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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 경건한 성도의 사회생활(1)
엡 6:1-9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엡 6:1-9 / [자녀와 부모]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녀를 감독할 권리를 부모에게 주셨으므로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 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십계명 중에서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ㄴ. 신5:16) 3) 그 약속이란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너는 복을 받고 오래 살리라'는 것입니다. 4) 부모들에게도 한마디 당부하겠습니다. 자녀들을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또 잔소리를 늘어놓아 반항심을 일으키거나 분노를 품게 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주님의 사랑이 담긴 훈계와 조언과 충고로 키우십시오. 5) [종과 주인] 종들은 주인에게 복종하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섬기듯 자기의 주인에게 봉사하십시오. 6-7) 주인이 볼 때는 열심히 일하는 척하다가 뒷전에 가서는 딴 짓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마음을 다해서 행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것과 똑같이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하십시오. 8) 여러분이 종의 신분이든 자유인이든간에 선한 일을 하면 일일이 주께서 갚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9) 주인들도 지금 내가 종들에게 권면한 것과 같은 태도를 가지십시오. 종들을 윽박지르지만 말고 정당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 자신도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주님은 그들에게도 주님이 되십니다. 주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바울은 가정의 첫 시작인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놀랍게도 그리스도와 교회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그 사랑을 기반으로 바울은 고대시대 가정의 부모와 자녀 이야기와 종과 상전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부모와 자녀(1-4) 바울은 자녀들의 순종과 아비들의 훈육 구절 사이를 접속사 ‘또’를 사용합니다. 아비 또한 누군가의 자녀이기에 자녀로서의 의무를 다해야합니다. ‘자기 부모에 대한 공경’은 가정 안에서 큰 모범이 됩니다. 자녀들을 훈육하기 전에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아비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에베소서 4장 26-27절의 ‘분’을 연상케 합니다. 자녀들이 저녁때까지 분을 품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자녀들에게 틈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성도의 사회생활(5-9) 고대시대 가정에서는 혈육인 가족들과 더불어 종들도 함께 살았습니다. 육체의 상전은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구별해서 사용합니다. 육을 따라 주인된 상전에게도, 종들은 주께 하듯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 눈치만 보며 시늉만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하듯 두려움과 떨림과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섬겨야합니다(5-7). 주께 하듯한 모든 선한 일을 육체의 상전이 몰라준다 해도, 하늘의 상전인 주께서 다 갚아주십니다(8). 상전들도 똑같이 주께 하듯 종들을 대해야 합니다. 특히 그들의 지위와 권리를 이용해서 종들을 위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주인’(쿠리오스)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구주의 구속하심으로 종이나 자유인이나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 즉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요 1:12-13).
적용 : 주 안에서, 주의 교훈과 훈계로, 그리스도께 하듯,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주께 하듯, 주께로부터, 그들과 너희의 상전 등등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가정이나 사회생활 속에서 당신은 ‘주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나 매순간 ‘신전의식’, ‘주님 앞에서’를 실천하는 하루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가정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가정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가정의 주인이 되시고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이라면 인간적인 지혜나 경험보다는 먼저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며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 설 교 >
종의 자세
엡 6:5-9 / 박기완 목사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근본이 되고 꼭 있어야 될 중요한 태도를 우리에게 소리 높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 모든 성도와 성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 그것은 '종의 자세'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도라면...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살 때에 꼭 필요한 자세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의 자세를 가져라" 하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엡6:5절 이하에 보면,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라고 말씀하심으로 종과 상전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옛날의 '종과 상전'에 대한 말씀을 오늘날에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고용인은 사람을 쓰는 사람이고 피고용인은 그 사람에게 소속되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엡6:5-9절의 말씀을 요약하면, 피고용인이 고용인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이 자세는 우리의 삶, 우리의 신앙생활, 혹은 사회생활, 그리고 모든 일반 생활 속에서도 가져야 할 근원적인 삶의 자세라는 사실을.... 밑바탕에 깔면서 오늘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
1. 종의 태도
먼저, 상전에 대한 종의 태도로서 성경의 말씀을 요약하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인간에게 관심이 있다.
먼저 성경은 제도보다는 인간에게 더 관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사회제도를 직접적으로 정죄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그 당시에도 노예제도는 분명 악이었습니다. 올바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괴롭힘을 당했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의 시대, 이삭과 야곱의 시대.... 심지어 예수님이 계셨던 신약시대에도 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왜 바울이나 예수님이 노예 제도를 반대하거나 노예 해방운동을 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제도를 반대하거나 그 제도를 바꾸기 보다는 다른데 더 큰 관심이 있습니다. 그 보다 더 커다란 관심은.... 정치나 제도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 제도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아무리 제도를 주어도 사람이 악하면 그 제도를 악용하고 또 그 제도를 파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언제나 제도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사람이 바뀌면 사회도 바뀌고 제도도 바뀝니다.
2) 성령으로 충만하라!
둘째로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종의 자세는 '성령 충만'입니다. 오늘 본문의 에베소서 6장에서 종의 자세에 관해 말씀하기 전에 5장에서 바울은 먼저 성령충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령으로 충만 하라고 강조합니다(엡5:18).
왜냐하면 상전이 종을 사랑하고 종이 상전을 잘 섬길 수 있는 삶의 태도는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할 때 비로소 갖을 수 있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은 그리스도인이 모든 삶의 태도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고 원인이 됩니다.
3) 순종하라!
셋째로 종은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상전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된다면 우리는 명백히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요구할 때 내가 그것을 "아니요!" 라고 대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상전에게 순종의 자세, 섬김의 자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주께 하듯 하라!
넷째로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5절 말씀에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주께서 맡기신 내 일터에서 성실하게 내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이 삶의 태도와 의식 때문에... 주님 앞에 서있는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5) 성실한 마음으로 일하라!
다섯째는 성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종은 성실해야 합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는 것은 거짓없이 충성하는 태도... 그리고 '단 마음'으로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6:7)
여기서 '단 마음'이란 억지로 하거나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즐기고 기쁨으로 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요, 바로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로 나를 이곳에 서게 하셨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쁨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으면 단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휘파람을 불면서 일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태도, 이런 마음들이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종의 자세입니다.
종의 자세는 모든 인간관계,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고 모든 삶의 자리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고 원인이 됩니다.
2. 종의 자세를 가지려면
그렇다면 종의 자세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예수님을 묵상하라!
그것은 첫째로 예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에수님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 예수님이 종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섬기려고 오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0:45절에서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은 종이 되기 위해서...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섬김의 본을 보이시면서 "너희들도 이렇게 하라!" 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당시에 발을 씻는 일은 종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샌들처럼 생긴 신발을 신고 사막과 같은 지역을 다니다 보면 금새 발이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종들은 주인이 돌아오시면 얼른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바로 종들이 하는 그 일을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섬기는 모습... 그 모습을 머리에 그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처럼 종이 되셨다면....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종의 길을 택하셨다면.... 오늘 우리가 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론 종이라는 개념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종' 하면 우리는 자꾸 노예적인 개념이 있어서 싫어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종이라는 말은 좀 특별한 경우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종은 '자유의 종'입니다.
자유의 종... 무슨 말인가 하면... 옛날 구약성경에 보면, 어떤 종이 그 주인 밑에서 6년 동안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7년이 되는 안식년이 돌아오면 출애굽기 21장에 보니까, 이 종에게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생각할 때 자기가 일하고 있는 이 주인댁이 너무 좋은 겁니다. 자기의 일터가 좋고 주인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유를 포기합니다.
그리고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과 함께 영원히 있고 싶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는 제사장에게 가서 귀를 뚫어서 표시를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의미도 모른 채 귀를 뚫는데.... 귀를 뚫는 습관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를 뚫으면 "나는 영원한 종입니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이 종은 다른 종들과는 다릅니다. 영원한 자유를 얻었던 종....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었던 종인데.... 그는 다른 위대한 목적과 거룩한 동기가 있어서... 그 값진 자유를 포기하고 내어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자유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참 자유하게 만드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5: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거룩한 목적 때문에 주님 앞에 그 자유를 내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자기의 방종과 쾌락과....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도구로서 쓰지 않고.... 이 자유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려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이 거룩한 목적가운데.... 이 자유를 내어놓고 무릎을 끓어 섬기는 사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종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종이 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바라본다면... 오늘 우리가 종이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종이 되려면 주님의 모습을 자꾸만 묵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사실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누누이 말씀하신 내용 가운데 하나는 "내가 다시 오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왜 다시 오실까요?.... 주님은 영광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알곡은 구별하여 천국 곳간에 들이시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 쭉정이는 모아 불에 던져 사르기 위해서.... 즉,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왜 오신다고 하셨을까?...
누가복음 12:3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님은 다시 오실 때에도...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계속해서 섬기시려고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섬긴다' 하면 흔히 겸손을 말합니다. 겸손은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섬길 수 없습니다.
앞에서 자유를 얻은 종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그 종이 7년째가 되어 자유를 얻었는데 그가 나가서 자유하지 않고 계속 종노릇을 하겠다고 얘기하면서.... 출애굽기 21:5절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제가 주인님을 그리고 이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2) 사랑의 동기로 하라!
그가 기꺼이 자유를 포기하고 종이 되기를 원하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말씀하기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아내가 남편을 섬길 때, 혹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러나 사랑하면서 섬겨보세요.. 사랑할 때는 모든 것이 쉽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보람이요 기쁨입니다. 사랑하니까 즐거움이 되고 감격이 됩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섬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선태사항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사랑하라!" 그러므로 사랑해야 합니다, 섬겨야 합니다.
3) 서로 돌아보라!
또한 참된 종의 자세는 서로 돌아보아 살피는 것입니다. 종노릇을 잘하려면 잘 살펴야 합니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되는가?... 잘 살펴야 합니다.
좋은 종, 신실한 종, 충성된 종은 잘 살핍니다. 주인이 말하기 전에... 누가 나에게 말하기 전에...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내가 여기서 할 일은 무엇인가?....찾아 다닙니다. 잘 살핍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려 가서도 신임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잘 살폈습니다. 주인이 시킨 일 외에도 찾아서 알아서 했습니다. 그러니까 보디발 장군은 말합니다. "너에게 내 아내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다 맡기노라" 그러면서 집안의 모든 열쇠 꾸러미를 맡겼습니다.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부지런히 살핀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종들은 주인의 뜰에 항상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무엇을 명령하면 즉시 행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65: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주님의 뜰에 거하면서 주의 명령을 기다리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복된 사람입니다. 하물며 주님의 명령을 받아 행하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뜻을 깨닫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행하는 사람.... 그 사람은 신실한 종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의 뜻을 부지런히 살피는 신실한 종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주께 하듯 하라!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 했습니다. 종의 자세 가운데 하나는 주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려고 하는 그 분이 주님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보기싫은 남편이라도 주님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저기 주님이 서 계신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오늘부터라도 아내들이 집에 가셔서 남편을 보시면 "아! 주님이 저기 계시는구나!..." 그런 심정으로 한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께 발을 왜 못 씻겨 드립니까?... 내가 주님한테 뭔들 못하겠습니까?... "주께 하듯 하라!..."
5) 해야 할 마땅한 일을 행하라!
더 중요한 사실은, 종이 해야 할 마땅한 일들을 행해야 합니다. 알고는 있는데 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직분을 맡고 많이 받았으면... 그만큼 종의 자세... 종의 도리로 섬겨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생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받는다" 고 말씀했습니다.
많이 맡긴 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그 일을 잘 감당하면 큰 상급을 주십니다.
6) 자랑치 말라!
마지막으로 눅17:10절의 말씀에서 종은 자랑치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다 행한 후에 말하기를 "주님,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공로와... 내가 무엇을 했다는 주장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요... 그래도 갚지 못할 빚인데...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주님을 따르게 하신 은혜.... 이 모든 것... 이게 다 주의 은혜인데.... 무엇을 자랑할게 있겠습니까?....
바로 이 자세, 이런 태도, 이런 인격이야말로 참된 종의 자세인 것입니다.
TV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에.... 제목이나 원작자나 연출자, 감독자의 이름들이 자막으로 처리되어 나오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타이틀(title)'이라고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보여주는 것을 '오프닝 타이틀(opening title)'이라고 하고, 마치고 나서 보여 주는 것은 '엔드 타이틀(end title)'이라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프닝 타이틀'에 나오는 여러 이름들, 그 이름들이 빛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와 감독자, 그리고 이름난 스타 탤런트 그들의 이름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커다랗게 나옵니다.
드라마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이름은 빛납니다. 사람들은 유명한 감독이나 연출자, 혹은 배우들이 나오면... 이 드라마는 훌륭한 작품성이 있겠다고 미리 기대를 합니다.
오프닝 타이틀에 나오는 그들이 없으면 아마 그 드라마는 있을 수 없을...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들의 이름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이 크게 나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엔드 타이틀'에는 그 드라마를 만드는데 참여했던 또 다른 이름들이 나옵니다.
조명에 누구 누구, 의상에 누구, 조연출에 누구.... 촬영보, 미술, 음향효과.... 주로 보조적인 위치에서 섬겼던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드라마가 끝이 나면 볼 것을 다 보았다는 듯이... 사람들은 성급하게 채널을 돌려버리거나, 일어나 버림으로 인해서 결코 기억될 수 없을 낯선 이름들이 되고 맙니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에게 이들의 이름은 그렇게 중요하거나 관심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엔드 타이들에 나오는 그 이름들을 기억하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없다면 드라마는 가능할까요? 조명판을 들고, 카메라를 잡아 주며, 배우들의 대본을 복사해 주는 것... 그리고 분장이나, 소품 등을 준비하는 일들... 그러한 잡다하고 덜 중요해 보이는 일들을 감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엔드 타이틀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없다면 드라마는 가능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억해 주지 못하는 부분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드라마는 재미있어지고 인기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숨어서 수고하는 사람들 때문에 스타들이 있을 수 있는 갑니다. 말하자면 '엔드 타이틀' 때문에 '오프닝 타이틀'이 빛이 나는 셈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종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셨던 세례 요한은 결정적으로... 인기를 얻을 기회에서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있다는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 세례요한은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얼마나 훌륭한 종의 자세입니까?....
조용히 물러서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다른 이들을 세워 주는 일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필요합니다.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보다..., 남들보다 눈이 밝아서 문제를 더 빨리 보는 사람보다..... 빛 없이, 이름 없이 섬기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오프닝 타이틀'에 등장하는 스타보다 '엔드 타이틀'에 나올 묵묵한 이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우리 모두 주님과 같이 종의 자세로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하고 주님 앞에 크게 쓰임바 되는 종다운 종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처럼
엡 6:5-9 / 박조준 목사
우리는 앞에서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본문은 상전 과 종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어디서나 이런 종의 제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종의 수가 대단히 많았었습니다. 바클레이의 기록에 보면, 그 당시 로마 제국 에는 6천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 시민의 몇 배가 되는 숫자였습니다. 많은 빚을 지고 갚지 못할 때 또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면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숫자는 날로 더해 갔 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교훈은 종(servant)들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자녀 들은 그 부모에게 복종하고, 종은 육신의 상전(master)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세심 한 주의를 기울여 한편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남편도, 부모도, 상전도 그들의 의무가 무엇인지 를 가르쳐 줍니다. 성경에서 이처럼 균형을 유지하는 다른 교훈은 없습니다. 종들 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이 말은 사실 노예 (slave)를 의미합니다. 이것 은 삯을 받고 고용된 일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제도가 전혀 없기 때 문에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만 하더라도 문명한 사회에서 는 삯을 받고 고용된 하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종들은 그런 종들 이 아닙니다. 노예들을 의미합니다. 노예 제도는 바울이 살고 있던 시대에 보편적인 것이었습니 다. 더구나 초대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도 적지 않은 숫자의 성도들이 문자 그대로 노예들이었습니 다. 이 노예제도는 큰 문제였습니다. 1860년대에 미국의 남북전쟁이 원인이 바로 이 문제였다는 것 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는 노예제도를 찬성한 것인가? 하는 생 각도 가지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서는 구약시대와 달리 교회가 세상에서 분리되고 구분을 가져 교회가 국가와 관계를 맺고 있지만 국가와 하나는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이 이런 면에서 다릅니다.이스라엘 국 가는 곧 교회였습니다. 그때는 국가와 교회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국가에 대해서 어떤 것을 말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 믿는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시대에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였고, 정치적이거나 그밖의 사건을 다루는 것은 교회의 임무였습니다. 이제 신약시대의 교회는 언제나 교회,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의 순례 자로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것에 대해서 관심을 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첫째 임무는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게 됩니다. 교회는 여기 서 세상을 개혁하려 하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 힘으로 개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임무는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복음을 죄와 마귀의 세력과 심령의 눈이 멀어서 방황하는 심령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치나 경제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는 순간, 교회는 복음화의 제 1차적인 임무를 거스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치적인 문제나 또 다 른 입장들을 직접으로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그들이 어떠한 자들이든 간에 죄의 세력 아 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합니 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서도 느끼시겠지만 기독교는 노예제도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것을 좋게 봐주고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의 태도는 애매합니까? 아닙니다. 이미 말 씀드린 대로 교회가 관심을 두는 것은 예수 믿은 노예가 그의 주인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할까 하 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노예제도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았습니다.오늘 기독교의 지도자들 중에는 이런 일을 직접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 문 제를 가지고 설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직접적인 행동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이 극히 관심을 두는 것은 그런 문제나 그 처지의 양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를 갖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술고래가 회개하고 새사람 되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술 먹는 것을 고 발하는 것이 아니라, 가련하고 불쌍한 술고래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데 있습니다. 왜 냐하면 그 길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제 1차적인 관심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의 지위와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가 종이든 상전 이든, 그가 왕이든 신하이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그들 모두는 복종해야 하며, 어떤 경우든지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처하여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의 순례자, 외인들과 나 그네 로서 우리의 관심은 하늘의 상전에게 진실하고 우리의 영원한 집을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 다. 교회는 환경이나 조건을 개선하는 일에 직접 손을 대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리스 도인 각자가 나라의 국민으로서 조국을 개선하는 데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 구분하는 선(線)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법을 자기 손에 넣고 행동해서는 안됩니 다. 그러나 그 말이, 그가 속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와 다른 이들이 살고 있는 환경과 조건을 개선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책임은 우선 사람들을 예수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복음 을 전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의 피로 그들을 불러 내며 말씀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해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날 수 있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이 위대한 원리들을 가르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직접적인 임무요, 할 일 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교회는 그밖의 것들을 간접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 회는 그런 사람들의 전체 품성을 감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자신이 변화한 사람들이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보세요. 저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온전히 변화해서 능력을 얻게 될 때 세상에 나아가서 세상을 뒤집어엎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이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교회 가 사회조건들을 변화시킨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낳을 때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간접적인 방식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복음 전도자로서의 제 관심은 사람들의 영혼들이고, 제 임무는 주님 앞에 나온 심령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소개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수가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그리스도인의 생각의 폭은 더 넓어질 것입니다. 한국교회 100년이 넘은 지금 전인구 의 25퍼센트가 그리스도인인데, 이제 절반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많이 달 라질 것입니다. 75퍼센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는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하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가 처한 조건과 환경에 순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임무라는 결론을 얻었습 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는 생활 조건을 개선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 다른 이들과 협조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 나 법이 정한 한계 안에서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처한 환경에 대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이 새로운 이해를 가지고 어떻게 적응해 나갈까 하는 것을 찾는 일입니다. 여기 본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자세를 말씀합니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면을 말합니다. 종들 아, 상전에게 복종하라. 그러나 눈가림만 하지 말라. 소극적인 측면입니다. 여기 눈가림만 하지 말라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종이 그 상전에게 복종하지만, 언제나 주인의 눈치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그가 하는 일보다 주인을 더 많이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 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상전의 눈치만 보는 종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이 와서 우리를 보고 있지는 않나 하고 기다리는 종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누가 보는 사람이 없으 면 일을 하지 않든지, 아니면 해도 최소한도만 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나타나면 열심히 일하고 자기는 아주 충성스런 종인 척합니다. 그것을 눈가림만 하는 봉사 (eye-service)라고 합니다. 그 리스도인은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삯을 얼마 받으니까 그 삯만큼만 일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마땅한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일에는 관심이 없고 주인이 볼 때만 최소한 일하는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 눈가림만 하는 일 이라고 책망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가 아니라고 밝히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가림의 정반대이어야 합니다. 5절을 보세요. 종들아 두 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 고 했습니 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 2장 3절에서 사용한 표현과 똑같은 표현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 했는데, 바울이 왜 두려워했습니까? 무엇이 그를 떨게 만들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무서워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두려움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다가 잘못 전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그것 을 범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떨었던 것입니다.사도 바울은 이처 럼 복음을 설교하는 일을 아주 심각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치리로다 라고 말할 수 없었다면 그는 결코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 원을 완성하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노예의 조건까지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줍니다. 천한 일을 하는 불쌍한 노예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사도가 복음을 설교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그런 마 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바른 눈으로 해야 한다는 말 입니다. 한눈 팔지 말고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이 보나 보지 않으나 그것이 문제 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맡은 일을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맡은 일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 니다. 그를 고용한 사람이 누구든지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그의 시간은 자기의 시간이 아니고 주인의 시간입니다. 그가 맡은 돈은 자기의 것이 아니고 주인의 것입니다. 그의 일과 관련된 모 든 것은 다 주인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일을 해야 하는 시간에 그 일을 하지 않고 딴전을 부리고 있다면 그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의 명령에 불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고용주의 시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일 입니다. 자기의 시간이 아니고 주인의 시간에 기독교 신앙이나 영혼 구원 같은 일을 이야기하느 라고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의 교훈이 아닙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모아서 의무수행을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동기가 아무리 선하다고 하더라고 우리 주인에게 속한 것을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용할 권 리는 전혀 없습니다. 혹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옳은 것이다 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복음전도자로 고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으로 돌려 버리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성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이나 재물이나 다른 모든 면에서 이 점을 철저히 적용시켜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 유의해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6절 하반절에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라고 했습니다. 눈가림만 하지 말고 그 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다른 말로 하면 목숨을 다하여 (from the so ul) 하라고 합니다. 여기 쓰여진 용어는 주님께서 어느 계명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냐? 고 묻 는 질문에 대답한 것과 같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 을 사랑하라. 다시 말하면 전인(全人)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전인격이 그 일에 집중되어야 한다 는 말입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는 말은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라는 뜻입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식으로 하 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그 일을 안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해도 안될 것입니다. 일을 하되 얼굴을 찌푸리고 합니다.
