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G 김연중 단장이 귀빈실에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다. |
Q. 시즌 중반이지만 LG의 부진이 눈에 띱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현재 LG의 모든 것을 알고 싶습니다. - 김성찬 외 212명 -
1990년 LG 트윈스는 프로야구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그들은 양쪽 날개가 떨어져 나가고 반쯤 뭉개진 여의주를 입에 문 채 불은 고사하고 하얀 입김만 토해내던 MBC 청룡을 인수해 창단 첫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여기다 1994년에는 2번째 우승을, 1995년에는 프로야구 사상 최다 홈 관중(126만 명)을 불러 모았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08년. LG는 롯데와 함께 2003년 이후 4강안에 들지 못한 유이한 팀으로 전락했다. 올시즌도 초반이지만 7위에 그치고 있다. LG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리고 LG에게 비상구는 있는가. <스포츠 춘추>가 3달에 걸쳐 LG를 집중 취재했다. LG를 명증하게 들여다보자는 시도이고 LG를 통해 한국프로야구 현실을 들춰보자는 의도이다.
LG의 불편한 진실은 [1] 명승부 뒤의 마운드 [2] 타자만 있고 야수가 없다 [3] 유망주는 허상이었나 [4] 김재박의 야구와 LG 신바람 야구는 있나 [Plus] 면피의 제단에 올려진 조인성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스포츠 경기를 ‘결전’, ‘사생결단’, ‘격침’ 등 전쟁으로 묘사한 시절이 있었다. 야구도 예외가 아니어서 특히나 감독은 이기면 ‘명장’, 지면 ‘패장’이란 소리를 듣게 마련이었다. 그 가운데 김재박 LG 감독은 전자에 가까운 이였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초대 감독으로 취임한 뒤 11시즌 동안 줄곧 현대에 머물며 팀을 포스트시즌 진출 8회, 한국시리즈 4회 우승으로 이끈 김 감독에게 ‘명장’은 당연한 찬사였는지 몰랐다. 2006시즌이 끝난 뒤 LG가 김 감독에게 15억5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며 영입했을 때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지만 그 만큼 차가운 법이다. 김 감독이 이끄는 LG는 지난해 리그 5위에 그친데 이어 올시즌(6월 11일 현재)도 23승 39패로 7위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인가. 성룡의 발차기가 예전 같지 않듯 ‘명장 김재박’에 대한 찬사도 이전과는 다르다. 어째서 김 감독은 LG에서는 현대 시절의 위용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일까. 김 감독의 현재와 미래를 알기 위해선 과거 현대 시절을 되짚는 게 중요하다.
김재박의 현대시절
“김재박 감독이 LG행을 선언했을 때 현대 프런트가 입을 모아 한 말이 있다. ‘LG에는 김용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전 현대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무슨 뜻일까.
1996년 김재박은 42살의 젊은 나이로 현대 창단 감독에 취임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구단 고위층이 ‘이것저것 요구가 많은 베테랑 감독’보다는 ‘구단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젊은 감독’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심에 창단 당시 단장이었던 김용휘 전 사장이 있었다. 그는 다른 구단 단장들과는 달랐다. 명함에만 존재하는 단장이 아니라 프런트를 총지휘하며 현장에도 깊이 관여하는 막후 실력자였다.
김 전 사장은 창단 전부터 현장과 프런트 각자의 고유영역을 설정하고 현장이 프런트의 선수 스카우트와 트레이드에 관해 일체 관여하지 않도록 했다. 실제로 김 전 사장은 시즌 중 동대문야구장을 드나들며 아마추어 선수들을 직접 관찰하고 선발하곤 했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이택근, 조용훈, 장원삼 등이었다. 현대에서 이뤄진 트레이드 모두 김 전 사장의 손을 거쳤고 선수들과의 소통도 현장보다 프런트에서 담당했다.
스카우트에서부터 선수 면담까지 김 전 사장이 도맡아 담당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야구단에 오기 전부터 현대 여자배구, 남자농구단 프런트로 잔뼈가 굵어 스포츠단 운영원리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현대시절의 김재박 감독. |
이 때문인지 김 감독은 현대 때부터 지금 LG에서까지 선수들과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오히려 선수들과의 소통을 강조할 때마다 “감독이 굳이 선수와 이야기할 필요가 있느냐”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감독이 특정선수와 밀접하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는 등 이유가 없지 않지만 어쨌든 1년에 1, 2번 외국인선수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김 감독과 선수들의 유일한 사적 접촉이었다.
