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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4일 오늘의 역사
2021년 제주 서귀포 서남서쪽 32km해역 규모 4.9 지진 발생
2021년 전북 군산시 고군산군도 해역에 난파선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중유적이 발견
고군산군도는 무녀도, 선유도, 신시도 등으로 이뤄진 섬의 무리를 뜻한다.
이번에 확인한 유적은 지난해에 접수된 수중문화재 발견신고를 토대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올해 60여일 간 고군산군도 해역을 조사해 그 존재를 파악한 곳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이곳에서 고려청자 125점, 분청사기 9점, 백자 49점, 닻돌 3점 등 200점 가량의 유물을 발견했다.
81점의 청자발과 접시가 다발로 포개진 선적 화물형태로 확인됐고, 난파될 당시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로 만든 닻과 노, 닻돌 등 선박에서 사용하는 여러 점의 선구(배에서 쓰는 기구)도 함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조사 해역 인근에서 고선박이 난파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2020년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별칭 대북전단살포규제법) 국회 통과
2018년 제주출입국외국인청 예멘 언론인 2명 난민 인정
2017년 문재인 대통령-시진핑 주석 한중정상회담(베이징),
2015년 이만섭 전 국회의장 세상 별세
2012년 애덤 랜자 미국 코네티컷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반자동소총 무차별난사 28명 사망
2011년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1000번째 수요시위
2010년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 재신임 반대 시위 발발
베를루스코니 총리에 대한 의회 신임투표 결과에 불만을 품은 대학생 등 시민들이 전국 대도시에서 폭력시위를 벌이는 등 이탈리아가 총리 신임투표 후폭풍에 시달렸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성추문과 부패 스캔들로 궁지에 몰리자 지난 14일(현지시각) 상·하원에 신임 여부를 물었고, 간발의 표차(하원 기준)로 재신임 획득에 성공했다.
14일 오후 베를루스코니가 의회 신임투표에서 살아남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분노한 시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다. 수도 로마에서는 대학생 수천 명이 길거리 차량에 불을 지르고 돌·계란·페인트 등을 경찰에 투척하며 가두시위를 벌였고, 경찰도 최루탄으로 맞대응했다. 이날 시위에서 경찰 50여명, 대학생 40여명이 각각 부상했다고 이탈리아 경찰이 밝혔다.
한편 하원 신임투표 개표 결과 야당의원 2명이 당론을 어기고 신임에 찬성하는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나면서, 언론과 야당에선 베를루스코니 진영의 매표(買票)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로마의 치안판사는 매표 의혹 사건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2010년 거가대로 일반에 공개
2010년 12월 13일 오후 거가대로의 개통식이 열린 후 14일 오전 6시부터 거가대로가 일반에 공개되었다. 거가대로의 개통에 따라 부산~거제 간 거리는 기존 140㎞에서 60㎞로 단축되었으며, 소요 시간도 2~3시간에서 40분대로 단축되었다.
거가대로의 핵심구간인 거가대교는 부산쪽 접속도로인 이 ‘거가대로 가덕구간’(8㎞)과 침매터널인 ‘가덕해저터널’(3.7㎞), 사장교 구간인 ‘거가대교’(4.5㎞), 거제쪽 접속도로인 ‘거가대로 거제구간’(16㎞) 등으로 나뉜다. 이중 거가대교의 침매(沈埋)터널은 국내에선 처음 시도되는 방식으로, 길이 180m·높이 9.97m·너비 26.5m·무게 4만5000~5만t의 속이 빈 콘크리트 덩어리인 함체 18개를 바다속에서 연결하여 만든 해저도로이다.
거가대로의 개통은 녹산·신호공단 등 서부산권 개발과 거제 관광·조선 산업의 연계체계 구축 등 부산·경남 지역의 경제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할 전망이다. 개별적으로 부산은 거제와 통영 시민의 유입으로 유통업계 고객·교육수요 증대와 부동산 가격 상승 등의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거제의 경우 부산지역 관광객의 유입이 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거가대교의 하루 예상 통행량은 3만4700여대이며, 통행 요금은 편도 1만원이다.
