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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반갑습니다. 네. 그럼 이제 지난번에 이어서 그
바이런KT
사십 일 장 부분 계속 보겠습니다.
아 나는 마음이 원하는 모습을 사랑합니다. 나는 마음의 변화를 지켜보며 한결같이 그 기쁨 안에 있습니다.
나는 그 기분 좋은 움직임은 마음이 변하는 맛을 사랑합니다.
나는 마음이 움직일 때 움직입니다.
티끌만큼의 저항도 없이 마음은 바람처럼 방향이 바뀝니다.
나는 예라고 말합니다.
아니오라고 말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쉽게 그런데 아니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니오는 예처럼 노력이 들지 않습니다.
나는 나에게 진실하다고 아는 것만을 말합니다.
아 때때로 사람들은 이 말을 혼동하고 오해하지만
그 역시 그들이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했는데요.
아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우리 마음이 아 분별 망상이 하루에 또 어 수십 번씩 움직이잖아요. 좋았다가 나빴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그리고
불교에서는 항상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죽끓 듯이 오락가락하는
이 분별 망상 생각 분별 그것을 그것이 문제다.
그게 모든 게 괴로움 苦의 원인이다.
그건 없애야 된다. 그렇게 말을 하죠.
그러다. 보면 사람들은 맞다. 내 생각이 문제다. 생각이 나를 괴롭히고 있구나
그래서 이 생각을 없애야 된다.
그래서 이 생각하는 내가
너무 싫고 생각하는 나를
어떻게든 없애버리고 싶거나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그 생각에게 막 화도 내고
너 왜 자꾸 올라오니?
이런 생각은 내가 싫어하니까
오지 마
저는 생각은 내가 좋아하는 생각이니까
더 많이와 하면서 어
올라오는 생각에 대해서 취사 간택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바이런케이트는 오히려 이랬어요.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모습을 사랑한다. 때로는 예라고 하고 때로는 아니오라고 하는 데 있어서. 음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않는다.
이 뭐가 다른 걸까요? 아
우리가 깨닫는다고 해서 생각이 올라오지 않아야 되느냐?
분별이 끊긴다.
무분별심이라고 해서
분별이 아예 다 없어지는 것이냐?
그게 아닙니다
분별은 그대로 있죠.
그러나 분별의 아 진실이 무엇인지?
를 바로 보는 거죠.
그래서 생각을 끊임없이 일으킨다.
할지라도 그 생각에 끌려가지 않는 거고
그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아는 거고
그 생각이라는 것은 분별 망상이라는 것
그죠?
여기서 눈앞에서 이 한바탕인 이
한마음 위에 바다 위의 파도처럼 그저 왔다 가는
허망한 생각인 줄
아는 거예요.
그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바다 위에 파도가 치는데 뭐가 문제가 되나요?
파도가 그대로 바다하잖아요.
생각은 일으켜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 생각에 끌려다니면서
그 생각을 진실하다고 믿으면서
허망한 생각을 진실한 생각으로 착각해서
그 생각을 믿는
그게 원칙인 거죠?
근데 생각의 진실에 눈을 뜨면
생각을 믿지는 않는단 말이죠?
생각을 마음껏 현실에서 활용은 하되
생각은 활용 안 하면서 살지 않을 수가 없어요.
밥 먹을 때 뭘 먹을까? 하는 것도 생각이고
모든 게 다. 생각이란 말이에요.
내 현실 세계를 사는 데 있어서는
생각을 쓰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생각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 진실에 눈을 뜨게 되면
생각을 가지고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단 말이에요.
번뇌煩惱 즉卽 보리菩堤이라는 말이 있어요.
번뇌가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이 그대로 보리 깨달음이란 말이죠.
생각의 진실을 바로 본다면 생각은 마음껏 활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그 생각을 사랑하게 되죠.
그러니까 그 생각이 바로 생각이 일어나는 거기에서 바로 법이 있으니까
자기 본 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여기서 그냥 바로 찍혀서 법이 확인된단 말이죠
그럼 생각은 더 이상 생각이 아니라
이 법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나 생각을 생각인 줄 알아서
생각에 끌려다니면
그때부터 우리는 생각에 끌려다니는
어리석은 중생으로
분별이 끌려다니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는 거죠.
그때 괴로워지는 거예요.
왜 이렇게 자꾸 생각을 문제 삼느냐?
아 이 세상이 여러분이 지금 내가 나라는 사람이
이 대한민국 이라는 세상에 태어나서
몇 살을 이렇게 몇 년을 살았고
학교로
이러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서
요러한 형제들과 함께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어떤 직장을 다니면서
이렇게 내가 살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집을 나와서 아침에 아
저리 가야지 하고 생각한 다음에.
차를 운전해서
여기 절에 와서
지금 절에 앉아 있다.
이게 전부 다 허상이란 말
전부 다. 생각이란 말이죠
우리는 진짜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근데 그게 다. 생각이에요. 생각
차 위에 이렇게 앉아서
여러분 페달을 밟고 있을 때
여러분은 마음속에서 내가 지금
상주 대원정사를 가는 중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오잖아요.
근데 거기 그 페달을 밟고 있는 그 순간 순간에
상주 대원정사가 있을까요?
거기에서 내가 차를 운전하고 있는 걸까요?
여러분이 매일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청소를 하고 아
밥을 먹고 할 때
내가 밥을 먹을 때
음식을 아까
이제 점심을 드셨을 것인데
밥을 먹는다면
나는 지금 밥을 먹고 있다.
혹은 나는 뭐 뭐 얼마짜리 밥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또 싫어하는 음식을
또 맛집에 와서 먹거나
맛집이 아닌 곳에서 먹거나
뭐 이러고 있다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어. 예를 들어 뭐
한 몇십만 원짜리 비싼 그
그 누가 그러대요
우리나라에 무슨 한 명이 있는
유명한 셰프가 있는데
그 사람이 하는 식당이 있대요.
그래서 우리나라 1명밖에 없는 1명밖에 없대요. 거기는 그 그 집은 얼마나 대단한 집은
거기 한 끼 먹는데 한
40만원
그러면 내가 이제 40만원 주고
그 식당 가서
거기서 준 음식을 먹어요
. 그럼 그 여러분이 굳이 안 가도 되는 게
그게 생각이에요.
거기서 뭐 이제 이래 저래 막 코스 요리가 나올 거 아니겠어요?
막 참 비싼 어디서 찾기도 힘든 식재료 가지고. 어마 어마한 요리가 나오겠지만
그게 또 어마어마한 요리일까요?
요리 들어 저희 예를 들어.
아버님
얼마인지 얘기 안 하고
아버님에게 그 음식을 이렇게 드린다 하면
짜증을 내지 않으실까?
우선 양도 작고 뭐
이렇게 겉멋을 갖다 붙였네. 하고 뭐
요만한 거에다가 뭐 희한한 거 갖다 치고 막
이럴 거 아니겠어요?
그거를 우리가 먹을 때
생각을 먹고 있는 거죠.
사실은 생각으로와
내가 이런 비싼 집에서. 아,
이런 나도 성공했다.