김 전 사장은 히트앤드런을 하듯 트레이드를 자주 시도했다. “1997년 현대가 1번 타자감을 구하기 위해 특급투수 문동환에다 5억 원을 보태주고 롯데 전준호를 영입한 건 당시로선 충격이었다. 그렇듯 대범하게 트레이드를 진행할 수 있는 구단은 현대가 유일했다. 감독이 ‘이 선수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어떻게 해서든 데려올 수 있는 팀도 현대 빼곤 없었다.” 전 현대 관계자의 증언이다. 그는 덧붙여 “1999년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가 주요 선수공급처였다”고 회상했다.
1997시즌이 끝나고 모그룹이 부도처리 되며 쌍방울 구단 역시 존폐의 기로에 섰다. 이때 쌍방울이 선택한 방법은 ‘선수를 팔아 운영비를 마련하자’는 것이었고 이를 가장 잘 이용한 구단이 현대였다. 박경완과 조규제가 대표적인 쌍방울 출신 영입선수들이었다.
LG도 현대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1998년 시즌 도중 최창호를 LG에 내주며 박종호를 불렀고 이듬해 3월에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현금 7억 원+안병원을 내주는 조건으로 임선동에게 현대 유니폼을 입혔다. 2000년에는 심재학을 받기 위해 최원호를 LG에 줬고 다음해 심재학을 두산에 넘기며 심정수를 데려왔다.
현대가 1996년부터 2002년 모그룹이 부도나기 전까지 실행한 트레이드는 총 17번이었다. 2002년 이후에도 7번이나 트레이드를 감행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현대가 트레이드를 ‘그토록 많이 시도할 수 있던 배경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어느 구단 가릴 것 없이 프런트가 가장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맞트레이드한 선수가 상대팀에서 잘하거나 FA 영입선수가 부진할 때다. 이는 문책을 의미한다. 그에 반해 현대 프런트는 모험을 즐겼고 실패해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당연히 트레이드에 적극적일 수밖에.” 수도권 모 구단 관계자의 증언이다.
과장된 말 같지만 사실이다. 선수영입이 실패로 끝날 때 문책은 지위고하를 따지지 않는다. 롯데 이근수 전 사장은 과거 롯데제과의 ‘빠다코코낫’ 신화를 창조했던 이였다. 2002년 롯데구단 사장으로 취임한 뒤 직원복지향상과 김해 상동연습장 준공 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으나 FA 이상목과 정수근에게 총액 62억6천만 원을 쏟아 붓고도 별 효과가 없자 결국 해임됐다.
“모그룹과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김 감독은 원하는 팀을 갖출 수 있었다. 최상의 지원과 최고의 선수들 사이에서 김 감독은 그라운드에서 야구만 잘 하면 그만이었다.” 전 현대 모 코치의 생각이다.
그러나 과거 삼성도 최상의 지원과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됐지만 매번 우승과는 멀었다. “삼성을 모델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고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현대엔 있고 삼성에는 없는 게 있었다. 해태와 성적부담이었다. 과거 삼성은 해태라는 더 센 강팀이 있었지만 현대가 정상궤도에 올랐을 때 해태는 전성기가 지난 뒤였다.
여기다 삼성 프런트는 ‘우승이 아니면 교체’라는 식으로 감독을 몰았지만 현대는 김 감독에게 ‘올시즌이 아니면 내년시즌에 잘하면 된다’며 부담을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김 전 사장이 구단운영에 깊숙이 관여한 터라 감독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돌아보면 현대에는 감독이 2명 있었던 것 같다. 김 감독과 양복 입은 감독 김 전 사장 말이다.” 전 현대 고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김 전 사장의 입김이 강했다고 김 감독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다. 어쨌거나 한국시리즈 4회 우승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다 2006년 김 감독은 망신창이의 현대를 포스트시즌까지 진출시켰다. 게다가 김 감독은 코치에게 권한을 나눠주는 관리형 감독이지 전권을 행사하는 제왕형 감독이 아니다. 선수단 관리를 잘한 것만으로도 찬사를 받을 만하다.
