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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3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배우 박민영 일본 나고야서 열린 ‘2022 아시아 아티스트 어워드 인 재팬’에서 AAA 베스트 아티스트상 수상
2021년 호주를 중인 문재인 대통령 스콧 모리슨 총리와 정상회담
2021년 코로나 변이바이러스 오미크론 영국에서 첫 사망자 발생
2019년 미국과 중국 무역전쟁 발발 526일 만에 1단계 무역합의 타결
2017년 북한군 병사 오창성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통해 귀순
2015년 헌법재판소 음주운전 3진아웃제 합헌 판결
2014년 인도네시아 자바 섬 산사태 일어나 56명 목숨 잃고 52명 실종
2011년 ‘철강왕(王)’ 박태준 별세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1981년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육사 후배이자 당시 민정당 총재였던 전두환 대통령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훗날 평전 등을 통해 “포항제철을 외풍(外風)에서 지킬 방패막이가 필요해 정치권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의원 배지를 달자마자 국회 재무위원장을 맡았고, 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을 거쳐 정계 입문 10년 만인 1990년 1월 민정당의 대표로 추대됐다. 하지만 민정당이 통일민주당(김영삼 총재)·신민주공화당(김종필 총재)과 3당합당을 하는 바람에 보름여 만에 최고위원으로 ‘강등’됐다. 그는 차기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그해 4월 노태우 대통령은 박 명예회장에게 당내 경선에 참여하지 말 것을 종용했고, 그는 결국 대선 불출마를 택했다. 그는 대신 내각제를 대통령 공약으로 제시할 것을 요구하면서 YS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박 명예회장은 1992년 대선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거절했고, 그해 10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이듬해인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포항제철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시작됐다. 박 명예회장은 포항제철 협력사들로부터 39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다. 이후 출국해 미국과 일본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1997년 박 명예회장은 4년여의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그는 그해 7월 포항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승리하면서 4선(選)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되던 그해 11월 자민련에 입당해 ‘김대중·김종필 연합’에 참여해 DJ의 당선을 도왔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반도체와 자동차 등에서 대기업 간 사업 중복을 없앤다는 취지로 5대 그룹의 빅딜(사업 교환)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박 명예회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1월 ‘새천년 첫 총리’로 발탁됐다. 그러나 곧바로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져 취임 4개월 만에 낙마했다. 이후 박 명예회장은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며 정치와 절연했다.
2010년 부산 거가대교 개통
거가대교(巨加大橋)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에서 가덕도와 죽도, 저도를 거쳐 거제시 장목면을 잇는 다리이다.
이다리는 길이 3.5km의 2개의 사장교와 3.7km의 침매터널 1km의 2개의 육상터널로 구성된 총 8.2km이다
총사업비는 1조 4,469억원이 투입되었으며 국고 지원 28%, 민간자본 72%로 완공되었다.
2004년 12월에 착공되었으며, 6년간의 공사 끝에 2010년 12월 13일 오후 2시에 개통식을 하였고 차량 통행은 다음날인 12월 14일 오전 6시부터 가능해졌다.
2009년 폴 새뮤얼슨 타계
2009년 12월 13일 미국인 최초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1970년)자 폴 새뮤얼슨 (Samuelson·94) MIT대 교수가 급환으로 벨몬트의 자택에서 숨졌다.
새뮤얼슨 교수는 현대 경제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놓아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 교과서 '이코노믹스(Economics)'를 썼다. 또한 MIT 교수로서는 최고 영예인 '인스티튜트 교수'였으며, 케네디·존슨 행정부 이래로 미 역대 행정부의 경제정책에 핵심적인 조언가 역할을 했다.
새뮤얼슨 교수는 시장 중심의 신(新)고전학파 경제학에 케인스 경제학을 접목시켜 신고전학파 종합이론을 확립했고, 엄격한 수학적 방법론을 도입해 경제학 이론을 새로 쓴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1948년 집필한 경제학 교과서인 '이코노믹스'는 19번째 개정판을 내며 전 세계 40개 언어로 출간돼 지금까지 약 400만권이 팔렸다. 그는 경제학자를 많이 배출한 집안 출신으로, 로런스 서머스(Summers) 미국 백악관의 국가경제위원장이 조카다.