이런 데서 이렇게 비싼 음식을 대접받으면서
이렇게 내가 먹는구나
이런 어떤 기분으로 그게 좋은 거겠죠?
근데 실제 음식 하나 하나가 먹으면
그 음식이 그렇게 어마무시하게 몸에 좋을까요?
넌 기분으로 좋겠죠?.
그냥 또 그 음식이 어마무시하게 엄청난 그
그 값어치라는 게 어디서 나오냔 말이에요?
값어치가 값어치가 자기 생각에서 나오잖아요?
실제 여러분이 이제 그 음식을 입에 넣고 이렇게 씹고 있어요.
그 음식을 이래 넣고 씹고 있을 때
그건 40만원 짜리일까요?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씻고 있는 중이지 않을까요?
그냥 이렇게 씻고 있는 거기서
생각을 생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지 않으면
그냥 이것이 좋은 줄 나쁜 줄 판단하지 않으면
사실은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이 좋다. 나쁘다
이렇다. 저렇다라고 하는
판단 그게 어떻게 그 생각으로 덮어 씌우는 거거든요.
입에 너무 입에 막 달고 맛있는 음식 있잖아요.
근데 그 음식을 먹을 때
어떤 사람은 되게 싫어할 수도 있어요?
왜냐면 분명히 입에는 맛있어요. 입에는
너무 달고 이렇게 맛있는 거 첨봤다 싶을만큼 맛있는데
어 그 일단 먹어보면 아
이게 그냥 완전 설탕으로 뭐 범벅을 했구나
그러니까 맛이 없을 수가 없지?
싶은 맛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
맛을 예를 들어
떡볶이를 한다 했을 때
떡볶이 맛을 내는 방법은 있죠.
설탕을 잔뜩 넣거나
저희 예전에 보면 저희 그 아버님이 집에서
만두를 한 번씩 해주시는데
만두가 집에서 먹는 만두가 제일 맛있어.
했거든요.
그 나중에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이렇게 만드는 모습을 한 번씩 본 적이 있었어요
아마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하긴 좀 그렇고 뭐
그냥 뭐 그냥 갖다 때려 넣었는데
라면 부스레기를 갖다가 막 안에다 속에다 넣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제 라면의 그 만두의 맛의 핵심은 간장이 있었거 든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간장에다가 뭐 저런 짓까지 해야 되지 붙여서 맛이 없을 수 없는 그거를 막 잔뜩 갖다가 넣구요.
뭐 요리에다가 뭐
옛날에 우리 보면 뉴스가 뭐 이거 있잖아요?
엄청 달게 만드는 슈가 막 그런 거 또 뭐 갖다가
막 만두 속 한 대로 드시고
간장이 너무 맛있었는데
가만히 그 맛있었던 그 간장의 실체를 보니까
나는 할 수 있어도 안 하겠다.
이 하나 안 먹고 말지 쉽더란 말이죠?
그 옛날에 이런 얘기도 하면
아버지 어머니가 기분 안 좋으실 거 아니에요. 그래서 어느 날인가
제가 이렇게 슬쩍 이렇게 책을 한 권 이거
제가 되게 감동받은 책인데 어? 이거
이제 어머니 아버지가 몸이 조금씩 조금씩 아파지시고
나이도 드시면서 여기저기 힘들죠?
또 하고 뭐 먹고 나도 깨운하지도 않고 이렇지 않아요. 그랬더니 어.
어떻게 알았냐?
고 다 그렇거든요.
나이가 들면 몸이 좀 안 좋잖아요. 그래서 그게 먹는 것 때문에 그런 먹는 거를 요.
책을 한번 읽어보셔라 이러고 갖다 드렸더니 뭐
그 책을 읽고 나서는 이제 그 다음부터.
안 좋은 음식 이런 것들을 그때 하시고서는 하나하나 이제 갖다 버리도 되더라고요.
안 좋은 이런 뭐 안 좋은 이런 것들을
근데 보세요.
그렇게 입에 엄청나게 맛있어요.
그럼 그게 맛있다라는 생각이잖아요.
근데 그걸 아는 사람은 그걸 먹으면서도
알음알이가 바뀌었으니까
입에 맛있어도
이게 맛있다. 이렇게
해석되지 않고 아 또 이상한 짓을 했구나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지.
맛집이라고 하는 곳이
우리 해석이 맛집이에요.
우리 판단이 맛집이고
그냥 집에서 고구마 입에 한 입
고구마 그냥 뻑뻑한데
빨리 먹으려고 막 하면
고구마 맛이 없어요.
기침하고 들썩이면 근데
그냥 요만큼 쬐끔만 입에 문 다음에
오래오래 씹으면 그 아주 맛있잖아요.
모든 음식이 모든 식자재 하나하나가
그 고유의 맛을 느끼게 되면
그 나름의 그 맛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보세요.
거기다 뭔 짓을 한 그
유위조작이라 그래요.
가공하고 뭔 짓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입은 맛있다고 하겠지만
그게 정말 맛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전부 다 생각이에요.
그리고 어떤 음식을 먹을 때도 이게 이게? 에사무사 하는데 사람들한테 어?
이거 유명한 셰프가 한 음식을 가져왔다. 그러면
괜히 맛있게 느껴지?
그리고 또 이렇게 제가 뭐 이래저래 있으면
전국 각지에서 이런 많은 분들이 오시면
그 동네에 뭐 이용하고 샀다리면서
이렇게 오면서 샀다 하면서
이렇게 주기도 하세요.
그러면 어마무시하게 유명한 집이라곤 하는데
이걸 줄 서서 먹는다곤 하는데 여기 뭐지?
대전 도가 그 군산 동으로 가면 뭐
유명한 빵집 같은 거 있잖아요.
제가 그쪽에 우리 예하부대 있고 해가지고
가서 그. 그 군산에 있는 그 빵집도 가봤고 유명한 빵집의 빵들을 좀 몇 개 먹어봤어요.
어 맛있죠.
근데 음 막 그렇게 막 소름 끼치게 맛있다. 뭐 이런 거는 뭐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빵이 다 빵이지
뭐 이런 느낌이죠?
그런데 이게 제가 이 빵들이 이제 어떠세요? 하고 이렇게 나눠드리면
다들 반갑다. 그냥 드신단 말이에
그런데 이제 나눠 드릴 때
이 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누가 어디에서 몇 시간을 줄을 서가지고
구하기 힘든 빵이고
오전에 끝나는 빵이라고
얘기를 하면서 드리면
되게 맛있게 드셔요.
다들 크 진짜 막 감동을 하면서 그
다. 생각이잖아요.
그러니까 말 한마디를 하면 그
말 한마디 이런 빵입니다라고 말을 할 때
벌써 그 말에서 개념이 의미가 입혀지는 거예요.
그 음식은 음식 있는 그대로 보* 못하는 거죠?
그럼 어떻게 먹는 게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음식 맛을 보는 걸까요?
생각해서 판단이 그런 모든 것들이 들어가지 않으면 어떨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거 좋다거나 나쁘다는 판단
맛있다거나 맛없다는 판단이
정말 진실한 거였을까요?