2008년 '1조원대 피해' 12개 다단계업체 적발
2008년 12월 14일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는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며 투자금을 받아챙긴 혐의(사기)로 12개 다단계업체 대표 등 간부 16명을 구속기소하고 102명을 불구속 기소했으며, 달아난 8명을 지명수배했다. 또 이들 업체에 유사수신 프로그램을 공급한 업체 5곳의 대표를 유사수신행위의규제에관한법률위반 방조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하고, 프리랜서 1명에 대해서는 약식명령을 청구했다.
이 사건 피해자는 11만명이 넘고, 투자자들의 피해 금액은 1조129억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적발 업체 중 가장 규모가 큰 C사의 경우 “IP―TV 셋톱박스 사업에 투자하라”며 전국 26개 지점을 통해 6642명으로부터 4007억원을 끌어 모았다. C사는 “계좌당 100만원을 투자하면 30주 동안 원금과 이에 대한 30~50%의 수익금을 주겠다”고 투자자들을 속였다.
H사는 최근 2년간 ‘건강보조식품 판매 사업’ 및 ‘대부업 사업’에 투자시 24주동안 130%의 원금 및 배당금을 분할 지급하겠다고 속였고, K사는 “아프리카 가나에서 추진중인 금광개발사업에 투자를 할 경우 8주 내에 투자금의 120%를 지급하겠다”며 수천명으로부터 각 1천966억원과 178억여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한편, 불황을 틈타 불법 다단계업체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이들 업체에 회원 및 수입·수당지급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공급한 업체들도 처음으로 형사처벌돼 불법 다단계업체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다.
2008년 이라크 알 자이디 기자 이라크에서 기자회견하는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신발 던짐
2007년 아프가니스탄 도의부대·다산부대 완전 철수
2002년 여중생 사망 추모 전국 60여곳에서 촛불집회
미군 장갑차 사고로 사망한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시위가 2002년 12월 14일 오후 서울시청 앞 등 전국 60개 지역에서 7만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일제히 열렸다. 이날 오후 3시 ‘여중생 사망사건 범대위’ 주최로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10만 범국민 평화대행진’에는 학생과 시민 등 5만여명이 참여했다.
‘불평등한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국민행동’ 상임대표인 문정현 신부는 개회사에서 “부시 대통령의 여중생 사망사건 사과는 기만적인 것”이라며 “SOFA 개정 등 우리의 요구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오후 6시쯤 촛불 점화식을 갖고 미국 대사관이 있는 광화문 방면으로 거리행진을 벌였으며, 경찰은 경찰버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들과 대치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 군중 500여명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으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비폭력”을 외치며 저지선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대 일각에서는 “미군은 즉각 철수하라” “미군을 한국 법정에서 사형시키자” “이회창은 친미 우파” 등의 구호가 나오거나 팻말·깃발 등이 내걸렸다. 부산·대구·광주 등지에서도 각각 2000~6000여명의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촛불 행진이 벌어졌다.
1999년 미국, 파나마운하 파나마정부에 공식반환
미군이 관리해오던 파나마운하의 공식반환식이 중남미 각국 수반들이 참석한 가운데 14일(현지시각) 파나마 수도 파나마시티에서 열렸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고어 부통령,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등은 이번 행사에 불참했고, 지난 77년 운하관리 재협상을 벌인 카터 전 대통령이 미국 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했다. 재협약에 따라 파나마운하는 12월 31일 자정을 기해 파나마 당국에 넘어갔다.
반환된 파나마운하 지역은 총길이 81.6㎞의 수로와 1426㎢의 주변지역이다. 파나마 전 국토면적(7만8200㎢)의 5분의1에 해당된다.