기분이 나빠서 뾰루 퉁해서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무슨 일을 맡아서 한다고 해도 마음으로, 목숨을 다하여 속 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온 정성을 다하여 해야 합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니라 했습니다. 마지못해 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지 말고, 심령을 기울여 정성껏 하는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7절에 단 마음으로 섬기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심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 은 무슨 일을 맡을 때 어리둥절한 가운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이 없을 때 단 마음으로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 사명으로 생각하면 무슨 일 이든지 단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입니다. 그 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 위해 그 몸이 찢기시고 그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값으로 산 바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을 깨닫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고 그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거기서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전도의 열매를 맺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주께 하듯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만일에 우리가 일터에서 신용을 잃고, 불친절 하고, 게으르고, 되는 대로 진심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독교를 깎아내리는 나쁜 간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식입니다. 세상 사람은 최소의 일을 하고 최대의 보수를 요구합니다. 일에서 빠져나올 기회만 있으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만일 주인이 거기에 없으면 일하는 시늉만 내고, 주인이 갑자기 나타나면 눈에 띄게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은 그와 정반대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큰 해를 끼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언제나 맡은 일을 잘 해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맡은 것에 무관심한 사 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큰 해를 끼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일상 생활을 주 목하여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서 보는 바를 가지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판단합 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 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예수 믿 는 사람이 그가 속해 있는 곳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 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는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다 다섯 달란트 맡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더 유능할 수도 있습니다.우리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든지 최선을 다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가 가지고 있 는 능력을 최선을 다해 최대로 발휘한다면, 그는 아마 큰 능력을 가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훌 륭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맡았으면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언제나 부지런해야 합니다. 언제나 정직해야 합니다. 언제나 신실해야 합니다. 언제나 믿을 만해야 합니다. 언제나 사랑할 만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식이 없고 특수한 기술이 없고, 권력이 없고 돈이 없는 것은 부끄러 울 것도 없고 잘못도 아닙니다. 그러나 신용있는 사람, 믿을 만한 사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야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종들아,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 그 일이 무엇이든지 맡았으면 최선을 다 하라. 너희가 종일지라도 최선을 다하라 고 하십니다. 왜요?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또한 큰 전도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실례를 많이 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세요. 그는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하나였지만 이교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디서 일하든 지 총애를 받게 되었고 승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그가 다른 사람에게 설교를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보 디발 장군 집에 있을 때 총무로 승진했고, 감옥에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가 어디, 어떤 환경 과 조건에 있든지 언제나 거기에서 총애를 받았습니다. 경건하게 무슨 일에든지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주님께서 작은 일에 충성한 자는 큰 일에도 충성하고,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 일 에도 불의하다 고 하신 말씀에 그런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훌륭한 전도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전도의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나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틴 루터가 발견한 위대한 진 리입니다. 그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위대한 교리를 깨닫게 될 때 모든 입장이 바뀌어졌습 니다. 이제 그는 하녀가 방을 쓰는 것으로도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으로 깨닫게 되었습 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외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꼭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눈가림만 하지 말고, 마음으로 일합시다. 단 마음으로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맙시다. 언제나 누가 우리가 일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나는 이렇게 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 이 사람은 무슨 일이든 맡으면 최선을 다해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나도 예수 믿으면 이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통해서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우리는 그 리스도의 종입니다.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인 것을 나타냅시다. 우리가 있 는 그곳을 복음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좌우명
엡 6:5-9 / 이종윤 목사
사도바울의 시대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에베소 6장의 '종들아'라고 시작하는 이 말씀은 바로 이 노예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노예들 중에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 됨으로서 참 자유을 느꼈지만, 현실을 타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매를 맞고 누명을 쓰고 손발이 절단되는 처지에 놓여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마침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옴으로써 비로소 참 자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 섬기는 일을 용감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대접을 받기 위함이 아닌 섬기기 위해 왔듯이 그들에게 주인을 기쁨으로 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위대한 삶의 좌우명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Ⅰ. 내가 섬기리라(I serve)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섬기도록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계십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섬깁니다.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섬깁니다. 피차가 명령을 하고 존경을 받고 대접받는 것이 아닌 모두 섬기는 백성인 것입니다. 섬김에는 특정한 법칙도 없이 그저 기쁜 마음으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하듯 다른 이를 기쁜 마음으로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Ⅱ. 이 좌우명은 우리 일에 영향을 미친다
이 좌우명은 우리가 하는 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마치 혁명을 일으키듯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주님을 진실로 섬기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종하게 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 6:5) 굴종이 아닌 순종을 함으로써 기쁜 마음으로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는 거룩한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적당히 입술발림으로 하는 것이 아닌 두려워하고 떨며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은 자신의 뜻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상황이 오든 오직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감시 하에 됨을 압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눈가림 없이 성실함으로 임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상주시는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Ⅲ. 이 좌우명이 우리 영을 향상시킬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남을 섬기려고 하다보면 고난과 역경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듯이 섬기는 사람은 불평과 원망이 사라지고 오히려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지도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열심을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도자가 앞에서 열심을 내면 그 밑의 사람들이 충성을 다하겠다며 따르는 것이 사람입니다. 하물며 우리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이 세상에 오신 분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르지 않을 수 없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는 인색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섬기는 심정으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주님께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하며 사람의 불신임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실패에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을 섬김으로 얻게 되는 특권들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본분을 기억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그분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 살지 못했다면,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섬기고, 또 다른 이를 섬기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소유물인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요 우리는 그의 머리라. 머리와 몸이 붙어 있어야 살 수 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중에 그리스도를 섬기고, 우리의 이웃을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섬기는 성도님들 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일과 일터
엡 6:5-9 / 조재호 목사
오늘부터 4주간에 걸쳐 일과 일터, 술과 담배, 대화와 관계, 카드와 빚, 그리고 선교적 사명 등 크리스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들은 이 땅에 살아가는 이 땅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하늘의 백성’이라는 이중적인 신분을 가진 이중국적 소유자 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이중적이지 않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이 땅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살지 못하는 갈등과 기도가 있을 뿐이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의 일상생활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우리의 믿음이 실천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한 주일에 주일 하루, 한 시간 예배드리는 시간이 세상에서 소 중한 것처럼 사회에서 생활하는 나머지 6일의 시간도 똑같이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지하철 전동차에서 기관차도 중요하고 그 뒤에 따라가는 객차도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7일 내내 사회생활은 안하고 예배만 드리는 사람, 365일 기도원에만 가서 사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6일 동안의 삶은 믿음이 실천되고 믿음의 열매를 먹으며 사는 축복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도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 중에 가 장 큰 일은 사람을 창조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끝내시고 ‘참 좋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은 첫 사람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 잘 지키라’는 일을 지키셨습니다. 에덴 동산도 단순히 놀고 먹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요한 9:4)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 종교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비난할 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렘33:2)’ 하나님이시고,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시니 아들은 자신도 맡겨주신 일을 하 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일을 하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하는 여러 가지 보통의 일이 있습니다. 학생의 일은 공부하는 것이고, 군대 나간 젊은이의 일은 근본적으로 국토 방위하는 일입니다. 전업주부의 일은 없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일입니다. 빨래, 설거지, 청소, 육아, 식탁준비 등의 가정일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시간낭비, 인생낭비가 아닙니다. 이 일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상적인 일들은 하나님이 주신 아주 소중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보통의 일과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과 일터, 직업과 직장을 주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절은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일하라고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일터에도 동일하게 계십니다. 우리에게 일을 명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교회의 일에만 관심이 계신 것이 아니 라 일상의 일에도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일생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여러분의 일상의 중심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여러분의 일터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여러분의 일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들이 일을 통해서 건강한 믿음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일을 통해서 삶의 물질적 필요를 얻습니다. 돈을 법니다. 그래야 자신과 가족이 먹고 살게 됩니다. 그 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직업, 일은 금전적 보상을 받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월급만 받으면 그만이다’는 생각, ‘일만 실컷 부려먹으면 된다’는 생각은 불쌍한 돈의 노예, 가 엾은 일의 노예의 모습입니다. 어느 증견 간부의 고백처럼 ‘믿음이 새로워질수록 직장 부하와 동료를 위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이전에 직장 사람들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고 일을 끝내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고 도와주는 곳이 되었습니다.”는 간증이 있는 일과 일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돈에만 매어 사는 불쌍한 돈의 노예나, 무정한 일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일과 직업과 일터에서의 우리의 자세가 믿음 안에서 달라져야 합니다. 일터의 소명의식을 가 져야 합니다. 진정한 좋은 믿음의 소유자는 건강한 믿음과 정신으로 맡겨주신 일을 사명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은 “요령만 피 우고 눈가림으로만 일을 하지 말고 성실한 마음으로 섬기는 자세로 남을 대하라”고 분명히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평생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과 일의 터전들이 곧 선교의 현장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타내려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믿음을 보여 드려야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종국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평생 일상 속에서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과 일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엡 6:5-9 / 김광일 목사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성당에 사도 야고보의 무덤이 있습니다. 교통이 불편한 시절에 많은 순례자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야고보의 신앙을 생각하며 이 곳을 찾아 왔습니다. 성당의 신부와 수녀들이 안내하였는데 매일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였습니다. 순례자들에게 사도 야고보의 무덤을 보여 주고, 야고보의 행적을 들려주고, 함께 기도하고, 시간이 되면 식당으로 인도하였습니다. 하루에도 같은 일을 몇 번씩이나 하였습니다. 한 해 동안에 같은 일을 매번 반복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안내를 하다 보니 따분해졌습니다. 순례자들에게는 일생 한 번 있는 감격의 길이었으나 안내하는 이들에게는 지루한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정성도, 열정도 없이 대충 안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신부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느꼈습니다. 일생일대의 감격을 기대하며 찾아 온 순례자들을 최고의 정성으로 모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와 수녀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곳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순례자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찾아 오셨다고 생각합시다. 주님이 내 앞에 서 계신다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안내합시다. 최선을 다하여 설명하고, 정성을 모아 기도하고, 주님께 하듯 식사를 정성으로 대접합시다.” 이러한 자세로 안내를 시작하였더니 찾아 온 순례자들마다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순례자들을 안내하던 신부와 수녀들이 더 큰 감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을 가지고 만든 영성 훈련 프로그램이 바로 꾸르실료(Cursillo) 운동입니다. 그래서 꾸르실료 정신은 ‘주께 하듯 하라’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근본이 되고 꼭 있어야 될 중요한 태도를 강조하고 있는데 바로 종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종은 노예적 개념의 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 종을 말합니다. 출애굽기 21장에 보니, 주인 밑에서 6년을 일하다가 7년이 되면 종에게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자유를 얻은 종이 생각해보니 자신이 일하는 일터가 좋고 주인이 좋아서 주어진 자유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과 함께 영원히 있고 싶습니다. 이제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종은 제사장에게 가서 귀를 뚫어 그 표시를 하게 됩니다. 귀를 뚫는 것은 “당신의 영원한 종입니다” 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종은 다른 종들과 다릅니다. 영원한 자유를 얻었던 종입니다. 마음대로 살 수 있었던 종입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목적과 동기가 있어 값진 자유를 내어놓았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자유의 종’ 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종들은 자유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사명을 감당하는,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일하는 노예 개념의 종이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종의 모습은 바로 이 ‘자유의 종’ 입니다. 임명받는 임원들은 자유의 종으로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첫째로 성실하게 순종해야
한국교회사 초기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서울 중화동의 경동제일교회에 영수라는 직책이 있었습니다. 영수라는 직책은 장로에 해당되는데 교회를 관리하며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직책을 감당하던 엄영수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의 직업은 왕손을 모시는 마부였습니다. 하루는 왕손을 모시고 지방으로 여행을 가는데 가는 길에 “나으리, 예수 믿으시죠” 하고 전도를 하였습니다. 왕손이 물었습니다. “아니, 네가 예수를 믿느냐?” “예, 그렇사옵니다. 한 3년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마음이 너무 기쁩니다.” 그말을 들은 왕손이 마부에게 빈정거리며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너 같은 상놈이 양반이라도 된다더냐?” 그때 엄영수가 대답했습니다. “나으리, 예수믿는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양반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마부노릇을 잘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말이 왕손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열려 예수를 믿게 되었고, 훗날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여기의 '성실한 마음으로' 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오직 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이런 자세를 요구하는 것은 비록 육체의 상전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는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성실하게 섬겨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최고 자산은 성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만이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부디 두려워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하듯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관계가 거듭나야 합니다. 부부 관계부터 부모와 자녀 관계가 거듭나고 학교, 직장 등 모든 관계가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는 관계의 핵심은 성실한 순종입니다. 순종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주신 관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창조하신 하나님께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할 때 비로소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목회상담학자 웨인 오우츠(Wayne E. Oates)는 ‘일 중독자들’ 이라는 저서에서 켄터키주 겟세마네 수도원을 방문한 인상담을 썼습니다. 그 수도원은 치즈 제조로 유명했습니다. 수도사들이 직접 작업을 하는데 한 사람도 힘들어 하거나 지루한 기색이 없이 웃는 낯으로 찬송하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우츠 교수는 한 수도사와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수도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수도원은 치즈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치즈는 생계일 뿐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치즈를 만드는 노동시간 자체가 기도시간이요, 찬송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치즈 제조는 수익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기쁨이 중요합니다. 만족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이 일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보수를 현금으로 받지 않고 있으나, 행복이라는 값을 충분히 누리고 있습니다.” 오우츠 교수는 찬송을 부르며 노동하는 그들의 만족한 얼굴을 보면서 진정한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발견했다고 합니다. 직업의 행복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직장생활도 기도하는 시간이요 찬송하는 시간으로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행한다는 마음으로 하면 행복이 임할 것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여기에서 '눈가림만 하여' 와 '마음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그리스도의 종'을 대조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종들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바울은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육체의 상전이 볼 때에만 일하는 척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을 할 때 그리스도 앞에서 행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듯이 전심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의 대조를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의 종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위선적으로 충성하지 않습니다. 강제로 시킬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을 가지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깁니다. 세상의 상전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는 노예의 모습이 되면 지루하고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져, 강요당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기꺼이 선한 뜻으로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종들의 모습입니다.
셋째로 기쁨으로 섬겨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영국 연방의 자치령입니다. 오랫동안 백인들이 정권을 쥐고 경제권을 독점하며 살아온 국가입니다. 흑인들이 전체 인구의 70%가 넘지만,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백인정부에 의해 감옥생활을 한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젊은 시절 감옥에 들어가서 백발이 희끗희끗해서야 풀려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건강해 보였습니다. 긴 감옥생활에서 건강을 유지한 비결을 만델라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감옥에서 중노동을 하러 나갈 때, 사람들은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나는 좁은 감옥보다는 넓은 자연으로 나간다는 즐거움에 오히려 노동의 시간을 기다렸다.” 푸른 하늘을 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기쁜 마음으로 일한 것이 그의 건강 비결이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방에서 좌절과 분노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만델라는 감방 뒤뜰에서 채소를 가꾸며 새 생명 창조의 신기함을 누렸습니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 던져진 그는 교도소장에게 부탁했습니다. “교도소 마당 한 귀퉁이에 정원을 가꾸게 해주십시오.” 그는 허락을 받고나서 첫 해에 손이 많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고추와 양파를 심었습니다. 다음해에 여러 종의 장미도 심어보고 작은 묘목의 씨앗도 뿌렸습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정성스레 정원을 가꾸며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정원을 돌보듯 자신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교도소 마당에 무언가를 심고 가꾸던 그는 26년이 지난 후,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현실이 감옥이었어도 소망 중에 씨앗을 뿌리고 기쁜 마음으로 밭을 가꾸었더니 그 소망이 자라 복된 은총이 된 것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마지못해 함이 아니라 기쁨으로 일하는 태도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요, 하나님이 보내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곳에 서게 하셨다면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휘파람을 불며 즐겁게 일하게 합니다. 이런 태도야말로 그리스도의 종들이 갖는 자세입니다. 이 자세가 바로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동기와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마더 데레사(Madre Teresa) 수녀가 호주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데레사 수녀의 수행을 자원했으나 말 한마디 건넬 기회가 없었던 젊은 수사가 말했습니다. “수녀님! 뉴기니로 가는 비용을 부담하면서라도 수녀님 옆에 앉아 고언을 듣고 싶습니다.” 테레사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비용을 부담할 돈은 충분히 가지고 있나요?” 물었습니다. 젊은 수사는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 큰 목소리로 “예”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테레사는 “그 돈을 불우한 이웃에게 주세요, 그러면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듣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입니다. 즉 입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몸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세워진 임원들은 부디 성실한 마음으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눈가림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마음으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주께 하듯 섬기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행하든지 그대로 받을 줄 믿고 힘써 헌신하는 임원들과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
습 3:14-17, 엡 6:5-7 / 이성희 목사
서론
헬라어로 사람을 ‘안트로포스’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위를 향한 자’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위롤 향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머리가 제일 위에 지어져 있습니다. 사람과 달리 동물은 대체로 땅을 향해 삽니다. 네 발로 혹은 배로 기어 다니며 거의 모든 동물들은 입이 제일 앞에 튀어 나와 있습니다. 동물들은 땅을 위한 존재이며 먹기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만은 위를 향한 존재이며 먹기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동물처럼 변하면 동물보다 못한 법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슬프게 합니다. 어떤 동물이 성폭행을 합니까? 동물 사회에서 사기가 있습니까? 동물들이 서로 모함하여 헐뜯고 죽입니까? 사람만이 서로 물고, 서로 뜯고, 서로 죽이고 살아갑니다. 사람이 동물적인 삶을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사람들 스스로도 보람을 얻지 못합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근심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여 최초의 살인자가 되어 동기간에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라멕은 성경에 보면 처음으로 첩을 두어 축첩제도가 생기게 하였고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었습니다. 노아시대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항상 악했습니다. 홍수 이후에도 인간이 번성하게 되어 하나님께 대하여 도전하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대항은 끝이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은 죄인의 모습 그대롭니다.
로마서 1:28에는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고 합니다. 29절에는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들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를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미국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는 신앙인과 불신앙인의 후손의 다른 점을 조사하기 위하여 두 표본 모델을 선택했습니다. 신앙인으로는 미국의 걸출한 신학자요 목회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정을 택했습니다. 그는 프린스턴대학교의 설립자이며 칼빈 신학을 계승한 신학자입니다. 다른 한 모델을 마커스 슐츠의 가정입니다. 그는 뉴욕에서 큰 술집을 경영하여 거부가 된 사람입니다.
에드워즈의 가문은 지금까지 8대를 내려오면서 부통령과 주지사가 3명, 대학총장이 13명, 그 가운데 예일대학교 총장이 2명, 인구 6백만 이상 대도시의 시장이 3명, 장. 차관급 공무원이 82명, 변호사가 149명, 판. 검사가 48명, 목사가 116명, 의사가 68명, 교수가 65명, 세계적 사업가가 75명, 뛰어난 발명가가 25명 탄생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문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슐츠의 가문은 후손이 1,062명인데 그 중에 교도소에 수감된 자가 6명, 정신병자. 알콜중독자가 58명, 창녀가 65명, 영세민이 286명, 교육받지 못한 자가 460명인데 이들에게 지출된 국고가 무려 1억 5천만 달러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가문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유대인 속에는 안식일 DNA가 있다고 합니다. 수천 년을 안식일을 지키다보니 안식일 DNA가 생긴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선을 쌓으면 선DNA가 생깁니다. 수천 년 동안 악을 쌓으면 악 DNA가 형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DNA도 있고, 슬프게 하는 DNA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DNA를 만들어 대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스바냐 3:15에는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 다음 17절에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까? 왜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은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여러분은 내 자녀이기 때문에 예쁩니까? 예쁘기 때문에 내 자녀입니까? 남편이 멋있어서 남편입니까? 남편이니까 멋있습니까? 예쁘기 때문에 아내입니까? 아내이니까 예쁩니까? 미국의 어느 목사님에게 그 교회의 청년이 와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자신도 이제 결혼을 해야겠으니 좋은 처녀를 소개해 달라고 청년은 목사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어떤 사람을 원해?”하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예쁘고, 지혜롭고, 건강하고, 똑똑한 사람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일등신부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자네, 장가가기 틀렸네?” 하고 말했습니다. “왜요?” “그런 사람이 세상에 딱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시집을 가버렸네”. “누군데요?” “내 아내일세”. 자기 아내가 돼야 가장 예쁘고 가장 기쁜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사람이 된 사람을 사랑하시고,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장난감 사줘”. 이 말은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 대접하는 말입니다.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이 말은 학생이 선생님을 대접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주십시오. 해 주십시오”. 이 말은 하나님을 대접하는 성도의 말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품에 있고, 부모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부모를 기쁘게 합니다. 자녀는 이미 부모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하신 자, 보호받는 자 된 것을 기뻐하십니다. 구원받은 자는 이미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사야 43:1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확인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참일 때 북군의 어느 장군이 링컨대통령에게 와서 “하나님이 우리 편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링컨은 “하나님은 항상 우리 편인데 나의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 편인가’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이면 하나님이 구해주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편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끔찍이 챙겨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리 잘못해도 챙겨주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애굽은 미워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마귀의 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까? 하고 싶어도 그렇게 못합니다. 마귀 편은 항상 마귀가 좋아하는 일만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마귀를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알카에다나 탈레반이 무엇 때문 미국에 끊임없는 테러를 합니까? 우리나라가 아프간에 파병한다고 우리도 보복을 하겠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기편이 아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기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보복과 전쟁이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사람들은 편을 듭니다. 특히 전쟁 영화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느 한 편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악한 사람도 착한 사람 편을 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편이 이기를 원합니다.