2009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피습
2009년 12월 13일 오후 '스캔들의 황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Berlusconi) 이탈리아 총리가 밀라노에서 한 중년 남성의 습격을 받아 코뼈와 치아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는 이날 밀라노에서 지지자들의 집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지지자들과 악수를 하는 도중 42세의 남성이 던진 조각상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다. 이 남성이 던진 것은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을 본뜬 소형 금속 조각상으로, 베를루스코니는 코뼈와 치아 2개가 부러져 얼굴에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급히 병원으로 후송됐다.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마시모 타르탈리아(Tartaglia)라는 42세 남자로 정신병력(病歷)이 있는 인물로 밝혀졌으나, 구체적인 범행 동기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기업 오너(owner)이자 언론 재벌 총수인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이탈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총리직을 3번이나 역임할 정도로 고정 지지층이 두꺼운 정치인이다. 그러나 10대 모델과의 섹스 스캔들, 성매매 여성과의 추문(醜聞), 이후 부인과의 이혼 소송, 기업가로서의 탈세 및 부패 혐의, 마피아 세력과의 결탁설 등 온갖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최근 사면초가에 처했다.
그의 지지율도 올 상반기엔 온갖 스캔들에도 60%대를 지켰지만, 이후 "해도 너무한다"는 여론이 확산되면서 40%대로 급락했다. 올 하반기에는 자신의 탈세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막기 위해 '최고 공직자 면책특권' 조항을 의회를 통해 통과시켰지만, 지난 10월 대법원이 위헌(違憲)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부패혐의 사건과 관련해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서야 할 처지다.
2005년 노벨평화상 후보인 미국의 스탠리 투키 윌리엄스 사형당함
2005년 제17차 남북장관급 회담 열림(제주)
2004년 북한 작가 홍석중 금강산에서 제19회 만해문학상 뒤늦게 받음
원래 시상은 11월 24일 예정이었는데 홍 작가가 서울에 오지 못함
수상작 『황진이』. 한국 세계최초로 와이브로(휴대인터넷) 시제품 개발성공 시연회
2003년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 생포
2003년 12월 13일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자신의 고향인 티크리트 인근 지하에 땅굴을 파고 숨어 있다가 미군에 체포됐다. 이는 같은 해 4월 후세인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종적을 감춘 뒤 약 8개월 만의 일이었다.
미군은 후세인이 공기정화 시설이 갖춰진 지하의 소규모 동굴 같은 은신처, 일명 ‘거미 굴’(Spider hole·저격병의 잠복호를 일컫는 군사용어)에 숨어 있었으며, 후세인은 체포 당시 얼굴 둘레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상태였다고 전했다.
이라크 미군정 당국이 다음날 14일 사담 후세인의 생포 사실을 공식 발표함에 따라, 1979년 7월 대통령이 된 이후 2003년 봄 이라크전쟁 때까지 24년간 이라크를 철권 통치해온 사담 후세인의 독재 정권이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사담 후세인은 1937년 4월 28일, 미군의 급습 체포 작전이 벌어진 이라크 북부 도시 티크리트에서 멀지 않은 아우자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 ‘사담’은 아랍어로 ‘맞서는 자’ ‘충돌하는 자’라는 뜻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사담 후세인은 매우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20세 때부터 범아랍 사회주의를 표방한 바트당에 몸담아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쿠데타와 요인 암살에 직접 가담했으며, 31세 때인 1968년 바트당의 무혈 쿠데타 성공으로 사실상 권력을 잡았다. 이후 석유 국유화(1973년)를 성공시키고, 보안군 책임자 등의 지위를 맡으면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대해 갔다.