“문제는 김 감독의 그간 현대 스타일이 LG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LG에 김용휘가 없다’는 우려는 ‘현대와 LG는 180도 다르다’는 말을 의미했다. 김 감독이 LG에서 ‘선수가 없다’고 강조하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현대는 그런 말이 나오기도 전에 프런트가 알아서 뛰었지만 LG는 현대가 아니다.” 한 야구해설가는 말을 이어 “LG도 김 감독만 데려오면 팀이 변하겠지 하는 생각만 했을 뿐 제반여건을 갖추는데 소홀했다”라고 평했다.
‘다시 부는 신바람야구’ 그러나 깃발만 나부낄 뿐
시즌을 앞두고 LG 구단주가 바뀌었다. 이와 동시에 팀 구호도 ‘다시 부는 신바람, 팬과 함께 V3’로 변경됐다. 일부에서 “LG의 신바람 타령이 또 시작됐다”며 볼멘소리를 냈지만 사실 LG에게 ‘신바람 야구’는 팀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1994년 LG 이광환(현 우리 히어로즈)감독은 기존 야구계의 관행을 깨고 이른 바 ‘자율야구’ 즉 ‘신바람 야구’를 통해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야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구호가 혁명의 동력이 된 적은 거의 없다. ‘자율야구’, ‘신바람 야구’ 역시 구호이자 이미지에 불과했다. 정작 우승은 ‘선수와 코칭스태프 그리고 프런트의 조화’라는 전통적인 방식을 통해 이뤄졌다.
1994년 LG는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 등 신인선수들이 입단하며 포지션 경쟁이 불붙었다. 이 감독은 세 선수를 입단 첫해부터 주전으로 발탁하고 타순도 1, 2, 3번에 배치하는 등 강수를 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당시 입단 2년 차였던 박종호도 기본에 충실한 플레이로 수비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당시 팀의 4번 타자였던 한대화(현 삼성 수석코치)의 역할도 컸다. 1993시즌이 끝난 뒤 해태에서 LG로 전격 트레이드된 한대화는 ‘한물갔다’는 세간의 평을 비웃기라도 하듯 붙박이 4번 타자로 106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9푼7리, 10홈런, 67타점을 기록했다. 한대화의 대활약으로 타선의 고민이었던 ‘4번 타자 부재’를 말끔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한대화가 팀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리더십이었다. 한대화는 LG 유니폼을 입자마자 팀 내 파벌의 수장으로 꼽혔던 투수조의 모 선수를 일시에 제압하며 팀워크를 다잡았다.
LG 김재박 감독에게 올시즌은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
투수진은 타선보다 더 좋았다. 이해 LG 선발투수 가운데 15승 이상이 무려 3명이었다. 이상훈은 18승5패로 해태 조계현과 다승 공동선두에 올랐고 김태원과 정삼흠이 각각 16, 15승으로 뒤를 따랐다. 이해 30세이브를 기록한 김용수라는 든든한 마무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승수였다. 그리고 포수 김동수의 투수리드와 착실한 수비가 빛을 낸 결과였다.
14년이 지난 2008년 이광환 우리 히어로즈 감독은 “당시 LG 야구를 ‘자율야구’라고 하지만 실은 ‘시스템 야구’였다”며 “강팀이 되기 위한 5가지 조건 가운데 3가지 이상이 충족된 덕분에 시스템이 유기적으로 돌아갔고 우승까지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감독이 강조하는 5가지 조건이란 ‘15승 이상의 투수와 해결사 본능을 갖춘 4번 타자, 발 빠르고 출루율이 좋은 1번 타자 그리고 좋은 포수와 마무리 투수’다. 1994년 LG는 5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팀이었다.
여기다 프런트도 “현장에 대한 간섭이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을 만큼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했다. 아마추어 선수 스카우트에서부터 트레이드 그리고 2군 선수 육성까지 미래를 내다보고 잡음 없이 추진했다. 이 감독의 이해와 프런트의 책임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감독은 LG에 오기 전부터 프런트와 현장의 역할분담을 인정했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선진적 사고방식의 야구인이었다.
2008년 LG가 다시 ‘신바람 야구’를 들고 나왔을 때 일부 야구인들이 “깃발만 들었지 내용이 없다”고 혹평한 건 1994년과 비교해 공통점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1994년 ‘신인 3총사’가 LG야구를 변화를 주도했다면 지금의 신인들은 ‘만년 유망주’로 팀의 동맥경화를 주도하고 있다. 최동수가 4번 타자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이지만 그에게 과거 한대화의 리더십을 요구하기엔 무리가 있다. 최동수는 스스로 밝히듯 아직 자기 앞가림하기에도 바쁘다.
