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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주일설교. 구원의 영광을 참고 기다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 18-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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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약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합니다. 하지만 정해놓은 시간에 만남을 기대하며 기다리시는 시간은 행복하고, 기대감이 넘칩니다. 성경은 구원자가 오실 것을 무수히 예언하지만, 그 때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구원자가 언제, 어떤 상황으로 오실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무작정 기다려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다리다 지쳐서, “정말 구원자가 오실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자신이 메시아(구원자)라고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을 따라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구원자가 오실 때가 “이때다, 혹은 저 때다”라고 날짜를 맞추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작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눈길하나,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촌 동네에 사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육신으로 오신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난 목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은,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야 제대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에 비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감추어진 비밀이신 예수님의 실체를 훤히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오셨다가 가셨음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상황이지만, 반드시 오시겠다고 실제 육성으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기록으로 남겨진 성경의 말씀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확실한 소망 가운데 얼마든지 시간이 지나도 기쁨으로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마다 주님을 기다릴 수 있는 대림절이 반복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복한 기다림의 시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십니까? 소망이 넘치십니까?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흰옷을 입은 신부가 되어서 신랑 되신 주님과 결혼을 한 사이입니다. 이제 곧 사랑하는 신랑이 오실 시간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신부의 마음이라면, 기쁘고, 설레고, 행복하게 살아갈 미래에 대해 소망이 넘쳐야 당연한 거죠. 대림절이 한 주가 지나고 두 번 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성탄절 까지 앞으로 남은 대림절 기간 동안 더욱더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소망가운데 주님을 기다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을 표현 할 때, ‘갈망’(渴望, crave, 간절하고 애타게 바람)한다, 혹은 ‘고대’(苦待, wait impatiently, eagerly - 몹시 기다리다)한다고 표현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인간만 구원 받을 대상이 아니라 식물, 동물, 자연까지도 다 구원의 대상입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2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리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아멘.
의문이 듭니다. 영혼이 없는 동식물, 바다와 산, 자연경관들이 왜 굳이 구원이라는 영광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처음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죄를 저질렀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저주를 내리셨는데, 그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표준새번역, 창 3:17) 인간이 죄를 저질렀지만, 그로 인해 땅까지 저주를 받았습니다. 또한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 하시기를, “~네 동생의 피가 땅에서 내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입을 벌려 네 동생의 피를 받은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우리말성경, 창 4:10-11) 여기서도 가인이 살인을 저질렀는데,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땅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말씀입니다. 아무 죄도 짓지 안했는데 인간들과 함께 저주를 받았으니 심하게 억울 할만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죄를 저지르게 되면, 세상의 모든 자연물들이 죄의 강력한 저주 아래 함께 묶여있게 되어서, 큰 고통을 받습니다. 지금 세상의 바다, 산, 강, 산림이 인간의 과욕 때문에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기다려야 하는 영광의 대상이 된 겁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익히 깨달아 알았고, 피조물들이 극심한 고통가운데 신음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이렇게 고통 받고 있는 것은 순전히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말씀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동식물과 자연경관을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모든 만물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 곧 구원의 영광에 모든 만물을 포함시키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22절이 피조물의 고통을 담고 있는 구절 이라면, 그 다음 23절은 인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23절을 읽어 드립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아멘. 성령을 받은 우리들은 두 가지를 기다리는데, 첫째로, 양자, 곧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실 것과, 둘째로, 몸의 속량, 곧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게 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22절의 모든 피조물의 기다림과 23절의 인간의 기다림의 두 구절에서 공통적인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찾으셨습니까? ‘탄식’한다는 말입니다. 탄식한다는 원어의 뜻은, 너무나도 충격이 커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나, 견디기 힘든 고통 때문에 혼자 중얼거리거나 불만을 터트린다는 뜻입니다. 기다림에 지치면, 사람이 이렇게 탄식하는 모습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탄식의 의미들은 표면적인 해석이고, 실제적인 의미는 훨씬 광대합니다. 탄식이라는 장애물이 우리의 인생을 공격하여 처참하게 무너뜨릴 때, 이로 인해 낙심된 마음을 누군가가 지켜 주어서, 그 사람이 취해야 할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도록 일깨워 주신다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일깨워 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은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도와주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첫째, 실족하고 낙망하여 갈갈이 찢겨진 채 널브러져 있는 우리들을 권능의 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겁니다. 둘째,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언젠가 슬며시 다가와 손을 내밀어 잡아 주시고, 함께 동행 하여 주시는 겁니다. 셋째, 희망이라는 것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공허한 우리의 빈 마음에, “다시 할 수 있다, 다 해 보자”는 소망과 힘을 불어 넣어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땅이 꺼져라 신음하고 한탄하는 상황에 놓여 있을 때, 하나님 아버지는 즉시로 우리에게 오셔서, 세워주시고, 함께 동행해주시고, 힘과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말씀만 들어도 힘이 저절로 채워지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저는 이 구절을 적으면서, 저도 모르게, “아멘”, “아멘” 하면서 손을 꽉 쥐어 봤습니다. 힘이 꽉~ 채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만 우리 곁에 계시다면, 우리는 어떠한 고통과 한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내일을 향해서 걸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아멘.
