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산문(시집 『돌아가는 길』(그루, 2021)을 펴내며)

[가우/박창기]

시인의 산문

가우 박창기

 내 시의 바탕은 바다(송도 해수욕장과 그 언저리)와 어릴 적 놀던 성당 마당과 바람이다.

 이 나이 먹도록 내 뇌를 떠나지 않은 것을 보면 저들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 같다. 시인의 말에도 되뇌었지만 시를 빌려 세상에 외치기를 밥 먹듯이 했다. 시는 구원의 언어라고 떠들었는데 아직도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오늘도 몹시 아파하고 있다. 선택되어 선물로 보내어진 세상에서 부끄럽게 살아 빛이신 그분에게 돌아갈 길이 아득하여 하늘 아래서 마냥 머뭇거리고만 있다. 나의 이런 고백을 듣고 용서해 주실 임이 계셔 나는 행복하지만 마냥 부끄러울 뿐이다.

 잘 몰랐지만 나에게 시가 처음으로 다가온 것은 어휘가 아니고 자연의 어떤 순간과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혼자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형들 따라 간 곳이 그 바다였다, 송도해수욕장과 그 언저리. 엄청 넓은 모래펄과 경사가 얕은 바닷가에서 찰방이는 파도와 놀기 좋았다. 발바닥을 비벼 건져 올린 조개를 날것으로 먹었던 점심, 가난으로 밥 먹기가 어려웠던 시절이라 여름이면 거의 점심은 바다에서 해결했다. 형들이 하던 모습을 흉내 내니 저절로 바다에서 혼자 노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바닷가에서 노는 시간을 줄여 송도 언저리로 진출하여 살로 잡기, 낚시하기도 곁들였다. 혼자서 놀자, 여러 순간과 모습들이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로 다가옴을 느겼다.

 이따금 유년의 마음 책갈피에 고이 웅크리고 있던 녀석들이 펼쳐진다. 삘기 뽑아 나누어 먹던 녀석, 강 건너 오이, 수박밭 서리하러 같이 헤엄쳐 간 녀석, 자맥질로 주먹만 한 조개 잡아 까먹던 녀석, 왕잠자리 다리에 실 묶어 수컷을 유혹하던 녀석, 새까만 손으로 구슬치기하다 허리춤을 잡던 녀석, 콧물을 자주 닦아 소매가 뺀질뺀질하던 녀석, 다리 걸어 넘어뜨리고는 모른 체하던 녀석, 친구 시켜 몰래 연애편지 전했다고 눈 흘기던 녀석, 그런데 보이지 않는 녀석들이 더러 있다. 우리가 벌써 그런 나인가?

오랜 날을 살아온 것 같지만, 생의 온갖 굴욕의 계급장이 붙어있다는 걸 마주보다 보면 그 어처구니에 크게 웃게 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잊고 살아온 것에 대한 회한이 태산 같다. 제멋에 겨워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인연의 구수한 정을 멀리하고 살았단 말인가?

 내가 살았던 곳도 형산강의 지류 중 한 곳이어서 이 샛강을 중심으로 녀석들을 만나고 함께 소통했으며 성당 마당도 그 근처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거룩한 녀석들과 늘 같이 했다. 특히 크리스마스 전야 대미사를 마치고 성가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던 행렬은 잊을 수가 없다. 10월이면 송정 솔숲 속의 수도원(지금의 포항제철 자리)에서 치러진 성체거동 행사는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주일 미사 후 주임 신부님의 오토바이에 얹혀 구룡포 공소와 송라 공소에 가서 미사 올리던 추억도 새롭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은 내 등 뒤로 먼지 날리며 신나게 달리던 모습도 신났다.

 매일 새벽 성당에 가서 복사를 하고 돌아와 집 앞 샛강에서 오리 알을 건지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이 오리 알과 나의 시 「따뜻한 흉터」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생님께 반항했던 다음 날 새벽 어머님이 들려주신 오리 알 한 소쿠리가 파란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 그 새벽에 선생님 댁을 방문하고 큰 절하고 용서를 빌었는데, 어릴 때의 그 여운이 고교입학 시험장에 가서 폭발하고 만다. 하필이면 초등학교에 안 계시고 경북고등학교 입학 시험장 감독관으로 와 계실 게 뭐람. 이렇게 출세하시려고 우리에게는 수업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으시고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만 하셨던 것인가? 나는 반장이라 아이들이 떠들면 대표로 불려나가 매만 맞았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했다.

