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가해 4월3일 [(자)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예레미야서 20,10-13
복음 요한 복음 10,31-42
◈ [서울] 사순 제5주간 금요일
2020년 가해 4월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헤아림과 배려’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생일과 축일을 늘 챙기는
분이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신 분들의 기일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생일과 축일을 축하 받기는 했지만 제가 생일과 축일을
기억한 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식사 초대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식사를 마치면 음식과 과일을 챙겨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다시 정성껏 음식을 나누는 걸 봅니다.
저는 초대는 많이 받았고, 선물을 받기는 했지만 누군가를 초대하거나,
저의 것을 나눈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몇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피정의
집에 봉사하러 가는 분이 있습니다. 비용도 기꺼이 감수하고, 피정하러
온 사람들을 위해서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피정하러 갈 때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곤 했습니다. 차려진 음식을
먹었지만 수고하는 분들을 생각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헤아림과 배려에
대해서 말은 많이 했지만 헤아림과 배려를 행동으로 옮긴 적이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아림과 배려를 보여 주셨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보셨고,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느님의 헤아림과 배려였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몸을 병들게 했지만, 두려움과 공포는 마음을 병들게
했습니다. 몸의 병은 의료진과 방역 당국의 헌신과 노력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병은 약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헤아림과 배려가 있어야만 막을 수 있습니다. 해가 뜨면 어둠이
걷히듯이, 헤아림과 배려가 있으면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대구를 찾아간 광주의 의료진이 있었습니다. 지역감정이
아니라, 지역연대가 있었습니다. 이제 막 임관한 간호 사관학교
졸업생 전원이 대구를 찾아갔습니다. 마스크가 부족한 대구지역을
위해서 마스크를 보내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있습니다. 대구의
병실이 부족하니, 병실을 마련해 준 다른 지역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두려움과 공포를 더욱 키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스크를
매점매석해서 이익을 챙긴 사람입니다.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사람입니다. 국가적인 재난의 현장을 정쟁의 도구로 삼으려는
사람입니다. 조직의 보호를 위해서 감염사실을 숨긴 사람입니다. 조직의
성장을 위해서 감염된 걸 알면서도 모임에 참석한 사람입니다. 이기심과
욕심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위험합니다. 코라나 바이러스는
백신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이기심과 욕심은 백신으로 막기가
어렵습니다.
예전에 읽은 심순덕님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해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을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질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헤아림과 배려를 삶으로 실천하면 우리는 모두 ‘엄마’가 될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엄마’의 모습으로 살아가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신앙인은 그런 ‘엄마’의 삶을 사는 겁니다. 헤아림과
배려로 주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곤경 중에 나 주님 부르고, 하느님께
도움 청하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부르짖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 안 믿으면 인생성숙 결핍.
2020년 가해 4월3일 (금) 예수님 안 믿으면 인생성숙 결핍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0,35~38)”
우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의 탄생과 업적을 목적으로 놓고 질서 잡혀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탄생과 업적을 인류에게 전할 목적으로 남겨졌죠.
역사 기준도 BC는 그리스도 전, AD는 주님의 해로 세계가 정했습니다.
AD에 태어나는 인류는 예수님 탄생에 기준하여 몇 해만에 라는 겁니다.
이미 인류역사 기준점이 예수님이신데 안 믿으면 인생성숙 결핍입니다.
가톨릭인은 힘이신 주님 사랑하올 주님 나의 반석 이런 정신무장 했죠!
만인은 평등 자유 하늘초대 받은 자들이 맞다싶으면 하느님가족 됩시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모든 죄는 열등감에서
비롯된다.
2020년 가해 4월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모든 죄는 열등감에서 비롯된다.>
복음: 요한 10,31-42
저는 키 작은 열등감이 있었고 지금도 그것을 극복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누구도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리 잘생긴 연예인들도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열등감이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요?
‘더 리더’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길 가다가 열병에 쓰러진 10대
소년 마이클을 30대의 한나가 구해 정성껏 간호해 줍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합니다. 한나는 글을
읽지 못합니다. 마이클이 책을 읽어주면 한나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립니다. 한나는 마이클의 장래를 생각해서 조용히 마이클을 떠납니다.