아기가 조금 자라면 예쁜 짓을 해보라고 시킵니다. 엄마 아빠가 “예쁜 짓”하면 아기가 예쁜 짓을 해요. 그런데 예뻐요? 엄마 아빠는 예쁘다고 야단이지만 남이 보면 별로에요. 그 정도는 다른 아기도 다 해요. 그런데 우리 아기가 하는 예쁜 짓은 예뻐요. 예쁜 짓이 나를 기쁘게 해요. 왜요? 내 자녀니까, 내 편이니까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기쁨을 줍니다. 사랑해야 기쁘게 합니다.
아이가 아빠를 닮아 천식을 앓고 있는 아기가 있었습니다. 연신 ‘콜록 콜록’합니다. 그런데 아빠는 그 아이를 보고 “콜록거리는 건 안 좋지만 내 닮은 건 좋다”고 합디다. 내 자식이 하는 것은 그렇게 사랑스럽고 기쁜 일입니다. 로마서 8:28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하는 짓이 예쁜 짓입니다.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올해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눈가림이 아니라 마음으로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6에는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는 겉에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중심에 있습니다. 눈가림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눈가림만 하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옵탈모둘리아’입니다. 이 말은 골로새서 3:22과 이곳에만 나오는 말로 바울이 만든 용어라고 봅니다. ‘옵탈모스’는 눈이고, ‘둘로스’는 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눈의 종’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eyeservice 혹은 external service라고 합니다. 눈에 보기 좋게 섬기거나 겉으로만 섬기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는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기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못 속입니다.
골로새서 3:22에서도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눈가림만 하면 사람은 기쁘게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눈가림만 하면 왜 하나님께 기쁨이 안 됩니까? 하나님께는 눈가림이 안 통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눈 가리고 아웅’이 되지만 하나님께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다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서 16:7에는 “사람은 외모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합니다. 로마서 8:27에는 하나님을 “마음을 살피시는 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식(外飾) 전문가였습니다. 겉으로만 거룩하고, 문자적으로만 순종하고, 말로만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하지만 속에는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마태복음 7:15에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봉사,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헌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이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는 독일 황제 칼 5세와 교황에게 고소를 당하고 사면에 그를 위협하는 말과 행동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황제는 루터의 모든 항의문을 취소하면 용서하겠다고 하였고, 하루의 여유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루터는 “나는 이 모든 것을 고칠 수 없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서있습니다. 나를 도우소서”라고 단호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귀에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단호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몹쓸 병에 걸려 시력과 기억력을 함께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와서 묻습니다. “시력과 기억력 둘 다 잃는 것이 불쌍하여 하나만은 잃지 않게 해 줄 테니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그 때 그는 “시력을 택하겠습니다. 지난날을 기억하는 것보다 앞으로 일을 보는 게 낫겠죠”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앙이란 선택입니다. 가장 중요한 선택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1:10에는 “이제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하나님께 좋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구해야 합니다. 옛말에도 신통해야 인통하고 인통해야 형통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통하면 모든 것이 통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모든 것이 잘 됩니다.
오늘의 본문 6, 7절을 보세요. “마음으로”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이 말의 영어 성경에 보면 “with all your heart”라고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라는 뜻입니다. 위선적 충성이나 억지로 시킬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중심 보신다는 하나님 앞에 있는 자세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루터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Coram deo’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라는 말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존전 앞에 있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종들의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굴복할 따름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맹목적인 굴종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매를 맞고, 팔려가고,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순종은 참 순종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의 부모님께 대한 순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한 선한 순종입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참 순종입니다.
요한일서 3:18에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합니다. 형식적으로나 보이기 위한 가식적 모습이 아니라 참 마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인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하여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세요. 그들은 부요한 것 같았지만 가난한 것, 부족한 것, 곤고한 것, 가련한 것, 가난한 것, 눈 먼 것,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했지만 속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바울을 보세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속에 알맹이가 꽉 찬 곡식처럼 내면이 튼튼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3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경고하십니다.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척’ 하지 마십시오. 곰을 만나면 죽은 척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곰을 만나 죽은 척했습니다. 착한 곰을 만났는데 이 착한 곰은 이 사람이 진짜 죽은 줄 알고 묻어주고 갔다고 합니다. 잘못 ‘척’ 하다가 죽는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2:37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라고 하신 하나님이 눈가림으로 섬기라고 하실까요? 절대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라고 하신 하나님이 눈가림으로 하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절대 아닙니다.
결론
영국의 시인 루퍼트 부르크가 어느 날 리버풀에서 항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갑판에 올라가 부두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는 다른 사람들 보자 절실한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배에서 내려 부둣가에 내려가 거리를 배회하던 한 소년에게 “얘야, 너 돈 벌 마음 없니?”하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있지요”라고 얼른 대답했습니다. “그럼 이 돈을 받아라. 그리고 배가 떠날 때까지 여기 서서 나에게 손을 흔들어 다오”. 사람들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돈을 들입니다. 기쁨을 얻기 위하여 투자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하나님은 엄청난 투자를 하셨습니다. 그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시고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비들아!
엡 6:4 / 김남준 목사
"아비들아"
유대인들의 교육은 그 어머니의 영향이 지대합니다.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가 이방인이어도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그 아이는 유대인으로 받아줍니다. 후천적인 교육이 선천적인 핏줄보다 훨씬 더 무섭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아버지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정에 있어서 그 가정을 세워가고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교육하는 궁극적인 책임을 아버지가 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자녀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 대하기도 힘든 사회입니다. 그러나 비록 아버지들이 실업자처럼 매일 가정에 앉아서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수는 없는 형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역시 한 가정을 바르게 세워야할 책임을 가장에게 물으십니다.
부모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고 해서 아이들이 올바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내면의 세계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흘러나와 자녀들의 마음속에 흘러 들어가게 될 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가장들에게, 남편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바쁘다는 핑계로 가장의 책무를 외면하는 남편들, 아비들에게 일침을 주고있습니다. 아버지가 독실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정상적인 가정으로 돌아가는 첩경입니다.
오늘날은 아내에 의해서 억지로 끌려나오는 신앙 생활이 대부분 남성들의 신앙을 대변하는 그림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부인이 남편보다 신앙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아예 남편의 자리를 점유해버리는 사태도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인이 더 신앙에 열심이 있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남편으로 하여금 가장의 주권을 행사하게 하고, 남편에게 남편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어서 그 남편이 가정의 모든 제도들을 바르게 세우고 원리들을 바르게 세우고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하여야 할 영적인 책임과 부담을 지고 있다는 것을 수시로 깨우쳐 줌으로써 남편이 그 일들을 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지혜로운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 자녀를"
성경은 '아비들'을 불러내면서 '너희 자녀를' 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자녀가 아니라 너희 자녀라고 말하는 것은 부모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이들 중에서 특히, 자기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를 향해서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식된 자들이 모든 이 세상의 노인들이 아니라 자기의 부모를 향하여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듯이, 또한 부모도 자기 몸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향해서 매우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이를 높은 지위에 올려놓지 못하거나 훌륭한 대학에 못 보낸 것은 책임이 적습니다. 그러나 좋은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부모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끊어질듯 끊어질듯 하면서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면면히 이어진 것은 탁월한 가정교육의 덕택이었습니다. 부모를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속에 철저히 신앙이 들어가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사십 세가 되어 세상에서 배울 만큼 배웠고, 최고 학부를 나왔고 말과 행사가 다 능하여서 어디서든지 지도자의 행세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민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즐겁게 여겼습니다. 누가 그런 가치관을 집어넣어 주었습니까? 어머니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정말 감화를 잘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 부모를 통해서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신앙이 물려지도록 이 법칙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어떨 때 가장 그 신앙이 깊이 심겨지는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왜곡되고 잘못된 것들이 어린 시절 심겨지면 삐뚤어진 상이 되어서 영원히 그 인생의 시야를 좌우합니다. 그런 것들을 바르게 잘 가르치라고 부모의 신앙을 보고 어린아이에게 유아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식이 완전히 믿음에서 파산하고 나면 그 부모의 인생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아비들에게 자녀를 향한 특별한 의무감들을 끊임없이 고취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학교를 보면서 늘 느끼는 것이 부모가 그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의 반만 신앙생활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 영혼이 정말 놀랍게 변할 것이란 사실입니다.
자녀들의 인생은 부모 인생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장성해 결혼할 때까지 그 인생은 부모와 결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베냐민을 요셉 있는 애굽으로 올려보낼 때 유다가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와 이 아이는 생명이 결탁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부모와 자식은 생명이 결탁된 것입니다. 자식이 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떠나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서 인생을 망치게 되면 자기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던지 하나님 앞에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자식만 바르게 잘 키워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놓아도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없이 하나님 앞에 실패한 삶을 살았던 그 사람 밑에서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자란 아들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올바르게 자라면 부모로서는 일단 신앙에 있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철저하게 그 아이를 위한 심각한 의무를 부모에게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권리도 주셨습니다.
율법을 보면 부모에게 대항하고 부모를 치는 자는 죽여버리도록 명령했습니다. 율법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에 대해서 물려받은 그 권한과 권세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권세와 권한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충분히 보이시기 위해 이런 중한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부모가 자녀를 권세있게 다스리고 치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녀들을 장악해야 합니다. 잘 가르치던 못 가르치던 그것은 나중 문제고 우선은 자식을 부모가 손에 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매한 신앙의 인격이 없어도 일단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커다란 범죄인가 하는 것을 철저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다음에 교육이 됩니다. 요즘 가장 커다란 위기는 부모가 자녀들에 대해서 모든 권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벗어났으면 지금부터라도 손안에 넣어야 합니다. 완력으로 손안에 넣던지 아니면 감화를 시키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손안에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모의 손아래서 복종하는 아이로 만들어야 합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소극적인 명령 하나와 적극적인 명령 하나입니다. 그 소극적인 명령은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칫 오해하면 아이들에게 무조건 잘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는 전혀 아닙니다. 아이들을 때리지 말아라 아니면 징계하지 말아라 야단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고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어떤 때 아이들이 부모에 대해서 노여운 마음을 갖게 됩니까?
우선 첫째는 징계가 올바르지 못할 때입니다. 징계가 올바르지 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징계를 가하는 것, 혹은 잘못한 것이 적은데 큰 징계를 가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징계의 정도가 자기 잘못한 것을 이미 초과했다고 생각되어 속에서 반감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징벌을 줄 때는 벌을 줄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를 속히 결정을 해서 용서하려면 심각하게 충고한 다음에 확 용서해버리고 징계를 하려면 심각하게 한 다음에 그 잘못한 것에 비례하는 만큼 징계를 해야 합니다. 잘못한 것보다 과하게 혼날 때 그때 자녀들 속에서는 조금 잘못해서 미안한 의식까지도 다 사라집니다. 매가 사람을 방종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자녀들이 부모를 향해서 노여워하게 되는 경우는 부모 자신은 그렇게 안하면서 나에게 그것을 강요할 때입니다. 문제는 부모 자신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겁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무리 어려도 속에서 다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당장은 매가 두려워 아무말 없이 따를지라도, 유치원만 다녀도 벌써 속으로 다 옳다, 옳지 않다는 도덕적인 판단을 합니다. 더군다나 그 아이가 중학교 정도 올라가고 나면 몽둥이와 용돈은 그의 기계적인 복종은 받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부모를 닮아야되겠다는 것은 받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너무 오랫동안 고통을 주는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잘못된 성품이나 생활 관습이나 습관이나 혹은 잘못된 사상이 자식들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을 지속적으로 줄 때 자녀의 마음에 노여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부모가 하나님 앞에 책망 받아야 할 영역입니다. 자기 자식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부모들은 자식에게 그렇게 하고도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그것은 잊어버려지지가 않고 오래도록 남아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주위에서 정말 이상적인 가정을 찾기는 너무나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회복되지 않는 한 우리 자녀들의 영혼도 진정한 회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 아비들을 향한 권고는 단순히 사랑의 명령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애끓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인 것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부모들이 소극적인 명령을 이행하지 않아서 자녀가 이같이 노여워하는 마음을 같게 되면, 적극적인 명령 역시 이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본문은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라는 적극적인 명령을 아비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오직 교양과 교훈으로 양육하되, 그 교훈은 주의 교훈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올바른 신본주의적인 기독교 사상이 들어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도 부모의 심각한 의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잘 먹이고 잘 키워서 아이가 성인이 되는 것만이 부모가 할 일이 아니라 그 아이가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잘못된 사상을 섭취하지 않도록 바르게 양육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한 주의 교양과 훈계를 굳이 구분한다면, 주의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인 성숙에 관한 것이고, 훈계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신앙의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교양으로 양육한다는 이야기는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이고 하나님의 자녀된 몸가짐인가 하는 것들을 실제적인 삶 속에서 가르쳐주는 것이고, 이 훈계는 객관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사람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게끔 깊이 새겨주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이 세상 최고의 신학교는 어머니 무릎이다"라고 했습니다.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덕 그리고 내면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질 등입니다.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삶 속에서 함양시켜주는 임무를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셨습니다. 어린아이가 자라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면, 그가 무엇을 믿고 어떤 신분의 사람이며,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위해서 어떠한 의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이 아이들에게 철저하게 교육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부모들이 자기의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키든지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는 방식과 철학으로 자녀들을 교육시켜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우리가 사라지고, 그 아이가 우리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우리보다 나은 신앙을 소유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자녀를 교육하는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방법으로,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 가정 속에서 다시 또 그런 자녀들이 출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견고해져 갈 것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맺음말
무너진 교회 뒤편에는 반드시 무너진 가정의 신앙교육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신앙교육을 교회에만 맡겨서는 안됩니다. 이번 주부터 교회에서 뭘 배우고 왔으면 "무엇을 배우고 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그 아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하나 늘어가는 것을 부모는 영어단어 하나 더 배워 가는 것보다 훨씬 더 기쁘게 생각함을 아이들에게 인식시켜 주십시오. 부모의 주된 관심사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새겨질 때에 아이들도 그 신앙을 위해서 열심을 내게 됩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올바르게 아름답게 자녀를 교육하는 것이 돈을 벌고 이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도 더 심각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 양육의 사명이 우리 관심의 주제가 되어서 그 아이를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으로 키워가는 데에 마음과 정성과 기도와 눈물을 쏟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신 것은 우리에게 이 심각하고도 거룩한 사명을 부과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 심각한 의무를 충만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감당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비들아! 자녀를 양육하라
에베소서 6:4, 사무엘상 3:13-14
'남극의 신사'라고 불리우는 펭귄은 자식을 극진히 사랑하는 부성애의 대표적인 동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암컷 펭귄이 알을 낳으면 수컷 펭귄은 알이 깨지지 않도록 자기의 발등으로 알을 받습니다. 알을 낳은 암컷은 먹이를 찾아 나서고, 알을 받은 수컷이 그 알을 품습니다. 영하 50도의 추위와 시속 300km의 강풍 속에서도 수컷은 알이 깨질까봐 식음을 전폐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한 달 가까이 알을 품고 있습니다. 암컷은 먹이를 찾아 나섰다가 알이 부화되기 2,3일 전에 돌아와 수컷과 교대를 해서 알을 품습니다.
한달 가까이 식음을 전폐하고 알을 품고 있던 수컷은 기진맥진해서 죽음 직전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센 바람이 몰아쳐도, 그 어떤 혹한의 추위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배가 고파 허기져도 아빠 펭귄은 절대로 알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습니다. 아무나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부성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 전에 지나간 '어린이날'을 맞이하면서 신문과 방송마다 '어린이'에 대한 특집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눈에 띠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최근 들어 자녀들의 방임형 학대가 증가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제대로 밥을 주지 않거나 학교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혼이 늘어나면서 자기가 낳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포기하기는 부모가 늘어가고 있다는 슬픈 보도도 있었습니다. 학대라고 부를만큼 아이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만 보도되고 있지만, 사실 먹을 것을 주면서도 실제로 양육을 포기하거나 바르게 양육하려는 의지가 없는 부모들까지 하면 양육받을 권리를 누리지 못한 아이들은 너무 많을 것입니다.
정말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그 자녀에 대한 양육의 책임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부모된 책임을 너무나 쉽게 내팽개쳐버린 세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성경은 우리 신앙의 부모들에게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 신앙인 부모들이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화나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너희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 하면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이건 자녀들에게 주는 말씀이어야 하지 않느냐'고 되물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이 우리에게 화나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느냐'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화나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을 공동번역에서는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부모님들이 너무 쉽게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도, 자녀들이 상처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고 물어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라고 업신여기지 말고, 아무리 작은 아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실족케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그들을 실족케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첫 번째로 우리의 자녀들도 엄연한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도 인격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말과 행동에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무리 작은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비록 어른들이 보기에는 작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전 인격이 달려 있는 소중한 감정들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너무 자주 그들의 감정을 무시합니다.
몇주 전에 주방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전도사님의 큰아들 예찬이가 우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주위에 있던 어른들은 예찬이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왜 우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밥먹다가 우는 아이를 보면서 어른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농담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찬이가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속상해 죽겠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자기 마음도 모르고 웃고 농담하고, 자기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으니까 "제발 말 좀 그만 하라"는 것입니다.
오후 예배 들어가기 전에 놀고 있는 예찬이게 "밥 먹다가 왜 속상했어?" 그렇게 물었더니, 예찬이가 "지금은 행복해요" 그러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감정이 어른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 어른들의 웃음거리가 되면 그 아이는 인격적으로 무시당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우리 어른들이 느끼는 것과 똑같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그들의 감정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작은 그 자체로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실족케 하지 않으려면 내가 낳은 아이라 하더라도 내 소유물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청지기들입니다. 그건 아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잘 양육하고 키우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아이들입니다. 절대로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마치 내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 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래도 좀 나은 편입니다. 내 물건처럼 생각하는 부모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마치 종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내 물건이나 종처럼 취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바르게 키웠는지에 대해서 반드시 회계하자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랍비가 안식일에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두 아이가 집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랍비의 아내는 아이들의 시체를 이층으로 옮긴 뒤 흰 천으로 덮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남편인 랍비가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귀중한 보석을 잘 보관해 달라고 맡기고 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주인이 나타나 맡긴 보석을 돌려 달라고 했어요.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러자 랍비는 별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라는 듯이 "말할 것도 없이 맡은 보석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되겠지." 그러자 랍비의 아내가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실은 조금 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셨던 귀중한 보석 두 개를 찾아 가지고 하늘로 돌아갔어요." 랍비는 아내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하나님의 보석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석을 맡겨주셨는데, 우리는 그 보석을 마치 냇가에 굴러다니는 값어치 없는 돌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 원인은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감정적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서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고후 4:7)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만 아니라 아이들도 질그릇 속에 감추어진 보화입니다. 보화는 소중하기는 소중한데, 질그릇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에 깨지기 쉽습니다.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질그릇 안에 담겨져 있는 보화처럼 연약한 아이들에게 감정적으로 대합니다. 내 기분이 좋을 때에는 잘 대해주다가도, 내 기분이 좋지 않으면 막대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 감정이 조절되지 않고 감정으로 대하면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와 같은 우리 아이들의 인격이 깨어지고 꿈이 깨어지고 행복이 깨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자녀를 양육할 때에 "사랑하는 것은 뜨거운 가슴으로, 꾸짖고 책망하는 것은 냉철한 머리로" 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것은 머리로, 꾸짖는 것은 가슴으로 하면 아이를 바르게 양육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계산된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며, 폭발하는 감정에 따라서 아이를 꾸짖는다면 그 꾸지람은 역효과를 내고 맙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것은 뜨거운 가슴(감정)으로 해야 하고, 꾸지람과 책망은 냉철한 머리(이성)으로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우리보다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습니다. 아이들을 화나게 하거나 낙심케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내 방식대로 양육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열은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교육을 시키려고 합니다. 논밭을 다 팔고, 집을 팔아서라도 가르치려고 합니다. 심지어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빚을 지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영어를 잘하게 한다고 아이들의 혀까지 자르는 게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입니다.