또 우리나라에 예를 들어 뭐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 뭐
미슐랭 이래 가지고 이렇게 딱 그 사람은
이 사람은 대표 셰프야 하면
그 사람이 정말 우리나라에서 가장 음식을 맛있게 하는 사람인 건지.
또 아니면 가장 영향 있게 만드는 사람인 건지.
그건 그냥 사람이 분별로 만들어 놓은
기준이죠.
그거를 다 우리는 어쩌면 그분들이 해주는 음식보다. 옛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가 해줬던 음식이 더욱더 맛있을 수도 있죠.
제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
그 앞에 가서 뭐
부모님한테 이게 뭐 뭐 어쩌고 이러지 않는단 말이죠?
그거 맛있게 먹죠. 즉
가만히 보세요.
내가 맛있다. 맛없다 하는 것이
생각이에요. 이거를 이제 아 그렇군요 하고 이렇게 이게 제가 하는 말을 듣고
믿으란 얘기가 아니에요.
이런 말을 들으면 여러분들은 이제 우리 법문은요.
어 부처님이 열반을 하실 때
자등명 법 등명을 말하셨잖아요.
법 등명 법을 들으면 법문을 들으면.
그러니까 자등명해야 돼요.
자기에게서 정말 그러한가?
자기에게로 가서 불교는
불교의 말하는 깨달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체득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잖아요.
모든 본문을 들으면 듣고 나서 머리로 이해하면 끝이에요.
끝난단 말이죠?
그렇게 하는 거는 내 것이 되지 않아요.
법문을 듣고 나면
이제 나에게 정말 그러한지
자기에게서 확인해야 돼요.
자체에서 그것이 채득돼야 되고
증언돼야 되고
스스로 정말이네 하고
내가 온몸으로 내 온 존재로
그냥 그걸 확인을 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평소에는 여러분 50년 60년 이상을 밥을 먹고 살았는데
밥을 안 먹어요.
우리는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아
생각을 먹으면서
50년 60년 내내
거의 한 번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밥과 함께 존재하지 못하고
밥을 제대로 먹지 않은 채
항상 생각 속에서 음식을 그냥
이렇게 쑤셔 넣었구나
자기 생각을 경험해요.
밥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음식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을 경험해요.
그 음식의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
그 의미를 먹고
이 단순한 밥을 먹는다라는
단순한 사건 있잖아요.
이 맨날 늘 일어나는
아무 것도 아닌 일
이 아무것도 아닌 일
요거 하나 요거 하나에서 깨어나면
오 번 천지에서 깨어나는 거예요. 뭐
엄청난 수행을 하고 뭐
신묘장구대다라니 를 절에 가서 외워야지만
진실을 터득하는 게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순간이 그냥 법이란 말이에요.
법이 드러나 있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법을 보지 않고
자기 분별 보니까 속는 거예요.
그럼 이렇게 말을 하면 아 음식을 먹는다라니. 아무것도 아닌
심심하고 평범한 이 하나의 심심한 일
이것이 이 음식을 먹으면서
내가 선빵이 될 수 있고
업무를 드는 순간이 될 수 있고
깨어날 수 있단
이 될 수 있단 말이죠?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러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왜 제가 자식 눈을 가지고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라고 하느냐
그러니까 여러분을 뭐 무시하거나
이러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번 보세요.
정말 제가 한 말이 진짜인 거 아닌가
그래서 한 번이라도 홀로 남들과 대화하지 않고
혼자 밥 먹을 수 있는 시간에
그냥 오롯이 온전히 생각으로
그 음식을
덮어씌우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냥 그냥
아무 생각해서 판단하지 않고 그냥
먹어 보란 말이죠?
그러면 사실은 먹는 것조차 아니에요.
우리 먹을 때 음식이 입에 들어온다
씹는다.
이빨로 음식을 씹는다.
무슨 맛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잖아요.
근데 온전히 거기 있게 되면
음식을 먹는다는게 다 분별이잖아요.
이게 음식이다
이게 뭐 맛있는 거다
맛없는 거다
이거 다 생각분별이잖아요.
분별 없이 그냥 씹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씹을 때
실제라는 건
내가 이빨로
나는 그냥 이 음식이 뭔지 몰라
무분별 뭔지 몰라
난 그냥 씹을 뿐이야.
이러면 이제 자신은 씹을 뿐
온전히 깨어 있었다 하고
나는 씹을 뿐 이런단 말이죠.
그건 진짜 씹을 뿐이니.
씹는 거 분별하냐
씹는다. 이것도 분별 아니에요?
내가 이빨로 뭔가 싶고 느끼고 어.
그냥 그런 것 그런 모든 생각에서
판단 다 내려놓고
그냥 있으면 내 몸은 몸은 아
이 세상 모든 것은요?
인연 따라 인연이 화합하면 저절로 작용하거든요. 바람이 불어오면 낙엽은 떨어져요?
그런데 여름에 낙엽은 안 떨어져요.
그런데 가을이 돼 버리면 그래서
인연이 이 낙엽이 단풍이 들어서 이제 떨어질
시절 인연이와 버리면.
여름에는 아무리 센 바람이어도 안 떨어지던 그 낙엽들이
인연이 탁 맞아버리면 그때
바람이 불면 그러니까 낙엽이 뚝 떨어진단 말이죠.
작용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인연 따라 그러는 거예요?
그냥 낙엽은 원래 인연이 그렇게 맞으면 떨어지는 거예요.
입은 내가 입으로 밥을 먹는다. 이거 생각이에요. 전부 다.
이 몸뚱아리가 나라서 내가 오늘 점심을 뭐 먹고 저녁을 뭐 먹고 밥을 먹었고, 뭐 잘 씹어 먹을까 씹어 먹었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이게 내가 아니고 얘는 뭐와 같으냐 하면 인연이 인연이 그냥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인연 따라 낙엽이 바람 불어도 안 떨어지든 낙엽이 인연이 되니까 똑 떨어지듯이 또 단풍이 안 들던 낙엽이 가을이 되니까 저절로 색깔이 물들듯이
저 짐승들이 배가 고프면 여기저기 나와서 사냥을 하듯이,
구름은 시절 인연이 오면 저절로 구름이 맺혔다가 뒤로도 내렸다가
또 인연이 따르게 맞히면 우박으로도 내렸다가 눈으로도 내리잖아요.
그 누가 주체 주재자가 있어서 그렇게 하나요?
나 오늘은 비를 뿌려 볼까? 오늘은 우박을 좀 뿌려 볼까 뭐 이렇게? 특별한 주제자가 있어서 그것을 행할까요?
인연이 그냥 저절로 그렇게 하는 거잖아요?
거기 주체 자아가 없어요.
비가 수증기가 됐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또 비로 떨어지고 하면 그 실체적 주체가 있어가지고 그 주체가 윤회하면서 나 수증기로
윤회했어.
나는 구름으로 윤회했어? 나는 비로 윤회했어? 이러면서 살까요.
비가 구름에 있는 애들이 모여가지고 야 다음 생에 너희는 뭐가 될래? 난 우박이 될 거야. 나는 눈이 될거야. 이러고 있을까요? 그러한
자아가 없잖아요.