2002년 부시대통령, 김대통령에 전화 ‘여중생 사망’ 직접 사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3일 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과 관련, “깊은 애도와 유감(deep sadness and regret)의 뜻을 밝힌다”며 직접 사과의 뜻을 밝혔다.
부시 대통령은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미군 수뇌부로 하여금 한국측과 긴밀히 협조하도록 지시했다”면서 “미국민들은 한국민들에게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으며 한·미 동맹 관계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이에 “우리 국민들이 이제는 부시 대통령의 진의를 이해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앞으로 이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현재 진행 중인 한·미간 SOFA(주한미군지위협정) 실무협의를 통해 구체적인 개선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우리 국민도 주한 미군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유지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부시 대통령과 김 대통령은 또 이날 통화에서 북한의 핵 동결 해제 발표를 수용할 수 없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북한은 이를 즉각 철회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지난 10월 멕시코 로스카버스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계속 추구하기로 다시 의견을 모았다.
2001년 미국 러시아에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 탈퇴 공식통보
2000년 미국연방대법원 플로리다 수 검표 위헌 판결 부시 대통령 당선 확정
1997년 EU, 11개국 회원국 가입 결정
1996년 구총독부 건물 완전 해체
1996년 유엔 사무총장에 코피 아난 피선
제7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가나 출신 코피 아난 유엔 평화유지군담당 사무차장이 1996년 12월 13일 선출됐다. 유엔 안보리는 사무총장 선출을 위한 투표를 실시, 5개 상임이사국을 포함 15개 이사국의 만장일치로 아난 차장을 차기 총장후보로 총회에 추천키로 결정했다.
아난 총장은 24세에 유엔에 발을 들인 후 줄곧 유엔무대에서만 활약해왔다. 아프리카경제위원회, 세계보건기구, 유엔고등난민판무관실, 제네바 유엔사무소, 본부 국장 등을 역임한 뒤 사무차장보-차장을 거쳤다.
아난은 가나출신이지만 대학교육부터 미국에서 받아 사실상 미국적 사고와 행동을 한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매칼레스타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MIT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아난은 유엔내에서 오래전부터 업무능력과 인품을 고루 인정받아 왔다.
1991년 중요무형 문화재 제90호 `황해도평산소놀음굿` 예능보유자 장보배씨 별세
1991년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화해와 불가침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1990년 노태우 대통령,소련을 공식방문(-17일)
1986년 말誌 `보도지침` 관련, 김태홍(민언협사무국장), 신홍범(민언협실행위원), 김주언(한국일보 기자) 구속
1986년 9월 6일 말誌에 게재된 `보도지침`과 관련해 12월 13일 김태홍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이 외교상 기밀누설 혐의로 구속됐다. 이틀씩 간격으로 신홍범 민언협 실행위원과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도 구속됐다.
말지는 이 책에서 `보도지침`을 문공부 홍보정책실이 각 언론사에 은밀하게 시달하는 보도통제 가이드라인이라며 그 증거로 1985년 10월 19일부터 1986년 8월 8일까지 10개월동안의 보도지침 5백84개를 게재했다.
외교상 기밀여부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이 거듭되다 이듬해 6월 3일 김태홍씨와 김주언씨는 집행유예 판결을, 신홍범씨는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한편 천주교 서울교구는 5월 31일 세사람에게 `가톨릭자유언론상`을 시상했다.
1983년 대법원, 가정파괴범에 사형 확정
1982년 실명제 수정안 국회재무위 통과
1981년 폴란드 전역 계엄령 선포
1980년 7월 1일 고기값 인상을 계기로 그다니스크에서 발생한 파업은 8월 전국으로 확대, 레흐 바웬사가 지도하는 솔리다니스치라는 자주관리독립노조운동이 전개됐다.