물론 그런 교육열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우리나라의 교육열 때문에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교육열이 대부분 부모들의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을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고생해서 가르쳐 놓으면 나중에 아이가 성공해서 부모를 잘 모실 것이고, 공부를 많이 시키면 훌륭하게 자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부모들은 자기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아이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식은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라 주어야 마음이 놓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공부 잘하는 자기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법대에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노래를 너무 너무 좋아해서 성악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법대에 가라'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자기 꿈을 포기하고 법대 가기 위해서 공부를 했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으니까 성적도 떨어지고, 결국에는 4수까지 해서 성악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법대에 가고, 의대에 가라는 것은 부모들의 욕심입니다. 아이들의 개성과 소질을 무시한 채 부모의 욕심대로 커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내 욕심대로, 내 방식대로 양육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양육을 해야 합니다.
②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자녀를 양육하기를 원하십니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우리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여야 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자녀 양육의 목적도 바로 이것이어야 합니다.
'교양'이라는 말은 '훈련'이라는 말입니다. 훈련에는 피나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둬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자라가지 않습니다.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과감하게 채찍을 가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육에서 채찍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채찍질을 금하고 있긴 하지만, 훈련을 위해서는 채찍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잠언에서도 자녀를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는 채찍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 23:14)고 했고,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 29:15)고 했습니다.
음부의 자식이 되지 않게 하려면 채찍이 필요하고, 채찍이 필요할 때에 채찍하지 않으면 그 자식은 결국 부모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못된 자식이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채찍을 아끼다가 자식을 망친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구약의 말씀에 소개되고 있는 엘리 제사장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사시대 마지막 사사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삼상 2:12)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처럼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못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사무엘상 2장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제물을 가져옵니다. 그러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환을 시켜서 제물을 자기들 마음대로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제물을 삶고 있으면 갈고리로 걸리는 대로 제사장 몫이라고 가져 가버렸고, 불에 태워 드릴 제물은 태우기도 전에 '생고기를 원한다'며 생고기를 가져 가버렸습니다.
제물로 드린 짐승 가운데 일부는 제사장의 몫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사장의 몫이라 하더라도 먼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다음, 제사장이 자기의 몫을 가져가야 합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드리기도 전에 자기들 마음대로 제물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이 그런 사악한 짓을 일삼고 있는데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엄하게 꾸중을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쳐서라도 하나님께 범죄한 자식들의 악행을 고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성적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인 회막에서 말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조용히 타이를 뿐입니다. 그런데도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타이름을 듣지 않습니다. 이미 망나니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의 가문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실 수 없다고 판단하시고는 사무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어린 사무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엘리 제사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 죄악이 너무 커서 어떤 방법으로도 용서가 되지 않을만큼 멀리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을 바로잡아주지 못했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다."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서는 채찍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채찍을 아끼면 아이를 버리게 될 수 있습니다. 후에는 부모를 욕되게 하는 자식이 되고 맙니다.
세 번째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 속에는 부모가 먼저 삶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말로부터 배우는 것보다도 삶과 행동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러기에 부모님들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아이들에게 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바르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앙의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주일성수하지 않으면서 자식들더러 주일학교에 빠지지 말라고 말하면, 지금 당장은 부모님 말씀이 무서워서 주일학교에 가겠지요. 그러나 그런 신앙은 어떤 포기될지 모르는 불안한 신앙일 뿐입니다. 주일 성수하는 것, 십일조 생활하는 것, 기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 겸손히 섬기는 것, 신앙인답게 사는 것, 그런 모든 것을 부모님이 먼저 본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지 말라고 해도 따라합니다.
어느 설문조사에 이런 보고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만약 내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물었더니, 아주 흥미로운 대답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겠습니까? 그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기들이 아빠 엄마가 된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진짜 아빠와 진짜 엄마를 혼내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답니다. 그 이유는 그 동안 엄마 아빠도 잘못한 것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는 실수하고 잘못하고서도 아무런 반성이나 벌을 받지 않으면서, 자기들이 잘못하면 어김없이 나무라고 혼내기 때문에 너무나도 불공평하게 느낀 것입니다. '삶'은 없고 '말'로만 가르치려는 부모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비행 청소년은 없다. 단지 비행 부모가 있을 뿐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아 뒤에는 반드시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부모의 모습이 10년, 20년 후의 자녀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아이들에게 본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삶으로 본을 보여주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먼저 본을 보이시고 "내가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해 줍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오늘 어버이주일에 부모된 우리들이 먼저 이 귀한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아름다운 생애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장해 갈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자녀교육
엡 6:4 / 남 호 목사
"아비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라고 자녀교육에 대해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의 젊은 부부들은 부부중심의 가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자녀를 작게 낳으려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낳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목표가 짧은 인생 동안 두사람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자국인들이 자녀를 낳지 않으니까 외국 유학생들이 자녀를 낳아도 양육비를 지급해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유학생들은 아이를 셋만 낳으면 공짜로 공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파리에 갔을 때 유학생 집에 아기 돌잔치가 있어 갔는데, 유학생 부부들이 아기를 보통 한, 둘, 셋 정도 데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 한국 젊은이들도 아기를 많이 낳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유를 물어보면 작게 낳아서 훌륭하게 키우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 교육비가 모자라서 오락시설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에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말씀 중에 기업, 상급, 화살, 복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런 말들은 자식은 부모에게 축복이 되고 명예가 되고, 방패가 되고, 위로와 사랑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소유를 내 종에게 상속해야 합니까?' 라고 한탄했습니다. 자식이 없으니까 소유를 상속해 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한나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너무 자녀를 낳고 싶은 나머지 성전에 올라가서 술 취한 사람같이 울부짖으며 태를 열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오랫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니까 몸종에게 괄시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창1:28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의도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자녀를 낳아서 양육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성경을 통해 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차례로 생각해 보며 자녀양육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고, 반성하고, 회개하는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Ⅰ. 노엽게 하지 말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어린아이의 인격에 상처를 내지 말라' 또는 '어린아이의 인격을 존중하라' 라는 뜻입니다. 어른은 어른의 인격과 입장이 있고, 아이들은 아이들의 인격과 입장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인격과 입장을 무시하고 어른들의 입장에서 지도하고 양육할 때 아이들의 인격에 상처를 내게 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들의 형편을 이해하고, 그들의 생각을 귀하게 여겨 주어야 합니다.
만약 자녀가 학업성적이 올라가지 않는다면 꾸중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아이의 입장을 무시하고 '너는 법관이 되어야 한다' '서울대학 법대를 가야한다' 라고 부모의 바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기도 합니다.
'더글라스 맥아더'의 자녀의 기도문을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주여!
내 아이가 약해질 때
자신을 아는 강한 힘을
두려움 앞에서는 용기를
옳은 일로 인한 패배에는 긍지를 가지며
승리하였을 때 겸허하고 온유한 자로 키우게 하소서
내 아이가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을
가장 보배로운 가치로 삼고 살도록 키우게 하소서
비오니 내 아이를 평탄한 길로 이끌지 마시고
고난과 역경의 삶으로도 인도하소서
거센 폭풍에도 견딜 줄 알게 하시며
패배한 이에게는 사랑으로 대할 줄 알게 하소서
맑은 마음 더 높은 목적으로 살며
남을 지배하려들기 전에 자신을 지배하며
미래를 향해 발돋움하면서도 과거를 잊지 않는 아이로 키우게 하소서
이렇게 된다면 먼 훗날에
나는 그의 아비로써 헛되지 않게 살았노라
당신께 조용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녀의 입장을 알고 계십니까? 자녀의 계획과 생각을 알고 계십니까? 무엇이 자식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자녀의 형편을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자녀들의 입장을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밥 먹여주고, 옷 입혀주고, 잠재워주고, 학교 보내주면 부모의 노릇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녀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자녀의 입장을 (현실) 보살펴 주어서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자식의 계획과 생각을 이해하고 선하게 인도할 때, 성경에서 말하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부모가 될 줄로 믿습니다.
Ⅱ. 교양 하라(교육으로 양육하라)
교양이란 말은 '어린아이를 양육함', '교육', '훈련', '징계'의 뜻을 지닙니다.
자녀를 교양 하는데는 2가지의 방법이 있는데, 첫 번째가 체벌을 통한 훈련이고, 두 번째가 징계로 잘못된 점을 교정시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양육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므로 잘 양육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잠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초달' → 회초리로 볼기나 종아리를 때리는 일
잠23:13-14 "아이를 훈계치 아니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할찌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잠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 히브리인들의 가정교육을 잠깐 살펴보면
1. 히브리 민족은 교육 공동체로서, 그들은 삶 자체가 교육이며, 이 교육을 종교 교육의 이상을 실천하는 최상의 방법으로 생각합니다.
2. 히브리인들의 가정교육 내용은 하나님의 뜻과 생의 방향을 제시하여 생활하게 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 교육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계시와 율법으로 교육합니다. 교육하는 교과서는 성경이며, 성경을 통해 철저한 교육을 시행합니다. 예를 들면 아기가 탄생하는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서 양육합니다.
★ 종교 개혁자들의 가정교육관을 생각해보면
·루터 → 어린이의 가정교육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데 사랑이 아동교육의 원동력이라고 말했으며, 징계를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해야된다고 말했습니다. 벌할 때는 벌하는 사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벌하며, 벌을 받는 아이도 하나님 앞에서 책망 받는 것을 느끼고 그 벌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아이를 잘 양육하도록 기도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죤 칼빈 → 가정교육을 강조하였으며, 1년에 한번씩 심방해서 부모들이 자녀 교육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지 여부를 조사케 하고, 부모의 행동과 자녀 교육을 감독케 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선물로 받았으니 교육을 통해서 잘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부모가 자녀를 양육해야 됨을 말씀하고 있으며, 종교 개혁자들도 위와 같이 자녀 교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양육하라는 말씀은 어린아이가 잘못했을 때 사랑으로 덮으라는 것이 아니라 체벌하든지 징계하든지 잘못을 인식하고 고쳐서 바른 가운데 자라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자녀에 대한 의무"
문제아 속에 문제의 부모가 있습니다. 자녀의 운명은 어머니가 만듭니다. 가출하는 자녀들의 세 가지 큰 이유를 보면
① 자녀의 심리를 이해해 주지 못해서(30%)
② 부모의 가정불화(50%)
③ 갈증을 해결해 주지 못해서(20%)
히브리인들은 자녀들에게 잡은 고기를 주지 않고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돈을 바르게 버는 법과 관리하는 법, 그리고 사는 길을 알려준다고 합니다.
가정은 인간의 감정과 정서가 싹트고 자라는 요람이요, 가치관과 인생관의 터전이 마련되는 기초적인 교육의 터전입니다. 부모는 마땅히 자녀들의 말을 들어주는 귀, 칭찬하는 입, 채찍을 든 손, 기도하는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욕은 물론 저주도 하지 않아야 하고, 그렇다고 방관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며 키운 자녀는 멸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근면, 소망을 심어주어야 하고, 경험과 자립성과 적극적인 신앙을 확실하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양육하면 바르게 자라고 성공적인 자녀로 양육될 줄 믿습니다.
Ⅲ. 훈계하라고 했습니다.
언어로 훈계하고 설득시켜서 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이해하고 자녀도 부모를 이해해야 합니다.
때때로 마음에는 있는데 표현력이 부족해서 훈계의 효과를 거두지 못할 때가 있고, 감정적으로 치우쳐 이성적 논리보다 감정이 앞서므로 훈계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를 설득할 수 있는 표현력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훈계할 때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워야 합니다.
성경에는 부모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15:- 가나안 여인은 자녀를 위해 예수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응답이 없습니다. 또 부탁합니다.
거절당합니다. 그래도 또 부탁합니다. 멸시와 모욕을 당합니다. "주인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 고 예수님이 모욕하여도 계속 부탁합니다. 자기는 무슨 취급을 받더라도 자식만 치유된다면 좋다는 마음입니다. 이런 자식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훈계를 할 때 자녀 교육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 많은 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인간의 지능은 4살 이전에 90% 완성이 되며,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른 시기는 출생해서부터 6개월까지라고 합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베튼 화이트 박사는 어머니의 행동이 1-3살 사이 어린이의 정신 발달을 결정하며 이 시기가 일생 살아갈 토대를 쌓는 시기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녀의 교육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말고, 부모된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교양으로 양육하고, 훈계로 양육하면 훌륭한 자녀들로 양육될 줄로 믿습니다.
성인 아이를 치유하라
엡 6:4 / 이중표 목사
사람은 누구나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부모가 되어 자녀들에게 좋은 유산을 물려주려는 소원을 갖게 됩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은 물질도 있고, 정신도 있고, 명예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줄 수 있는 유산 가운데 가장 큰 유산은 인격입니다. 인격은 유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의 인격을 닮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서 성장했습니다. 부모에게 체질을 받았습니다. 용모를 받았습니다. 건강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질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 중에는 나쁜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는데 나쁜 것은 상처이고, 좋은 것은 은혜입니다. 나쁜 것은 우리의 자아상, 인간성을 굴절시키고 병들게 하지만 좋은 것은 주님의 형상을 닮도록 만들어 줍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4절)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은 나쁜 영향이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은 좋은 영향입니다.
“어버이들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4절, 공동번역)
우리 부모님은 죄인이요, 완전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좋은 영향만 미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상처도 주고, 아픔과 고통도 줍니다. 자녀에게 잘못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속에 있는 모순된 자아로 인하여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최근에 청소년들에게 설문 조사를 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기 부모를 미워한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싫어하거나 전혀 존경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그 원인으로는 자존심의 실추, 이유없는 학대, 비난, 상처, 욕설, 구박 등을 들었습니다.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부모, 형제, 그리고 주변에 있는 친척, 선생, 친구에게서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영향을 받을 때 좋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나쁜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시절에 받은 영향이 우리의 일생을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린시절에 받은 영향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성장하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잠재되어 있던 것들이 밖으로 표출되게 됩니다. 현재 내 모습은 내가 어린시절에 받은 영향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외적으로는 성장했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성장하지 않은 어린 아이가 숨어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길러가면서 자녀가 성장하지 않으면 부모의 마음은 아픕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잘 성장하는데 우리 아이는 성장하지 않을 때 마음이 아픕니다.
이와같이 우리 속에도 어린시절에 받은 상처 때문에 자라지 못한 어린 아이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성장을 해서 어른이 되었지만 내적으로는 어렸을 때 받은 상처가 나를 억압하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한 어린 아이가 그대로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과거적 내적 아이, 성년 된 유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사업을 잘 해서 크게 성공하고, 높은 지위에 올라서 겉으로 볼 때는 어른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어린 아이가 내재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교수들, 유명한 사회 인사들, 목사, 장로, 권사들 중에서 어린 아이 같이 유치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4절)
여기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헬라어로 ‘parorgiva’ 혹은 ‘parorgivzw’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학대하거나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등 끊임없는 비난과 책망을 통해 낙담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우리는 어린시절의 상처가 감정적으로 자녀를 분노케 해서 생긴 것으로 생각하지만 무의식중에 입힌 상처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기질은 출생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질이 부모의 인간성과 환경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어서 습관화되고 개성화 된 것이 성격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 휴 미실다인은 그의 저서 “몸에 밴 어린 시절”에서 성인아이의 성격유형을 여섯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첫째, 불만하는 자아상입니다. 대개 일등주의에 빠져서 자녀에게 책망만 일삼는 완벽주의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2등 했는데도 칭찬 받기는커녕 “조금만 더 잘 했으면 1등 했을텐데 왜 안해가지고 2등을 했느냐”고 책망을 듣는 사람, 이런 사람은 성공하고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돈을 벌어도 불만이요, 잘 살아도 불만이요, 출세해도 불만입니다. 그리고 남이 잘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둘째, 반항하는 자아상입니다. 강압적인 부모 밑에서 사사건건 감독, 지시, 억압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마음 속의 분노가 반항심으로 응어리져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가출이나 지나친 투쟁으로 자기 의사를 표출합니다. 노사분규, 시위 현장에서 지나치게 앞장서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셋째, 자기중심적 자아상입니다. 이런 사람은 부모의 과보호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좋은 것은 자기가 먹어야 되고, 좋은 것도 자기가 가져야 됩니다. 이런 사람과 결혼하면 비위를 맞추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살기가 힘듭니다. 막내나 독자에게 많습니다.
넷째, 무절제한 자아상입니다. 유약한 부모 밑에서 자라 무엇이든지 요구하는대로 충족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절제를 못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낭비를 많이 합니다. 돈이 떨어지면 우선 쓰고 보자, 먹고 보자 해서 카드를 마구 긁어댑니다. 이런 사람은 낭비벽이 심해서 저축한 돈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다 집 한 채씩 장만해서 사는데 반포에서 안산으로, 안산에서 화성으로 집값만 오르면 이사 다니느라 바쁩니다.
다섯째, 불안한 자아상입니다. 부모가 사업상, 직업상, 학업상, 혹은 유명인사라 너무 바빠서 다른 사람 손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격이 불안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도 못하고 남에게 사랑을 베풀 줄도 모릅니다.
여섯째, 자학적인 자아상입니다. 어린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거나 조실부모해서 친척집에 맡겨져 지나치게 눈치를 보고 자란 사람입니다. 또한 신체적 장애 때문에 가족들과 고립시켜 놓았다든지,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으며 자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고, 자기를 미워하고 학대합니다. 의처증, 의부증이 있습니다.
최근에 장로회 신학대학에서는 신학생을 모집하는데 이색적인 방법을 내세워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신학생 250명을 모집하는데 필기시험에서 500명을 합격시킨 후에 인성테스트를 해서 최종적으로 250명을 합격시킵니다. 인성테스트는 목사의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석하는 방법입니다. 인성테스트 한 것을 서울대학 인성테스트 연구소에 의뢰를 해서 채점을 한 다음에 그것을 가지고 교수들이 면접을 하는데 필기시험에서 1등을 했어도 인성테스트에서 점수가 저조하면 목사로서 부적격하다 해서 불합격을 시킵니다.
교회에서 장로를 피택할 때도 인성검사를 해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보통 때는 잘 모릅니다. 교회에서 뭘 할 때 압니다. 사사건건 브레이크를 거는 트러블맨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독재자 히틀러가 유대인 6백만을 학살한 데는 성장배경에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우연히 어머니가 이웃집에 사는 유대인 남자와 부정한 행위를 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장사하러 나가면 어김없이 유대인 남자와 부정한 행위를 했습니다. 그것을 본 어린 히틀러의 가슴속에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유대인 6백만을 학살한 사람이라는 오점을 역사에 남긴 것입니다.
이런 어린시절의 상처가 결국은 내 인격을 잘못 형성되게 할 뿐만 아니라 가정생활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교회 집사님 가운데 사회적으로 성공한 기업가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사회적으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아내를 괴롭히는 못된 남편이었습니다. 부인은 미모도 아름답고, 교양 있고, 살림 잘하고, 나무랄 데가 없는 여자였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제 아내는 나무랄 데가 없는 여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착한 아내인데도 집에만 가면 아내에게 성질내고, 못되게 굴었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들을 때는 양심에 가책을 받고 ‘서로 사랑하며 살기도 짧은 인생인데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하면서 아내에게 잘해주려고 하는데 막상 아내를 보면 그게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상담을 하면서 어린시절 성장배경에 대해서 물어봤습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어머니를 학대하고 때리는 것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것을 보고 ‘왜 저렇게 어머니를 구박할까 나는 결혼하면 절대로 아버지처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시절에 봤던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사람은 두 가지를 닮는데 하나는 좋은 면에서 닮고 하나는 나쁜 면에서 닮는다. 좋은 면에서 닮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닮는 것이고 나쁜 면에서 닮는 것은 미워하기 때문에 닮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면 그 사람과 동일시됩니다. 아버지를 미워하면 아버지와 같이 됩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면 좋은 것을 닮지만 미워하면 나쁜 것을 닮습니다.
그는 상담을 통해서 자신이 받았던 어린시절 상처 때문에 아내를 구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치유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안에서 태어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안에 있던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아내를 볼 때 옛날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사랑스럽고, 교양있고, 살림 잘하는 훌륭한 아내로 보였습니다. “여보, 당신에게 용서를 비오. 당신같이 훌륭한 사람에게 내가 너무 못되게 굴었오. 내 부족한 것을 용서하시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어린시절에 받은 상처는 놀랍게도 자녀들에게 그대로 표출됩니다. 자녀에게 훈계를 하지만 그 훈계마저도 상처가 됩니다.
우리가 개를 기르면서 개를 향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고 소리치면 개가 으르렁거리면서 달려듭니다. 그런데 개를 쓰다듬으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가 너를 미워한다.” 그러면 개가 꼬리를 치면서 좋아합니다.
이처럼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말로 훈계를 해도 그 속에 사랑이 담겨있지 않으면 자녀에게 상처만 줍니다.
심리학자들이 유년기에 신체적 학대를 받은 181명을 조사한 결과 70%가 자기가 부모에게 받은 학대를 그대로 자녀에게 하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어린시절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다면 은혜로 치유 받아야 합니다. 치유 받아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되면 주의 교양과 훈계는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교양은 훈련이요, 훈계는 말로 타이르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훈련을 잘 시켜야 됩니다. 아침에 늦잠 자려고 하면 일찍 일어나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주일날 교회에 안가려고 하면 억지로라도 보내서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떠들고 장난치는 것도 못하도록 묶어놓아야 합니다. 어렸을 때 훈련을 안시키고 커서 훈련시키려고 하면 잘 안되고 오히려 상처만 주게 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장성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내적인 모습과 외적인 모습이 어른이 되어서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부모가 됩니다.