연간 1만7000여척이 이곳을 통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넘나들며, 전세계 전체 물동량의 약 4%인 2억2800만t을 소화하고 있다. 선박 1척당 통과료는 평균 3만4000달러. 연간 6억5000만달러(약 7350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1914년 운하 개통 이후 이곳을 사용한 선박은 82만5000대가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미국, 일본을 항해하는 선박은 파나마운하를 이용하면 4800㎞나 단축할 수 있다.
1995년 보스니아 평화협정 서명
보스니아내전 당사국 지도자들이 1995년 12월 14일 파리에 모여 역사적인 보스니아 평화협정에 공식 서명했다.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 투즈만 크로아티아 대통령, 밀로세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이날 오전 11시50분 엘리제궁에서 지난달 21일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가조인한 보스니아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어 클린턴 미대통령, 시라크 프랑스대통령, 콜 독일총리, 메이저 영국총리,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 그리고 유럽연합(EU) 의장국인 스페인의 곤살레스 총리가 추가로 서명했다.
이로써 1992년 4월 보스니아의 독립선포직후 세르비아계가 인접 세르비아 공화국과의 통합을 요구하며 무장투쟁에 돌입해서 시작된 내전이 막을 내렸다. 보스니아는 회교-크로아티아계 연방과 세르비아계 공화국 등 2개의 정치적 실체로 구성된 하나의 독립국가가 됐다.
1993년 세계최대인 중국 삼협댐 공사 시작
세계최대인 삼협댐 공사가 1993년 12월 14일부터 시작됐다. 공사는 만 4년만인 1997년 11월 1차 물막이공사를 완료했다. 물막이 공사는 강 양쪽에서 토사를 부으며 전진, 강 중심에서 서로 맞닿게 하는 작업이다.
중국인들이 장강으로 부르는 이 양쯔강 물을 가로막는 역사적 장면은 중국 중앙 CCTV를 타고 12억 중국인들에게 중계됐다. 삼협댐 건설은 `물속의 만리장성 공사`라고 불릴만한 대역사이다. 1919년 손문이 처음으로 안을 냈고, 1956년 모택동, 1958년 주은래, 1980년 등소평 등이 의욕을 보였으며, 1992년 4월 중국정부의 결정으로 현실화됐다.
2009년 댐이 완성되면 높이 185m, 길이 2331m 총출력 1820KW, 저수량 393억입방미터로 저수량, 발전용량 모두 세계최대가 된다. 또 양쯔강 중상류 지역에는 평균 너비 1.1Km 길이 6백Km에 달하는 거대한 인공호수가 만들어진다
1993년 국방부, 프랑스 무기상에 55억 사기 당해
국방부 군수본부가 프랑스 무기거래상의 가짜 선적서류(B/L)에 속아 선적도 하지 않은 무기 값으로 국고 6백70만달러(한화 약 55억원)를 지불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1990년 11월 국내 광진교역을 통해 프랑스 무기오퍼상인 에피코(EFICO)사와 1백5㎜ 포탄 등 6백70만달러어치의 탄약수입계약을 체결, 1992년 12월 외환은행 파리지점에서 에피코사가 발행한 가짜 선하증권을 받고 대금을 전액 지급하여 사기당한 사건이다.
무기는 구경도 하지 못한 채 이같이 돈만 떼인 사기사건은 무기도입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국방부 군수본부가 탄약도입을 하면서 국제사기를 당한 것은 국방부의 무기도입업무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충격적 사건이었다.
1992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흑인폭동으로 비상경계령 선포
1991년 이집트 사파가항 부근에서 여객선 좌초. 4백60여명 사망
1989년 프로야구 MBC 청룡야구단, 럭키금성(LG) 그룹에 매각
1989년 소련 반체제 물리학자 사하로프 사망
소련의 수소폭탄을 개발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그후 핵무기의 파괴력에 가슴아파하며 반체제운동과 인권운동에 평생을 바친 사하로프 박사가 1989년 12월 14일 사망했다.