 이 샛강에 대한 잔잔한 정이 남아서 그 이야기들이 자주 클로즈 업 되기도 한다. 추억 속으로 들어가면 샛강 바닥에선 아직도 피라미들과 붕어들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걸 본다. 조약돌이 맑은 얼굴로 웃고 있는 정경이 아름다워 한참을 머뭇거린다. 왕잠자리 잡느라 종종거렸던 발걸음의 흔적이 질척여서 그만 그 곁에서 주술 같은 소리를 흘리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샛강이 문명의 이기에 짓밟혀 실핏줄이 막히고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을 보고서는 강의 심장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역시 샛강임을 알겠더라. 나에게 실오라기 한 올만큼의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능력만 있어도 그것은 원형질에 대한 애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그냥 사는 게 아닌데, 겉은 다 다르나 속은 거의 비슷한 원형질을 가졌음에 틀림없지 않겠는가?

 특히나 좋아하고 사랑한 것이 파도다. 시 「파도」(시집 『나무가 걸어오네』(그루, 2012))를 올려본다

 ‘늘 깨어 있었어요/그대의 손이 닿는 거리 그 곁에서/쉬지 않고 철썩 때려 주는 소리에/가난한 가슴은 늘 깨어 있었어요/어쩌면 그대의 몸짓이/가난한 가슴을 풍요롭게 했는지도 모릅니다//그것은 채찍 같고/영혼을 명징하게 하는 지혜 같은 것/겉으로는 사나운 것 같아도/안으로 안으로 깊어져서는/마침내는 심연의 고요와 평화로 자리하는 것/차지 않고서는 비울 수도 없는/뜨거워지지 않고서는 식지도 않을/사랑하지 않고서는 미워할 수도 없는/당찬 마음 같은 그대, 파도/작은 바람 하나가 생의 방향을 결정하듯/품고 살 수밖에 없게 한 그대/내 사랑의 첨병 같은/내 사랑의 염원 같은/그대‘

 그 바다에 가고 싶다. 바라지 않아도 저 홀로 출렁이다 멀리서 온 강물을 뜨거운 가슴으로 맞이하는 그 바다에 가고 싶다. 우리는 모두 너무 기다렸다. 기약할 수 없는 신기루들을 마냥 기다렸다. 바다가 우리를 기다렸던 건 우리의 기다림이 아니라 추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 홀로 길을 내어 흘러가는 강물을 보라. 추억이 함께 흐르지 않고서야 먼 길을 에돌아왔겠느냐? 그리움에 목이 마르지 않고서야 머언 샛강물을 불러 모았겠느냐 강물이 바다를 만나 마음껏 출렁이는 건 기쁨의 손뼉이다. 기쁨의 광휘가 저물고 나면 추억은 되살아난다. 추억 안아 들여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그 바다에 가고 싶다.

 뭍에 있어도 마음은 자꾸 바다로 달린다. 뜻도 모르면서 바다경전에 푹 빠져서는 읽기만 했었던 나에게 최초의 시는 바다였다. 온몸으로 읽는다며 교만에 찌든 허상에 매달려 있을 때 경전의 가장자리에서 헤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려준 것도 그 파랑이었다. 파랑은 바다만이 뱉어내는 언어다. 그 언어의 속살과 갈비뼈 사이에서 끊임없이 서슬 푸른 채찍을 들었지만 돌아선 쪽은 나였다. 만신창이가 된 이즈음에 와서야 바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바람은 나보다 바다의 경전을 더 잘 읽는다. 바람은 파랑을 수도 없이 데리고 경전의 구석구석을 다독이듯 읽었다. 바람은 큰손으로 바다를 다루는데……. 나는 겨우 몇 장의 경전을 넘겼을 뿐인데 심연의 끝장을 대면하기 까지는 몇 번의 허물을 벗어야만 하는지, 이제야 겨우 파랑이 남긴 언어의 파편을 줍는 것이 고작이다. 다가설수록 바다경전의 페이지는 두껍고 깊다.