그러한 자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인연 따라 저절로. 수준 끊임없이
제행무상
무상하게 흐를 뿐이지요.
비가 됐다. 구름이 되었다가 강의 됐다가 사람 몸에 들어가 피가 되었다가 바다가 되었다가 또 수증기가 되었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거기 주체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마땅히 한단 말이에요.
이 몸뚱아리는 목이 마르는 인연을 만나면
하늘이 건조한 인연을 만나면 또 특정한
인연을 만나면 비를 뿌리듯이
이 몸통알이도 똑같아요.
목마르다라는 인연을 만나면 얘는 저절로 어디 가서 자꾸 물을 찾아요.
얘가 내가 물을 먹는 게 아니에요.
내가 물을 먹는 게 아니고 얘가 지가 물을 먹어야 될 인연을 탁 만나면
어떻게 가는지도 몰라요. 저절로 自在
여러분 목마른지 귀신같이 알잖아요?
알고 나면 얘가 지가 알아서 물을 찾지 않아요.
얘가 배가 고프면 제가 알아서 음식을 찾아요.
그리고 이런 밥 먹을 때 신기하게 귀신 같이
여러분 어떨 땐 밥 먹고 싶고
어떨 때는 담백한 거 먹고 싶고
어떨 땐 빵 먹고 싶고
어떨 땐 커피 먹고 싶고
어떨 땐 느끼한 거 먹고 싶고
어떨 땐 뭐? 짜고 매운 것도 먹고 싶다가
뜨거운 국물도 먹고 싶다가
여러분이 다 그 일정을 짜나요?
음식, 뭐 들어갈지를
일주일 뒤에 점심때 뭐 먹을지?
지금 알 수 있을까요?
몰라요.
모르는데
그 계획 안 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버려두면
얘가 알아서 지가 알아서 하잖아요.
그럼 이제 친구들 모여가지고 야 우리 뭐 먹으러 갈까?
이렇게 물어봐요.
너 뭐 먹고 싶어요 물어봐요?
그러면 내가 이 일정을 짜는 것도 없잖아요.
내가 계획한 게 없잖아요.
난 반드시 이걸 먹을 가야 말까
계획한 게 없는데 뭐 먹고 싶어라고 물어보면
우리는 누구나 잠깐 어디 가서 본다? 보고 와가지고 어. 나 짜장면 먹고 싶어. 나 매운 거 먹고 싶어. 이렇게 바로바로 얘기를 하죠.
뭘 보고 그렇게 얘기한 거죠?
자동으로 알아요.
이렇게 얘는요?
내가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저절로 얘를 굴리고 있어요.
인연생 인연멸
연기緣起즉卽무아 無我
이러잖아요.
무아
나라는 고정된 실체적 자아는 없어요.
그냥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는 중인 거예요.
얘도 바람이 불었다. 안 불었다 하듯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왔다 갔다 하듯이
얘도 이 물 덩어리도 왔다갔다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거예요. 지수 화풍이 나 들락날락 거리고 있단 말이에요.
인연 따라 거긴 고정된 자아라는 나가 없어요.
근데 내가 반복되는 경향성을 보고서는 나의 어떤 주체인 걸로 실체인 걸로
가짜 나를 만들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게 나라고 우겼을 뿐이에요. 이렇게 내년 따라 작용하는 거예요. 그냥 인연을 만나면 적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밥을 먹어가 아니구요. 얘는 밥 먹을 때가 되면 밥을 찾아요. 먹을 걸 찾아요. 그러면서 업습에 따라서 옛날에 어릴 때부터 숟갈로 이렇게 밥을 퍼먹는 습관이 있잖아요. 그럼 그 업습의 문화적 배경에서 자랐으면 그 인연 따라 숟갈로 밥을 퍼먹어요. 네팔 같은 데서는 그 밥 먹고 싶은 인연이 있으면 칼에다가 밥을 손으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가지고. 왼손으로 이렇게 이렇게 해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묶는단 말이죠? 손으로 이렇게 묻혀서 근데 더럽다는 생각을 안 해요. 그게 없음이니까요. 그 몸뚱아리는 그렇게 습관이 굳어져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절로 음식을 찾죠? 그런 음식이 여기 들어가잖아요? 입에 들어가면 저주 입은 이 입과 치아는 저절로 씹는 작용을 막 하지 않아요? 내가 씹어요? 그럼 막 넣는 것도 지가 알아서 넣고 씹는 것도 지가 알아 씹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지가 알아서 씻을 뿐만 씹을 뿐만이 아니라 침이 자기 혼자 알아서 나와 가지고. 알아서 섞이고 절묘한 때를 만나면 지가 알아서 또 꿀꺽 넘키고 곡을 넘기고 나면 알아서 소화가 되고 알아서 또 저 밑에까지 내려가고 골고루 온몸으로 갖다 보내고 그러다가 목이 마르면 또 물을 먹고 배가 부르면 언제쯤 배가 부는지 희한하게 또 기가 막히게 앓아 가지고는 그 위를 들어가 본 적도 없잖아요. 이거 얼만큼 찼는지를 모르는 것 같잖아요. 모르는 것 같은데 희한하게 또 계신 같이 알아요. 그럼 또 멈출 때 멈추고 내가 하는거 맞나요? 저절로 일어나고 있잖아요. 완전히 저절로 아니에요? 전자동화 아니에요. 내가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씹는다. 이것도 분별이에요. 신문다도 분별해요. 그냥 인연 따라 일어나고 있을 뿐이에요. 뭔가가 이렇게 알아차례질 뿐이지요. 이 깨어있는 하나의 상품이 이브 로면은 씹고 코 오면 냄새 맡고 눈으로면 보고 나라는 감촉을 느끼고 그 모든 것들을 그냥 비추고 있을 뿐이란 말이야. 깨어있는 이야 마음 하나가 그 모든 것을 이렇게. 이렇게 비추고 이렇게 할 뿐이에요. 거기서 한 번 굴러가지고 분별이 탁 걸려버리면 그게 이제 내가 밥을 먹는다가 돼 버려요. 내가 좋은 음식을 먹는다 나쁜 음식을 먹는다. 나는 가난해서 맨날 안 좋은 음식만 먹고 산다. 인생이 비참하다. 이런 식으로 초단 아프다 옳다 그르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해석 속으로 들어가서 그런데 그 해석을 빼면 해석은 좋거나 나쁘거나 옳거나 그러거나 맞거나 틀리거나 하는 분별로 모든 것을 비교분별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 해석된 비교분별은 진실하지 않아요. 그럼 진실한 거는 뭐 뭘까요? 우리 모든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모든 삶의 경험 속에서 진실한 것은 전부 다 이름뿐이에요. 내가 밥을 심는다. 내가 이름이죠? 밥을 밥 밥이라는 씹을 밥 밥알을 씹고 있을 때 내가 밥을 먹고 있다. 밥을 씹고 있다라는 생각이 일어나잖아요. 근데 바발을 씻고 있을 때 그게 바바 이름이 없으면 해석 판단 분별이 없으면 그냥 그 경험이 일어날 뿐이에요. 그냥 씹는 이 소리가 들릴 때 딱 한 번 글로 가서 좀 이 소리가 들리고 난 다음에 잠깐 있다가 아 이러면은 벌써 두 번째 자리 떨어진 거죠. 점수를 듣고 나서 정수리되는 해석이 따라붙는단 말이에요. 틈이 없이 일 초도 앞뒤가 없이 이걸 뭐 무슨 듣기 이전 듣기 이후 이런 생각도 없이 그냥 그냥 걷자 고창 일어나고 있는 이 딱 찍혀있는 이거 이거는 애쓰지 않잖아요. 우리가 애쓰는게 아니잖아요. 전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늘어나잖아요. 저절로 깨어 있잖아요. 저절로 이렇게 알잖아요? 요게 마음이죠. 근데 이 이 영 점 영영영일 초라도 움직여 버리면 생각이 확 돌아버리면 그것은 분별심이죠 그러니까 딱 이것뿐인 거예요. 진실은 내가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는다. 이건 다 생각이고 이름이잖아요. 이름 이름으로 개념으로 해석된 거잖아요. 모든 것에서 이름을 빼면 그냥 씻고 있는 이 경험이에요. 이건 씹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볼 때는 보는 이 경험이고 들을 땐 듣는 경험이고. 그걸 듣는 경험이니 보는 경험이니 뭐 즉 가니 어쩌니 이것도 다 말이잖아요. 다 틀린 거예요. 그 또 그냥 이거죠.