그로부터 8년 후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전범 재판을 참관하던 중 옛
연인 한나가 전범으로 몰려 재판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녀의 혐의는
수용소에 수감된 죄수들의 일상을 기록해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클은 문맹인 한나가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의
무죄를 확신합니다. 그런데 한나는 순순히 자신이 한 일로 인정하고
20년형을 선고받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인간을 죄짓게 만드는 무기가 무엇인지 가장 중요한 하나만
말하라고 하면 저는 ‘열등감’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열등감이 있다면
사탄은 그 열등감을 극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이유로 온갖 악한 행동을
부추길 수 있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 된 이유도 이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뱀은 이렇게 유혹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된다.”
(창세 3,5)
뱀은 하느님처럼 되게 만들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면 하느님처럼 된다고 꾀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이 처음부터 당신처럼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 모습대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교리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398)
‘신화’란 하느님처럼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하느님처럼 되도록 창조하였지만, 인간이 이것을 믿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처럼 되려고 선악과에 손을 댄 것입니다.
선악과는 자신이 이미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처럼 되어보려는 사람에 의해 강탈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더는 죄를 짓지 않게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방법은 이 열등감을 극복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하수인들은 이 가르침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하는
노력이 아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습니다.”(460) 이를 위해 인간이 되셔서 믿음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셨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누구든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 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저의 키 작은 열등감은 죄의 원인이었습니다. 유럽에 나가서 공부하다
보니 그 열등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왠지 무시당하는 느낌에 ‘그래도
공부는 내가 더 했지’, ‘작으니까 더 민첩하지’ 등으로 그
열등감을 극복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웃을 판단하고 깎아내리는
죄입니다. 나폴레옹도 자신의 키 작은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세계
정복을 꿈꾸었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전쟁에 휘말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릅니다.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곧바로 사탄의
하수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밀떡이 당신과 같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체를 영하면 더는 높아질 수 없는 수준이 된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 믿음만이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방에 들지 않겠어요.”
켈리 여사가 호텔 직원에게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가구 하나 없는 이 게딱지만한 방에서 자면서 그 많은 방값을
지불하진 않을 겁니다. 내가 촌에서 올라왔다고 깔보는 모양인데….”
“부인 일단 타세요.”
직원이 그녀의 말을 자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부인의 방이 아닙니다. 엘리베이터라고요!”
이미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는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자라고 해도 화가 나지 않습니다. 이 믿음이 없는
사람만 계속 자존심 때문에 죄에서 허우적대며 자신을 높이려 하다
불행하게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https://youtu.be/HVnejR5Qj5A (유튜브 묵상 동영상)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사순 제5주간 금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20년 가해 4월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 요한 10,31-42: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어
유대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32절)고
하신다. 유대인들은 돌을 던지려고 한 이유가 바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라고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33절)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성, 즉 하느님이심은 알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에 인간이었다가 나중에 하느님이 된 분이 아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하느님이셨고, 나중에 인간이 되셨다. 그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을 당신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 같이 되고, 아들과의
친교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하고 말할 수 있느냐?”(35-36절) 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께서 사람들에게
오셨다면,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바로 그 ‘하느님의 말씀’께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일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이 신들이 된다면 그들이 참여하는 그분이 하느님이 아닐 수
있겠는가? 우리는 빛에 다가가 빛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빛에서 물러나면 어둠속에 있는 자가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신들이 되게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당연히
하느님이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37-38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일은 바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으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다. 아드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렇게 당신이
‘말씀이신 하느님’이심을 보여 주셨다.
이 ‘말씀이신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단지 모습이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의 육체를 지니셨다. 인간 육체 안에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일들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요 말씀이시라는 것이 그분의 일들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그분이
아버지의 일들을 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다.
당신의 육체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불리기에 합당치 않다고
보인다면 그 일들만이라도 믿으라고 하신다. 여기서 아들의 일은
아버지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들어야 한다.
유다인들은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지만, 그들의 손을 벗어나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40절)고 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다른 민족들의 교회로 가시는지를 보여준다. 이 교회에는 세례의
샘이 있고, 많은 사람이 요르단 강을 건너 그분을 찾아온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 건너편에 머무르셨다는 말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서 다른 민족들로 건너가셨고,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그리스도에 관하여 한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41-42절 참조)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 가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께 몰려와서,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41절)고 하며 예수님을
믿었다고 한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던 요한을
믿었다. 그렇다면 표징을 일으킨 예수님은 더더욱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 때문에 요한의
신뢰성이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우리
자신의 참된 변화와 더불어 살아있는 표징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음을
기억하며 그러한 새로운 삶을 주님께 바치며 살아가도록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요한 10, 39)|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20년 가해 4월3일 금.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요한 10, 39)
그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더더욱 빛나는 것들은 끝내 붙잡을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이 순간에 감사할 뿐입니다.