8월 31일 정부대표자와 노동자대표 회담에서 자주관리노조결성의 허용과 파업권이 보장되는 등 소련권에선 전례없는 민주화조치가 취해졌으며 독립노조산하회원은 1,000만명에 달하는 큰 세력이 됐다. 자유노조운동이 확대되자 사회주의 이탈이라고 비난해온 소련은 이를 분쇄하기 위해 폴란드에 개입, 정부당국에 강압책을 쓰도록 압력을 가하자 폴란드정부는 이에 굴복하여 1981년 12월 13일 전국에 계엄을 선포했다.
야루젤스키 당 제1서기는 그와 동시에 독립노조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바웬사 등 노조지도자, 지식인, 반체제인사 1,000여명을 체포했으며 노조측은 이에 항거했으나 독립노조운동은 1년여만에 정지됐다.
1979년 신현확 제13대 국무총리 취임
1978년 주한미군 철군계획에 따라 1진 219명 오산기지서 첫 철수
1969년 리비아주둔 영국군 철수 결정
1967년 TBC-FM CM방송 개시
1967년 동백림간첩사건 기소된 34명 전원 유죄선고
동백림간첩단의 실체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67년 7월 8일, 김형욱 중앙정보 부장의 입을 통해서였다.
“동백림을 거점으로 북한에 드나들면서 간첩활동을 한 194명을 적발, 수사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1차 발표에 이은 7차례의 후속발표는 부정선거 시비로 혼란스럽던 정국을 일거에 잠재웠다.
발표 한달 전인 6월 8일 총선에서 공화당이 저지른 대규모 부정선거로 야당은 재선거를 요구하고 대학가는 부정선거 규탄데모로 휴교사태가 잇따르던 상황이었다. 서울대 교수, 유명 예술인 등 면면이 인텔리들이다 보니 국민들도 경악했다.
1967년 12월 13일 법원은 기소된 34명 전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 2명에게는 사형, 4명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됐고 나머지 피고들도 징역 15년에서 1년이 선고됐다. 이들을 강제연행하는 과정에서 서독·프랑스 등과 빚어진 외교마찰, 수사과정에서의 무리한 고문, 합법적인 서클을 간첩조직으로 날조하는 등의 문제점이 드러나자 ‘박정희 정권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피고들은 3년도 안돼 형집행정지로 모두 풀려났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동백림 사건'을 조작은 아니지만 과장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진실위 발표에 따르면 사건 가담자들이 북한의 돈을 받거나 특수교육을 받는 등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은 사실이나, 단순 북한 접촉행위에 무리하게 간첩죄를 적용했고, 학생운동 단체인 ‘민비연(민족주의 비교연구회)’을 북한과 연결시켜 사건을 부풀렸다
1966년 미국, 월맹 하노이를 처음 폭격
1963년 미국, 캄보디아와 단교
1962년 서울 창신동 사창가에 화재. 이재민 800명
1962년 미국, 3대륙 통신위성을 발사
1961년 아랍통일공화국 한국과 영사 교환 수교
1959년 재일동포 북송 반대 데모
1957년 서이란에 지진. 주민 1,400명 사망
1955년 전두엽절제술을 개발한 포루투갈의 신경학자 에가스 모니스 사망
1950년 유엔 정치위. 13개국 한국휴전안 가결
1948년 요르단 의회,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의 병합 승인
1944년 화가 그랜드 모리스 사망
1944년 프랑스 화가 칸딘스키 사망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독자적인 발전의 발자취를 남긴 바실리 칸딘스키가 1944년 12월 13일 겨울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스크바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에스토니아의 교수직에 임명됐다. 그러나, 그는 곧 교수직을 포기하고 그림에 몰두하기 위해 1896년 독일 뮌헨으로 떠났다. 초기 그의 그림은 동화와 같은 역사적이고 낭만적인 주제나 풍경 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던 1895년 그에게 추상화라는 개념의 예술적 인상을 끼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바그너의 ‘로엔그린(Lohengrin)’ 이라는 공연을 관람하고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모네의 ‘건초더미’라는 작품을 보게 된 것이다. 칸딘스키는 모네의 작품을 통해 점으로 이루어진 그림에서 대상이 없다고 느꼈고, 바로 이때 미술의 추상성을 발견했다. 그는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이탈, 선명한 색채로써 교향악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관철한 후 점차 기하학적 형태에 의한 구성적 양식에 몰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모스크바로 돌아가, 1918년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1921년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이듬해부터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수로서 후진지도와 신예술 개척에 힘썼다. 그러나, 1933년 나치가 그의 작품을 퇴폐 예술이라고 낙인찍자 그는 고향인 독일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 1939년 프랑스에 귀화했다. 그후 파리 교외의 누이쉴센에서 편견 없이 조용하고 자유로운 작업을 계속해 나가다 7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주요작품으로는 ‘푸른 산’ ‘즉흥 14’ ‘검은 선들’ ‘가을’ ‘콤포지션 7’ 등이 있다.