여러분이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가 있다면 부모를 용서해야 합니다. 부모를 용서한다는 말은 “아버지를 용서합니다” 하고 용서를 선언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가 조상적부터 물려받은 상처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때 내 상처는 치유되고 아버지를 위대한 부모로 우러러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우리는 부모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준 상처까지도 감사로 받아 ‘나에게 은혜를 더 받으라고 준 것이지’라고 생각하십시오.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면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이 은혜를 받으십시오.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든 그 환경을 은혜로 받으면 좋은 환경으로 바꾸어집니다.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어떻게 예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됩니다. 예수와 함께 죽을 때 예수의 마음이 내 마음을 차지하게 됩니다.
교회에 믿음생활 잘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 딸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말도 잘 안듣고, 머리도 빨갛게 물들이고, 이상한 옷을 입고, 전에 하지 않던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일찍 들어오라고 하면 더 늦게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딸이 못마땅했지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날도 딸은 어김없이 이상한 복장을 하고는 밤늦게 집에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딸의 얼굴을 보자 그동안 참았던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딸의 뺨을 세게 때렸습니다. 그때 딸이 두 눈을 부릅뜨고 “아버지, 나는 아버지에게서 한번도 예수의 모습을 본 일이 없습니다.” 하고 확 쏘아붙이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뭐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통곡을 했습니다. “주님, 예수의 모습을 갖지 못한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한참 후에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딸의 방을 노크했습니다. “똑 똑 똑” 딸이 방문을 열었습니다. 아버지는 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딸아, 내가 잘못했다. 네 아버지를 용서해라. 너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을 용서해라.” 딸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버지의 행동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지를 살짝 껴안았습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딸이 잘했든 못했든 아버지가 딸을 때린 것은 상처를 준 것입니다. 딸은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모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딸에게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 때 딸이 오히려 용서를 빌었습니다.
다음날부터 딸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머리에 물감을 들이지 말아라, 이상한 옷 입지 말아라, 일찍 들어와라 말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변하니까 딸도 변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어떻게 양육해야 합니까?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정예배를 드릴 때 가정예배가 되는 것이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아이를 축복할 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할 때 아브라함의 가문으로, 축복의 가문으로, 그리스도의 가문으로 변화되는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자녀교육의 2제
엡 6:4 / 오창우 목사
할렐루야!!
여러분 반갑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크신 사랑으로 함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옆에 사람 보시면서 인사합시다. "반갑습니다." 아주 반가워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우리나라에 경차로 제일먼저 나온 자동차가 티코입니다. 아시죠? 이 차가 얼마나 작은데도 잘 달리는지요. 고속도로에서도 이 티코가 참 빨리 달려요. 그런데 티코가 처음 나왔을 때 이런 유머가 돌았습니다. 한국에서 티코를 몰던 사람이 이 차를 독일로 가져갔습니다. 독일의 고속도로 이름은 아우토반입니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는 제한 속도가 있습니다. 100키로에서 110키로.... 그러나 독일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에는 제한 속도가 없기 때문에 세계의 내노라 하는 자동차는 다 이 아우토반에 와서 그 속도를 뽐을 낸다고 합니다. 바로 이 아우토반에 우리나라 경차인 티코가 나타났어요. 작아도 빠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한참 신나게 달리는데 50키로 70키로 100키로를 넘어가지고 시속이 110-120키로···· 정신없이 올라갔어요. 그러다보니까 그만 너무 지나쳤는지 고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고치려 해도 안되니까 하는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손을 들고 구조를 요청했는데 커다란 벤츠가 서더니 한 신사가 내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도와드리겠습니다."고 했습니다.
티코 차주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벤츠 차주가 자기 차에 고장 난 티코를 줄로 묶어 견인해서 공장까지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만약에 문제가 있거나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경적을 울리세요. 그러면 내가 차를 세워서 문제를 해결해 주겠습니다” 약속을 하고 다시 아우토반을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우토반에 얼마나 많은 차가 다닙니까? 포르쉐 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순간 벤츠 운전자가 갑자기
"속도하면 벤츠인데..." 하고는 포르쉐를 앞서야 하겠다는 생각에 속도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벤츠가 200키로까지 속도를 내면서 앞다툼을 하고 있는데 문제는 뒤에 달려 있는 티코 운전자가 큰일이 났습니다.
'야~ 이러다가 죽는거 아닌가? 얼마나 마음이 다급해지는지...'
빵빵 경적을 울리고 그것도 안듣자 라이트를 켜서 알려도 벤츠의 운전자는 경주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아무 반응이 없는 거에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날 독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리기를 "아우토반에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다. 한국에서 온 조그만한 티코가 벤츠와 포르쉐를 추월하려고 경적을 울리고 라이트를 켜더라."
본대로 다 말한다고 맞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따라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과 진실은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르다는 것도 여러분은 인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작은 머리로 얼마나 많은 판단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도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비판과 정죄를 내 기준에 맞춰서 하고 있느냐 말입니다.
특히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자녀가 의사되기를 바라며 사는 부부가 있어요. 이 부부는 아이를 이렇게 키웁니다.
“자, 우리 영민이는 이 다음에 꼭 의사가 될 거예요…… 그렇지. 의사가 될 우리 영민이 잠에서 깨어났네요. 그래, 일어났어…… 옳지…… 쭈쭈 한번 할까? 그래, 자~다리 쭉 뻗고…… 의사는 키도 커야 돼요.”
“어이구, 이 다음에 의사가 될 우리 영민이가 이렇게 울면 안 되지요. ……어디가 아파 우는 건가요, 배가 고파 우는 건가요…… 아냐! 기저귀가 축축해서 그러는가 본데…… 그래도 그만한 일 갖고 울면 안 되지요."
무슨 얘기 입니까?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녀에 대한 기대와 꿈을 키웁니다. 아니,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부터 그 아이의 운명을 결정해 버립니다. 부모 자신의 기대와 꿈에 바탕을 둔 그 계획대로 자녀가 커주면 좋겠지만 그러기가 어디 쉬운 일입니까? 자녀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자녀의 능력은 고려치도 않고 부모 맘대로 꿈(부모만의)을 정해 놓고, 자녀보고 그 꿈을 이루라고 강요합니다.
그 꿈을 이루어 주는 자녀도 있겠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자녀는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것입니까? 혹여 자녀가 부모의 기대대로 자라 주지 않으면 “저 녀석은 누굴 닮아 저럴까”
“저런 자식이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라는 말도 자녀가 보는 앞에서 아무렇게나 말을 내 뱉는 부모들이 있어요. 자녀가 부모들의 기대대로 자라지 않는 게 어디 자녀만의 잘못입니까?
솔직히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덜컥 자녀부터 낳고 보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자녀에게 “넌 이렇게 자라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도 몰라 “자녀는 이렇게 키워야 한다”라고 누가 말만 하면 무조건 따라 하며 갈팡질팡합니다. 원칙 없는 자녀 교육, 부모의 기대만 존재하는 자녀 교육, 이것이 우리 자녀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부모들이 과연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절대 우리 자녀들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1889년, 역사를 바꾸어놓은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사촌인 오스트리아인 부부 사이에서 출생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소년은 알코올 중독자인 숙모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16살때 학교를 중퇴하고 극렬분자가 됐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세계2차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또 다른 한 아이가 같은 해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서 자란 소년은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입니다. 2차대전을 승리한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고 후에 미국의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아비들이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언제 노여워합니까?
한 부유한 집에서 자라난 아들과 가난한 집에서 자라난 아들이 성장해서 만났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사람은 항상 부모에 대해서 불만이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부모는 나에게 무엇을 남겨준 것인가? 나보고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라고 이렇게 밖에 나를 성장시켜주지 못했는가?’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둘이서 술을 한잔하면서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가난한 집에서 자란 사람이 부유한 집에서 자란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만일에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너만큼만 자산을 물려주었다면 나도 일찌감치 내 사업을 이끌어서 지금쯤 나는 아주 훌륭한 사업가가 되었을 거야”
무슨 말이에요? 자기는 재산을 못 물려받아서 이렇게 가난하고 힘들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랬더니 그 부유한 집에서 자란 친구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 말에 동의 할 수 없어. 너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가 부자였잖아. 그러나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 돈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야. 네가 보기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에게 돈을 물려받아서 내가 내 사업을 꾸리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가본데... 그렇지 않아.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그 습관, 태도 등을 본받았어.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돈은 안 물려주셨어. 유감스럽게도 너에게 돈을 물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지금의 네가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 너에게는 성공 모델이 없었던 거야”
우리는 자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어서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 맞습니다. 물려받은 것이 없어서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습관, 좋은 정신적 태도, 좋은 가치관 ... 그런 것들을 우리가 못 물려받아서 지금 보다 우리가 더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잠언1장 20절에 “지혜가 거리에서 부르며...”
라는 말씀처럼 얼마든지 우리는 부모 말고도 지혜를 이 세상에서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91)는 그에게 음악을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물어보는 질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당신은 음악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하루는 모차르트에게 음악을 배우러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모차르트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음악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그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예,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쳤고, 바이올린도 한 10년을 배웠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모차르트는 “수강생으로 받아는 들이겠으나 수업료는 원래의 두 배를 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보다' 생각을 하고 묵묵히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청년 한 명이 와서 그의 수강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물었습니다.
"당신은 음악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그 청년은 "전에 음악을 배운 적은 없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혹시 모차르트가 음악을 모르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고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뜻 밖에도 "좋습니다. 수업료는 반만 내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미리 와 있던 청년이 모차르트에게 항의하듯 물었습니다.
"왜 음악을 전혀 모르는 저 사람에게는 수업료를 반만 내라고 하시고, 10년이나 음악을 공부한 저에게는 수업료를 두 배로 내라고 하시니 그건 부당한 처사가 아닙니까?“
그러자 모차르트가 그 이유를 말해 주었습니다.
"아닐세, 내 입장에서 보면 음악을 이미 배운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 훨씬 더 어렵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내 입장에서 보면 잘못 된 습관들이 많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야 “
습관을 잘 못 들이면 고치기가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좋은 습관은 어렸을 적부터 형성을 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부모들은 바로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형성시켜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조금 자랐을 때 검소하고 소박하게 길들이지 아니하면 반드시 사치스럽게 되고, 부지런함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반드시 게으르게 되고, 참는 버릇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늘 다투게 되고, 겸양하고 공손한 버릇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반드시 거만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미 성장한 사람들은 그만 부모들에 대해서 그만 노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성장한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더 이상 노엽게 할 수 있는 원망들을 수 있을만한 잔재를 남기지 말아야 되겠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자녀교육의 첫 번째 계명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두 번째 계명은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십니다.
1)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십시오
개역성경에는 교훈이라는 말보다는 교양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여러분 교양이 뭡니까? 태도입니다. 지식을 가지고 취하는 태도를 교양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교양있는 사람은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압니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세워줍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보고 사람들이 돌을 들고 "쳐 죽일까요?"했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 돌로 치라" 다 돌아갔어요. 그러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말라" 예수님은 정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능성을 보고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교양으로"라고 하는 말은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을 귀히 여기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상대방의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습을 보셨을 때 어느 누구하나 예수 믿을만해서 믿을 만한사람 없습니다. 다 죄인입니다. 다 지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누가 누구를 정죄한다는 말입니까? 누가 누구를 싹수가 있다 없다 얘기를 합니까? 주님의 교양은 우리의 가능성을 보고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존심이 우리에게 있어요. 적어도 우리는 상대방의 명예와 체면을 보고 우리는 지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와 자녀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의 사정과 행동을 모르고는 자녀를 지도할 수 없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에게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 때에 부모가 먼저 앍고 은근하게 잘 조처하면 그 자녀는 부모를 더욱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여간 일에는 간섭 말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암만 옳은 말이라도 수다스러우면 듣는 이가 귀찮게 여기는 것 당연한 것 아닙니까?.
둘째는 매사를 간섭하면 자녀가 일을 제 의사대로 하여볼 용기가 나지 않고 일을 꾀하기를 두려워하며 겁이 나서 자주 자립하는 정신이 발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이란 일의 잘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주의 교양으로 상대방을 대우하라는 것입니다.
서울대 교수가운데 이면우 교수라고 계십니다. 신바람 교육을 제창하신 분입니다.
『 자녀 교육 10계명 』
1. 자녀를 깍듯이 예우하라.
2. 고집 센 자녀를 지원하라
3. 칭찬을 해도 남과 비교하지 마라
4. 큰 일에 실패한 자녀를 격려하라
5. 선택의 자유를 반복 훈련하라
6. 사람이 주는 상을 탐내지 마라
7.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성이다
8. 외로움을 극복하도록 가르쳐라
9. 전문가가 되도록 당부하라
10.부모는 최후의 안식처가 되어라
교양있는 부모는 자녀를 깍듯하게 예후할 뿐더러 그 자신이 자식들에게 안식처가 된단말입니다. 이 세상 어딜가도 위로 받을 수 없어도 내 부모님께만 오기만 하면 위로받을 수 있고 힘을 얻을 수 있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최근에 상영 됐던 영화 가운데 ‘말아톤’이라고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본래는 '마라톤'이라고 해야 하는데 '말아톤'이라고 하는 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그렇게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22살의 자폐아 청년이 있습니다. 나이는 22살이지만 그의 지능은 5살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아들을 갖고 있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고 답답하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어머니 박미경씨의 인고의 노력이 오늘의 배형진군을 만들었는데 그 일이 너무나도 감동적이기 때문에 영화로 만들어지고 엄청나게 많은 관객들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 영화 속의 실제주인공인 배형진 군의 이야기가 TV와 신문을 통해서 계속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말아톤’ 영화가 그렇게 많이 사람들을 동원하게 되리라는 것을, 개봉 전에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폐증’이라고 하는 장애를 가진 배형진군의 이야기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눈물을 많이 흘리게 하리라는 것을 미처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01년 춘천마라톤대회에서 42.195km의 풀코스를 2시간 57분 만에 완주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다음 해에는 철인 3종(수영, 사이클, 마라톤) 마라톤 경기까지 치러냄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정신연령이 다섯 살에 불과한 형진이가 신체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여간해서는 하기 힘든 일을 달성한 것입니다. 어떻게요? 정신연령이 5살밖에 안되지만 이 신체는 22살의 청년이라는 것을 착안했습니다. 정신을 보지 않고 육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너에게 좋은 육체를 줬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 영화 속에서 나오는 대사 중, 요즘 최고의 유행어가 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초원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 초원이 몸매는 끝내줘요~’
라고 하는 말, 그리고 ‘방귀는 나가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초원이 엄마는 기회 있을 때마다 “초원이 다리는?”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초원이는 “백만 불짜리”하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다시 엄마가 “초원이 몸매는?”하고 물으면 “끝내줘요~”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 자기암시를 하게 함으로써, 형진 군의 어머니는 그 아들로 하여금 용기와 소망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형진 군이 마라톤을 마치고 난 다음에 꼭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 또 해냈어요!” 그리고 “난 행복해요!”라는 말한답니다.
여러분 우리자녀들에게 교양있게 대해야 합니다. 배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존심을 세워줘야 합니다. 귀하게 여겨 줘야 합니다. 그리고 깍듯하게 예후를 하고 부모는 최후의 안식처가 되야 합니다. 주의 교양-주님은 한번도 우리를 정죄하거나 비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가능성을 보고 미래를 내다보고 우리를 존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자녀를 실패하게 하는 10가지 계명 중에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너는 제 같지 않냐?" 여러분 우리는 제 같은 애로 키우면 안됩니다. 제하고 다른 아이로 키워야 합니다. 중요합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어머니는 ‘사랑한다’와 ‘네 능력을 믿는다’는 두 마디로 아들을 길렀다고합니다. 새 아버지가 수없이 바뀌었지만 클린턴이 훌륭하게 자라나 대통령이 된 것은 어머니가 심어준 사랑과 자신감 덕분이었다는 겁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는 교양있게 해야 합니다. 성의 있게 해야 합니다.
한 포도열매를 보고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왜 이 포도는 이렇게 살이 쪘고 이 포도는 빼빼 말랐어요?" 엄마가
“뚱뚱하면 어떻고 홀쭉하면 어떠냐. 그냥 먹어둬!”그러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뚱뚱한 포도는 부지런해서 열심히 영양분을 빨아먹어서 그렇고, 빼빼 마른 포도는 게을러서 영양분을 안 빨아먹어서 그래”
아이들의 질문에 성의껏 답해주어야 합니다. 한번쯤은 성의있는 대답을 해줘야 하지 않아요? 하찮은 물음이라도 아이에게는 큰 문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홀히 취급하지 않고 인정하며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꾸지람을 많이 받으면서 성장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을 비난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수치심을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면 죄의식이 강해진다고 합니다. 대신에 어린아이가 격려를 받으며 성장을 하면 고마워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지도 못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다 걸고 문제를 일으키면 어려서 부모에게 너무 공격을 받으면서 성장을 해서 그런게 아닌가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자녀에게 교양있게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자존감을 세워주면서 귀하게 여기면서 믿어주면서 키우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뭘 그렇게 꾸물대? 시계 안보여? 벌써 15분인데 보나마나 또 지각이다."
이 아이는 어슬렁어슬렁 걸어가서 지각하고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듣게 마련이다.
좀 늦게 일어나도 "엊저녁에 늦게 자더니 일어나기 힘들었구나. 지금 15분이지. 괜찮아. 넌 아빠 닮아서 달리기는 끝내주잖아. 빨리 뛰어봐."
이 아이는 신나게 달려가 지각을 면하고 자리에 풀썩 앉으면서 생각한다.
'역시 난 아빠 닮아서 달리기는 끝내주는 구나.'
"오늘 시험 영어지? 또 아는 거 틀리지 마라. 지난번 같이."
이 아이는 겁먹은 채 이름을 힘없이 적고 시험을 보기 시작한다.
"오늘은 영어야? 이번에 열심히 했잖아. 실력발휘 한번 해봐. 오케이?"
그러면 이 아이는 '내가 아는 것만 나오겠지'하고 믿으며 자신감을 갖고 시험을 치룰 것입니다.
아침부터 자식의 기를 살려 어머니와 기를 죽이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침부터 자녀를 실패자로 만들어 내보내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침에 부모가 만들어준 태도는 하룻동안 아이의 성패를 좌우하게 됩니다. 할 말이 없더라도 등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어머나, 우리애가 벌써 이렇게 이뻐지네. 어깨가 벌어지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이 도와 주실꺼야." 복을 빌어 주시기 바랍니다.
심리학적으로 본 좋은 아버지는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유아기 자녀 - 젖먹는 아기에게는 엄마만큼이나 아이의 볼에 뺨을 비비고 그냥 흥얼거리면서 만져 주며 늘 흐뭇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아버지
아동기 자녀에게는 - 손을 잡고 무등을 태워주며 귀찮을 정도로 많은 사소한 질문에도 마치 웃어른에게 설명하듯 자세히 말해 주고 반듯한 자세를 보여주면서 여러 가지 소리나 동물 의 행동을 흉내내면서 같이 놀아주는 아버지
청소년 자녀에게는 - 최근 유행하는 노래를 같이 부를 수 있고 자녀와의 의리를 중시하며 엄마 몰래 용돈을 주거나 목욕탕에 같이 가며 머리를 맞대고 학교 숙제를 같이 할 수 있는 아버지
청년 자녀에게는 - 당당하게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기쁨과 울분을 함께 하며 자신과 나라의 앞일 을 내다보고 뜻을 키우는데 의기투합할 수 있는 아버지
아이들이 청년이 되니까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요. 그러나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어요?
장년 자녀에게는 -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경험을 자녀와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회상하며 뜻을 모아 작은 일에서부터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아버지
노년 자녀에게는 -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풍족하진 않지만 여유있게 살았노라고 감사하며 남을 위해 봉사하고 농익은 삶의 지혜를 나누는 아버지
자신에게는 - 언제나 남을 생각하고 욕심을 줄이며 구도하는 자세로 인생을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아버지
이런 아버지라고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2) 오직 "주의 훈계로 양육하십시오.
훈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강요가 좀 있습니다. 내 지식이나 경험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줄때 자녀들이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세계적인 흑인 농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는 수 백종의 농작물의 씨와 농작물에서 얻는 기름을 개발하는데 탁월한 공로를 세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미국 상원에서 그를 초청해서 그의 공로를 기리고, 치하하기 위하여 조그마한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사회자가 카버 박사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박사님,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초인간적인 발명과 개발을 하는 대단한 업적을 가질 수 있었읍니까?"
그랬더니 그 말을 들은 카버 박사는 손에 들고 있던 성경을 높이 들면서
"모든 조화는 여기에서 나옵니다." 라고 답변했습니다.
이때 어떤 상원의원이 약간 비웃는 듯한 말투로
"아니, 박사님 낙화생 기름 짜는 법도 그 책에서 배웠나요?" 라고 물었읍니다.