소리가 들릴 때 이게 없는데 소리를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이거예요. 이거 소리와 상관없는 모양과 상관없는 이 이 마음이 이 마음의 모든 것의 간원이죠. 그럼 볼 때 어디서 봐요 여기서 보잖아요. 들을 때 어디서 들어요. 어딘진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여기라고 한 거예요? 눈앞이라고 한 거예요. 어딘지 뭐 그걸 찾으면 안 돼요. 아니 찾을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이렇게 있는데 있음 됐지? 위치를 찾을 필요가 있어요? 위치를 찾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젖어도 있잖아요. 이것이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죠 그죠? 우린 일어날 때 일어난 줄 알고 사라질 때 사라진 줄 알죠. 그죠? 이거 이거보다 먼저 이 마음이 있으니까. 이 마음이 종소리가 안 들리는 줄 알고 들리는 줄 알고. 파는 거 바탕 바탕해 배경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그 늘 살아있는 이 깨어있는 이 마음이 있단 말이에요. 여기에서 보고 여기서 듣고 여기서 냄새 날 때 나가 냄새를 맡아요. 코가 맡아요. 밥 보고 감성 느끼고 생각하고 그 모든 그것이 일어날 때 그 여기서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질 뿐이잖아요. 균형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이 년에 맞춰서 눈으로 가면 보는 걸로 늘어나고 귀로 가면 듣는 걸로 늘어나고. 코에 가면 냄새 맡는 걸로 드러나지만 그 하나가 그렇게 한단 말이에요. 하나가 다. 여기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모든 경험이 일어나는 그 출처 그게 있잖아요. 어딨는지는 몰라도 이거 마음 하나죠. 이 마음 하나 진실한 것은 이 마음 하나죠. 이마비 내 몸 안에만 있어요? 메모 안에서 내가 배고픈지 안 고픈지도 알고 저기 바깥에 천둥이 치는지 안 치는지도 알고 그런데 아는 마음이 어디 따로 있어요? 천둥 번개로 뻥 칠 때 꽝꽝 하는 소리가 들리고 번쩍할 때 츠케 있지 따로 있냔 말이야. 굿 반짝하는 게 그게 마음이죠. 트럼프기 나무 한 그루가 전부 마음이죠. 또는 무엇을 경험하든 어떤 소리를 듣든 거기서 자기가 확인되죠? 이 끼어 있으면 확인되잖아요. 이 살아 있으면 된단 말이에요. 몸과 마음을 확인하는 건 이거는 네 해서 곰별이지요. 그럼 여기서도 확인되죠. 근데 그 생각을 돌로 구분하는 그 생각을 내려놓으면. 이 살아있는 이 마음 하나 요것만이 진실하단 말이에요. 그러니 이 자리에 딱 끌어내리고 있으면 아프고 아프지 않은 게 똑같죠? 잘 나고 못난게 똑같죠? 생각하고 생각없는 게 똑같죠? 성공하고 실패하는 게 똑같죠? 젊은 거 늙은 게 똑같죠. 부자와 가난이 똑같죠. 이거 다. 여기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나오는 모양이란 말이 모양 모양 따라가지 않으면 언제나 한결같은 이 이 마음 하나죠. 이게 진짜 자기란 말이에요. 이 이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찾을 필요가 없는 우리 모두가 다. 100 프로 갖추고 있는 부족하고 있는 이게 부처예요. 그런데 우리가 모두 부처지 어떻게 부처가 아닐 수가 있어요? 아닐 재간이 있습니까? 부처가 아닐 수가 있어요. 근데 아닐 때는 왜 부처가 아닌 것 같아요. 부처가 아니라고 착각할 수는 있죠. 어떨 때요? 생각 따라갈 때 생각이 만들어 이 가상현실. 아 이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곳이야. 대한민국 중 여기는 상주라는 곳이야. 여기 어디 상주가 있어요 찾아보세요 뭘 보고 상주라 그래요 여기에서 상주 비슷한 걸 찾아보세요? 여기서 저 나무가 상준가요? 호수가 상준가요 및 기둥이 상주인가요? 뭐가 상주예요? 이런 뿐이죠.
그 이름을 빼면 그냥 이 살아있는 깨어있는 이 마음 하나 경험 하나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 여기서 보면 변하는 모습 그 사랑하지 않을 일이 없죠. 변하는 모습이 그 모든 것이 진실인데요. 마음이 움직이는 것 그거 사랑하죠? 마음은 바람처럼 방향이 바뀌죠. 어떨 땐 예 했다가 어떨 땐 아니요. 했다가 어떨 땐 좋아요 했다가 어떨 땐 싫어요 했다가 너 왜 이랬다 저랬다 해 몰라요. 자기도 인터넷 그렇게 하는 거 어쩌라고요? 우리 다 이랬다 저랬다 하잖아요. 2년 따라 그러고 나서 또 스스로 자책하잖아요. 나는 왜 이랬다 저랬다 하지? 이러고 인원이 하는 거야? 내가 하는 게 내가 자책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아니라 이게 인연이 그냥 하는 거예요? 바람가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몸뚱이는 내 몸이 아니고요. 저 한줌 바람 구름과 똑같애요. 근데 예고라는 그 망상 하나가 요걸 나라고 막 빽빽 우기면서 이 몸뚱아리를 나로 삼는 요것만 나로 삼는 애가 하나가 있는 거예요. 걔한테는 얘의 생존입니? 제일 중요해요. 얘가 죽으면 자기도 죽는 애거든요. 걔는 그러니까 예의 생존을 위해서 그 에고는 최선을 다해요. 완전히 헌신해요. 그냥 근데 그건 진실한 내가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예 할 수도 있고 아니요. 할 수도 있고 이렇다 할 수도 있고 저렇다 할 수도 있고 마음이 왔다갔다 할 수 있어요. 아무 상관없어요. 이번에 따라 잘 사나요? 왜 세상 살인을 뭐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막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데 아마 그런 분들은 뭐 심지어는 어떤 뭐 기업을 하시는 사장님 뭐 이런 분들이 그 기업을 가장 잘하는 사람은 본인일 거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은 그 기업에 대해서 일도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근데 그런 분들이 우리한테 와서 하 선생님 제가 이게 참에 이 회사 무너지게 생겼는데 그냥 배팅을 해서 그냥 이거를 한번 확 그냥 해 가지고 잘만 되면 확 키우는 거고 이게 잘못되면 완전 무너지는 건데 어떻게 할까요? 그러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세요. 몰라요 근데.