1937년 난징(南京) 대학살 시작
나치조차도 ‘야수의 행위’라고 비난한 ‘난징(南京) 대학살’이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 동안 양쯔강 남안의 도시 난징(南京) 전역에서 자행됐다.
1937년 7월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톈진(天津), 베이징(北京) 등을 점령한 후,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항저우(杭州)와 상하이(上海)까지 점령한다. 12월 10일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중지나방면군(中支那方面軍) 사령관의 공격 명령을 신호탄으로 일본군 6개 사단 20여만명은 3개방면에서 난징을 향해 진격해 들어간다. 결사항전을 외치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3일 전 이미 충칭(重慶)으로 탈출한 상태.
12월 13일 마침내 난징은 함락되고 대학살의 서막이 시작된다. 무차별 사격, 생매장,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는 등 잔인한 학살방법은 모두 동원됐다. 여자들은 소녀, 노파 할 것 없이 무차별로 강간당한 뒤 살해됐고, 젊은 남자들은 총검술훈련으로 베어졌다. 12월 13일자 도쿄(東京)일일신문에는 ‘중국인 참수(斬首)시합에 참가해 106명과 105명을 참수’한 두 소위의 사진과 찬양기사가 실렸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이 30여만명. 당시 난징의 총 인구는 70여만명이었다.
마쓰이는 전후 도쿄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처형됐으나 일본인들은 그를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과 함께 ‘순국칠사(殉國七士)’로 추앙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우익들은 이 사건을 ‘20세기 최대의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34년 미국의 전화 창시자 웟슨 사망
1929년 일본경찰,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계획하던 신간회 본부를 습격. 간부 검거(민중대회 사건)
1928년 거슈인 작곡 `파리의 아메리카人` 초연
1921년 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15도 고도 비행에 성공
1921년 영국-미국-일본-프랑스, 태평양조약 조인
1921년 여성 법학자 박관숙 출생
1921년 상설 국제사법재판소 설치
1916년 알프스산맥 눈사태로 9천명 사망
1910년 스즈키 우메타로, 첫 비타민 보고
1910년 12월 13일 일본의 독일 유학파 스즈키 우메타로가 도쿄화학회의 정례회의에 참석해 세계 최초로 '미지의 영양소'에 대해 발표했다. 19세기 말까지 동물이 필요한 영양소는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무기질 등 4대 영양소뿐이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당시 괴혈병과 각기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원인을 밝히기 위한 연국가 세계 곳곳에서 진행됐는데 1897년 네덜란드의 아크만이 백미(白米)로 기른 닭이 각기병에 걸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906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홉킨스는 동물이 4대 영양소 외에 또 다른 영양소인 '부속 물질'을 반드시 섭취해야 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역시 각기병에 대해 연구하던 스즈키가 이 부속 물질을 발견한 것이다.