 다시 그 바다에 와서 오래 파랑 곁에 앉아 있었다. 바람만 불어도 프라이팬 위의 메뚜기처럼 튀어 오르며 날 선 비명을 지르던 파랑을 안다. 바람이 잔잔할 때도 늘 가벼이 뒤척이며 말을 걸었지. 파랑 곁을 떠날 때까지는 어떤 대꾸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한때 파랑은 나에게 있어 푸른 정신이었고 갈맷빛 심장을 지닌 혼이었다. 도시를 헤매는 동안 정신의 폐허는 깊어 갔어도 내 가슴 어디쯤에는 켜켜이 살아 있었다. 도시에는 지상의 낯선 언어들과 비밀스런 음모가 곤두서 있었다. 벽 같은 저것들을 바라보는 마음들은 언제나 고개를 떨어뜨렸고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어느 새 물든 나마저 정신의 폐허에 몸을 떨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시간이 일상인 것 같아도 늘 소년이게 하진 못했다. 과거는 한줌의 어둠이었다. 다시 돌아와 파랑 곁에 오래 앉아 있다. 부끄러워 속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 파랑에 내 정신의 폐허를 씻는 일은 고백성사를 보는 것과 같다. 한줌 어둠의 덩어리 각혈 하듯 뱉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푸른 정신의 복고를 서둘러야 하는데 아직도 정신의 폐허를 씻지 못해 파랑 곁에서 주저하고 있다. 못난 녀석이다. 내 영혼의 거처는 허상이 된지 오래다. 마음의 거처가 남아있다면 늦어도 찾아가고 싶다.

 어제는 구만리 보리밭 그 언덕에서 석양을 베고 누운 이랑을 한참이나 보았다. 바람 잦던 그해 봄 보리밭에도 이랑마다 바람이 덩이째 누워들었는데 초여름 바람이 달려들어도 보리는 휠 뿐 눕진 않았다. 오랜 시간 머물며 조곤조곤 나눈 그 얘기, 보리와 바람 외에 들은 이가 없다. 이 밀어의 정체는 보리 벨 무렵이면 알게 된다. 바람타지 않은 것들이, 기다리지 않은 것들이 목마름 뒤에서 오는 시간의 결정을 어찌 알겠느냐? 대보 구만리는 거칠지만 그리운 포구다. 그곳에 가면 늘 여유롭다. 누가 붙잡지 않아도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포장마차에서 술과 마주 앉으면 침묵과 파랑 소리가 곁에서 술을 따른다. 술 한 잔에 녹아드는 이야기는 바다보다 깊고 산보다 높다. 이곳에서는 불을 밝히지 않아도 내 속이 다 읽힌다. 눈을 감고 누우면 더 그립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종교에 의해 내 삶이 어느 정도 결정지어지는 상황에 있었다. 모두가 성당에 나가고 있었고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하는 분위기여서 따라만 가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유치원 다니던 나이에 성당에서 형들 따라 복사를 했다. 그 후로는 성당 마당이 놀이터가 되었고 바닷가, 샛강 근처가 아니면 거의 성당 마당에서 놀았다. 이따금 프랑스 신부님과 장난도 치고 성당 주위 골목은 다 다녀서 미로를 체험하는 착각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복사를 하고 소년 프레시디움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자 학급에서 공부를 좀 했던 터라 대구로 유학을 가고 싶어서 공부 핑계 대고 성당에도 자주 빠지면서 입시 준비를 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낙방의 아픔으로 포항에 왔는데 건강에 이상이 생겨 1년 휴학을 하고 다시 재도전을 했는데 또 낙방이었다. 그로부터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발령받아 임지에 갈 때까지 힘겨운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포항에서 형님을 도와 일을 열심히 한다는 소식이 건너갔는지 발령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든다는 시기에 발령을 받아 모든 걸 홀가분히 내려놓고 임지로 갔다. 울진군 온정면 덕산리 덕산초등학교였다. 금천에서 버스에서 내리면 산길로 걸어서 5km다. 걸어가는데 갑자기 내 입에서 성가가 흘러나왔다. 그리스도를 외면한 후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 의지로 할 수 있었던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그리스도를 찾게 되고 기쁘게 삶을 영위했다. 다시 대구효성초등학교로 부름을 받아 올라왔다. 그러나 엇박자로 잘못을 할 때는 어김없이 태클을 거셨다, 그분은. 그럴 때마다 내 정신의 폐허를 다시금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내가 무고로 간첩 신고를 당해서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냈을 때도 그분은 잘 해결해 주셨고, 이 일로 평교사로 평생을 보내기 위해 또 공립으로 전출을 가게 되었다. 마음이 편하니 신명나게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잘못을 하면 어김없이 태클을 걸어 다잡아주시는 그리스도가 나에게는 특별한 존재임을 뒤늦게야 깨달아 마음이 아프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에 그리스도를 멀리하는 잘못을 저질러 오랜 세월 방황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는데 그러한 일로 해서 삶과 의식과 정신의 고양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감사하고 있다.