그런 뭐 분별에 내용 이야기 그거에 대해서 그 스님들이 그 모양의 세계를 아는 분들이 아니에요. 22 마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모양의 세계에 통달한 사람이 아니에요. 모양의 세계 통달한 사람들은 여러분이죠. 각자 자기 애를 자기가 제일 통달 했잖아요. 각자 자기 된 자기 갈등이잖아요. 여러분 집에 가면 여러분 집에 남편은 뭘 좋아하고 자식은 뭘 좋아하고 어떤 음식을 어떻게 해줘야 되고 그런 거를 여기서 일 등은 나잖아요. 우리 집 애들 키우는 것 여러분이 제일 잘하시잖아요. 남들보다 이 세상에서 일 등이란 말이에요. 첫 번 눈치만 보면 바로 뭘 원하는지도 바로 알잖아요. 일 등이란 말이에요. 세계. 그 모양의 색이 자신이 처한 그 모양의 세계는 본인들이 잘 알아요. 그러면 모양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요. 모양의 세계를 내가 통제할 수 있을 것이고 내가 내 노력 여하에 따라 모양의 세계 그 내가 바꿀 수 있다라고 착각해요. 그 모양이 난주라니까요? 그런 망상을 믿으면 내가 내 인생을 내 뜻대로 바꾸려고 키를 써요. 그러니까. 여기저기 찾아내면 내가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물어보고 그런단 말이죠? 그렇게 하면은 그걸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조작하고 변화시키고 바꾸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나라는 아상이 잘 쓰는 방식이란 말이죠? 그거 나에게 달리는 게 아니에요. 물론 나에게 안 달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 되지만 그러니까 간단한 거예요. 모양의 일은 모양이 알아서 헤어지가 인연따라 그러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일을 여러분 회사에서 예를 들어 20년 그 회사 일을 했다. 그런데 이제 한 단계 딱 도약할 이제 딱 단계가 됐어요. 내가 이렇게 맨날 과장만 하다가 탁 부장이 될. 시즌이 왔어요. 그럼 이제 이런 생각할 수 있잖아요. 내가 맨날 과장만 하다가 야. 이 과장들 서너 명을 이끄는 부장을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요? 들어올 수 있겠죠? 저렇게 하는 사람들 대단해 보였단 말이에요. 와, 저를 내가 할 수 있을까? 막 두려워서 질문한 사람이 있어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 저는 그 그 일이 뭔 일인지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근데 그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사실은 없죠. 누구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죠.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나는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몰라요. 그 뭐만 하면 돼요? 그냥 인연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돼요. 그것만 하면 돼요. 그 이상을 더 잘하려고 하니까 문제지 그러니까. 지금까지 과장까지 이렇게 갈고 나가 왔으면 그 부장을 할 만한 실력이 되는 사람이니까. 그중의 하나를 뽑은 거 아니겠어요. 근데 그를 뽑아놔도 본인은 기간경한단 말이에요. 그럼 그걸 근심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하면 하는 거고 못하면 못하는 거예요. 그러다 못하면 뭐 도태돼서 잘리는 거고?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즉 모양의 세계에 대해서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래, 모양의 세계를 내가 통제하는 게 통제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잘하려고 한다고 잘되는게 아니라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모양의 세계는 인연이 알아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그릇에서 2년을 20년 동안 인연을 2년이 아니고 20년 동안 거기서 이 년을 닦아 왔잖아요. 그러니까 인원이 알아서 할 거예요. 여러분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윗사람이 보기에 저 사람이 20년 동안 잘 해왔다고 보니까 그냥 믿고 맡긴 거 아니겠어요? 그럼 그 인연을 맡기고 그냥 맡긴 거고 나도 그냥 인연 다 나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없으면 이 년이 그렇게 하니까 인연이 그래 했나 보다. 하고 그냥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다 싶었는데 그 자리에 가면 어때요? 사람은 신기해서 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이런 말 있잖아요. 100 프로 그래요. 내가 잘할지 못할지 모르는데 그 자리를 딱 맡겨버리면 내가 맡겨요. 그 자리에 맞는 사람으로 그러니까 이 년은 그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어.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몰라요. 근데 자아는 혼란스러워요. 내가 부장으로 첫 출근하는 날 속으로 막 벌벌벌 떨면서 내가 자랄 수 있을까 막 막 떨면서 속으로 다짐을 해요. 내가 전혀 안 떠는 것처럼 늘 부장이었던 것처럼 내가 도장 될 만한 사람이 된 것처럼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지. 되게 센척해야지. 그리고 밑에 잘못하면 확 잡으면서 내가 부장으로서의 권위를 보여야지 하고 큰 다시 말해서 문 앞에 문 앞에 들어가기 전에 수목 크게 하고 들어가서 안 떠는 척하고 하루종일 연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속으로 연기를 잘하는 걸 보면서 속으로 어 이게 좀 되네. 이런 생각도 하다가 집에 와가지고 앞에서 고생들 했어. 이러고 딱 나가면서 차 안에 혼자 딱 있을 땐 아 벌벌벌 떨면서 어 이 말 하면 잘했지 그러면서 우와 나도 할 수 있구나. 이러잖아요. 우리가 생각이 생각은 항상 바쁘다니까요? 자아는 자기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이런 거에 늘 시달려요. 잘하면 잘해서 좋아하고 못하면 못해서 근심 걱정하고 떨고 크게 자아가 하는 거예요. 2년은 인연이 주어지면 하잖아요. 할 수 있는 건 하고 못하는 건 못하는 거예요. 그냥 인연은 저절로 그러니까 우리가 인연법대로 살지 않고 자아 자기 식대로 살려고 해서 그래요. 그 우리는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그냥 내 맡기고 하는 거예요. 할 수 있는 건 되고, 안 되는 건 안 되겠지. 그런데 내가 자신 있어도. 인연이 안 되는 거는 안 되지 않아요. 나는 자신 있었고 나는 정말 할 수 있는 자신이 자신 만만했는데 이 년이 안 되면 죽어도 안 되잖아요. 