1921년 5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사하로프는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26세때 박사학위를 받을 만큼 비범했다. 1948년 핵무기를 다루는 연구팀에 가담, 수소폭탄개발의 핵심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그는 젊은 나이였던 32세때 소련과학아카데미 사상 최연소 정회원에 선출됐으며, 스탈린상을 비롯해 소련국민의 최고영예인 노동훈장을 3개씩이나 받기도 했다. 미국과의 핵무기 개발경쟁에서 뒤져 있던 소련이 1953년 수소폭탄을 개발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그는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며 국가의 영웅적 존재가 됐다.
그러나 핵무기의 윤리성에 회의를 느끼게 된 그는 소련이 핵무기 개발을 중지할 것을 주장하며 반체제운동에 가담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불린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운동이 소련군에 의해 무력탄압되자 사하로프는 반체제발언의 강도를 더욱 높여 소련정부를 비판해왔다. 소련당국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인권운동을 전개한 그는 국제적 인권운동가로 알려졌으며 1975년에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정부의 박해로 출국하지 못했다.
그후 1980년 모스크바에서 추방돼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채 고리키시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그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온 것은 1986년 고르바초프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1989년 4월 인민대표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어서도 이날 사망할 때까지 체제내 개혁세력으로서의 활동을 계속해왔다.
1988년 삼성전자 256K EEP롬 개발
1984년 스페인 시인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사망
1983년 소련, 세계최대 군용수송기 개발
소련은 SS20 중거리핵탄두 미사일까지도 공수할 수 있는 초대형 군용수송기를 개발했다고 권위있는 영국의 제인연감이 1983년 12월 14일 밝혔다. 제인연감의 1983년∼84년 세계항공기편에 따르면 나토에 의해 `콘도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이4엔진 안토노프 400기는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기였다.
제인연감은 안토노프400기가 탱크와 완전무장한 2백명의 병력을 수송할 수 있을뿐더러 SS20중거리미사일의 핵탄두와 이동식발사대까지 그레나다와 같은 섬으로 긴급 공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안토노프400은 날개폭이 74m로 4600km의 활동반경을 가지고 있으며 美공군의 C5갤럭시 수송기보다도 5%정도 크다.
1981년 이스라엘, 골란고원 합병
1979년 유네스코서 경주를 세계 10대 유적도시로 지정
1977년 이집트-미국-유엔-이스라엘, 중동평화회의 카이로서 개최
1973년 `외교관 등 국제적 보호인물에 대한 범죄 및 처벌에 관한 협약` 채택
1970년대 초반까지 외교관 등에 대한 국제적 테러가 빈번히 발생함에 따라 외교적 보호인물에 대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관 등 국제적 보호인물에 대한 범죄 및 처벌에 관한 협약`이 1973년 12월14일 뉴욕에서 채택됐다.
국제적 보호인물의 정의를 외국에 체재하는 국가원수, 정부수반 또는 외무장관 및 동반가족과 국제법상 특별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국가대표, 공무원 또는 정부간 국제조직의 직원 및 동거가족으로 규정하고, 외교사절의 신체 및 명예는 불가침이며, 접수국은 이것이 침해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이 협약은 1977년 2월 20일 국제적으로 발효됐으며 국내에서는 1983년 4월 30일 국회동의를 얻어 같은해 6월 24일부터 발효됐다.
1969년 국제통화기구(IMF), 한국을 특별인출권(SDR) 통화공여국으로 지정
1967년 스탠퍼드 대학 콘버그-굴리안, DNA 인공합성에 성공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콘버그와 굴리안 박사가 DNA 인공합성에 성공했다고 1967년 12월 14일 발표했다. DNA는 사람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유전을 담당하는 물질로 1953년 크릭과 왓슨이 2중구조를 해명한 이래 DNA구조에 관한 연구가 급속도로 진행돼 1966년경에는 DNA를 만들어내는 4개의 염기와 단백질을 구성하고 있는 20종류의 아미노산과의 대응 등 유전암호도 해독된 상태였다.