15승 에이스가 없는 것도 뼈아프다. 설령 봉중근과 크리스 옥스프링이 호투를 거듭한다손 쳐도 정재복을 제외한 지금의 LG 구원투수진이라면 에이스는 팀의 확실한 승리를 책임지는 투수가 아닌 팀의 첫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일 뿐이다. 포수도 해결해야할 문제다. 그나마 1번 타자 이대형이 제몫을 해주고 있어 LG로서는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이 전 감독의 말대로 강한 팀이 되려면 5가지 조건 가운데 3가지 이상이 충족돼야 한다. 올시즌 LG는 고작 1가지만 충족하고 있다.
지는 팀은 아무도 신이 나지 않는다. 다시 ‘신바람 야구’를 재현하고자 한다면 이기는 팀을 만드는 게 우선이다. 그러나 계약 때부터 LG와 김 감독은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다.
LG와 김재박의 동상이몽(同床異夢)
2006년 LG는 장고 끝에 이순철(현 우리 히어로즈 수석코치)전 감독의 대안으로 김재박 현대 감독을 유력한 후보로 꼽았다. 김 감독은 1992년 현역시절 LG의 코치 제의를 거부하고 태평양 유니폼을 입는 바람에 그룹의 눈 밖에 난 바 야구인이었다. 김 감독이 LG 신임 감독으로 하마평에 올랐을 때 많은 야구인들이 “설마”하며 고개를 돌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LG 구단 수뇌부들은 “한국시리즈 4회 우승의 김재박 만큼 뛰어난 감독은 없다”며 “김 감독이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논리로 모그룹 고위층을 설득했다. ‘윗분’들도 “이번만은 틀림없다”는 구단 수뇌부의 자신감을 믿고 존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즌 종반까지 김 감독의 LG행은 미궁 속이었다. 첫 징후가 보인 건 그해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였다. 현대가 한화에 1승3패로 지자 일부에서 김 감독의 무성의함을 지적하며 “혹시 다른 팀으로 옮기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김용휘 현대 사장은 평소 절친했던 김영수 LG 사장에게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미안합니다. 김 사장. 어떻게 하다 보니 김재박 감독을 영입하게 됐어요.” 11년 동안 김 감독의 방패역을 자임했던 김 전 사장은 김 감독의 LG행을 본인의 입이 아닌 상대팀 사장에게 들어야 했다. 그러나 서운함 대신 김 감독의 현대시절 활약상을 앨범 3권으로 만들어 나중에 김 감독에게 전달하며 그간 노력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LG 구단 수뇌부는 김 감독에게 많은 권한을 줬다. 김 감독이 자신의 야구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밀어줄 때 화끈하게 밀어주자는 결심이 섰고 현대 시절 외국인선수를 어느 구단보다 잘 뽑았기 때문에 노하우를 전수받고 싶어 했다.” LG 내부 관계자의 증언이다.
지난해 LG 스카우트팀이 외국인선수 관련 보고서를 김 감독에게 전달했을 때다. “여기(LG)는 이렇게까지 분석을 해주네.” 김 감독은 그렇게 말하며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김 감독은 “나도 과거 미국, 도미니카로 외국인선수를 구하려고 돌아다녔지만 거기서 거기였다. 외국인선수는 영입도 중요하지만 활용이 그 만큼 중요하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영입해야 성공가능성도 커진다”며 “최종판단은 내가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 감독은 2년 연속 삼성 출신의 외국인투수 팀 하리칼라와 제이미 브라운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로 끝났다.
“현대시절 김 감독은 외국인선수를 딱 1번 직접 선발했다. 2002년 멜퀴 토레스와 다리오 베라스였다. 선발요원 토레스는 그해 10승11패 평균자책 4.19, 마무리 베라스는 1승4패6세이브 평균자책 7.33를 거둬 시즌 중반 퇴출됐다.” 전 현대 관계자의 말이다.
LG 전 외국인선수 제이미 브라운. 역시 실패작이었다 |
실제로 현대의 외국인선수 영입은 스카우트팀과 김용휘 전 사장이 담당했다. 특히나 엄홍(현 삼성), 염경엽(현 LG) 두 스카우트의 활약이 컸다. 두 사람은 대개 5월 말 출국해 미국과 중남미에 45~50일 동안 머물며 영입가능 선수들을 관찰하고 리스트를 작성했다.