이 년이 안 되면 신기해요. 정말 자신만만한 사람도 인연이 안 되면 안 된다니까요. 그래서 완전 20년 30년 능수능란한 베테랑들이 어이없는 실수로 하기도 하잖아요. 인형 따라 가거든요. 그러니까 이 세상을 이 년법에 내맡겨야지. 이 년이라는 법이 끌고 가도록 하면 되는 거예요? 끌고 가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내가 벗고 될 그 자체예요. 내가 터를 달지만 않으면 되는 생각으로 이래야 돼. 저래야 돼. 이렇게 살아 저렇게 살아 너 왜 이렇게 못 사니? 너 잘 할 수 있니 하면서 끊임없이 속삭이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저 앞에 있는 저 나무 한 그루는 아 요만할 때 요렇게 갖다가 심었는데 저렇게까지 커져가지고 뒤 사람을 가릴 줄 알았겠어요. 지훈 하나도 안 건드렸거든요. 저기다가 물도 한번 별로 잘 뭐 다른 분들이 주셨나 모르겠네. 그거 가만 놔두는데 지 혼자 저렇게 알아서 잘 커요. 지 혼자 저렇게 크고 바람에 절어 알아서 불고 여기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부는 동네거든요. 그죠 저 그냥 싸게 한다고 아주 그 싸게 이렇게 약간 좀 해가지고 이렇게 그네를 하나 만들어 나무 그네를 여기 두 개 만들어 놨었잖아요. 그런데 어마어마하게 강풍이 불던 날 그 나무 그대가 완전 폭삭 그 그거 대부분 그 정도 나무가 많이 불거든요. 그런데도 초 자른 나무들이 알아서 이겨내요. 그 무거운 눈이. 있어도 또 꺾일 거는 또 꺾이고 버텨낼 건 버티면서 인연 따라 인연 따라 저절로 커요. 그러다가 인연이 다 하면 요. 앞에 소나무 한 마리 하나가 자 인연이 다 해서 그 죽었어요. 여러분은 모르셨나 모르겠는데 여기 앞에까지 그늘이 있었는데 그늘이 사라졌어요. 그 나무 하나가 없어지는 바람에 인연이 다 할 건 다 한단 말이야. 저절로 얘도 자연이에요. 이게 또 자연 그대로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저절로. 도로서 알아서 알아서 인연의 법칙에 따라서 저절로 사라지고 있어요. 살아가고 있어요. 근데 여러분이 제 생각으로 중계방송을 안 해도 얘는 알아서 지인연 따라 살고 있다니까요. 왜 그렇게 매순간순간 너 잘 할 수 있어. 너 못할 거야? 너 잘못되지 않을까? 너 늙으면 병들 못 들어갈 거야. 너 병들면 너 돈 많이 드는데 어떡해 지금 더 벌어야 돼. 더 통장에 쟁여놔야 돼. 너 이러다 죽으면 어떡할 거야? 죽으면 지옥 가지 않을까? 온갖 생각이. 나를 얼마나 무겁게 해요. 우리들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그 생각이고 분별 망상이잖아요. 그것이 허망한 분별 망상 얘 혼자 일어나고 있는 그 쓰레쇼를 말도 안 되는 쇼를 우리는 계속 보고 있잖아요. 평생 보고 있지 않았어요. 근데 우리는 보고 있는 이놈을 관심 갖지 않고 여기서 왔다 갔다 하는 그 온갖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그 분별 망상의 생각 그 생각을 믿고 살았죠. 생각이 주인인 줄 알았죠. 어 근데 그 생각은 여태까지 몇십 년 살면서 흔히 하루에도 오만 가지 생각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무수히 많은 생각이 나를 집어삼키고 행복하기도 하는 그 온갖 생각이 좋다. 나쁘다 하는 그 이야기를 믿었잖아요. 그래서 그 생각을 믿고 그 생각이 난 줄 알았잖아요. 그래서 내 마음 이러면 그 생각이 내 마음인 줄 알았잖아요. 그래서 생각이 흔들리면서 지금까지 사느라고 인생이 겨랐던 거예요. 근데 그 생각은 이 몸을 나라고 막 주장해요. 느낌의 나라고 주장하고 생각의 나라고 주장하고 의지의식의 나라고 주장해요. 뭐 걔한테 속았던 거예요? 우리가 이게 바로 집단적인 가스라이팅이에요. 우리 모두가 80억인구가 다. 거기 속으니까 생각에 속삭이면 속으니까요. 그런데 보세요. 그 생각은 계속 바뀌잖아요. 갓난애기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바뀌지 않았어요. 생각 믿을 만하던가요 이랬다저랬다 하잖아요. 언제는 이래 막 이렇게 해야 된다. 그랬다가 언젠가 저렇게 된다. 그랬다가 어 이게 맥락이 없잖아요. 생각이 막 좋았다 싫었다 하는 거 보면 얘는 밑도 끝도 없다니까요. 근데 거 그 얘가 막 생각을 막 쏘아버리면 그 뒤에서 또 뒷 생각이 따라붙어 가지고 그 맥락을 자기가 만들어야 돼요. 너 왜 그랬어? 이러면 자기도 모르거든요. 그럼 몰라고 말 안 해요. 어 내가 왜 그랬냐 하면 그리고 이제 막 만들어내요. 그러다 보면 또 말이 꼬여요. 아니 그게 아니고 자기도 모르는 말을 막 주절주절해요. 두 남녀가 사랑하는 두 남녀가 이렇게 길을 걷다가 앞에 너무 미모의 여성이 이렇게 지나가니까 남자가 나도 모르게 고개가 그렇게 간단 말이에요? 그걸 보고 옆에 있는 여자가 너 뭐야 너 왜 그랬어? 너 쟤가 왜 이렇게 좋아 가서 살어? 이러면서 왜 그랬어? 말 좀 해봐 도대체 그렇게 좋아 이렇게 물어보면은 이유가 없어요. 아 솔직히 말하면 이유가 없어요. 그냥 이렇게 이혼이 그냥 가는 거 인연이 인원이 계속 간단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 핑계 대지 않으면 될 것 같은 거예요? 생각은 이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아니, 그 사실 내가 저 사람이 좋은 게 아니고 저 사람이 너보다 예쁜 게 아니고, 그냥 아 제가 옷이 좀 마음에 안 들어가지고 내가 본 것 같아 뭐 얼굴이 성형수술 많이 했나 뭐 이러면서 되도 않네, 아니라는 핑계를 막 대려고 애쓰잖아요. 근데 이유를 알아요?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그냥 자연 현상이에요. 똑같잖아요. 솔직히 여성분들도 똑같죠. 멋있고 잘난 남자들 보면 깜짝 놀래잖아요. 어 사뭇 깜짝 놀란다니까요. 그 제가 적나라하게 그걸 안 게 제가 모 군법당 있을 때 우리 저 군 존병 하던데 이 친구가 SM 그 연기자 하던 친구였다. 그래서 너무 짜증 남 같은 성별끼리는 잘난지 못난지 잘 모르잖아 우리는 남자는 남자가 잘난지 몰랐는지 몰라요. 그런데 걔를 처음 봤을 때 제가 이야. 이렇게 저질 난 애가 있었네 싶은 대만 알겠더라고요. 잘생긴지를 그런데 우리 전에 군정 비행기 때문에 두 명 있었는데. 두 명이 다들 아주 핸섬했어요. 훌륭했어요. 그런데 여기 수많은 보살님들이 그냥 근종병 아저씨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세요. 막 맨날 이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그 전에 했던 근종병인데 전역하고 나서 이제 인사 온답니다. 해가지고 이렇게 와서 저랑 차 마시고 갔거든요. 근데 갑자기 그 오십육십 되신 보살님들이 난리가 나시대요. 어 저도 깜짝 놀랬어요. 난리 난리가 나는데 앞에 와서 그 뭐 이야기하는데 나가지 이분이 뭐 갖다 줬으면 나가 바로 나갔을 텐데 안 나가고 앉아서 계속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이 이렇게 계속 얘기를 하자 하는데 얘기를 하면서 제가 이렇게 옆에서 지켜보니까 되게 설레하는 게 보이는 거예요. 이 아줌마들이 어 희한하대요. 그 아니나 다를까 그 우리 옆에 있던 권정준 두 친구가 이 친구 가고 나서 아줌마들 보살인데 앉혀놓고와 진짜 고 삼 들 정말 저는 이 이 배신감을 이걸 주체할 수가 없어요. 