그러자 카버 박사는 대답하기를
"낙화생 기름 짜는 법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인간과 이 세계를 더 행복하게 만드시려는 하나님께서 이 책을 통하여 나에게 자기와 함께 일하자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는 참으로 깊은 진리가 담겨 있읍니다. 카버 박사는 왜 학문을 하게 되었읍니까? 하나님이 일하자고 하셨기 때문에 학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까? 성경을 통해서 들었다고 카버 박사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학문을 해도 하나님과 동사하며 연구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속 연구하는 분야에 지혜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런 제목의 글을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어찌하여 지난 2천년 동안 계대교육에 실패하였는가?” 여러분 무슨 말입니까? 오늘날의 신앙의 시작은 예루살렘의 오순절 성령강림절에 다락방에서 시작됐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 민족에게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민족이 다른 민족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자기 민족교회는 죽었습니다.
우리 지난 수요일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수요일에는 선교사를 파송을 했고 그 주일에는 "선교하는 기쁨"에 대해 설교를 했는데 우리나라는 선교사파송에 있어서 세계2위입니다. 만 팔 천명이 백 오십 국가에 있습니다. 대단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한국 교회가 예루살렘의 교회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나하는 염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2천년 동안 계속 다른 민족에게 복음은 전하고 자기 민족교회는 죽어왔다. 현재 한국 교회도 2세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90%이상이 교회에 안 나간다. 교회교육과 가정교육이 90%이상 실패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어떻게 아브라함부터 현재까지 4천 2백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고 살았습니까? 어느 통계는 유대교는 1년에 325시간 성경교육을 시키는데 비하여 카톨릭은 200시간, 개신교는 50시간 교육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당연히 을우리 후손들에게 말씀을 전해주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행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구원만 강조했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것만, 새 생명 얻는 것만 강조했지 말씀안에 살아가는 것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믿어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 속에 이러한 축복과 은혜가 계속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제 자식들에게 이 5가지를 늘 말합니다.
첫째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기도해야 한다.
셋째는 많이 강조하는 건데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노회가 있었고 노회임직식이 있었는데 목사안수 받는 목사들에게 무슨 말씀을 증거 할 까 하다가 저는 이 목사님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목사가 왜 있는거냐?" 교인들 때문에 우리가 있고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있는 거다. 내가 잘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
감사해야지요. 자식들은 부모에게 감사를 하고 부모는 자식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넷째는 검소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소비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카드를 너무나도 많이 씁니다. 그러니까 이 카드 때문에 가정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좀 검소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판이나 정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봐주면서 격려하고 칭찬을 해주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이 다섯 가지를 자녀들에게 강조합니다. 성경, 기도, 감사, 검소한 생활, 비난보다는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에 자손대대로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축복의 가문으로 만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자녀 양육의 원리
엡 6:4 / 박기완 목사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했습니다. 화사하고 포근한 복스런 계절입니다. 매년 5월이 되면 특별히 교회에서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고, 두 번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린이 주일을 맞아 이 시간에는 본문을 중심으로 '자녀 양육의 원리'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시는 복된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어느 부부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자기 방에 들어가서 숨을 죽인 채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소리를 마음 졸이며 듣고 있었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점점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급기야 화를 이기지 못한 아버지가 옆에 있는 가스밸브를 틀었습니다. 그리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습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방안에서 가만히 숨을 죽이면서 밖의 동정만 살피던 아들은 이상한 느낌에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왔습니다.
나와서 보니까 거센 불길이 아파트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엉겁결에 창문을 열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뒤따라 창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아버지도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결국은 자신도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온 가족이 다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다 무사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재미있는 풍자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첫째로, 아버지는 제비족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비처럼 날아서 땅에 사뿐히 땅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머니는 날라리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잘 날았겠습니까? 훨훨 날아서 땅에 사뿐히 떨어졌습니다.
셋째로, 아들은 비행청소년이었다고 합니다. 비행기처럼 날아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유머'에 나오는 얘기입니다만, 오늘날 가정이 얼마나 병들었는지 풍자적으로 꼬집어주는 이야기인 줄 압니다.
오늘 우리들의 가정은 하나님이 복 주시는 귀한 가정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자녀 양육의 원리 3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자녀들을 잘 양육할 것인가?....
1. 자녀 양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첫째로 깨닫게 되는 것은 자녀 양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아비들아' 라고 했는데, 여기서 '아비들'이란 말은 아버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한 가정의 머리요, 대표성을 띄고 있기 때문에 '아비들'이란 말은 '아비와 어미들아!' 라는 의미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 양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낳았다고 해서 무조건 다 부모가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았으면 잘 양육해야할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엊그제도 TV에서는 가정의 달을 맞아서 특집으로 '매맞는 어린이'에 대해서 보도한 것을 보았습니다.
자녀를 학대하고 구타하는 부모들의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내 자식을 내가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참견이냐?" 고 했습니다.
자녀를 무슨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큰 잘못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시편 127:3에 보면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업이라는 말은 숙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자녀를 잘 양육하라는 '숙제'로 주셨습니다.
또 상급이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부모는 자식을 하나님이 주신 '기업'으로, '선물'로, '상급'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여 돌보는... 그런 부모가 모범된 부모요, 좋은 부모인 것입니다.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모두 부모가 아니예요... 부모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 하지 못하면서 아이들에게는 못한다고 구박하고, 인격을 무시하고, 손으로 발로 몽둥이로 마구 때립니다.
자녀가 무슨 스트레스 푸는 대상으로...아니면 자기의 감정이나 화를 푸는 대상으로 여기는지...사정없이 구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이상이 오고, 비정상적인 아이가 되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999년도에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고등학교 전교에서 1-2등을 하는 우등생이 살인을 경험하고 싶다는 이유로 가정주부를 흉기로 잔인하게 살인한 일이 있었습니다.
경찰이 조사하고 보니까 이 학생은 부모가 이혼한 뒤에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의 이혼이 이 학생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로 남아 결국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한 남학생이 흉기로 여중생의 목을 찔러 죽게 하였습니다. 경찰이 그 남학생에게 왜 그런 끔찍한 짓을 하였느냐고 물어보니까 "그냥 아무나 찔러 죽이고 싶어서 그랬어요" 라고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학생의 가정 환경을 조사하여 보니까, 아버지가 너무 폭력을 휘둘러서 어머니가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결손가정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과 난폭한 성격, 어머니의 구타당함, 이혼... 이런 것 등이 이 학생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시편 127:4-5절 말씀에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성경은 자식을 가르켜 장사의 수중의 화살과 같다고 했습니다.
활을 쓰는 장사는 자신의 화살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평소에 화살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잘 다듬어서 윤을 내고 적당한 양의 깃털로 날개를 달아서 올바른 방향으로 잘 날아가도록...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부모는 화살을 잘 관리하는 장사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의 신앙을 관리하고 마땅히 행할 길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이 있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세월이 흘러 부모님이 나이가 들면... 이제 자녀들이 부모를 보호합니다. 그래서 그런 자녀들이 많으면... 올바르게 자란 자녀들이 많으면... 사람들이 감히 업신여기지 못해서 수치를 당하지 않고... 마음이 흐뭇하고 든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유태인 600만 명을 살해하였습니다. 후에 사람들이 히틀러가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의 하나로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보따리 장사꾼이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만 되면 장사하러 집을 나가 주말이 되어서야 들어오곤 하였는데, 히틀러 옆집의 유태인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만 장사하러 나가면 날마다 이 유태인 아저씨가 와서 자기 어머니와 나쁜 짓을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어린 히틀러는 유태인에 대한 분노를 품게 되었고 그가 장성하여 권력을 잡았을 때 이런 끔찍한 죄를 범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 양육의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모든 사람들이 유대 교육의 훌륭함을 인정합니다. 유아 교육에 관한 책들 가운데 대부분 유대인의 자녀 교육법을 소개한 책입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의 장소는 가정이었습니다. 교사는 어머니요, 교재는 성경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아이가 조금 크면 회당이라는 곳에 보내어 랍비에게 역시 성경을 배웠습니다.
12살이 되면 성경대로 살 의무를 가지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고, 아버지에게서는 직업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셉에게 목수 일을 배웠고, 베드로는 아버지에게 고기 잡는 기술을 배웠고, 사도 바울은 아버지에게 천막 만드는 것을 배웠습니다.
바른 신앙과 바른 사람으로 가르치는 가장 훌륭한 신앙의 교사는 부모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었지만... 어릴 적에 친어머니가 유모가 되어서 그에게 젖을 먹이며 "너는 히브리 사람이다 너의 민족은 지금 애굽 사람들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단다 너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야! 너는 운 좋게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 되었지만 네 민족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는 가르침을 받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디모데가 진실한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귀한 신앙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너무 공부를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한번도 에디슨의 질문을 피해 본 적이 없습니다. 훗날 에디슨은 발명왕이 되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모든 정신적인 압박은 어머니에게 풀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고 술회하였습니다.
방탕자 어거스틴도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지극한 사랑과 눈물 어린 기도 앞에 무릎을 꿇고 방탕아가 아니라 '성 어거스틴' 으로 변화되고 최대의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잔나는 자그만치 19명의 자식을 가졌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양육함으로 모두 다 훌륭한 인물로 키웠습니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는 링컨이 말을 시작할 때부터 매일 매일 성경을 읽어 주었는데, 링컨이 아홉 살 되던 때에 숨을 거두면서 유언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링컨아! 엄마가 죽더라도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하면서 유언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링컨은 어머니의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에 애를 썼고 노예를 해방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육학에서 "문제의 부모는 있어도 문제의 아이는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잘 양육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입니다.
가정에서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부모가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된 우리는 자녀 양육의 전적인 책임이 있음을 깨닫고 부모된 책임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자녀 양육의 원리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3:21절에도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하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여기서 '격노한다'는 말은 '배가 항해를 하는데 바람을 없앤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배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를 노엽게 하고 격노케 하는 것은 더 이상 배가 항해할 수 있는 힘을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기를 꺾어버리고 용기를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자녀를 징계하거나... 자녀를 잘못된 방법으로 징계해서... 자녀의 마음속에 분노를 축적시킨다면 그 자녀는 기가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더 이상 항해할 수 없는 배처럼...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상실하고 모든 의욕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화나게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라고 해서 무조건 옳으니 너는 아무 소리말고 따라오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모에게도 잘못이 있고, 실수가 있고, 옳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잘못하고, 오해하고, 바르지 않았을 때에는... 자녀에게 미안하다는 말, 잘못 되었다는 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잘못한 일이 있으면 자녀에게 사과를 해야 합니다. "얘, 내가 잘못했구나! 이 애비를... 이 애미를 용서해다오!" 하고 사과를 해야 합니다.
자기는 잘못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면서 한번도 미안하다는 말도 없으면서 자녀들이 조금만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빌어!... 그럴꺼야 안 그럴꺼야!" 하면서 윽박지르지는 않습니까?.... 이런 일들이 자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입니다.
흔히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경우를 몇 가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변화되어 가는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노엽게 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세대차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이런 것을 이해하면서 자식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르치면 자녀들에게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둘째로는, 지나친 통제.... 과잉보호입니다.
균형 잡힌 훈련이 없이 일방적인 강요를 할 때, 자녀들에게 노여움을 사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 반대로 지나친 방임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볼 시간이 없으니까 돈을 줘서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리거나 방임해 버리는 것은 부모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이 자녀를 위한 일인 것 같지만... "우리 엄마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그런 의식이 아이들에게 새겨지면 결국 자녀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부모의 생활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고 때와 장소에 따라 자꾸 변합니다.
자녀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은 술을 마시고, 부도덕한 생활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자신은 부도덕한 생활을 합니다. 부모의 말과 행동이 다를 때... 자녀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대한 사랑의 확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엄마 아빠는 무엇보다 나를 제일 사랑해!" 하는 의식이 자녀들의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의 줄이 끊어지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마십시오. 기분 나쁘게...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는 교육이나 훈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 는 말은 자녀를 분노케 하는 말이나 행동을 피하라는 말입니다.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비합리적인 것을 요구하거나, 부모라는 권위를 남용하는 일 등을 삼가 해야 합니다. 자녀의 관점에서 생각하여주고 이해하여 주어야 하며 항상 인격적으로 대하여 주어야 합니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 선생님은 아이들을 "어린이"라고 부르는 말속에는 "어리신 분"이라는 존경의 말이 담겨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존경할 수는 없겠지만 인정하여주고 인격적으로 대해주라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3.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셋째로, 자녀 양육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오직' 이라는 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는 먼저 아이들을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방법이나 세상의 교육으로 아이들을 훌륭하게 양육할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 믿음으로 키워야 합니다.
또한 '양육'이라는 말의 원문에 보면 '엨트르포' 라는 말인데, '꽃을 기른다', '애완 동물을 기른다', '몸을 돌본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을 주안에서... 무엇을 기르고 돌보듯이... 세밀하게... 정성을 다하고 주의하여... 잘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먼저 자녀를 '주 안'에서 키워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가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이 지옥불에 떨어지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부모는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얘야, 너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말씀을 앞세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는 네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신앙생활 잘 하기를 바란다." 하면서.... 자녀들에게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제일주의로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저 "공부, 공부, 공부" "대학, 대학, 대학"만을 외칩니다.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고 말은 잘하지만 그저 대학만 들어가면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산에 가면 산삼이 있고, 바다에 가면 해삼이 있고, 집에 가면 고삼(高三)이 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에 고 3학생, 한 명만 있어도 전 가족이 비상이 걸립니다. "이번 입시에 붙기만 해라!" 그러면서 온 가족이 합격만 열망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는 자녀가 대학에 떨어졌다고 가슴 아파하고 식음을 전폐하는 부모는 있어도... 사랑하는 자녀의 영혼이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감수성이 한참 예민한 아이들한테 "야, 교회가 다 뭐냐? 공부해라! 공부!" 그러면... 자식농사 다 망쳐 놓고 난 뒤에, 가슴을 치면서 후회한들... 그때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장 우선 되어야 할 것은 신앙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바른 신앙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이들은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기 때문입니다. 내가 제대로 신앙 생활을 못하면서 어떻게 내 자녀들에게 바른 신앙으로 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했는데, 교양은 주로 예방적인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훈계는 주로 치료적인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선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아니하도록 미리 예방적인 차원에서 교양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활용한 예가 있습니다.
한석봉의 얘기입니다. 한석봉은 어린 시절, 글공부를 하기 위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한석봉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글공부를 중도에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인들 왜 사랑하는 아들이 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일부러 엄하게 대합니다.
"석봉아! 내가 불을 끌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나는 떡을 쓸겠다! 그래서 네가 이기면 오늘밤 여기서 머물고 그렇지 않으면 당장 이 길로 돌아가거라!"
그러면서 어머니는 불을 껐습니다. 캄캄한 가운데서 어머니는 떡을 썰고, 한석봉은 글을 썼습니다.
나중에 불을 켜보니까, 어머니가 썬 떡은 가지런하게 보기가 매우 좋았습니다. 그런데 한석봉이가 쓴 글은 삐뚤 삐뚤하며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결국 한석봉은 눈물을 머금고 다시금 글공부를 위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왜 어머니의 마음인들 아프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밤새도록 울며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엄격함이 있었기에 한석봉은 당대에 가장 훌륭한 명필로써 이름을 떨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자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 '교양'이 필요합니다.
잠언 22:6절에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였고,
시편 127:4절에 보면 젊은 자의 자녀는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아서 방향 설정을 잘 하여 주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6:4-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키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부모님들이 먼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치되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 할 것이며, 또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또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여 믿음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수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통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미간에 붙여서... 보는 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정말 말씀대로 세계에서 머리가 되는 복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나라에 500만명, 미국에 700만명, 그리고 그밖에 여러 나라에 300만명 등 1,500만명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를 다 합해도 우리나라 인구의 1/4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오늘날, 모든 영역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나라는 뭐니 뭐니해도 미국이 아닙니까?... 그런데 미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이 전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과거에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다가 2000년 이상 나라를 빼앗기고 전세계 도처에 흩어져서 나그네와 같이 살았던 치욕스런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1948년에 독립을 하여 다시 이스라엘 나라를 세웠는데, 이는 세계사에 단 한 번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상이 노벨상인데, 수상자 중에 자그마치 15%에 해당하는 40여명이 유대인입니다.
미국의 명문 대학인 하버드, 예일, 콜롬비아,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 30% 이상이 유대인입니다.
뿐만아니라, 세계적인 인물 중에 과학자 아인슈타인, 심리학자 프로이드, 작가 토마스만, 지휘자 반스타인, 재벌 모우건, 정치인 키신저, 그리고 IMF의 총재들이 다 유태인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릴 적부터 자녀들을 주의 말씀과 교양과 훈계로 양육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녀들이 뛰어난 인물이 되고, 전 세계를 무대 삼아 활약하고, 머리가 되어 앞서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고, 어릴 때부터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을 받아 신앙의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여야 합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가정마다... 자녀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부모가 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겐 기쁨과 축복이 넘치는 복된 가정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보다 귀한 자녀
엡 6:4 / 김동호 목사
지난 주 저는 한미준이라고 하는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한미준이란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이라는 말의 약자로 몇 년 전 결성된 자그마한 교역자들의 모임입니다. 며칠을 함께 보내며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하며 아주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아주 중요한 결정 하나를 하였는데 그것은 각 교단에서 배출되는 신학생들을 위한 인턴 레지던트 코스를 한미준이라는 이름으로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의대생들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고시를 통하여 의사가 된 후에도 다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통하여 그동안 학교에서 학문적으로 배웠던 모든 지식들을 실제적으로 경험케 하는 것처럼 신학생들이 신학대학에서 배웠던 모든 것들을 실제로 교회와 교회에서 목회하는 선배 목회자들을 통하여 실습하게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미준의 목회자들이 다 분주하고 그 누구보다도 시간이 없는 분들이지만 이 일 만큼은 정말 만사를 제쳐 놓고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이 일을 섬기려고 합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점점 더 확신 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귀한 일 중에 하나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을 키워내는 일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사람을 키우는 사람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그와 같은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에 있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리고 누구나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을 키우는 일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일, 그것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과 일군으로 키우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 평생을 투자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직업을 가지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평생을 공부하고 평생을 일합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직장에서 승진하여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그만큼 투자할만한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을 바르게 양육하는 일입니다. 자식은 바르게 양육하는 일은 사업을 잘 하는 것과 직장 생활을 성공적으로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자식은 사회생활의 성공보다 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때때로 그것을 잊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 때문에, 인간적인 성취욕에 눈이 멀어 보다 중요한 자식을 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극단적으로 말처럼 들릴는지 모르나 세상적으로 아무런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맡겨 주신 자녀를 바르고 훌륭한 양육하였다면 그는 자신과 세상을 위하여 가장 귀하고 큰일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아무리 성공하였다고 할지라도 정작 중요한 자녀 교육에 실패하였다면 그의 세상적인 성공은 별로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목회자입니다. 때문에 목회는 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보다 귀한 것은 제게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 그 목회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소명감이 부족한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자식이 목회보다 더 중요한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와 자식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자식을 택하겠습니다. 무슨 오해를 받고 어떤 욕을 먹는다고 하여도 저는 자식을 택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이 세상을 위하여 훌륭한 목회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훌륭한 아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는 결혼 전 학교 교사였습니다. 아내에게 결혼 후 교사를 사임하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감사하게도 제 뜻에 동의해 주었습니다. 만일 아내가 그와 같은 제 뜻에 동의 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아내를 너무 사랑하여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면 참으로 엉뚱하게 들으실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목회를 포기하고 아이들을 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게 세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 아이들이 나름대로 잘 자라주었습니다. 저는 그 축복과 은혜 때문만으로도 하나님께 제 인생을 다 드릴 수 있고 또 그러고 싶습니다. 제 아이들이 나름대로 그렇게 잘 자라 준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제 아내 때문입니다. 제 아내가 가정과 자식을 위하여 그리고 저를 위하여 자신의 중요한 세상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저와 제 아이들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저와 우리 아이들이 그 빚을 갚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저는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목회를 정리하고 싶습니다. 중요한 일들을 좋은 후배를 찾아 맡겨 주고 그리고 그 후배가 훌륭하게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는 하나하나 목회에서 손을 떼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제가 앞장서서 일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저도 이제 앞장을 서면 일이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조금 느낍니다. 저는 앞장을 서면 될 힘을 가지고 뒤에 서고 싶습니다. 그 힘으로 후배들을 밀어주고 싶습니다. 사람을 키우고 싶습니다. 그 중에 가장 밀어주고 키워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내입니다.
이야기가 좀 엉뚱한 데로 흘렀습니다. 제가 이와 같은 이야기를 통하여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였던 것은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일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녀보다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을 더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시편 127편 3절에 보면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자식은 기업입니다. 세상의 어떤 기업보다 더 크고 중한 기업입니다. 실제적으로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것보다 자식을 성공적으로 양육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어렵습니다.
공부께나 한 사람들 중에 ‘내가 애나 보려고 이 힘든 공부 한 줄 아느냐?’라는 참으로 어리석은 말과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 하나를 바르게 잘 양육하기 위하여 박사를 백 개를 따도 모자랍니다. 박사 백 개를 따서 아이 하나를 잘 키웠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입니다.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일은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귀히 여기시는 일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세상이 아니라 여러분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보여 지시는 모든 하나님의 사역은 그 중심이 세상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세상을 관리하시며, 우리를 바르게 키우고 양육하시기 위하여 성경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통하여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과 인생을 십자가에 못 박아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들에게 당신의 온 인생을 거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을 하나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에 당신의 모든 삶을 다 거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도 나처럼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걸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모든 것을 걸고 너희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다 사업과 직장에 인생을 겁니다.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주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이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사업과 직장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자식들을 위한 것이라고 항변합니다. 아이들에게 좀 더 좋은 것을 먹이고, 좀 더 좋은 것을 입히고, 좀 더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그 죽을 고생을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이 틀린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틀린 말입니다. 많은 부모들은 그것이 자식만을 위한 것 인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식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속에 자신의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성취욕이 있다는 것을 부모들은 알아야만 합니다.
