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아카데미 시즌 때 작품상 후보작들의 예고편을 보다가
<히든피겨스>의 유쾌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땡그랗고 귀여운 눈의 ‘옥타비아 스펜서’를 좋아하기도 하고,
<문라이트>에서 반한 ‘마허샬라 알리’도 보고 싶었습니다.
(근데 이 형님은 혼자서 로맨스를 찍고 있더라는...)
<스파이더맨>의 MJ ‘커스틴 던스트’가 나오는지는 몰랐습니다.
나이가 든 건지 피로에 찌든 캐릭터를 표현한 건지는 몰라도 표정은 안쓰러웠습니다.
‘케빈 코스터너’는 한때 괜히 잘 나가는 미남스타가 아녔구나 싶었구요.

저는 문과 출신으로 물포자인데다가 수포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과의 세계가 신기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히든피겨스>를 보면서도 그랬습니다.
칠판을 빼곡이 채운 루트와 싸인・코싸인 따위가 어떻게 커다란 쇳덩어리를 우주에 날려보낼 수 있는지.
저에게는 마술과 다를 바 없고, 수식을 가득 채운 칠판이 우주처럼 보였습니다.
영화 초반 백인 경찰 에피소드는 당시의 사회상을 한번에 보여줍니다.
차가 고장나서 도로에 서 있을 뿐인데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고압적이고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던 이 백인 경찰은
이들이 소련과 우주개척 경쟁을 하는 NASA의 직원이라는 것만으로
마음이 풀어지고 손수 에스코트까지 해줍니다.
냉전 앞에서 인종의 벽은 아무것도 아니네요.
당시의 인종차별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국가가 적대감을 이용해 국민을 얼마나 잘 통제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흑인 차별의 상황들은 참 치사합니다.
입학이 제한된다든가 서류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든가 하는 굵직한 문제들도 있지만,
화장실, 버스좌석, 도서관 이용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차별은 참 더럽고 아니꼽습니다.
그런 차별들에도 뿌리깊은 고국도 아닌 이 치사한 나라를
(영화에서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조국’으로 생각하며 우주진출을 염원하는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우주임무 그룹의 수장 ‘알’은 자신의 팀에 배정된 전산원 ‘캐서린’에게 얘기합니다.
“숫자의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해.”
한껏 폼 잡으며 얘기했지만 뒤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그 모습이 우스워집니다.
커피포트마저 함께 쓰기를 꺼려하고,
'colored'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 800m를 뛰어다녀야 하는
촌극이 벌어지는 집안 사정도 못 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 말이죠.
‘캐서린’의 항변으로 그 촌극을 알게 된 그는 ‘colored' 화장실의 안내판을 요란하게 뜯어버리고는
“NASA에서 모든 사람의 오줌색깔은 똑같아.”
라며 폼을 잡는데, 뭘 저렇게 티를 팍팍 내면서 하나 싶은 게 정치인이 적성에 맞아 보입니다.

영화의 세 주인공 ‘캐서린’, ‘메리’, ‘도로시’는 각자의 영역에서 차별에 맞섭니다.
중심인물은 ‘캐서린’이지만, ‘도로시’와 그녀의 예피소드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캐서린과 메리의 에피소드가 ‘뛰어난 개인’의 난관극복기인 반면,
도로시의 에피소드는 ‘집단의 이야기’이고 여성차별, 인종차별에 노동문제까지 더해집니다.
그리고 정보화라는 사회구조의 변화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이야기이죠.
도로시는 이 거대한 문제를 성숙하고 유연하게 대처합니다.
특히 생계를 위협하는 정보화의 큰 파도를 유연하게 적응해가는 생존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너무 쉽습니다.
주인공들이 원체 능력자여서 그런지 그녀들이 말하고 행동하면 문제가 술술 풀립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캐서린의 항변만으로 NASA 내부의 차별 문제가 시정되고,
특정 학교에 유색인종 입학을 금지하는 법률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메리는
몇 마디 말로 판사를 구슬려 입학 허가를 받아내죠.
기계를 잘 다루는 도로시는 당시에 최첨단 기술이었던 컴퓨터를
오로지 독학만으로 IBM의 기술자보다 능숙하게 다룸으로써
NASA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됩니다.
‘당당히 맞서서 말하고 행동하라!’
라고 이야기하고픈 것인지는 몰라도 실화를 기반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아쉬움이 큽니다.
절대로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았을 거거든요.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었으면 지금까지 인종차별 문제가 남진 않았겠죠.
‘알’이 연장을 들고 ‘colored’ 안내판을 부셔버리는 게 멋있어 보이긴 하지만
실제였으면 그런 독단적 행동이 사내 갈등을 더 증폭시킬 게 뻔합니다.
그리고 그런 표식들 몇 개 없애버린다고 한순간에 변기를 함께 썼을 리도 만무하죠.
법원에서 흑인의 입학을 허가했다고 해서 메리의 학교생활의 순탄할 리도 없을테고,
기계를 잘 다룬다고 컴퓨터를 기술자보다 잘 다루게 될리야 있겠습니까.

물론 작품의 의도로써 그간의 과정을 생략한 것이겠지만,
비슷한 시기의 흑인 생활상을 다룬 <헬프>를 비교하면 그야말로 꽃길만 걷는 셈입니다.
<헬프>의 미시시피와 <히든피겨스>의 버지니아는 차별의 정도가 달랐던 모양입니다.
이런 차이가 흑인 사회 내에서의 계급 차이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미시시피의 흑인들은 교육수준도 낮고 생활도 열악한데다
그들의 직업은 대체로 불안정하고 멸시를 참아내야 합니다.
이에 반해 버지니아의 흑인들은 교육수준도 높고, NASA와 같은 탄탄한 직장을 다니는
그들의 생활수준은 2000년대를 사는 제가 부러울 정도입니다.
이런 차이가 차별 문제 해결의 난이도를 결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튼 능력과 의지만 갖고 행동하면 모든 문제가 술술 풀리는 모습을 보니
흡사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가홍보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미국인들에게는 세계의 강국이 되고 다양성의 사회가 된 역사를 교육하고,
외국인들에게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기회의 땅이라는 것을 홍보하는 듯 하죠.
사실 이야기 구조로만 보면 과거의 그 오그라드는 국가홍보영화랑 다를 게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주체가 흑인으로 바뀐 것만으로 영화는 새로워지고 그 의미는 남달라집니다.
21세기형 미국 홍보영화가 이런 식이라면 당분간은 환영해 줄 것 같네요.

우주진출도 피해갈 수 없는 가화만사성의 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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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쓰기에 딱 좋은 영화죠. iptv에 출시예정으로 뜨는 걸 보면 곧 다운로드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너무 뻔하고 너무 착한 영화죠, 그래도 꽤 재미있었습니다만은.. 기대보다는 좀 아쉬웠다는..
작품상 후보로는 좀 단순한 진행이다 싶었습니다.
정말 너무 쉬운 전개가 아쉽죠 영화다보니 ㅜ 차라리 미드로 길게 시즌으로 나누었다면 ㅎ
하나의 에피소드에 좀더 집중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