 여기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대곡길 196-30에 이사를 와서 내 삶을 펼친 것이 벌써 6년째다. 여기에 와서 ‘휘영청’이라는 어휘를 좋아하게 되었다. 달빛 아래든 별빛 아래든 모든 것이 용서될 것 같고 즐거움도 늘어날 것 같아서 내 마음이 더러 휘청거렸었다. 청춘은 어제였고 지금은 안녕과 거룩함의 시기가 아닌가 여기게 된다. 계간 『주머니 속의 행복』(계간 『詩하늘』의 전신)과 계간 『詩하늘』 25년을 마무리하는 기념호 100호를 출간하게 되어 여간 기쁘지 않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향해 말해야 한다. 독자는 시인의 언어를 읽기 위해 시를 찾아 나서며 감흥에 따라 좋은 시, 좋은 시인으로 각인하고 분류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등단은 무용지물일 뿐 아니라 먼저 등단했다고 앞자리를 원하는 고리타분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詩하늘은 문학회이나 옭아매지 않는다. 자유로운 영혼들의 소통의 집이라 누구든 포용한다.

 나는 눈앞의 꽃보다 강 건너 등불을 더 좋아하는 나그네다. 멀리 돌아다녔다. 오랫동안 헤매고 다녔다. 나를 따라다닌 건 늘 빈손에 가난이 사랑이었다. 사랑할 수 있어 부끄럽지 않았다. 오늘도 강 따라 발이 가고 있음을 말리지 못한다. 나는 한때 시에 대해 이런 생각을 했다. ‘할 말을 너무 많이 가진 너에게서 한 마디 말도 듣지 못하고 할 말을 못해 가슴 아픈 너에게서 한마디 말도 끄집어내지 못했다. 할 말을 하고 나면 쓰러질 것 같은 너에게서 지켜야 할 일이란 사소하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 거 차마 듣지도 끄집어내지도 못하는 아, 불쌍한 나의 상상이란, 네 속의 말을 죽이는 일은 잠시나 살리는 일은 영원한 보살핌이 아니더냐, 네 아픔의 어깨를 감쌀 수만 있어도, 네 고뇌의 등을 다독일 수만 있어도, 네 눈물의 고통을 느낄 수만 있어도, 네 인내의 언덕을 오를 수만 있어도, 나는 존재의 이유를 뛰어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겠는데’하고 말이다.

 바람과 동무하며 세상 구석구석 다녀봤지만 아직도 구원의 언어 가까이에 가지 못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터득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도 든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골짜기에 침잠해서 푸르른 정신으로 세상의 한 쪽이 밤으로 눕는 시간에 맞추어 빛나는 것들을 초대하고 있다. 되도록 할 말을 아끼며 멀리서 소리 없이 커가는 것들의 숭고함을 배우며 나무에 걸려 되돌아오는 세상의 어떤 소리를 들으려 한다. 그럴 때마다 내 푸르른 정신은 단단한 은유로 귀결되어 더욱 깊고 유장해질 것이라 믿어본다. 감잎 빛 노을의 순간이 지나갔다 하더라도 이 저녁, 푸르른 정신 날것 그대로 훤하게 반짝이기를 기원해본다. 어느 날 작은 바람을 만났는데 세상일 아랑곳하지 않고 맘껏 노는 것이 몹시 부러웠다. 시 「바람의 군무를 보며」 만난다.