단순히 마이너리그 선수들을 만나는데 그치지 않고 메이저리그 로스터 안에 든 선수와도 접촉해 명함을 주는 등 ‘발로 뛰는 영업’을 했다. 에이전트도 수시로 갈았고 믿을 만한 에이전트라면 끝까지 신뢰를 지켰다. 현대 스카우트팀이 준 명함을 보고 직접 전화를 건 선수가 있었다. 2007년 부상으로 퇴출되기 전까지 2005, 2006시즌 2년 연속 현대 에이스로 활약했던 미키 캘러웨이였다.
김 감독의 영입이 좋은 외국인선수 영입을 뜻한다고 믿었던 LG 구단 수뇌부에게 2년 연속 외국인선수 영입실패는 낙담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김 감독과 LG는 처음부터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다.
“김 감독은 현대시절 능력과 한계가 분명한 지도자였다. 그라운드에서 경기에만 집중하면 그만이었던 현대에 비해 LG는 권한이 늘어난 대신 할 일이 많아졌고 책임도 커졌다. 반대로 LG가 현대만큼 충분한 지원을 해주리라는 예상과 달리 선수수급에 소극적이자 크게 실망했다.” LG 내부 관계자는 구단 분위기에 대해서도 말을 이었다.
“구단 수뇌부는 초보감독 이순철이 팀을 망쳤다고 믿는다. 김 감독은 한국시리즈 4회 우승 의 노련한 감독이니 만큼 뭐가 달라도 크게 다를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권한도 많이 주고 지난해 봉중근, 박명환을 영입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올시즌 하위권을 맴돌자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다.
게다가 ‘윗분’이 “FA영입 없이 있는 선수로 팀을 만들라”는 지시를 하자 선수수급에도 미온적일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과거 LG 프런트는 권한이 강한 만큼 책임감 역시 강했던 조직이었던데 반해 근간은 정반대로 권한은 스스로 포기하고 책임은 회피하려는 조직이 됐다. 1994년과 비교해 뭐든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김 감독과 LG의 엇박자가 빚은 촌극이 있다. 6월 3일 이뤄진 두산과의 2대2 맞트레이드였다. 이날 LG는 두산 투수 이재영과 내야수 김용의를 영입하고 포수 최승환과 외야수 이성열을 내주는 2대2 트레이드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발단은 두산이 채상병의 부족분을 메울 포수가 구하기 위해 LG에 최승환을 요구하며 시작됐다. 그런데 의외로 LG에서 순순히 제의에 응했다. 한발 나가 “이왕 하는 김에 한 명씩 추가해 2대 2 트레이드를 하자”는 역제의까지 했다. 두산 오재원, LG 정의윤 등 다양한 카드가 나왔지만 결국 3일 발표된 트레이드에는 이성열과 김용의의 이름이 올랐다.
“계약기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감독은 올시즌만 생각한다. 그런 감독을 대신해 팀의 미래를 보는 게 프런트의 일이다. 최승환 트레이드는 감독이 하고 싶다고 해도 프런트가 나서서 뜯어말렸어야 할 사안이었다.” LG 출신의 모 스포츠채널 야구해설가는 그 같이 분통을 터트리며 “조인성이 도마 위에 올라있고 지난해 1경기도 뛰지 않았던 38살의 김정민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언제 이탈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슨 생각으로 최승환을 트레이드 했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두산에서 이적한 이재영은 좋은 투수다. 그러나 LG의 미래를 감안할 때 가장 시급한 포지션은 포수라는 게 중론이다 |
덧붙여 그는 “이재영이 좋은 투수이긴 하나 잘된 트레이드는 팀의 부족분을 채우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트레이드는 두산의 승리”라고 단언했다. 최승환은 3일 트레이드 전까지 2000년 데뷔해 프로 통산 78경기에 출전, 108타수 27안타 2홈런 9타점, 타율 2할5푼을 기록했던 평범한 2군 선수였다. 기록만 보면 그렇다.
그러나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2군 경기에 굳이 뛸 필요가 없을 만큼 독보적인 포수였다. 어느 2군 선수는 최승환을 “2군의 진갑용”이라고 불렀다. 다른 팀 2군 지도자들도 “왜 쟤(최승환)가 2군에서 뛰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 정도로 최승환은 뛰어난 공배합과 수비력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포수였다.
사정이 없던 건 아니다. 최승환이 떠나기 전 LG 2군에는 5명의 포수가 있었다. 1군 포수 2명이 30대 중반 이상인 점을 감안할 때 2군의 포수 적체는 이상하리만치 심했다. 누군가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 그런데 왜 하필 최승환이었을까.