콘버그는 1956년에 DNA를 합성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효소 DNA 폴리메라제를 발견, DNA합성에 성공했다고 발표해 1959년 노벨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러나 후에 이 DNA는 생물활성이 아니고 본물(本物) DNA와는 확실히 구조가 다르다는 것이 판명됐다.
1963년 국가안전보장회의법 제정
1961년 필리핀 대통령에 마카파 칼 당선
1960년 이디오피아에 쿠데타 발생
1960년 유엔총회 아시아-아프리카 43개국의 식민지해방선언안 가결
1959년 영국-그리스-터키, 키프로스 독립협정
키프로스는 그리스계와 터키계 2개 민족으로 형성된 1개 국가로 국민들의 반목은 이미 고질화된 상태의 국가였다. 분리를 원하는 터키계 국민들에 비해 그리스계는 그리스와의 병합을 갈망해 왔다. 그리스계 국민수는 8대 1로 터키계를 압도하고 있었다.
섬을 둘러싼 그리스·터키의 대립으로 양국간의 감정이 점점 격화되자 서방국가 반공군사동맹의 분열을 두려워한 영국과 미국이 중재에 나서, 1959년 2월 마침내 취리히에서 양국 수뇌의 비밀회담이 실현됐다. 뒤이어 양국에 영국·미국 대표를 포함한 회의가 2월 19일 런던에서 개최되어, 런던 협정으로 불리는 키프로스 독립협정이 성립됐다. 이 협정으로 1960년 8월 키프로스는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12월 14일에는 마카리오스 주교가 터키계 경쟁상대를 물리치고 키프로스 대통령에 선출됐다
1959년 재일동포 제1차 북송
1959년 12월 14일 재일교포 북송선 제1호인 소련 선박 토보르스크호가 975명을 태우고 북한 청진을 향해 일본 니가타항을 출발했다.
일본 정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 1,800여 명의 경찰을 부두에 배치하고, 10여척의 함정을 동원해 근해를 감시했다.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재일동포를 추방하려는 일본의 은밀한 계획과,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고 대남공작원으로도 활용하기 위한 김일성의 계략이 맞아떨어져 성사됐지만 한국 측의 집요한 설득과 압력으로 처리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일본과 북한적십자사가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동포 북송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 것은 1959년 8월 13일이었다. 우리 정부는 곧 ;한일기본협정'과 '평화선 철폐'등을 체결하겠다며 북송중단을 설득했고, 국민들도 연일 반대 시위를 벌였다.
1984년까지 계속된 북송으로 일본인 처 1,830여명을 포함, 9만3,000명이 북한으로 보내졌는데 이들은 애초 기대와는 달리 북한에서 동요계층 또는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결혼, 전직, 거주지 등 생활전반에 걸쳐 엄격한 감시하에 놓이게 됐다. 일본인 처들은 그 후로 일본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1953년 한미합동경제위원회협정 조인
1950년 유엔, 한국정전위원단 설치 결의
1949년 애치슨, 대만 불간섭방침 언명
1946년 유엔총회 군축대헌장 결의
1946년 유엔본부 뉴욕에 설치 결정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봉
마가렛 미첼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소설의 무대인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1939년 12월14일 개봉됐다.
조지아주(州)는 이 날을 휴일로 정해 흥행을 도왔고 애틀랜타시(市)는 3일간의 시가 퍼레이드로 흥을 돋구었다. 3년간 600만달러가 투입돼 3시간37분으로 완성된 ‘바람과 함께…’는 개봉전부터 화제가 무성했다.
클라크 게이블을 남자 주인공으로 정하고 촬영에 들어갔지만 정작 여주인공인 스칼렛역(役)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고, 불타는 노을을 배경으로 게이블이 비비안 리와 멋지게 입 맞추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게이블의 심한 입냄새로 비비안 리가 NG를 연발하기도 했다.
그 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8개 부문을 휩쓸었고, 상영 1년만에 25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성공했다.