낙심한 우리들을 아픔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집착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아프지만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으로 십자가의 여정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집착의 방식이 아니라 사랑의 방식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사랑의 하느님께로 가는 시간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자아를 벗어나야 비로소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입니다.
자아를 벗어나는 사순시기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잘 알고 있습니까?
2020년 가해 4월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잘 알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다시 한번 참으로 놀라운 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셨습니다. 그냥 돌이 아니라 한대 맞으면
정신을 잃을 정도의 살상용 돌입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하며 몰지각한 유다인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입니다.
수백 번 수천 번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사건입니다. 너무나도
감지덕지한 황송스런 사랑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하는 짓을 보십시오.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손에 손에
하나씩 돌을 들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돌을 들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도적이며 적극적인 ‘살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이기로 마음먹고 달려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족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배신감, 비애감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진노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징벌을 내리지도 않으십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에 또 다시 설득하십니다.
끝까지 대화의 창구를 열어놓으십니다. 그리고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그게 아니란다.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것이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하고 마음 바꿔먹어라. 내게로 돌아와라.”
우리 인간들의 배은망덕함, 돌까지 드는 노골적인 적대감 앞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는 예수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항상 우리들의 영혼, 우리들의 구원을 먼저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돋보입니다.
첨예한 논쟁이 계속되던 어느 순간, 유다인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민첩하고도 지혜롭게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겨우 적대자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신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 건너편,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장소로 건너가셨습니다. 집요하고도
표독스러운 예루살렘의 유다인들과는 달리 단순하면서도 순박했던 그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구원자로 이땅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환대하고 사랑하기는
커녕, 정면으로 거부하고, 모독하고, 죽이기 위해 손에 돌을 들고,
마치 가축처럼 이리 저리 몰고 다니는 유다인들의 반역은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무한한 권능을 부여받으셨음에도
불구할고 당신 자신을 끝까지 거부하고 폭력을 행사하려는 유다인들을
무한한 인내로 참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또한 경이롭습니다.
이천년 전 유다인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수두룩합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자기 마음대로 그분의 말씀을
해석하려는 유혹들이 오늘 우리들 안에서도 남아있습니다. 자기 만족에
머무르는 신앙,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회색 신앙은 예수님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것을 넘어 배척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잘 알고 있습니까? 참으로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분을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하느님과
일심동체, 더 나아가 하느님 자체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알려주신 진리의 말씀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그로 인해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 어떤
기득권이나 고정관념의 환상, 아집이나 위선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라고 촉구하십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내 방식이 최고는 아닙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20년 가해 4월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요한 10,31-42)
내 방식이 최고는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요한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겐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 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
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합니다.
자명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을 보지 않고 그저 갈릴래아 출신 이라는 사실에만 집착했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내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에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내
방식으로 나를 채우기보다 비워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모두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4월 3일(금) - 백부장의 인품
오늘은 ‘백부장의 인품’에 대해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6절 말씀에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부장은 참 사람이 된 사람입니다. 보통 지도자나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하찮게 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가 많지 않습니까?
심지어 부리는 존재로 생각하고 그들의 의견이나 그들의 자존심은
생각지도 않는 것이 윗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백부장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자신의 하인 즉, 몸종을 부리듯이 하는 자인데도 백부장은 자신의
가족처럼 대하는 모습을 봅니다. 자신의 하인이 그렇게 아프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집으로 보내!” 그리고 “낫고 나면 나와!”
아마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보통일 것입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가족처럼 생각하고 예수님께 직접 찾아가서
“하인을 고쳐 달라”고 부탁합니다. 자신의 가족을 대하듯이 얼마나
간절히 부탁하는지 모릅니다. 백부장의 성품 너무나도 귀하고
덕스러움이 몸에서 풍겨 나옵니다.
우리도 이 백부장의 모습 참 닮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같이 자기 밖에
모르며 너무나도 회색도시가 되어가는 즈음에 백부장의 인품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성도 많았으면 합니다.
많이도 말고 기간을 정하여 하루에 한번만이라도 백부장의 그 인품을
의도적으로 실행해보는 성도 되십시오. 할렐루야!
- 인천 부평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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