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에 불참
일가붙이들이 함께하는 벌초(伐草)에 참가하지 못한 채 입안의 통증으로 끙끙 앓으며 진종일 휘청대고 있다. 오늘 청주(淸州) 한문(韓門) 공안공(恭安公) 할아버지 후손들이 벌초하는 날이다. 그런데 임플란트 시술 후유증과 구강염이 겹쳐 도저히 참석할 몰골이 아니다. 그래서 전후 사정을 주관하는 동생들에게 알리고 휴식을 취하면서 자리를 펴고 누웠다가 일어나기를 되풀이하며 불편한 심신을 추스르고 있다. 그럼에도 넌덜머리가 날만큼 호되게 몰아치는 통증이 점점 심해져 침이나 음식을 삼키기도 무척 힘들다. 만일 내일까지도 가라앉지 않는다면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가야겠다. 우선 얼을 뺄 듯한 아픔이 기승을 부려 견디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정신이 혼미해져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예로부터 전승되고 있는 미풍양속인 벌초에 어떤 뜻이 담겨있을까. 이는 묘의 풀을 베어 정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조상 묘의 풀을 베어 정리하는 풍속으로서 금초(禁草)라고도 이른다. 이는 조상의 얼을 기리는 후손들의 정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습속이다. 그 옛날 선조들의 묘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조상을 잘 모시지 못한다고 여겼다. 이런 맥락인지 돌볼 사람 없이 방치된 묘를 골총(古塚)이라도 호칭했다. 그 옛날에는 한 해에 두 번 벌초를 하는 게 관례였다. 이들 시기는 모두 전통적으로 성묘하는 명절이다. 봄에는 한식에 성묘와 함께 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리고 가을에는 추석 전에 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가을에 한 번 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요즘 가을 벌초는 칠월 백중 무렵에 시작하여 팔월 추석 이전까지 마치는 게 보편적인 습속이다. 그 대상은 부모와 조부모를 포함한 조상의 묘이다. 오랫동안 선산을 소유했던 가문이라면 묘의 수가 너무 많은 관계로 편의상 직계 조상의 묘만 하는 게 상례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선산이 있더라도 여러 자손들이 모여 대규모로 하는 풍습은 현격하게 줄어들었으며 관리인을 두거나 대행업체에 맡기는 경우가 숱해졌다. 제주도에서는 벌초를 소분이라고 한다. ‘풀(草)을 친다(伐)’라는 의미에서 벌초(伐草), ‘무덤(墳)을 깨끗이 정리하다(掃)’라는 견지에서 소분(掃墳)이라 호칭하고 있다.
지지난 금요일(9월 8일) 기를 쓰고 버텨오던 치아문제 해결을 위해 마침내 4개의 임플란트 1차 시술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지난 금요일(15일) 약속에 따라 병원을 찾아 발치했던 4군데에 인공치근(fixture)을 심으며 절개하고 꿰맸던 실을 뺀 뒤에 치료를 받고 돌아왔다. 대략 시술한지 일주일이 지나면서 잇몸이나 얼굴의 부기가 어느 정도 빠지면서 제 모습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며칠만 조신하게 대처하면 되리라는 생각과 함께 쾌재를 불렀다.
마(魔)가 낀 걸까.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와 밤부터 잇몸이 비정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가라앉으려니 생각하고 버티며 뭉그적거리다가 어제 토요일도 어물쩍 넘겼다. 구강염으로 인한 통증이 점점 심해지는 상태인데 일요일이다. 따라서 병원이 모두 문을 닫은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어 전전긍긍하면서 방방 뛰며 안절부절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셈이다.
벌초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게 몹시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조상을 하늘 같이 받들어 모시는 효성스러운 후손이거나 가문의 전통을 끔찍이 자랑스러워하는 축과는 격이 다른 평범한 후손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뿌리가 같은 일가들이 모여 묘에 풀을 깎고 담소하며 즐기는 분위기에 끌려 이변이 없는 한 빠지지 않으려 할 뿐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풍속인 벌초에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내남없이 해를 거듭할수록 벌초꾼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이는 노령화로 유명을 달리하거나 불참하는 경우가 늘어 가는데 새로 참여하는 젊은 세대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아름다운 풍습이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나는 외아들이다. 따라서 벌초에 불참하면 내 부모님의 영혼이 엄청 서운해 하시리라는 객쩍은 생각 때문에 기를 쓰고 참석하려 한다. 하지만 현실이 고약하게 뒤틀려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이따금 발생해 낭패스럽다. 올해처럼 아예 참석하지 못하면 내 부모님의 영혼이 동구 밖으로 마중 나오셔서 내가 나타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실 것만 같다. 매일 하는 일 없는 아낙군수처럼 집지킴이 노릇을 하는 밥쇠인데도 불구하고 왜 그분들이 영면에 드신 고향을 자주 찾지 못할까.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으련다. 당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 지극 정성으로 기르고 교육시켜 반듯하게 설 수 있도록 기틀을 잡아 주시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이런 주제에 입으로는 사람의 도리와 참된 자식의 길을 얘기하는 모순 속에 삶을 꾸려간다.
벌초에 참석해도 예초기를 작동하는 방법은 고사하고 풀을 깎을 줄도 모르는 반거충이다. 이런 때문에 마땅한 역할을 찾지 못해 빈둥대는 게 태반이다. 항상 참가하는 일가들 대부분이 나보다 한참 아래인 동생이거나 조카들이다. 따라서 자의반 타의반 상태에서 뒷전으로 밀려나 뒷짐을 지고 오가며 입으로 일하는 충수꾼에 지니지 않는 어정잡이 꼴이다. 그래도 올해처럼 아예 참석하지 못할 경우는 가문에서 강제로 쫓겨나 외톨이가 된 것 같이 불안하고 조상들께 죄를 짓는 기분이다.
가장 연장자로서 인천에 살며 나보다 10살 위로 올해 여든셋에 이른 형님 한 분은 고령에도 직접 운전을 하면서 해마다 빠짐없이 참석한다. 그 형님을 뵐 때마다 저런 각오와 자세로 참여하리라고 내심으로 다짐해도 자신이 없고 따르기 어려울 듯하다. 올해는 부실한 치아 문제로 도저히 참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더라도 내년부터는 빠지지 않을 참이다. 하지만 제대로 실천에 옮겨질지 장담하기 어렵다. 이 다짐의 성공 여부는 건강과 직결될 개연성이 높다는 견지에서 하는 얘기이다. 이런 연유에서 앞으로 건강에 신경 쓰지 않고 벌초마당에 빠짐없이 참석할 수 있는 행복한 삶을 누린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사)한국수필가연대 108인 대표수필선, 2018년 3월 30일
(2017년 9월 17일 일요일)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벌초에 참석 못하셨지만 교수님의 정성이 대단하십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담에는 벌초 다녀 오시길 바랍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