 ‘벼이삭을 건드리고 나온 바람의 손에/이른 봄에 본 벼 낟알의 숨소리가 얹혀 있다/사람의 입속으로 들어갈 생명의 끈을/줄기차게 키우고 있을 뿌리들과/햇볕의 즐거운 운동이 말하지 않는가/꿈은 아무리 허술해도 버릴 게 없다/봄부터 길게 갈 것을 아는 침묵이야말로/마침내 되돌아올 것을 믿는 희망 때문이다/아무도 벼 낟알에게 변하라고 재촉한 적이 없다/갈 데까지 가야함을 알기에/가고 있는 지혜를 엿보는 것이다/그 지혜를 엿보러 수없이 이랑을 들락거렸을 바람/바람의 손길 없이 큰 벼이삭은 하나도 없다/물, 흙, 햇볕도 고맙지만 바람의 덕이 더 크다/오늘도 나는 창밖으로 본다/벼들이 바람과 노는 모습을/집단 군무의 아름다움에 빠져 시간을 잊는다/그런데 벌써 벼이삭이 패고 가을이 저기 보인다/늘 살아있다는 것이 시간의 나침판임을 보게 된’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사람과의 관계였다. 상대적이라는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세상에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작용이 늘 일어났던 것이다. 「마음」이라는 주제의 시가 나를 찾아온 것도 많은 사람을 겪은 뒤였다.

 ‘너 하나를 읽을 수 없어/이리도 막막하냐//너 하나를 가늠할 수 없어/이리도 난처하냐//난 아직도/너의 포로다’

 깨달음은 늘 뒤늦게 찾아와서 난처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사람이지. 그러다가도 잊을 만 하면 ‘빛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은 고통스러우나 아름답다.’는 어떤 명제가 생각나게 되더군. 세상살이가 그렇고 모든 관계가 그렇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지. 오늘 아침에 새가 울고 영춘화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그리운 것들은 멀어만 보였는데, 어느 새 곁에 와 있었다. 다시, 오늘 살아 있는 이 기쁨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빛이 있어 내가 있음을 감사하고 있고, 칠흑을 디디고 건너던 발걸음을 기억하고 있으며, 발등으로 서늘히 지나간 미물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런 내가 이 새벽 광명을 선물하는 이의 거룩함을 어이 찬미하지 않겠느냐? 다시 주어진 오늘을 어이 찬양하지 않겠느냐? 소중하여라, 오늘이여! 신비하여라, 신의 손길이여!

 또 한 권의 나를 말할 수 있는 시집『돌아가는 길』(그루, 2021)을 엮게 되어 세상에 감사한다.

 시 「그리워하며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부럽다」를 끝으로 시인의 산문을 마치려 한다.

 도움 주신 모든 분께 감사한다.

그리워 한다는 건

너에게로 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게

기적이고 참 고마운 일이란 걸 깨닫는다

들길을 걷다

발아래 보이는 봄소식들을 접하다 보면

또 감사하게 된다

영혼의 이웃들이 나를 이 길로 오게 했구나

내가 그리워한 것들에 빚진 일이 많다

막무가내로 그리한 것이지만

빚진 자의 마음이 이리도 가벼웁다니

숨 쉴 수 있음에 감사하고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워하며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부럽다

[가우/박창기]

15번째 시집을 내고 이런저런 일로 보내드리지 못하고 세월만 보냈습니다.
올해 내로 시집을 받아보실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시인의 산문은 원래 시집에 실으려고 했는데 분량이 많아 따로 올리려고 했었습니다.
그게 오늘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를 좋아한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하고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영철]

저 역시 바다에서 배우며 파도를 사랑합니다.
그저 존경스럽습니다.
20집, 30집이 빛으로 태어나길 기도하겠습니다.

[김정규]

대보 구만리에 가서 소주 한잔 하고 싶습니다,그냥 바람처럼 날아가서.
별만 바다로 쏟아지는 그런 밤이면 며칠이든 눌러 붙어서.그냥 마냥.

[서찬교]

저도 할말은 많아서 주절거리고
,뭔 글인지도 모를 글을 써놓고
애써 위안을 삼는일은 몇숟갈이라도
남겨야 그나마 후회가 덜 할것같습니다..
선생님께 많이 배웁니다.

[강오]

가우선생님,뒤늦게 먼길 돌아와 보내 주신 귀한 푸르른 시집 잘받았습니다. 아무쪼록 더욱 강건하시고 많은이들의 가슴에 각인되는 별이 되시리라 생각되며
많은 가르침의 기회주셔서 항상 감사드리고 고마운마음 함께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