정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좋은 엄마, 좋은 아버지입니다.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는 부자 엄마 아빠가 되어야만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착각입니다.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좋은 부모는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부모는 아이를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그리고 자신의 그 어떤 성취보다 더 중히 여길 줄 아는 부모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몇 주일에 걸쳐서 ‘무엇보다 귀한 자녀’라는 제목으로 자녀 교육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설교로 서론적인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드렸습니다. 그것은 자식은 무엇보다도 귀히 여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서론적인 말씀은 자식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 서론적인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자식을 직장보다 귀히 여기고 사업보다 귀히 여기고 개인적인 성공과 성취보다 귀히 여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돈만 벌려고 시간을 다 쓰지 말고 할 수 있다면 돈 버는 시간을 좀 줄이고 돈 보다 귀한 시간을 아이들을 위하여 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회적인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모든 시간을 다 쓰시지 마시고 시간을 아껴서 그 소중한 시간을 아이들과 놀아주고 이야기 해주는데 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하여 아이들이 어렸을 때 휴가도 가고 놀이터도 가고 놀이공원도 다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하고 노는 것은 공부하는 것보다 중요하고, 장사하는 것 보다 중요하고, 사업을 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생각처럼 쉬운 일은 물론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시간을 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투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업도 귀하고 직장도 귀하고 세상적인 성취와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아이들이 더 귀하다는 평범한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저는 늘그막에 자식 덕을 보는 것이 최고의 축복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모든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하듯 모든 자녀들은 부모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자녀는 생각처럼 많지 않습니다. 다만 부모를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자녀들이 많을 뿐입니다. 왜 자녀들이 부모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 줄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 부모들이 가르쳐 주지 않아서 입니다.
사랑은 말과 마음으로만 하고 실제로는 세상과 직장과 사업 그리고 개인적인 성공과 성취에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자했기 때문에 자녀들도 효도는 말과 마음으로만 하고 실제로는 세상과 직장 그리고 사업을 부모보다 더 귀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자녀들이 부모와 친구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외롭습니다. 왜 많은 자녀들이 부모와 친구가 되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많은 부모들이 자녀와 친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말과 마음으로만 자식을 사랑하고 실제로는 자식들 보다 사업과 직장과 개인의 성공을 더 귀히 여기면 살아왔던 그 동안의 삶을 한번 뒤돌아보며 회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그 어떤 기업 보다 더 크고 귀한 기업으로 맡겨 주신(그리고 맡겨 주실) 자녀들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귀히 여기며 살겠다 다짐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귀한 자녀(2)
엡 6:4 / 김동호 목사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는 자에게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주리라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전에도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저는 늘그막에 자식 덕을 볼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염치가 없는 기도라고 할 수 있고 좀 엉뚱한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그것이 제가 기도하여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아주 기막힌 복 중에 하나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제가 기대하고 기도하는 자식의 덕은 물론 마음이지만, 마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구체적으로 경제적으로도 자식 덕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몰라도 경제적으로까지 자식 덕을 본다는 것은 실제로 힘든 일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압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자식을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자식의 덕을 보면서 산다는 것은 계산이 잘 안 되는 일입니다.
저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다가 ‘아 그래서 하나님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는 자에게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덕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자식에게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주시겠다 하신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면 하나님이 약속을 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마음에 명심하고 새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에베소서 6장 1절에서 3절의 말씀대로 우리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면 우리 부모님들이 늘그막에 마음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얼마든지 덕을 보실 수 있도록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순종하여 이 말씀을 축복을 쟁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효자는 효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외적인 일이 가끔은 있어서 좋은 부모 밑에서도 불효하는 자식이 나오기도 하고 좋지 못한 부모 밑에서도 효도하는 자식이 나오기는 하지만 보편적으로 볼 때 효자는 좋은 부모 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효자가 먼저가 아니라 부모가 먼저라는 사실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어버이 주일에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이 되라는 설교를 중점적으로 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자식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하라는 설교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좋은 부모란 어떤 부모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좋은 부모를 그저 좋은 스폰서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뒷바라지만 부족함 없이 해 주면 그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쉽게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부모란 좋은 스폰서가 아닙니다. 좋은 스폰서가 되는 것 만으로는 절대로 좋은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날마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부모입니다. 옛날 우리들의 부모는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스폰서로서의 부모 역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들은 그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물질이 아닌 기도로 부모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는 것으로 부모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모가 눈물로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우리들은 그 부모님들의 눈물의 기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좀 넉넉해 지면서 우리는 기도를 잊었습니다. 아이들을 좋은 것으로 먹이고 좋은 것으로 입히며 원 없이 자식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며 자신들이 예전의 자기 부모보다 더 유능하고 훌륭하다 착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 자식들을 자기보다 더 복을 받은 자식들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자식을 위하여 가장 중요하고도 필요한 눈물의 기도를 잊었습니다.
좋은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위하여 얼마나 구체적으로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좋은 스폰서가 되는 것으로 좋은 부모라고 착각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여 자녀들에게 좋은 스폰서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 스스로 좋지 못한 부모라고 자학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부모는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되는 것입니다. 돈은 누구나 마음 먹는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기도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부모만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자식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날마다 기도하는 부모가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부모란 자식에게 인생과 신앙을 가르칠 수 있는 부모입니다. 좋은 부모는 반드시 자녀에게 좋은 교사 이어야만 합니다. 좋은 교사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부모는 절대로 자녀에게 좋은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옛날에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교사요 스승이었습니다. 옛날의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예절을 배웠고 인생을 배웠고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요즘 부모들은 반복하여 말씀을 드립니다만 그저 옛날 보다 좋은 스폰서 일 뿐입니다. 돈으로 부모 노릇을 다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 아빠는 좋은 아빠이고 가난한 아빠는 그렇지 못한 아빠인 것처럼 모두들 착각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옛날의 부모보다 경제적인 면에서 많이 넉넉해 진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좋은 학교 보내는 것으로 다 해결하려고 합니다. 정말 아이들에게 중요한 교육은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요즘 학교에서는 그와 같은 것들을 기대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설령 그와 같은 것을 가르치는 좋은 학교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좋은 부모에게서 배우는 것만 하지 못합니다. 자식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스승과 교사는 부모입니다. 부모이어야만 합니다.
자식을 위하여 기도하고, 자식을 위하여 가르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내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내 아이가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과연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알아야만 자식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고, 자식을 위하여 가르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불행하게도 요즘 많은 부모들은 그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녀들이 건강하고 똑똑하여 좋은 학교에만 가면, 그리하여 이 다음에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되고 출세하게 되면 그냥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확신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교육과 기도는 그것에 집중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착각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을 위한 우리 부모들의 치명적인 착각입니다. 우리들의 그와 같은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삐뚤어지고 망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점을 심각하게 반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명한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아비의 기도문’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녀를 위하여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를 알았던 사람이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만 하는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훌륭한 장군이기 이전에 훌륭한 아버지였습니다.
내 아이를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과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를 주시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 하지 않고 당당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곤란과 고통의 길에서 항거할 줄 알게 하시고
폭풍우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알며
패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그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높은 이상을 갖게 하시어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먼저 다스리게 하시며
내일을 내다보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게 하소서
또한 생활의 여유를 갖게 하시어 인생을 엄숙히 살아가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마음과 교만하지 않은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
그리고 참으로 위대한 것은 소박한 데 있다는 것과
참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새기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그의 아비된 저도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는가 나직이 속삭이게 하소서
A Father’s Prayer(맥아더의 ‘아들을 위한 기도’)
by General Douglas MacArthur
Build me a son, O Lord, who will be strong enough to know when he is weak, and brave enough to face himself when he is afraid; one who will be proud and unbending in honest defeat, and humble and gentle in victory.
Build me a son whose wishbone will not be where his backbone should be; a son who will know Thee and that to know himself is the foundation stone of knowledge.
Lead him I pray, not in the path of ease and comfort, but under the stress and spur of difficulties and challenges. Here let him learn to stand up in the storm; here let him learn compassion for those who fail.
Build me a son whose heart will be clear, whose goal will be high; a son who will master himself before he seeks to master other men; one who will learn to laugh, yet never forget how to weep; one who will reach into the future, yet never forget the past.
And after all these things are his, add, I pray, enough of a sense of humor, so that he may always be serious, yet never take himself too seriously. Give him humility, so that
he may always remember the simplicity of true greatness, the open mind of true wisdom, the meekness of true strength.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저는 앞으로 몇 주일에 걸쳐서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을 텍스트로 삼아 우리 자녀를 위하여 무엇을 가르치며 무엇을 기도하여야 할 것인가를 설교하려고 합니다. 그가 자식을 위하여 기도한 용기와 정직한 패배에 대하여 당당함과 겸손과 온유함과 강인한 정신과 긍휼과 너그러움 그리고 깨끗함과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여유와 소박함을 하나 하나 성경적으로 조명하며 살펴 보려고 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우리들이 정말 좋은 아이들의 교사가 되려면 먼저 교사된 우리가 그와 같은 것들을 배워야만 합니다. 훈련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과 기도만이 아닌 우리 삶으로 그와 같은 것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기도한 자녀를 얻기 이전에 먼저 우리가 그와 같은 삶을 사는 부모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좋은 부모에 도전하십시다. 자식을 위하여 기도할 줄 아는 부모가 되는 일에 도전하십시다. 골방에서도 기도하지만 실제로 자녀의 손을 잡고, 혹은 직접 머리에 안수하며 기도하는 일에 도전하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자식에게 인생과 신앙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교사로서의 부모에 도전하십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의 참 뜻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 하였습니다. 자식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일 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중요한 일일 뿐만 아니라, 자식을 위하여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과 나라를 위하여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사업과 목회와 선교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은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중요한 일일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어떠십니까? 만일 문제가 있다면 왜 그런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인 우리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조차 몰랐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가르쳐야만 할는지도 모르고 자녀를 키웠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실력이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루게 되겠지만 자녀들의 인격을 존중하지 못하고 때때로 무례하게 자식을 대하는 우리들의 무지한 교육 방법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맥아더처럼 기도하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정확히 자녀를 위하여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를 알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내용을 몸과 삶으로 실천하면서 그것을 자녀에게 가르치고, 가르칠 때 아이의 인격을 존중하며 아이에 대해서는 바른 예의를 가지고 가르친다면 아이들은 반드시 훌륭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좋은 자녀는 좋은 부모가 만듭니다. 효자는 좋은 부모가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효자로 키우실 수 있는 좋은 부모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무엇보다 귀한 자녀(3)
엡 6:4, 사 41:10- 16 / 김동호 목사
어려서 듣던 옛날이야기 중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소시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착하게 살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어느 날 산신령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까지 세 가지 소원을 이야기하면 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소원을 빌어야 가장 후회 없는 소원을 빈 것인지가 부담이 되어 밤이 깊도록 첫 번째 소원조차 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긴장을 하며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니 배가 고팠습니다. 할머니는 그만 무의식중에 ‘커다란 소시지나 하나 먹었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소원이 되어 하늘에서 커다란 소시지 하나가 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할머니는 놀랐고 할아버지는 화가 났습니다. 소중한 소원 중 하나를 소시지와 바꾼 것이 너무나 화가 난 할아버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소시지 할망구 코에나 가 가 붙어라’라고 말을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할아버지의 말이 두 번째 소원이 되어 할머니 코에 그 소시지가 가서 붙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커다란 소시지가 먹지도 못하게 할머니 코에 가서 붙어 있게 되자 할 수 없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남아 있는 한 가지 소원을 이용하여 그 소시지를 할머니 코에서 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소중한 세 가지 소원을 통하여 겨우 커다란 소시지 하나를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철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욕심을 가지고 이것저것을 욕심내 보지만 정작 자기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를 모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만일 하나님이 내일 아침까지 세 가지 소원을 들어 주시겠다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세상에 우리 자신보다 귀한 존재가 있다면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우리 자녀를 위한 세 가지 소원을 들어 주시겠다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사랑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하여 과연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자유인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좋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고 죄를 지어 타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격을 존중하신다는 것이 저는 너무나 좋습니다.
저는 그래서 개인적으로 누가 저의 인격과 자유를 건드는 것이 가장 싫습니다. 저로 하여금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과 결정을 내리게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강요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싫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대하지 않으시는데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대하는 것을 용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럴 경우 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싸웁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사람들의 인권과 인격 그리고 자유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제일 싫습니다. 하나님을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큰 벌을 내리십니다. 때문에 살아가면서 타인의 인격을 모독하고 인권과 자유를 무시하고 폭력을 가하는 우를 범하지 아니하도록 언제나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인으로 창조하시고 모든 판단과 결정을 스스로 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바른 판단과 옳은 결정을 내리도록 옆에서 도와주시지만 우리 스스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언제나 기다려 주십니다. 자유인이란 모든 판단과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자유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모든 판단과 결정을 스스로 내리며 살아야 할 자유인인 우리가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치명적입니다. 자유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여야만 하는데 판단력과 분별력이 부족하여 옳지 못하고 바르지 못한 것, 자신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들을 선택하며 산다면 그의 삶은 언제나 실패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바르고 정확한 판단력과 분별력을 하나님께 구하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즘 설교의 텍스트로 삼고 있는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에 바로 그와 같은 간구가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하나님께 자신의 자녀가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인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자유인에게 꼭 필요한 분별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영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영적인 분별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부어주신 당신의 영은 분별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범죄하고 타락하면서부터 그 소중한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하나님의 영을 상실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을 상실하면서부터 인간은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되어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배부지 못할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는’(사 55:2) 헛된 일을 하며 인생을 헛되게 낭비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특징은 분별력을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는 욕심인데 욕심은 언제나 우리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우리에게서 생명과 같은 분별력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으면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부터 인간은 약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본시 우리 인간의 힘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인데 힘과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약해질 때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안입니다. 불안할 때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별력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불안하게 되면 알던 것도 모르게 되고, 늘 하던 것도 못하게 됩니다.
인간은 약할 때 분별력을 잃습니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약할 때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과 사랑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하여 ‘약할 때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셔야만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별력을 갖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강함입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우리 인간을 강하게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돈이 우리를 강하게 하고 지식이 우리를 강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출세하여 권력을 갖게 되면 강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생각들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돈이 있으면 힘이 생기게 되는 것도 사실이고,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많은 지식을 갖게 되면 강하게 되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말 할 것 없이 권력을 갖게 될 때 우리 인간은 강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그 강함이 우리에게 분별력을 가져다 줄 정도의 강함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른 분별력을 가져다 줄만큼의 힘과 강함은 믿음으로부터만 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강함은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주고 그 평안은 바른 분별력에 있어서 없어서는 아니 될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21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산과 같은 일을 당하였을 때 우리 인간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은 미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시편 121편을 기록한 기자는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절망하지 아니합니다.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전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라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당당하게 산을 향하여 눈을 들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시기 때문인데 자기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시편 기자의 믿음이요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능하신 분이 아닙니다. 유능하신 분이 도와주어도 힘이 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면 그 도움이 얼마나 클 것이며 그 도움이 얼마나 완벽할 것일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고 확신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지키시는 분이시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지키시는 분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지키시는 까닭은 사랑 때문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신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나를 지키시니 밤의 달도 나를 해치 못하고 낮의 해도 자신을 해치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건강보다도, 공부보다도, 세상의 성공과 권력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달리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가르침으로 사랑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그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여러분의 자녀에 대한 모든 기도와 소원은 다 이루어졌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외에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꼭 암송시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 중에 하나는 이사야 41장 10절에서 16절의 말씀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허무한 것같이 되리니,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 두 가지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은 언젠가는 결국 무너지고 망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이 절대로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두 가지 사실을 알고 믿는다면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여도 절대로 망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강하고 험해도 불안하지 않을 것이며 약해지지 않을 것이며 때문에 자유인에게 생명과 같은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맥아더 장군과 같이 ‘약할 때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줄 아는 지혜로운 부모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그와 같은 힘을 얻기 위하여 사랑하는 자녀에게 힘써 하나님을 가르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언제나 담대함으로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언제나 옳고, 언제나 바르고, 언제나 자신에게 유익한 것만 선택하고 살아가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에게 ‘약할 때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언제나 실수하지 아니하고 옳은 것만 선택하고 바른 것만 선택하고 자신과 하나님에게 유익한 것만 선택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되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산과 같은 일을 만나도 기죽지 아니하고 산을 향하여 당당하게 눈을 드는 자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셔서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고 지켜 주신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여도, 세상이 아무리 강하고 힘이 있다고 하여도 결국 자신의 머리 털 하나 상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그것을 당당하게 세상에 선포할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약할 때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이 바른 영적 분별력을 통하여 항상 옳고 바르고 좋은 것을 선택하게 하시며 언제나 자신에게 복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며 사는 영원한 자유인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무엇보다 귀한 자녀(4)
엡 6:4, 삼상 17:45-49 / 김동호 목사
우리는 요즘 맥아더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텍스트로 삼아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과연 무엇을 기도해야만 하는가를 함께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맥아더는 자신의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를 주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지혜롭고 자녀를 위하여 중요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자신과 자녀를 위하여 빼놓지 않고 기도해야만 할 중요한 제목 중의 하나는 ‘용기’입니다. 우리도 맥아더 같이 자신과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용기’를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가지 예수를 믿으면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기독교 신앙은 참 능동적이고 공격적이고 전투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겸손 그리고 욕심 없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잘못 이해하면 기독교 신앙이 나약한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강함 보다 강한 강함이지 절대로 나약함이 아닙니다.
니이체가 기독교를 오해하여 나약한 것을 숭상하는 종교라고 비판을 하고 인간을 나약하게 하는 하나님을 자기가 죽였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그리고 요즘 김용옥이라는 사람이 그와 같은 니이체를 이야기를 하며 기독교를 폄하하고 잘난 척하고 있지만 저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주 능동적이며 다이나믹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 속에서 강한 운동력과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느낄 수 있고,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마 11:12) 속에서도 우리는 그와 같은 기독교의 정신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나약한 인간인 우리들에게 마귀를 만나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타협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피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대적하여 정면으로 공격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마귀도 우리를 이기지 못하고 피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약4:7)
성경은 인생을 전투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누려야 할 천국의 세상이 아니라 싸워야 할 죄악의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녀가 세상과 죄에 오염되어 세상과 함께 멸망하는 삶을 살게 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마귀를 대적하고 세상과 세상의 죄와 싸우는 전투정신과 전투기술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삶은 전투입니다. 부인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전쟁에 내 보내는 것이 안쓰러워 할 수 있는 대로 감싸주고 보호해 주려고 하지만 그것은 자식을 망치는 일입니다. 자식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인생의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자식의 전쟁을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말 자식을 사랑한다면 안쓰럽더라도 자식을 강하게 키워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을 절대로 나약하게 키우지 않으십니다. 온실에서 편안하게 키우지 않으십니다. 물 속에도 집어넣으시고, 불 속에도 집어넣으십니다. 환난도 격께 하시고 불경기도 격께 하십니다. 훈련도 장난이 아니어서 훈련을 받다가 꼭 죽을 것만 같고, 혹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고 잊으신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만큼 힘들고 어렵습니다.
예레미야 12장 5절에 보면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읽다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인정도 사정도 없어 보이는 유격조교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채찍질 하여 키우십니다. 절대로 오냐오냐하며 응석받이로 키우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보호해 주시지만 게을러서 자기의 달란트를 땅에 파묻어서 가난해 진자까지 보호해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를 악하고 게으른 자라고 꾸짖으시며 그 있는 것을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그리고 그를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시는 아주 무서운 분이십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고 말씀하시는 아주 강하고 무서운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가 인간을 나약하게 한다고 주장하는 니이체와 요즘 김용옥이라는 사람은 정말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용기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다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 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떠날 때는 갈 바도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 어느 누구 보다도 개척정신이 뛰어난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부모와 친척과 같은 빽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업을 하거나 정치를 하거나 취직을 하고 직장에서 승진을 하려고 할 때에도 학연과 지연을 동원하고 할 수만 있으면 그와 같은 것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실력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하였던 파이어니어였습니다. 그는 강한 자였고 용기 있는 자였습니다.