이러면서 어떻게 할 수가 있어요? 날카 쓰지 마세요. 이러면서 저 저 어린아저씬데. 어떻게 저 잘생겼다고 그렇게 저나 제나 뭐가 다를 게 있냐면서 그러니까 이분들이 피식 웃으면서 달라 많이 달라 그러더라고요. 꼭 그 보살님들이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인연이 그럼 인연이 그러니까. 그냥 자연현상이 내가 나쁜 놈이 아니에요. 이 자연 현상이에요. 그냥 그럼에도 있는 그대로에 있는 그들의 자연현상을 자기는 생각으로 교정하고 싶어해요. 이유를 알고 싶어해요. 이유를 중중 무진 연기적 현상으로 중중 무진 연기라는 말이 뭐예요? 중중 무궁무진한 하나의 인연으로 그 일이 벌어진 게 아니란 말이에요. 어마어마하게 우리가 알 수 없을 만큼 무궁무진하게 많은 인연들이 얽히고 설켜가지고 그 하나의 사건을 일으키고. 그러한 일을 만들어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말로 그걸 이해하려고 하고 해설하려고 하고 납득하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음이에요 몰라요. 너 왜 너 같은 베테랑이 그런 시술했어 몰라요. 왜 그런 실수를 하는지 모른다니까요. 왜 그런 실수를 하필이면 그때 안 될려고 하면 결정적인 순간이 안 되구요. 또 되려고 하면요. 평소에 전혀 능력도 없는 사람이었고 얘보다 능력 센 사람이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될 인연이 되면 갑자기 윗사람 눈에 들어가지고 승승장구를 해요. 그러면 아마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은 다들 공감하실 텐데 주로는 능력 있는 사람이 진급을 할 확률이 높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느 조직에나 어 한 10 프로 20 프로 뭐 더 될 수도 있지만 모르겠어요. 더 적을 수도 있고 모르겠는데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죽어도 되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너무 교묘하고 너무 좋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밑에 사람 쪼개기만 하고 괴롭히기만 하면서 윗사람에게는. 뭐라 그러죠? 그게 아부하고 막 막 알랑방구를 끼면서 막 정말 나쁜 그 누가 봐도 나빠서 너무너무 싫은 막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죽을 죽기보다. 더 싫을 만큼 밑에 사람이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성품 자체가 너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이기적 뛰면서 뭔가 하여간 뭐 그런 류의 사람들이 가끔 10 제가 취소한 것 같고 가끔 있는 것 같아요. 어 그럴 때 제가 이렇게 상담했을 때 군에 있을 때 상담했을 때 보면. 그런 사람이 야 저 사람 더 이상 진급 못하겠다 싶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윗사람에게 기가 막히게 어떻게 어떻게 수를 잘 써가지고 높은 자리까지 기열이 올라가는 사람이 가끔 있어요. 가끔 주로는 없는데 가끔 있거든요? 그런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이 정말 죽어나요? 막 분노하고 절망하고 자잘하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봐야. 저런, 사람이 진급하는 그런 세상에 내가 살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러면서 이렇게 뭐랄까 의혹을 상실하고 그러니까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란 말이죠? 이 세상에는 우리가 보통 돌연변이라고 하는 있잖아요. 돌연변이도 인연이 있어서 있대요. 그리고 아주 선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아주 악한 사람도 있는 거죠. 이유는 몰라요. 왜 그래야 돼요? 이유 몰라요. 제가 뭐 그 이유를 어떻게 알아요? 이 세상 왜 이렇게 만들어졌어요? 이유 몰라요.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는데요?
자연이 스스로 그러하듯이 삶도 그러한데 왜 인생은 나다. 나도 하는 분별을 입혀놓고서 다시 그 분별해서 벗어나라고 또 하죠.
이렇게 물어봤어요.
그리고 중생들은 분별이라는 걸 이렇게 우리가 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리고 이제 와서 분별해서 벗어나라고 하죠.
힘들게 몰라요.
왜 그런지 우리는 뭐든지 다 뇌를 알고 싶어한단 말이에요?
그걸 깨닫고 보면 아 이래서 그렇구나 라는 그 외래에 답을 얻는 게 아니에요.
아니, 질문할 필요가 없구나 그 질문이 사라지는 거지. 어떻게 그걸 알 수가 있어요.
알 수 없어요.
아는 것은 지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중중무진의 연기
를 어떻게 내가 소수의 몇 가지를 보고서 알았다고 할 수 있어요.
알았다고 해도 그건 자기 생각일 뿐이죠.
알았다고 하면 그 진짜 한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의 한계 속에서 알았다
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에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알음알이가
그래서 자기 생각이 아무리 옳은 것도
거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고집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알 수 없기 때문에 안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이에요. 임시적이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임시도
알았다
몰랐다.
옳다
그르다
를 쓸 수 있죠.
현실 세계에서는 그러나 거기 과도하게 고집할 필요는 없는 이유예요.
아 다시 한번 돌아가 보죠.
마음만 끊임없이 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나는 변할 수 없는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 같잖아요.
이 마음은 변해요. 그래서 마음은 우리
대승 기신론
이라는 책에 보면
일 심 이문 돈
이라고 있어요. 일심 마음은 하나뿐이에요. 일심 이 이 마음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 한마음 일 심 이 한마음에서 두 가지 문으로 나뉘는 것처럼 보여요. 분별하면 그 두 가지가 진멸문과 생멸문이라는 말이에요. 그녀의 마음이라는 게 이
일심
으로 한바탕에 딱 바탕으로 있단 말이에요. 늘 늘 있는 이 마음이 있단 말이에요. 근데 늘 있는 늘 모든 모든 분별 망상 모든 삶을 비추고 있는 이 마음이 진멸문으로 진여 진실되고 여여해서 늘 한결같은 이 마음이 있는데 생멸문이라는 게 이 마음 위에서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