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6월 8일, 미 공군 폭격기가 독도 주변에서 폭격 연습을 실시하여 조업 중이던 우리 어민들이 대거 목숨을 잃거나 다친 '독도 폭격 사건(독도 오폭 사건)'이 실제 발생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미군정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주요 경과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건 경과 및 피해
◇사건 발생:
▪︎1948년 6월 8일 낮 12시경, 오키나와 등에서 출격한 미 극동공군 제5공군 소속 B-29 폭격기군 및 정찰기가 독도 상공에 진입하여 폭탄(454kg) 수십 개를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했습니다.
◇당시 상황:
▪︎독도 인근 해상에는 미역 채취와 어로 작업을 위해 강원도, 경상도 등지에서 출항한 어선 30~80여 척과 수많은 어민이 조업 중이었습니다.
◇피해 규모:
▪︎당시 언론 및 미군 기록상으로는 어선 11척 파괴, 사망자 14~16명 수준으로 보도 및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생존자와 유가족의 증언 및 조사에 따르면 어선 수십 척이 파손되고 사상자가 최소 100~150여 명에 이르는 대형 참사였습니다.
(해방이 얼마되지않아, 식민지 모습의 우리 어민을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여기고, 죽이는 연습을 실시했던 것.)
2. 미군 및 당국의 대응
◇미군의 해명:
▪︎사건 발생 후 미군 당국은 폭격 연습을 실시한 사실을 인정하며, 독도를 무인도나 바위로 착각하고 어민들의 조업 사실을 알지 못한 '불행한 유감스러운 사고(오폭)'라고 발표했습니다.
♡배상 문제:
▪︎미군은 소청위원회를 구성하여 피해 조사를 실시하고 유가족 및 부상자에게 일정 배상금을 지급하였으나,
▪︎배상 액수가 당시 돼지 1마리 값(약 300~500환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형편없어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기록적 의미:
▪︎당시 미국 극동공군사령부(FEAF)의 보고서에는 "1947년, 이미 독도가 한국의 일부(a part of Korea)임이 명백히 확립되었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어,
▪︎미군 당국 역시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조난 사고나 미제 사건처럼 묻혀 있다가, 1990년대 이후 생존자 증언과 연구를 통해 진상이 조명되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매년 6월 8일 독도와 울릉도 등에서 희생자 추모 위령제가 열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