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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
여러분!
이것이 그렇게 대단한 발견으로 보입니까? 이 말을 무심코 보면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좋은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며 그저 넘어갈 수 있는 말입니다. 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감사정도는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발견입니다. 아니 대단한 발견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시인은 좋은 상황이 절대로 아닙니다. 고난, 고통의 선을 넘어서 죽음에 이르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발견이 아니라 대단한 발견입니다. 지금 시인은 죽음의 사선에서 “여호와는 내 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대단한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이라는 원어적 의미는 “여호와는 나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과 비슷한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나’(내편)와 ‘우리’(임마누엘)는 약간 다른 뉘앙스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 속에 때로는 ‘나’와 함께 하신 분이십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하나님은 내편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고백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게 된 근원은 아담(하와)이 하나님의 명령(언약)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입니다.
선악과 언약을 어긴 아담과 하와의 문제를 해결(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아를 보내주겠다는 기쁨소식, 창3:15)해 주기 위해 찾아온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며 숨었습니다.
사람에게 두려움이 생기게 된 것은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에던 동산에서는 두려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멀리하며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종종 엄습해 오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면 아마 의인에 가까운 사람일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두려움에서 이제 자유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자유함은 지식이나 군사적인 자유함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경제적이나 가정적으로 안정되어 두려움이 사라져서 자유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시인이 두려움에서 그토록 자유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내편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결코 지식이나 정치와 경제적, 사회적 상황이 호전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정치와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자유함’에는 모든 상황이 호전되었다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죽음의 고통에서 자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은 내편이시며, 부르짖는 기도의 응답으로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시인의 세 번째 고백입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시인은 죽음의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고통을 주는 세력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권력의 세력이 약한 집단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반전된 상황입니다. 그동안 고통을 받았던 약한 사람(집단)이 고통을 주었던 강한 사람(집단)에게 ‘네가 나한테 어찌할 건데’입니다.
한국적인 정서라면 이런 말입니다. 지금까지 열세에 몰렸다가 어떤 계기로 반전이 되어 ‘니가 뭔데 해볼테면 해봐’식으로 당당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시인의 상황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 적용할 만한 네 가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두려움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에 시인의 주위에 두려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이런 표현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고상한 표현입니까? 그동안 시인은 사람에게 두려움의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순간에 그 두려움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시인은 바로 두려움에 대상이었던 그 사람에게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라고 반응하고 있습니다. 생각 할수록 고상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시인과 같은 체험을 한다면, 어떻게 반응하며,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2017년도 2/3 가고 1/3 정도가 남았습니다. 2017년 남은 기간 동안 신앙적으로 좀 더 성숙해져서 말 한마디라도 달라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시인처럼 고상한 표현을 의식적으로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설사 이런 고상한 표현은 하지 못하더라도 신앙적으로는 성숙함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람의 무능함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무능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사람의 무능’이라는 말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보잘 것 없는 인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항상 자기 곁에 계시면서 지키며 돌보시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러한 두려움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은 대단하고 사람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내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 현상으로 반응을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능력은 무시하고 보이는 사람의 권력은 대단한 능력으로 생각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보이는 사람보다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능력을 위대하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2017년 남은 시간이나마 사람의 능력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선시하며 사는 한 해로 마무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은 내편이시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시인은 ‘하나님은 내 편인데,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투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됩시다’입니다. 설교 제목이 오늘 주제와 반대되며, 특히 이번 단락인 ‘사람이 내게 어찌 할꼬’라는 주제와도 맞지 않아 보아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결론에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넷째는 두려움에서 자유함을 받은 시인의 당당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이며, 실제적으로 누리는 자유입니다. 앞에서 시인은 ‘두려움에서 이제 자유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시인은 자유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두려움에서 벗어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기 두려움을 벗어났다는 것은 자유한 것이며, 또한 자유하기 때문에 이런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자유함에 대해 너무 모르거나 인색함이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너무 무거운 혹은 무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끔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행위(율법) 구원론에 대한 글들이 심상치 않게 눈에 띕니다. 그래서 은혜나 믿음의 구원론을 말하면 당장 야고보서 나온 ‘행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성구 등등 몇 구절을 근거랍시고, 은혜 구원은 마치 싸구리 구원처럼 댓글이 달립니다.