제가 지금 드린 말씀을 한 구절로 압축한 구절이 18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아멘. 공동 번역으로 다시 한 번 읽어 드리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멘. 우리 인생은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의 연속입니다. 죽지도 못하고, 사고의 위험, 질병의 위험, 먹고 살아가는 고역, 상처 받고, 상처 주는 관계의 고통.... 이런 것들을 계속 안고, 천년만년 살아가야 된다면, 그 자체가 지옥일 겁니다. 인간의 일생을 유한하게, 100년 남짓 살고 죽음을 맞이하게 창조하신 것은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인생의 고통의 기간은 짧게 해주시고, 영원한 구원의 영광에 이르는 영생을 보장해 주셨으니, 그깟 100년 인생 버티어 볼만하지 않겠습니까? 한 해 동안 고난 가운데 버티시고, 견디시고, 살아 내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지금의 삶은 고난과 탄식일지라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비교할 수 없는 구원의 영광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하며 구원자 예수님을 기다리시는 대림절 기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현재 처지가 고난의 상황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중에 나타날 구원의 영광이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지금 당장 부닥치는 현실의 고통을 견뎌내는 것은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25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짐의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25절을 읽어 드립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우리말 성경,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아멘.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단순하게 참고, 또 참고 기다리는 것 뿐 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무작정 참고 기다리라고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재, 고난과 탄식이라는 최저점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 주님이 오시면, 반드시 구원의 영광을 얻는 최고점에 이르게 됩니다. 최저점에서 최고점에 이르는 과정의 중간에는 ‘소망’이라는 매개체(24절)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소망은 계단이 되어서 우리를 구원의 높은 자리로 한 단계씩 상승시켜 줍니다. 소망을 붙들어야 무엇에든지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소망은 곧,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오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것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 사실이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말씀에 다 기록 되어 있습니다.
정리해 드리면, 최저점 인생에서 최고점 구원의 이르는 계단을 올라가려면, 반드시 소망이신 예수님을 딛고, 의지해서 참고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겁니다. 소망이 없이는 구원의 영광으로 가는 높이를 단 1mm도 높여 갈수가 없습니다. 주님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시간은 다 버려지는 시간입니다. 주님에게 마음을 두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시간은 삭제되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시간은 사탄에게 빼앗긴 시간들입니다. 소망되신 주님으로만, 참고 기다릴 수 있으며, 주님과 함께 끝까지 참고 기다린 사람만이 구원의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에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요지는 간단합니다. “00야! 구원의 길이 보이니? 너 혼자서는 절대로 못 가는 길이야. 봐라, 내가 넓고, 곧게 만들어 놓은 구원의 길이야. 나와 함께 가면, 저 끝에 구원이 있단다. 애야! 나를 믿고 고난과 탄식을 참고 기다릴 수 있겠니?” 우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 혼자 가려 했습니다. 참지 못하고 다른 길로 갔습니다. 최고점에 이미 이르렀다는 허황된 생각을 했습니다. 소망이신 주님이 제 곁에 와서 다시 손을 잡아 주신다면, 다시는 소망을 놓지 않고 구원의 길로만 걸어가겠습니다. 도와
주세요” 이 고백은 말씀 준비하면서 제가 드린 고백입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스스로 고백을 드려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인 가수 소향이 부른 ‘바람의 노래’라는 곡의 가사 일부분입니다.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 나는 이 세상 /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인생의 해답은 지식과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주님만이 우리의 해답이 되십니다. 이 단순함을 깨닫는 사람은 사랑이요 소망이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즐길 거리들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소망을 붙잡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전략전술임을 간파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영광을 보게 하는 것이 주님의 최종 목표라면, 사탄의 최종 목표는 우리 모두가 구원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최저점 인생으로 생을 마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주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구원은 이미 우리의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십시오. 소망을 붙잡으십시오. 우리 모두가 고난과 탄식을 참고 이겨내고, 구원의 영광을 맛보는 최고점에 이르는, 성공한 인생, 승리한 인생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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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안일하고 나태한 우리의 신앙을 일깨워 주셔서, 소망의 주님을 다시 한 번 굳게 붙잡고, 구원의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시며, 생명과 구원의 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