1939년 국제연맹, 핀란드 침공 이유로 소련 제명
1937년 북경에 중화민국임시정부 수립
1926년 김구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 수립
1911년 아문센, 인류 최초로 남극점 도달
로알드 아문센은 선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북극탐험을 꿈꾸었다. 오슬로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아문센은 극지 탐험에 대한 열망으로 항해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1903년부터 1906년까지 대서양에서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북서항로 항해에 사상 처음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1909년 4월 6일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달하자, 눈길을 돌려 남극 탐험에 나섰다.
당시 남극점에 먼저 도달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문센이 이끄는 노르웨이 탐험대와 영국 해군 소속 로버트 스코트의 영국 탐험대가 그 경쟁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추위와 초속 30미터의 강풍을 견뎌 내며 한 발 한 발 극점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1911년 12월 14일 마침내 아문센이 어떤 생명체의 발길도 닿지 않았던 곳,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1911년 10월 19일, 아문센은 웨일즈 만의 기지에서 에스키모 차림을 한 네 부하와 개들이 끄는 설매를 이끌고 남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출발 당시 52마리의 개를 데리고 떠났는데 돌아올 때는 썰매를 끌 12마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동력원은 그 자리에서 식량으로 변했다. 이는 애초에 식량무게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고 아문센이 성공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스코트도 한발 늦게 남극점에 도착했고, 귀환 도중 조난을 당해 차가운 빙하 위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세계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아문센은 다시 북극으로 관심을 돌려 비행선을 타고 북극해를 횡단할 계획을 세웠다. 1926년 5월 11일 이탈리아의 노빌레, 미국의 엘즈워스와 함께 세 나라의 공동 탐험대가 비행선 노르게 호를 타고 킹즈 만을 출발, 다음 날 1시 25분 북극점에 도달하고 비행을 계속해 알래스카에 도착, 북극해 횡단 비행에 성공했다. 그 2년 후인 1928년 5월, 아문센과 함께 북극횡단 비행을 했던 노빌레가 다시 북극 탐험에 나섰다가 행방 불명이 됐다. 아문센이 그를 구출하기 위해 수색에 나섰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조난사했다.
1906년 독일, 잠수함 U보트 1호 진수
1900년 막스 플랑크, 양자론 발표
독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가 1900년 12월 14일 베를린에서 열린 한 물리학 회의에서 전자기파가 연속된 파동이라는 기존의 학설을 뒤엎고 `전자기파 에너지는 서로 구별되는 불연속적인 덩어리들의 집합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해 학계를 놀라게 했다.
플랑크는 이 에너지 덩어리를 양자로 명명했다. 물리학계에서는 이 양자이론을 고전 물리학의 종막이자 20세기 현대물리학의 혁명이라고까지 평가하고 있다. 플랑크는 이 공로로 191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882년 독일인 묄렌도르프 외교고문으로 초빙
1825년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데카브리스트의 난` 발생
1824년 프랑스의 벽화가 퓌비 드 샤반 출생
1812년 1858년 인도의 초대 부왕 영국의 정치가 존 캐닝 출생
1799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사망
1799년 12월 14일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워싱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로 불린다.
1732년 버지니아주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토지측량관이 됐다. 1774년 제1회 대륙회의에, 1775년 제2회 대륙회의에 버지니아의 대표로 참석하고, 이 회의에서 무력항쟁이 결의되자 그는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피로에 지친 식민지군을 격려, 역경을 극복해나갔다. 1781년 10월 프랑스군의 원조를 받아 요크타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독립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1789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같은 해 4월 30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793년에 발발한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중립을 선언하고, 유럽의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수립했다. 1796년 3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민주주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끝내 사양했다.
1791년 아일랜드의 시인 찰스 울프 출생
1788년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3세 사망
1739년 중농주의 학파 이론의 프랑스 경제학자 피에르 사무엘 뒤퐁 출생
1730년 청나일강 원류에 도달한 스코틀랜드 탐험가 짐 브루스 출생
1636년 인조, 남한산성으로 피난
1503년 르네상스 시대 최고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 출생
788년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3세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