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의 전설
조선 명종 때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하였다.
한번은 자신의 운명을 점쳐보니 아무 해 아무 날에 비운으로 죽을 운수였다. 그래서 살아날 방법을 궁리해보니 용상 밑에 숨어 있어야만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에 그런 뜻을 임금에게 올려서 그날 용상 밑에 숨어 있었다. 이때 마침 쥐가 한 마리 지나가자 임금은 홍계관에게“마루 밑으로 지금 쥐가 지나갔는데 몇 마리였는지 점을 쳐보라” 고 물었는데“세마리인 줄로 아뢰나이다” 라고 답하자 임금은 홍계관이 임금을 기만했다하여 노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홍계관은 도리 없이 새남터로 끌려갔다. 형장에 도착한 홍계관은 다시 점을 쳐보고 형관에게 “잠깐 동안만 여유를 주면 내가 살 길이 있으니 사정을 들어 주시오” 하니 형관도 불쌍히 생각하여서 잠시 기다리기로 하였다. 임금은 홍계관을 형장으로 보낸 뒤 그 쥐를 잡아 배를 갈라보니 그 뱃속엔 새끼 두 마리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본 임금은 깜짝 놀라서 곧 승지를 불러 홍계관의 처형을 중지하라고 일렀다. 급히 말을 달려 간 승지가 당현(광나루와 구리사이에 있는 고개)위에 올라보니 막 형을 집행하려는 순간이었다. 승지는 크게 "처형을 중단하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그 말소리는 그 곳까지 들리지 않았다.
승지는 다시 손을 들어 중지하라고 손을 저었으나 형 집행관은 도리어 그 시늉을 속히 처형하라는 줄로 알고 곧 처형을 단행했다.
승지가 그 사실을 임금께 보고하니 임금은 “아차!” 하고 무척 애석해 했다. 그리하여 그 고개 이름을 「아차고개」라 부르게 됐고 지금의 워커힐 뒷산을 아차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출처] 아차산의 전설|작성자 화백거석
"忍(참을인)자 세번이면 살인을 면한다" 는 말의 유래
홍계관은 조선시대 명종때 널리 알려진 점쟁이다.
그의 점술이 너무나 신통방통하여 그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홍계관은 맹인점술가의 시조가되었다.
타고 날때부터 맹인이라 걱정을 많이 했으나,,,점술이 알려지면서 집안에 돈도 많이 들어오게되었다.
신수점(身數占)이 너무나 유명하여,,,1년의 운수 길흉화복의 판단에서 짧게는 몇년 길게는 수십년 뒤의 일까지 꿰뚫어보았다.
한 선비가 찾아와 장차의 운수를 보니...
"장차 천하에 이름을 크게 떨칠 부귀할 상이오"
그런데
"자칫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평생을 망칠 수도 있소"
"그렇소, 그럼 피할 방법은 무엇이요?"
"방법이 한가지 있으니...집에 가거든 보이는 곳마다 참을인忍자를 많이 써붙이시오"
집에 돌아와서...
대문에, 안방에, 마루에, 부억에, 기둥에. 어디든 써 붙혔다,
어느날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보니...
마누라가 어느 쌍투튼 남자와 동침을 하는 것이었다.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분에 못이겨 부엌으로 갔다. 식칼을 집어들고 나오는데 참을인忍자를 봤다.
그래도 분에 못이겨 집어들고 나오는데 마루 기둥에 또 참을인忍자를 보고 잠시 망설였으나...
칼을 들고 안방문을 열려는 순간,,,또 참을인忍자를 보는 순간...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忍자의 의미??를 되새겨 본것이다.....
그때에 선비의 아내가 인기척을 듣고서,,,방문을 열며...
"여보, 죄송해요,,,먼저 자서...."
그래도 선비는 씩씩대며..."옆에 상투 튼 놈은 누구요?"
"왠,,상투라니요?"...하면서..옆에 잠자는 이를 깨웠다...
눈을 비비며,,,
"형부오셨어요?"
"죄송해요" "이런 모습이라"
머리를 감고 젖은 머리를 뒤로 웅켜맨채 잠들었다,,,
놀러 온 처제였다.
선비는 상투로 착각한 것이였다.
정말 큰일 날뻔했다....식은 땀이 등줄기에 흘러내렸다.
정신을 차리니 忍자 덕분에 큰 화를 면한 것이다.
선비는 홍계관의 예지력에 감탄했다.
훗날 정승이된 선비는 자손에게 그 얘기를 전해주며...
"어떤 경우도 화 내기전에 참으며 먼저 상황을 파악하라."고 훈계했다.
이에 연유하여 참을인忍자 세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출처] 아차산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