“33살의 조인성이 3년은 더 주전포수로 뛴다는 가정 하에 그때가 되면 최승환은 33살로 적지 않은 나이다. 우리 좋다고 능력 있는 포수를 2군에 계속 잡아둘 순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조인성의 후계자를 찾는다면 서성종(25)이나 고졸 신인 김태군(19)이 낫다는 판단이 섰다.” LG 핵심 관계자의 설명이다.
최승환의 장래를 위해 이적을 시도했다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LG 김연중 단장은 두산 유니폼을 입은 이적 선수들을 볼 때마다 “미안하다. 두산에서는 열심히 뛰어주길 바란다”고 말한다고 했다. “마치 시집 보낸 딸을 보는 기분”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구단이나 감독 모두 최승환이 조인성의 백업이 아닌 정당한 경쟁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듯싶다.
LG, ‘작전수행능력’이라는 집단 최면에서 깨라
“아무래도 작전수행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선참 최동수는 ‘어째서 팀이 부진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선수들의 작전수행능력 부족을 꼽았다. “감독님께서 계획하신 작전에 잘 따라야 하는데 아무래도 (선수들이)작전수행능력이 부족하다. 하루 빨리 개선해야 한다.”내야수 박경수도 다르지 않았다.
선수뿐만이 아니다. LG의 코치들도 이구동성으로 “선수들의 작전수행능력이 무척 떨어진다”고 강조했다. 하다못해 프런트 직원들까지도 “옆 동네 두산과 비교해 작전수행능력이 큰 차이가 난다”며 아쉬움을 토했다.
LG의 작전수행능력 부족을 가장 아쉬워하는 이는 다름 아닌 김재박 감독이다. 김 감독이 “선수가 없다”는 말 다음으로 자주 하는 소리가 우리팀 선수들은 작전수행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김 감독의 생각을 LG 구성원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김 감독은 히트앤드런, 런앤드히트, 도루, 번트 등으로 이뤄지는 작전야구를 신봉하는 이다. 대개 감독들은 작전야구를 좋아한다. 자신의 능력으로 경기를 풀어간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선수의 전체적인 능력 가운데 작전수행능력이 있는 것이다 |
김 감독의 작전야구는 현대시절 그를 한국시리즈 4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번트와 히트 앤드런을 애용했다. 특히나 희생번트는 김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1996년 감독 데뷔 때 희생번트 104개를 시작으로 2006년 팀을 떠날 때까지 7시즌 동안 희생번트 100개 이상을 기록했다.
2000년 91승 2무 40패로 2위 두산과 16경기 차나 앞서며 정규시즌 1위를 했을 때도 희생번트를 74개나 댔다. 이해 현대는 팀 홈런 208개를 기록했다. 2006년 김 감독은 마침내 희생번트 153개를 기록해 단일시즌 최고기록을 세웠다.
삼성 박종호는 현대시절 “혹독하게 번트연습을 했다”고 기억했다. 박종호의 기억에 따르면 현대는 가장 먼저 피칭머신을 이용해 번트연습을 한 팀이다. 우리 히어로즈 전준호의 기억도 다르지 않다. “김 감독은 번트의 중요성을 무척 강조했다. 스퀴즈 번트, 희생 번트, 기습 번트 등 상황에 맞춰 갖가지 번트훈련을 하도록 했다.”
김 감독이 그토록 번트훈련을 많이 시킨 이유는 번트가 성공확률이 높은 득점루트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LG를 이끌면서 팀 희생번트는 고작 89개만 댔다. 8개 구단 가운데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이유는 있었다. “LG 선수들이 현대에 비해 작전수행능력이 떨어지고 번트 댈 기회도 많지 않았다”는 게 김 감독의 답변이다.
2군 경기에서 한 선수가 타구에 맞아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
맞는 말이었다. 지난해 LG는 희생번트 89개를 대는 동안 167번의 번트 실패를 기록했다. 167번의 실패 가운데 번트 헛스윙이 22번, 번트 파울이 145번이었다. 번트 헛스윙은 롯데에 이어 1개 차로 2위, 번트 파울은 부동의 1위였다.