행위 구원을 주장한 사람들은 자유함에 대해 무지하거나 은혜 구원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안에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함은 결코 방종이 아닙니다. 자유와 방종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경건과 자유는 반비례가 아니라 비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유와 경건은 기차 레일과 같이 양자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레일이 벌어지면 무서운 사고로 연결되듯이, 자유와 경건이 벌어지면 방종이 되어 무서운 일들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레일이 좁아져도 동일한 사고가 되듯이 자유와 경건이 좁아지면 무거운 혹은 무서운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제부터라도 진리 안에서 진정으로 자유하며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7)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본 절은 두 가지 내용이 핵심입니다.
첫째는 시인은 하나님이 계속 내편이 되어 주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5절에서 피를 토하는 기도를 하면서 또 하나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시인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내 편, 우리 편도 됩니다.
둘째는 원수들의 보응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여기 ‘미워하는 자’는 시인을 괴롭히며 고통을 준 ‘원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람(내가)이 보응을 하면 또 다른 보응이 나에게 돌아옵니다. 사람의 보응은 다람쥐 체바퀴가 돌 듯 돕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응하면 보응으로 끝이 납니다. 내가 보복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시인처럼 눈으로 보면 됩니다.
여기 하나님의 보응은 두 가지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당할 일들에 대한 보응입니다. 세상의 두려운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보응이 들어가면 가시덤불이 금세 타서 없어진 것 같이 일순간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12).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으로서 마지막 날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24).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심판의 날까지 확대하여 해석해도 무리는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는 증거이며, 확신인 것입니다.
<결 론>
하나님은 분명 시인의 편이셨습니다. 지금 시인의 상황은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부르짖는 기도 중에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움에서 자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 내용입니다.
시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내 편’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시인과 반대되는 표현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실수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아닙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항상 내(우리) 편이십니다.” 그러나 나는(우리는) 하나님의 편이 되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내(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자’는 의미에서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자”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편, 나의 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편이 되지 않으려고 멀리멀리 떠나고 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자.”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아니라면 세상의 편이 아니겠습니까? 돈에 집착하면 돈 편이 되는 것이며, 정치에 몰두에 있으면 권력이 우리의 편일 것이며,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관심 갖고 사랑하면 자녀의 편이라는 보편적인 정도를 넘어 자녀가 나의 우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히 고민거리가 된다며 지인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25개월 전에 손녀를 보았고, 백일 전에는 손자를 봤습니다. 예쁨을 넘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여기서 도를 조금 넘으면 하나님보다 손녀와 손자를 더 사랑할 것만 같아 고민이 된다고 했더니, 지인이 만약에 이선교사가 손녀와 손자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다면 다시 선교현장으로 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정말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지인의 위로로 한 숨을 돌릴 수 있었으나 여러분은 혹시 어떤 것 때문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편이 되어 저처럼 고민한 부분은 없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으면서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우리)편이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핵심이라면, 이제 ‘내(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자’ 이것은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를 다른 때보다 정신 차리고 잘 들었습니까?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오늘 설교가 시인과 반대되는 개념이어서 여러분의 영혼을 망치는 설교인지 아닌지를 잘 들으셨습니까? 저는 오늘 작정하고 설교를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이상한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설교는 항상 잘 들어야 하는데 오늘 설교는 특별히 잘 들어야 할 이유입니다. 이 정도면 다른 때보다 설교를 잘 들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실수를 순간적으로 넘기려는 꼼수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실수를 방어하려는 지혜나 재치는 더욱더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제자 여러분!
오늘 설교가 비록 시인과 반대되기는 하지만, 여러분의 영혼을 망치는 설교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항상 내(우리) 편이시니 이제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됩시다.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의 일화를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날 미합중국(미국공식명칭)은 예수를 믿는 청교도들의 의해 세워졌습니다. 현대교회의 추수감사절로도 이를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백인 우월주의이어서 흑인 노예제도가 성행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가슴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흑인들을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를 허용한 사람이 바로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입니다. 비록 많은 세월이 흘렸지만 그 여파로 미국의 43-44대(2009-2017)버락 오바마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새로운 역사 중에 하나입니다.
링컨이 대통령이었지만 대통령의 권력으로 노예를 해방시키기는 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북부군과 남부군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위 미국의 남북전쟁입니다.
링컨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정부(북부)군을 이끌고 전쟁을 하였습니다. 북부군이 밀리고 있을 때 링컨 대통령이 참모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많은 참모들이 링컨 각하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이때 링컨 대통령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편이다. 그러니 우리(모든 군대)가 하나님의 편이 되자고 기도를 역제안 하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정부군이 승리하도록 역사해 주셔서 노예들이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많은 역사는 흘렸지만 흑인인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실상은 저도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설교를 준비하면서 링컨 대통령의 일화가 생각이 나서 설교 제목의 힌트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다짐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시니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자” |
첫댓글 귀한 말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