스즈키는 각기벼에 유효한 쌀겨 안의 물질을 추출해냈고, 이 물질은 종래의 영양소와 전혀 다른 새로운 영양소였다. 1911년 이 사실을 논문으로 발표한 스즈키는 1912년 이 성분을 '오리자닌'이라고 명명했다. 1년 뒤인 1913년 폴란드의 생화학자 카시미르 펑크도 같은 결과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펑크는 그가 추출한 '아민(Amine. 질소를 포함하고 있는 유기화합물)'이 생명(Vita)에 꼭 필요하다는 뜻으로 '비타민(Vitamine)'이라고 명명했다.
한편 스즈키와 펑크는 비타민을 규명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지만, 1929년 노벨 생리 의학상은 '미지의 영양소'의 아이디어를 낸 홉킨스와 아이크만이 수상했다.
1904년 프랑스 화가 루시엔 쿠토 출생
1903년 소련 작가 예브게니 페트로프 출생
1903년 스페인 기타 연주자 카를로스 몬토야 출생
1902년 미국 사회학자 탈코트 파슨스 출생
1900년 러시아 레닌 등, 주간지 `이스크라`(불꽃) 제1호 발간
1897년 독립운동가 서동성 출생
1891년 미국 언어학자 한스 쿠라트 출생
1890년 미국 극작가 마르크스 코널리 출생
1887년 제1차 대전 영웅 미국의 알빈 요크 출생
1873년 러시아 작가 발레리 브류소프 출생
1871년 캐나다 화가 에밀리 카 출생
1871년 일본 소설가 다야마 가타이(前山花袋) 출생
1865년 스페인 작가 가니베트 이 가르시아 출생
1864년 고종 12세 나이로 즉위
1863년 독일 신학자 요하네스 바이스 출생
1860년 프랑스 배우 기트리 출생
1856년 미국 교육자 아보트 로렌스 로웰 출생
1838년 프랑스 식물학자 피에르 알렉시스 미야르데 출생
1836년 독일 화가 프란츠 폰 렌바흐 출생
1818년 영국 정치가 러틀랜드 출생
1816년 독일 전기공학자 베르너 폰 지멘스 출생
1805년 독일 천문학자 요한 폰 라몬트 출생
1804년 캐나다 정치가 조셉 하우 출생
1797년 독일 시인 하이네 출생
1780년 독일 화학자 요한 볼프강 되버라이너 출생
1780년 러시아 외무장관 칼 바실예비치 네셀로데 출생
1730년 영국 고고학자-외교관 윌리엄 해밀턴 출생
1724년 독일 물리학자 애피누스 출생
1720년 이탈리아 극작가 고치 출생
1678년 중국 청조 13대 황제 옹정제 출생
1654년 미국 정치가 로버트 리빙스턴 출생
1613년 스웨덴 장군 칼 구스타프 브랑겔 출생
1585년 스코틀랜드 시인 윌리엄 드러먼드 출생
1560년 프랑스 정치가 막시밀리언 쉴리 출생
1553년 프랑스 부르봉왕조 창건한 왕 앙리4세 출생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 개최
1545년 12월 13일 북이탈리아 트리엔트(현재의 트렌토)에서 이른바 트리엔트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는 18년이 지난 1563년 12월 4일에야 폐막됐다. 공의회는 당시 프로테스탄트가 가해오는 비판을 가톨릭이 어떤 방법으로 피해가며 교회를 통일할 것인가를 목적으로 개최됐다. 자기 개혁을 모색하고 선언한 중요한 공의회였다.
교황 파울루스 3세(바오로3세)가 제안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동의해 처음 소집된 공의회는 정치 군사적인 문제로 두 차례 중단되었으나 교황 피우스 4세(1559-1565)때 마무리됐다.
프로테스탄트가 참여하지 않아 가톨릭 교리를 다시 확인하는 식으로 공의회의 결론이 나오자 신구교간의 분열은 더욱 심화됐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철학자 ·신학자의 공허한 논의, 성직자의 위선 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서술한 `우신예찬`으로 이 공의회에서 `불경스런 이단`으로 정죄당했다.
1533년 스웨덴 왕 에리크14세 출생
1520년 교황 식스투스 5세 출생
1363년 프랑스 신학자 제르송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