올시즌도 79번의 번트실패를 기록한 대가로 희생번트 49개를 성공시켰다. 희생번트와 번트실패 횟수에서 각각 리그 1위다. SK가 42개의 희생번트를 성공하는 동안 43번의 번트실패를 했던 것과 비교하면 김 감독의 말대로 LG 타자들의 작전수행능력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김 감독이 1년 전까지 몸담았던 현대 역시 번트의 달인들은 아니었다. 지난해 현대는 희생번트 123개를 대며 124번의 번트 실패를 했는데 이 가운데 번트 헛스윙 9, 번트 파울이 115번이었다. 감독이 교체됐다고 전임 감독과 함께 번트실력이 증발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건 번트를 선호하지 않고 현대나 LG처럼 번트연습도 특별하게 하지 않는 한화가 희생번트 82개를 두는 동안 83개의 번트실패를 한 점이다.
김 감독은 올시즌 스프링캠프에서 번트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밝힌 바 있다. LG의 모 선수는 “지루할 정도로 번트연습을 많이 했다”며 “다시는 (번트를)실수하지 않을 것 같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번트실패는 여전했다. 이유가 뭘까.
현대에서 김 감독의 총애를 받았던 한 선수는 “과거 현대와 지금 LG 선수들은 번트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는 창단 때부터 스타선수들이 즐비했다. 한때 이숭용이 백업선수로 뛸 만큼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우승은 둘째 치고 그런 팀에서 슈퍼스타가 아닌 이상 주전으로 뛰려면 감독의 사인을 충실히 이행해야 했다.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 선수들은 감독의 눈에 띄어 살아남기 위해 번트를 비롯한 작전수행에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여기서 그는 “당시 현대의 번트는 감독이 아니라 선수들이 필요해서 선택한 것”이라고 정의 내렸다. 현대 프런트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백업선수들은 대타라도 나가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려고 하루종일 번트나 밀어치는 타격훈련을 했다. 그래야 감독에게 주목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현대의 작전야구는 감독의 작품이 아니라 살아남으려는 선수들의 작품이었다.”
현대시절 선수들과 접촉이 많았던 한 프런트는 “선수들끼리 ‘스프링캠프에서 번트훈련을 많이 하지 않았으면 오히려 타격이 더 좋아졌을 것’이라는 말들을 많이 했다”며 “2000년 팀이 91승을 거두며 정규시즌을 1위에 올랐을 때도 ‘번트를 안 댔으면 100승을 넘기고 남았다’는 진지한 농담이 선수들 사이에서 오고 갔다”고 말했다.
번트를 안 댔으면 100승도 가능했을 것이라,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던 현대출신의 지방팀 선수에게 물었다. 답은 간명했다. “현대가 한국시리즈에서 4회나 우승한 건 선수들이 기본적으로 야구를 잘 하는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전수행능력도 야구능력이다. 뛰어난 타자가 작전수행능력이 좋은 건 당연하다는 의미다. 그런 타자들에게도 똑같이 번트훈련과 밀어치기 훈련을 시켰으니 타격이 발전했겠나.”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작전수행능력은 야구센스를 뜻한다. 야구센스가 좋은 선수들이 대개 리그를 지배하게 마련이다. 무사, 1사에서 주로 걸리는 히트앤드런은 1루 주자를 안전하게 다음 루로 진루시키기 위한 작전이다. 대개 성공하면 주자는·1루에서 3루까지 간다.
올시즌 1루 주자를 단타로 3루까지 보낸 확률이 가장 높은 타자는 두산 김현수였다. 29번의 공격기회 가운데 13번을 성공시켜 45%의 성공률을 보였다. 그러나 타순과 관계없이 이종옥, 김동주(이상 두산), SK 박재홍, 롯데 이대호, 삼성 박한이 등 대부분 팀의 중심타자들이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이는 무슨 뜻일까. 작전수행능력이 좋은 타자들이 곧 뛰어난 타자라는 것이다.
LG 선수들이 번트실패를 들어 작전수행능력이 떨어진다고 단정하는 건 편견일 수 있다. 실제로 올시즌 LG의 작전수행능력은 통계상으로 나쁘지 않다. LG는 1루 주자를 단타로 3루까지 보낼 수 있는 162번의 상황에서 44번을 성공시켰다. 성공률 27%는 144번 가운데 42번을 성공한 두산의 성공률 29%와 비교해 별 차이가 없는 리그 2위였다. 작전도 많이 걸고 그 만큼 성공률도 높았다는 뜻이다.
