 얻었다. 펄 벅의 남편 로싱 벅은 여성에게 다감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일에는 열정적이었지만 아내를 이해하고 가정에 충실한 스타일의 남편이 못됐다. 선교 일에만 열중하며 가정을 나몰라라해서 어머니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펄 벅은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결혼생활에 절망했다. 더구나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캐롤은 펄 벅의 절망을 더욱 가중시켰다. 캐롤은 정신 지체아였다. 펄 벅이 딸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닐 때 남편 로싱 벅은 아내와 딸에게 무심했다. 남편의 무관심과 딸로 인한 죄책감과 고통을 잊기 위해 펄 벅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지>가 준 선물, 새로운 인생 그리고 노벨문학상
1927년 국민군이 난징을 공격했을 때 펄 벅은 가족이 몰살당할 뻔 한 위기를 겪는다. 이때 그녀는 중국과 서양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균열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아무리 중국에 살면서 중국을 사랑한다 하여도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미국인이라는 뼈아픈 자각은 그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들었고 이것은 펄 벅 문학의 평생 테마가 되었다. 1930년 그녀의 처녀작 [동풍 서풍]은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소설이었다. 미국에서 출간 된 이 소설은 1년이 채 안되어 3번이나 인쇄하는 인기몰이를 하였다. 펄 벅 문학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인생 최고의 전환점이자, 그녀의 남은 반평생을 확정 지을 소설을 발표하였다. 1931년 출판된 소설 [대지]는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와 부와 명성을 주었다, [대지]는 빈농으로부터 입신하여 대지주가 되는 주인공 왕룽을 중심으로 왕룽의 아내 오란과 세 명의 아들들의 역사를 그린 장편 소설이다.
[대지]는 왕룽이 죽은 후 세 아들이 지주, 상인, 공산주의자로 각자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을 묘사한 [아들들](1933년), [분열한 집](1933년)과 함께 3부작 [대지의 집]을 구성한다.
[대지]는 수많은 독자들의 탐독 속에서 퓰리처상을 받았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계 여러나라에 번역 출판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8년 스웨덴의 노벨상 심사위원들은 그 해의 문학상으로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작품 [대지]를 결정하였다.
펄 벅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미국의 여성작가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대지]는 미국인으로 태어나 중국에서 40여 년을 산 펄 벅이 미국과 중국 두 나라에 동시에 안긴 선물이었다. [대지]의 성공은 펄 벅에게 작가로서의 성공도 주었지만 그녀의 개인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무심한 결혼생활에 지쳐있던 펄 벅은 작가로 얻은 명성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출판해주던 출판사 J.데이의 사장 R.J.월시에게 사랑을 느끼고 로싱 벅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1934년 딸 캐롤과 입양한 딸 재니스를 데리고 미국행 배에 오른 펄 벅은 중국에 남은 로싱 벅과 중국땅에 영원한 이별을 고하게 된다. 이 날 이후 펄 벅은 단 한번도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열정적으로 인권사회운동에 투신하다
미국에 돌아 온 후 펄 벅은 본격적인 집필활동과 더불어 작가로서의 명성을 기반으로 인권사회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비록 아버지 압솔룸의 교조적 선교 활동에 염증을 느끼고 남편 로싱 벅의 계몽사상을 비웃었지만 그녀는 40여 년 간 선교사의 딸로 계몽운동가의 아내로 산 사람이었다.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사회활동은 그녀의 운명이었다. 작가의 조용한 은둔생활은 그녀의 인생에 맞지 않았다. 의욕적인 글쓰기를 하면 할수록 그녀는 사회활동에 더 많은 정열을 쏟았다.
그녀는 1930년대 미국 내 인종 차별에 반기를 들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1942년에는 민족 간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동서협회(The East and West Association) 설립하였고 1949년에는 세계, 특히 아시아 지역의 전쟁과 가난 속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을 미국으로 입양시키는 웰컴하우스(Welcome House.Inc)를 창설하였다. 그녀도 이 기관을 통해 7명의 피부색이 각기 다른 아이를 입양하였다.
또한 미군 병사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주둔한 뒤 생긴 미국계 사생아들을 돕기 위해 1964년 펄 벅 재단(Pearl S. Buck International) 을 세웠다. 이 재단은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의 중국계 아내 호미리와 친분이 있던 펄 벅이 소설의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버려진 미국계 사생아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만든 것이었다. 펄 벅 재단은 한국을 시작으로 현재 세계 11개의 나라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본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데 현재는 혼혈 아동뿐만 아니라 고아, 신체 장애우 등 사회에서 고통 받는 소외 아동을 돕고 있다.
펄 벅에 대한 엇갈린 평가
펄 벅의 사회활동이 너무 지나친 것이었을까? [대지]이후 나온 그녀의 소설들은 여전히 대중에게 인기를 끌었지만 평단에서는 반응이 좋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의 평론가 일부는 [대지]가 어쩌다 우연히 노벨상을 타게 된 작품이라고 폄하하였다. 또한 그녀의 맹렬한 사회 인권운동은 에드거 후버 FBI 국장 및 많은 반공주의자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거기다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밝힘으로써 중국 및 공산권의 미움도 샀다. 펄 벅은 닉슨 대통령 때 미국과 중국 간 화해 무드가 조성 될 시기 중국방문을 열렬히 희망했지만 그녀의 반공산주의적 입장표명에 불만을 가진 중국의 거부로 방문은 끝내 무산되었다.
펄 벅에 대한 세간의 인상도 말년 행보 탓에 상당히 구겨졌다. 펄 벅은 두 번째 남편 R.J.월시를 사별하고 외로움을 겪었다. 그런 그녀의 외로움을 파고 든 것은 40여 살 연하의 댄스 선생이었던 테드 해리스였다. 테드 해리스는 70대의 펄 벅을 쥐고 흔들며 그녀의 돈을 빼내 사리사욕을 채웠다. 펄 벅 재단에 들어갈 돈의 일부를 횡령하였으며 유산을 가로챌 궁리를 하였다. 늙은 펄 벅은 젊은 애인의 요사스러운 말에 눈이 멀어 그의 부정을 알면서도 그를 옹호하였다. 이것이 펄 벅 80 평생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펄 벅은 언제나 열정적이었으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앞장 섰다. 그녀는 미국의 인권과 여권운동, 매카시즘 시기의 마녀사냥 같은 민감한 주제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기꺼이 논쟁에 참여했으며, 신념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남성 평론가들은 펄 벅의 문학적 성공이 그녀의 주 독자층인 여성 독자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며 펄 벅이 과대평가된 작가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세계의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가난과 차별에 고통 받던 아동들이 그녀가 만든 펄 벅 재단의 도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펄 벅이라는 이 불세출의 작가이자 사회인권운동가의 삶을 더욱 값지게 해주고 있다.
▶1836년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의 작곡자,
작사자 루제 드 릴 사망
▶1827년 영국의 발명가
크럼프턴 사망. 뮬 정방기(精紡機) 발명
▶1810년 프랑스 기구 제작자
J.M 몽골리에 사망
▶1730년 체계적인 성운, 성단 목록을
편집한 프랑스 천문학자 메시에 출생
▶1541년 잉카제국 정복한 피사로 피살
▶1501년 남명 조식 출생
https://youtu.be/XLg4XA16r-M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