갈렙은 85세에도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고 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 14장에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다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만 저도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피가 끓습니다. 얼마나 근사한 말씀인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주신 축복도 앉아서 받은 사람이 아니라 싸워서 쟁취한 사람입니다. 남들이 힘들고 두려워서 좀처럼 도전하려고 하지 않았던 산지, 크고 견고한 성읍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용사라고 불리우던 아낙 자손들이 있는 그 성을 그것도 85세라는 나이에 도전하였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약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잘 못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인 순종과 겸손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고 저들을 노예처럼 쉽게 부리려고 하였던 당시의 크리스천 기득권층은 무늬만 크리스천이었지 진실한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엉터리로 잘 못 믿는 사람을 기독교로 보고 예수 잘 못 믿는 것을 비판하지 아니하고 기독교를 비판했던 니이체는 머리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인간을 나약하게 한다고 자기가 하나님을 죽였다고 큰 소리쳤던 니이체는 정신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에도 자신이 천재인줄로 스스로 착각하고 떠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미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야기하는 기독교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을 받는 다윗도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칼도 들 수 없고, 갑옷도 무거워서 입을 수 없었던 어린 소년 때에 장수들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골리앗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직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무너트렸습니다. 아무리 반복하여 읽어도 여전히 신이 나고 재미있는 말씀 중에 하나는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 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지르며 블레셋 사람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의 상한 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더라> 아멘 (삼상 17:32-52)
이 외에도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신앙의 용장들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왕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의 지조를 꺽지 않았던 다니엘과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걸고 죽으면 죽으리라 외치며 왕 앞에 나아갔던 에스더 등등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용기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 모두가 다 용기 있는 강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우리는 이 용기를 가르쳐 주어야만 합니다. 험한 세상과 싸워야 하는 자녀들이 안쓰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을 무작정 보호만 할 수는 없습니다. ‘골리앗과 싸우는 것은 너무 위험하니 차라리 골리앗에게 항복을 하고 골리앗의 종과 노예로 살아라’고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 적당히 타협하며 살라’고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다윗만 하고 세상은 골리앗만 하지만 언제나 도망가지 말고, 항복하지 말고 정면으로 도전하고 돌파하라고 가르쳐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이유는 우리의 용기에 있습니다. 용기의 근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용기는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두려움과 비겁함의 뿌리는 불신앙입니다. 다윗과 아브라함과 갈렙과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에스더의 용기는 모두 믿음에서 왔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용기 있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의한 세상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불의한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대적하며 싸우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맥아더는 자기 자녀를 위하여 기도할 때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을 하나님이 우리를 키우시는 것처럼 키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하게 키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기 있게 키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용기를 가르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골리앗과 같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윗처럼 싸우라고 가르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신과 사랑은 자녀가 진정한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무엇보다 귀한 자녀(5)
엡 6:4, 사 50:7 / 김동호 목사
초등학교 5학년 때라고 기억이 됩니다. 필리핀과 우리나라 사이의 농구 시합이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우리나라가 이겼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라디오 중계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우리나라가 이기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하나님이 참 곤란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틀림없이 필리핀 사람들은 하나님께 필리핀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을 터인데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셔야만 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은 우리나라와 필리핀은 똑같이 사랑하시지 우리나라라고해서 특별히 더 사랑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 곤란한 문제에 대하여 조금 깊이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답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실력 있는 팀이 이기게 해 주세요’ 실력 있는 팀이 이기는 것이 가장 공정한 일이고, 우리 실력이 필리핀보다 약하다면 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패배는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옳고 근사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지는 것에 대한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어려서 가정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운 옷을 입고 다녀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 저만 그런 옷을 입고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중학생이었던 사춘기에는 정말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싫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가방으로 누빈 곳을 가리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기 전에는 그것이 부끄럽더니 깊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가리고 다녔던 가방을 치웠습니다. 자신 있게 깁고 누빈 곳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당하게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멋있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세상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부끄러운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끄럽지 않은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경기를 한 후 나보다 실력이 나은 사람에게 패배하는 일은 조금 섭섭한 일이기는 하지만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내가 게으르고 삶의 방식이 잘못되어 가난해 졌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성실히 열심히 살지만 이런 저런 여건 때문에 남보다 좀 가난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운 줄 몰라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빠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부끄럽지 않은 일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에 못지않게 나빠지고 있습니다.
이솝의 우화 중에 ‘여우와 포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유가 잘 익은 포도를 보고 그것을 따 먹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 포도가 불행하게도 좀 높이 달려 있어서 여우가 아무리 최선을 다하여 점프를 해도 그 포도를 따 먹을 수 없게 되자 그 여우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저 포도는 시어’
자신의 정직한 실패를 인정하지 않은 여우 때문에 멀쩡하게 잘 익은 포도가 신포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는 이와 같은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세상에는 신포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포도가 다 신포도는 아닙니다. 신포도를 신포도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잘 익은 좋은 포도를 무조건 신포도로 매도하는 것은 아주 나쁜일입니다. 세상을 위하여 아주 좋지 않은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모든 포도를 신포도로 매도하는 여우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살다보면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일이 누군들 쉽겠습니까만은 우리는 그것을 훈련하고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든 성공한 사람들을 무조건 신포도로 몰아붙이고 정죄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참으로 악한 것입니다.
살다보면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가난에 대하여 담담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도통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것에 도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가난을 용납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나머지 모든 부자를 무조건 신포도로 몰아붙이고 정죄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악한 일입니다.
건강한 세상과 사회가 되려면 ‘당당한 실패와 가난’과 ‘겸손한 성공과 부함’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정직한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해 할 줄 아는 마음과 성공하고 부해졌을 때 겸손하여 실패하고 가난해 진자들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성공했을 때 교만하여 실패한 자들에 대하여 너그럽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참으로 살맛이 나지를 않습니다. 실패했을 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직하게 성공한 사람들 까지도 신포도로 매도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정말 살맛이 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 그리고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다섯 달란트를 맡은 사람은 열심히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를 맡은 사람도 열심히 장사를 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결과적으로 다섯 달란트를 맡았던 사람은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 되었고 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네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열 달란트와 네 달란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은 똑같이 충성된 종으로 인정하고 칭찬하셨습니다. 전혀 차이와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한 달란트를 맡았던 사람이 열심히 장사를 하여 한 달란틀 남겼어도 하나님은 똑같이 칭찬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달란트를 맡았던 사람이 열심히 장사를 하다가 실패를 하여 원금도 건지지 못하고 실패를 하였다면 하나님을 뭐라고 하셨을까요? 저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애야 너무 낙심하지 말아라. 장사를 하다보면 남을 때도 있고 손해를 볼 때도 있는 법이란다. 사람들은 혹시 너를 무능한 사람이라고, 실패한 사람이라고 비방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내 보기엔 너도 착하고 충성된 종임에 틀림이 없단다. 염려하지 말아라. 실망하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더 큰 일을 또 다시 맡길 것이다’ 저는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을꺼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합니다.
사람들은 성공과 실패는 ‘몇 달란트를 남겼느냐?’ 그래서 지금 ‘몇 달란트를 가지고 있느냐?’를 가지고 판단하지만, 성공과 실패는 달란트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평가로서 판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많이 남겼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고 적게 남겼다고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평가하시면 성공한 것이고, 하나님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평가하시면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달란트가 적다고 무능하고 실패한 사람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무조건 달란트가 많다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는 옳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눈에 보이는 성적과 평가에 연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한 달란트를 부끄러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달란트를 이용하여 열심히 살 생각을 하기 보다는 그것을 땅에 묻어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많은 달란트를 가진 사람을 매도하고 비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쓸데없는 열등의식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참으로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본의 재일교포 야구선수였던 장훈 선수가 처음 프로로 데뷔하여 좋은 성적을 내자 일본 관중들이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장훈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일본 관중 중에 한 사람이 장훈 선수에게 대하여 ‘죠센징 가라’라는 모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 말이 선동이 되어 장내에 가득했던 일본 관중들이 한 목소리로 장훈 선수를 야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죠센징 가라’ ‘죠센징 가라’ ....
관중들의 야유가 잦아 들 때까지 조용히 타석에서 벗어나 기다리던 장훈 선수가 다시 타석에 들어서면서 관중을 향하여 큰 소리로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 그리고는 일본 투수가 던지는 공을 담장 밖으로 넘겨 버렸습니다. 홈런을 친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 샘터라는 책에서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장훈 선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국민소득이 좀 적고 가난한 나라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국민소득이 좀 많은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교만하여 거드럭거린다면 그것도 역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본 사람은 일본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 사람은 그냥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존중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프랑스에는 ‘미슐랭 가이드’라는 곳이 있는데 미슐랭 가이드는 식당의 수준을 평가하여 발표하는 기관입니다. 프랑스의 식당과 요리사들의 꿈 중에 하나는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별 3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지금까지 그곳으로부터 별 3개 평가를 받은 식당은 프랑스 전체를 통 털어서 25곳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곳이 베르나르 루아조라고 하는 사람이 운영을 하였던 코트도르라고 하는 식당입니다. 루아조라고 하는 사람은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별 3개 평가를 받기 위하여 수십년 동안을 노력했고 드디어 1991년에 꿈에도 그리던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별 3개 평가를 받아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2003년 봄 권총으로 자살을 하였습니다. 이유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미슐랭 가이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느 식당 가이드가 그의 식당 평점을 19점에서 17점으로 낮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전에도 여러 번 말씀을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막내가 수능 점수를 좀 낮게 받고 나서 저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아버지 제가 부끄러우시지요?.......’ 당장 답장을 보냈습니다. ‘세상에 자식을 부끄러워하는 애비가 어디 있냐? 공부를 좀 잘하면 좋겠다는 것이지 공부를 잘하면 내 새끼고 공부를 좀 잘 하지 못하면 남의 새끼냐? 아버진 너 안 부끄러워. 공부를 좀 잘 할 수도 못할 수도 있는 것이지 공부가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
그 답장이 제 막내에게 많이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 막내는 결국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엘 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약간 떨어진 대학엘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제 막내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철이 없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 아비가 자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도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 막내가 성적이 좀 떨어져서 서울에 있는 대학엘 다니지 못하는 것을 늘 부끄러워하여 어께를 떨구고 다닌다면 무척 속상할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막내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자기 형들 못지않게 훌륭한 자기 일을 찾을 것이고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아이가 될 것이라고 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낮은 자존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등의식입니다. 낮은 자존감은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는데서부터 옵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데서부터 옵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아는 사람은 절대로 그와 같은 낮은 자존감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낮은 자존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당당하지 못하다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세상과 같은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귀히 여기십니다.
살다보면 실패할 때도 있고. 살다보면 남보다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살다보면 남에게 더 뒤쳐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부끄러워 할 필요 없습니다. 창피하게 이솝의 여우처럼 세상을 신포도로 매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을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 볼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죠센징 가라’라고 야유하는 세상을 향하여 두 발을 굳게 딛고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 큰 소리 한 번 지르고 세상의 담장을 넘기는 홈런으로 응수하는 당당한 크리스천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을 이사야 50장 7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아멘.
맥아더는 자신의 자녀를 위하여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한 자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중요하고 근사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자녀를 위하여 이 기도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다보면 질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좀 가난해 질 수도 있고, 좀 형편이 어려울 수도 있고, 좀 잘 안 풀릴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것 없어요.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삐뚤어 질 것 없어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빈정거릴 것 없어요.
하나님이 절대로 저와 여러분을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이 절대로 저와 여러분을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절대로 저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절대로 우리를 수치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걸고 삶으로 세상적으로 좀 성공했다고 거드럭거리지도 말고, 세상적으로 좀 실패했다고 기죽지도 말고 언제나 겸손하게, 그러나 언제나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무엇보다 귀한 자녀(6)
엡 6:4 / 김동호 목사
이제껏 살아오면서 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말과 일들이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의 말과 삶의 모습에서 나온 것들인데 제가 설교 중에 늘 자주 인용하는 것들입니다.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꼽자면 아무래도 임택진 목사님이신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 분의 삶과 말씀들이 저에게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벌써 여러 번 설교 중에 말씀드렸던 일들입니다만 오늘 다시 그 중 몇을 반복하려고 합니다.
임 목사님이 시무 중 큰 교회의 청빙을 받고 교회를 떠나시려 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교인들이 그와 같은 사실을 눈치 채고 목사님을 막았습니다. 교인의 대표로 선임 장로님이 목사님을 만나셨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목사님을 만류하시다가 ‘목사님, 큰 교회에 가시면 월급을 많이 드릴 터인데 만일 그것 때문이라면 가지 마십시오. 우리교회도 다음 달부터 목사님 생활비 올려 드리겠습니다.’
그때 제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목사님의 말씀이 나왔습니다.
<소시장의 소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값이 올라도 가고 내려도 가지만, 나는 소시장의 소가 아니요>
정말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명언 중의 명언으로 저는 기억하고 부족하지만 그렇게 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임 목사님 목회 하실 때는 한국 교회가 다 어려웠을 때였습니다. 특히 자녀들이 많으셨던 임 목사님 가정은 참 경제적으로 힘든 삶을 사셨습니다. 목사님 가정이 경제적으로 힘들면 가장 고생을 하시는 분은 아무래도 사모님이십니다. 임 목사님 사모님은 정말 경제적으로 빠듯한 살림 때문에 그 누구 못지않게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의 하신 말씀 중에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가난이 싫어, 그러나 무섭진 않아. 다시 이렇게 살라면 살지 뭐.>
어느 부자에게서 찾을 수 없는 삶의 당당함과 멋을 느끼게 하는 정말 명언 중의 명언입니다. 가난이 싫지만 무섭진 않다는 사모님이나 그와 같은 가난 속에서도 소시장의 소로서는 안 살겠다는 목사님의 말씀과 삶이 저에게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1981년 12월 마지막 주일 목사님은 65세로 은퇴를 하셨습니다. 임 목사님은 우리 한국교회에 정년 제도를 주창하신 분이십니다. 목사님은 65세 정년을 주창하셨지만 총회에서 의논하던 중 70세 정년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총회에서는 70세로 결정이 되었지만, 65세를 주장하던 사람이 70세까지 정년을 할 수 없다며 그냥 65세에 은퇴를 하셨습니다. 그때 까지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삶을 사셨고, 그때까지 막내가 대학을 다니고 있는 중이어서 교회를 그만 두시면 정말 경제적으로 막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저런 생각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신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은퇴 식 중에 드디어 목사님이 인사를 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23년 동안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정말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시고 은퇴하시는 목사님이셨기 때문에 마지막 말씀이 참 많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인사는 참으로 어이없을 만큼 간결하였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는 누가복음 17장 9절과 10절의 말씀을 암송하신 후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는 인사만 드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강단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너무 멋있고 근사하였습니다. 저도 은퇴 식 때 꼭 그렇게 인사를 하고 교회를 떠나고 싶습니다.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저는 빨리 은퇴를 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농담인 줄 알지만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 그와 같이 근사한 말고 은퇴를 하고 싶어서 은퇴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근사한 은퇴 인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청량리 중앙교회는 제가 어려서부터 자라난 모교회입니다. 남달리 사랑하고 애착을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임 목사님 때 건축하였던 예배당을 허물고 새로 건축을 하려고 하였을 때 저는 마음으로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당을 새로 지을 만큼 교인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예배당을 새로 지을 만큼 예배당이 낡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임 목사님 댁을 찾아가 임 목사님과 대화를 하던 중 나도 모르게 ‘그거 왜 쓸데없이 멀쩡한 예배당을 허물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리면 임 목사님도 최소한 ‘그러게 말이야’라고 맞장구를 쳐 주셔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임 목사님에게서 나온 말씀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내 교횐가 뭐?>
어떻게 청량리 중앙교회가 당신의 교회가 아니시라는 말씀이십니까? 자신의 인생과 청춘을 다 바쳐 섬기신 교회인데 어떻게 그 교회가 당신 교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은퇴를 하시면서 목사님은 교회에 대한 모든 것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평생 목회해 오시던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은퇴 후에도 계속해서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시려고 하는데 목사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깨끗하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 놓는 분을 이제껏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흔히 ‘큰 나무 밑에는 그늘이 크다’는 말을 합니다. 임 목사님은 정말 큰 나무셨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그늘이 없는 큰 나무였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에는 김익명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장로님 이십니다. 주일 장년 출석이 500명 정도 되던 때 교회 재정의 1/3을 혼자서 헌금 하시던 분이십니다. 제가 요즘 화폐가치로 대충 계산을 해 보았더니 일년에 최소한 2억 원 정도를 헌금하신 셈이 됩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하여도 그렇게 헌금을 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제가 주일학교 교육전도사를 하고 있을 때 그 장로님이 주일학교 부장이셨습니다. 저를 가족같이 아껴주시는 분이었고 경제적으로도 참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당회에 건의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서 그 장로님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로님은 정중하게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정말 평생 잊을 수 없는 명언을 남겨 주셨습니다.
<전도사님이 알다시피 제가 교회에 헌금을 좀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당회에 가서 말 잘 안합니다. 말을 많이 하든, 연보를 많이 하든, 둘 중에 하나만 많이 해야지 둘 다 다 많이 하면 좋지 않습니다.>
연보를 많이 하기 때문에 말은 많이 해서는 안 된다는 말 생각처럼 쉬운 것 아닙니다. 세상에 돈처럼 힘이 있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돈을 헌금하면서도 그 힘을 교회에서 쓰지 않으려고 그와 같은데 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이 어디 그렇게 쉽습니까?
<연보를 많이 하든, 말을 많이 하든, 둘 중에 하나만 해야 한다>는 말씀은 제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근사한 명언 중의 명언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제가 인용하려고 하는 말은 제가 ‘무엇보다 귀한 자녀(5)’에서 인용하였던 장 훈 선수의 말입니다. 자기를 죠센징이라고 놀리며 ‘죠센징 가라, 죠센징 가라’를 웨치는 일본 관중을 향하여,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라고 큰 소리를 질러대고 일본 투수가 던지는 공을 담장 밖으로 처 버렸던 장 훈 선수의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라는 말 또한 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명언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제 삶에 영향을 끼친 명언들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소시장의 소가 아니오>
<나는 가난이 싫어, 그러나 가난이 무섭진 않아>
<명한대로 행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내 교횐가 뭐?>
<말을 많이 하든지, 연보를 많이 하든지>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
이 여섯 개의 말은 크게 두개의 유형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유형은,
<나는 소시장의 소가 아니오>
<나는 가난이 싫어, 그러나 무섭진 않아>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 입니다.
둘째 유형은,
<명한대로 행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내 교횐가 뭐?>
<말을 많이 하든지, 연보를 많이 하든지>입니다.
첫째 유형의 말들은 ‘약할 때에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함’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약해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을 때 참 근사해 집니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추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하다고 비굴해지고 치사해질 때 추해 지는 것입니다.
둘째 유형의 말들은 ‘강할 때에도 지나치지 않고 겸손함’ ‘자기의 힘과 권리를 함부로 주장하지 아니함’ ‘약한 자들을 배려함’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강하기 때문에 근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중에는 강함에도 불구하고 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강하다고 교만하거나, 함부로 자기의 힘과 권리를 주장하거나, 약한 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욕심만 부리는 사람은 절대로 근사하지 않습니다. 훌륭하지 않습니다. 추합니다. 그러나 강하고 부할 때 겸손하고 자기의 힘과 권력을 함부로 주장하지 아니하고, 약하고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고 배려하는 강자는 참으로 근사하고 훌륭한 것입니다.
맥아더는 자녀를 위한 그의 기도문에서 그것을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녀를 주시옵소서> <승리에 겸손한 자녀를 주시옵소서>
여러분은 지금 강자이십니까? 아니면 약자이십니까? 여러분이 만일 지금 현재 강자가 아니고 약자라면, 그리고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라면,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이전에 먼저 ‘약하고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무조건 강자와 부자를 시기하며 빈정거리고 부정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가난하고 약하지만 늘 당당하고 긍정적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일 강하고 부하신 상태에 있으시다면, ‘겸손하게 해 주시옵소서, 자신의 힘과 권리를 자신만을 위하여 주장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가난하고 약한 이들과 친구 될 수 있게 해 주시고 저들을 늘 배려하는 큰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 최일도 목사님이 섬기시는 다일교회의 모임에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저는 거기서 부자들만 모인다고 하는 강남의 대형교회들이 별로 건강한 교회가 아니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회는 부자도 오고, 가난한 자들도 와야 좋은 교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두들 아멘하며 수긍을 하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그런 의미에서 다일교회도 강남에 있는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건강치 못한 교회라고 용기 있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깜짝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강남의 소위 부자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오기가 불편한 교회이기 때문에 건강치 못하다면, 다일 교회는 부자들이 오기 불편한 교회이기 때문에 건강치 못한 교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강남 교회에는 자가용이 없는 교인들이 좀 더 많아져야 좋은 교회가 되고, 다일 교회는 자가용 그것도 고급 자가용을 탄 교인들이 아주 많아져야 좋은 교회가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교회는 조금(?) 좋은 교회 같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교회도 부자 교횐 줄 아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부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에는 가난한 교인도 많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부자 교회 되는 것 싫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우리 교회가 가난한 교회 되는 것도 싫습니다. 부함과 가난함이 전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면 바로 그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자끼리만 모이는 교회, 가난한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교회는 오히려 쉽습니다.
그 힘든 일이 가능해 지려면, 교인들이 <당당하고도 긍정적인 약자>와 < 겸손하고도 강자의 책임을 다할 줄 아는 강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약자에게 가장 힘든 것이 바로 당당함과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자에게 가장 힘든 일은 겸손히 강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힘든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게 하기 이전에 먼저 당당하고 긍정적이게 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약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시장의 소가 아니요>
<나는 가난이 싫어, 그러나 무섭진 않아>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와 같은 근사한 말을 하며 사는 근사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강하고 부한 자를 겸손하게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강하고 부할 때,
<명한대로 행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내 교횐가 뭐?>
<말을 많이 하든지, 연보를 많이 하든지>와 같은 근사한 말을 하며 사는 정말 근사한 사람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약하고 가난해도 <정직한 패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당당하고도 긍정적이며 밝은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하고 부해도 <승리에 겸손한> 정말 근사한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맥아더 장군의 <정직한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녀를 주시옵소서> <승리에 겸손할 줄 아는 자녀를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