1루 주자를 아웃으로 2루까지 진루시킨 확률은 LG가 16%(39/246)로 8개 구단 가운데 가장 높았다. 타자가 아웃이 돼도 선행주자를 안전하게 진루시킬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작전수행능력의 잣대다. 희생번트와 내야땅볼을 그 만큼 잘 쳤다는 뜻이다.
지난해도 LG는 두 부문에서 리그 상위권이었다. 단타로 1루 주자를 3루까지 보낸 횟수가 44번으로 리그 3위였고 성공률은 28%로 SK와 공동 1위였다. 아웃으로 1루 주자를 2루까지 보낸 횟수는 43번으로 3위였고 성공률은 16%로 리그 1위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게 있다. 김 감독이 “선수들의 작전수행능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지만 실은 번트실패가 많아서 그렇지 전체적인 작전수행능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어쩌면 김 감독이 정작 신경 써야 할 건 작전수행능력이란 지엽적인 능력이 아니라 전체적인 선수들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현대 때처럼 선수들이 번트를 자신이 선택한 작전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
김 감독은 매번“포지션 경쟁을 통한 경쟁구도를 형성하겠다”고 호언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LG 내부에서조차 “선수들이 ‘내가 아니면 주전으로 뛸 선수가 없다’는 계산이 섰는지 절박함이 없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진루가 아니라 홈인이다. 올시즌 LG는 아웃으로 3루 주자를 홈으로 보낼 수 있는 26번의 기회 가운데 단 3번만 성공했다. 성공률 12%로 리그 최하위다. 득점권 타율 2할5푼2리와 주자 2루 시 팀 타율 2할9리 이 역시 리그 최하위에 해당한다. 특히나 주자 2루 시 팀 타율은 1위 SK의 2할8푼4리와 비교해 엄청난 차이다. 어째서 LG와 SK가 똑같이 희생번트로 주자를 2루로 보내는데 득점에서 차이가 나는지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작전수행능력은 선수능력의 한 부분일 뿐이다. 같은 의미로 번트 역시 작전수행능력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김 감독이 희생번트에만 시각을 고정한 사이 LG 타자들은 히트앤드런을 비롯한 팀 배팅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LG 선수단이 집중해야할 건 각자의 전체적인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김 감독이 희생번트를 선호하고 작전야구를 즐겨 사용한 건 선취점 획득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고 경기를 쉽게 푸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었다. 투수왕국 현대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현대는 1996, 1998년 각각 팀 평균자책 3.04, 3.03을 거두며 역대 한시즌 최소 팀 평균자책 1, 2위에 차지했던 팀이었다. 현대는 8개 구단 가운데 유일하게 팀 평균자책 4.70 이상을 기록한 적이 한 번도 없을 만큼 탄탄한 투수진을 자랑했다.
그러나 LG는 2003년 이후 줄곧 팀 평균자책 4점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팀이었다. 올시즌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작전수행능력이 과거와 같이 빛을 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승인가, 팀 리빌딩인가
투수 정재복이 가슴을 움켜쥔 것처럼 LG팬들은 자신들의 심장이 왼쪽에서 뛰는 한 희망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
LG가 ‘작전수행능력’이라는 집단최면에서 깨지 않는 한 팀이 무엇을 추구하고 어디로 가야할 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김 감독은 “선수가 없다”며 하소연을 겸한 푸념을 하는 대신 눈앞의 선수와 현실을 직시하고 그들의 가능성을 깨우는데 집중해야 한다.
김 감독에게 밥상을 차려주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 김 감독이 밥상을 차릴 때다.
구단도 “국내 최고 연봉의 스타 감독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식의 조소를 중단하고 전폭적인 지원이 어렵다면 김 감독에게 기적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 지금 김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에게 필요한 건 전폭적인 신뢰고 거기엔 한푼도 들어가지 않는다. 구단과 김 감독은 머리를 맞대고 목표를 다시 잡아야 한다.
LG팬들은 지금껏 “우승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 적이 없다. 팀이 하위권에서 맴돌아도 그들이 외치는 건 “LG없이 못 산다"는 응원뿐이었다. 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은 이럴 때 필요하다.
무엇보다 선수단만큼이나 프런트도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6·6·6·8’는 2003년 이후 지난해까지 LG의 성적이다. 이 기간 구단연감에서 누구의 이름이 빠지고 누구의 이름이 아직까지 남아있는가 살펴봐야 한다. 책임은 저울에 올려놓은 듯 공평하게 져야 탈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