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70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서애 유성룡
실학의 대가이자 명재상으로 이름난 유성룡의 고향은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다. 유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유성룡은 김성일과 동문수학했으며, 21세 때 퇴계 이황에게서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칭찬을 들었다. 선조는 유성룡을 일컬어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절로 경의가 생긴다”라고 하였고, 이항복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꼬집어 말할 수 없다”라고 했으며, 이원익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문무잡과 방목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안동은 과거와 현재가 잘 어우러진 곳이다. 도산면 토계리 원촌에 민족시인 이육사의 생가 터와 시비가 있으며, 이천동에는 거대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제비원 석불이 있다.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정여립 모반 사건 때도 자리를 굳건히 지켰을 뿐 아니라, 동인이었음에도 광국공신(光國功臣)의 녹권을 받았고, 1592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정치가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그의 학문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주어 실전에 활용하게 하였다.
말년인 1598년에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그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5년 풍원부원군에 봉해졌고, 파직된 뒤에는 고향의 옥연서당에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과 『서애집(西厓集)』, 『신종록(愼終錄)』 등을 저술하였다.
그가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어의를 보내 치료케 했지만 유성룡은 65세의 나이에 죽었다. 그런데 하회에서 세상을 떠난 유성룡의 집안 살림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소식에 수천 명이 그의 빈집이 있는 서울의 마르냇가로 몰려들어 삼베와 돈을 한푼 두푼 모아 장례에 보탰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실록의 사관은 그를 평하여 “천자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을 대할 적에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라고 칭찬한 뒤, “이해가 앞에 닥치면 동요를 보였기 때문에 임금의 신임을 오래 얻었으나 곧은 말을 한 적은 별로 없고, 정사를 오래 맡았으나 잘못된 풍습은 구해내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병산서원병산서원은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면서 설립되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잘 보존된 서원 중의 하나다.
하회마을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간 병산리에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屛山書院)이 있다. 이 서원은 1613년에 정경세 등의 지방 유림들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면서 설립되었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豐岳書堂)으로 풍산 류씨의 교육 기관이었는데, 선조 5년(1572)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29년 유성룡의 셋째 아들 유진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철종 14년(1863)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잘 보존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도처에서 서원을 건립했던 영남학파의 거봉 퇴계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 성과가 크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모든 서원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하였는데, 병산서원만큼 그 말에 합당한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충효당안동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건물은 양진당과 충효당이다. 충효당은 1600년대에 건립된 유성룡의 종택으로, 평소 충과 효를 중시했던 서애의 뜻을 받들어 이름지었다.
한편 안동시 임하면 금소동은 나라 안에서도 이름난 안동포가 생산되는 마을이다. 삼베길쌈이 워낙 성했던 곳이라 다른 마을 처녀가 시집오기를 꺼려했을 정도라는데, 이제는 이곳마저도 안동포를 짜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서민들이 즐겨 입었던 안동포는 구경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안동시에서 영주로 가는 국도 옆에 위치한 이천동에는 거대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이천동 석불, 일명 제비원 석불이 있다. 신라 때 도선국사가 새겼다고 전해지는 이 석불은 11미터 높이의 화강암 암벽을 그대로 깎아 몸통을 만들고 2미터 높이의 바위를 부처의 머리로 만들었다. 보물 제115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주의 근본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라고 노래한 무가(巫歌) 「성주풀이」의 기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이 석불이 있는 이천동 영남산에 연미사가 있다.
안동부 관아는 화산(花山) 남쪽에 있다. 황강 물은 동북방에서 흘러오고 청송읍(靑松邑) 냇물은 임하(臨河)를 지나온다. 이 두 물이 동남방에서 합쳐서 고을 성을 돌며 서남쪽으로 흘러간다.
남쪽에 영호루(映湖樓)가 있는데, 고려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을 왔을 때 이 누각 위에서 잔치하며 놀았다. 누각에 걸린 현판은 바로 공민왕이 쓴 것이다.
영호루 북쪽에는 신라 때 지은 옛 절이 있다. 지금은 절이 망해 스님은 없어도 그 정전은 들 복판에 따로 서 있는데 조금도 기울지 않아 사람들이 노나라의 영광전(靈光殿)에 견준다.
위는 『택리지』에 실린 안동에 관한 기록이다.
안동의 영호루는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수(漢水)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일컬어졌다. 김종직은 『영호루중신기(映湖樓重新記)』에서 “영호루는 안동의 이름난 누각이다. 그 강산의 뛰어난 장관은 비록 촉석루나 영남루에 비해서는 더러 손색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똑같이 낙동강 언덕에 자리한 상주의 관수루(觀水樓), 선산의 월파정(月波亭)은 자못 영호루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영호루의 현판은 고려 말(1380년) 공민왕의 필적으로 전해진다. 영호루가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문헌은 없다. 하지만 고려 초기인 1274년 김방경 장군이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천여 년은 족히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피난 왔던 공민왕은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 밖의 영호루를 찾아 누각 아래 강물에 배를 띄우고 유람을 하기도 했고, 호숫가에서 활을 쏘기도 하였다. 난이 평정되고 환도한 뒤 1362년 공민왕이 친필로 ‘영호루’라고 쓴 금자(金字) 현판을 내려 달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영호루는 여러 번의 물난리로 공민왕 이후 다섯 차례 유실되었고, 일곱 차례 중수되었다. 1934년 7월 23일에는 낙동강 상류 지방의 폭우로 인해 안동 시내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있었다. 이 수해로 영호루는 주춧돌과 돌기둥 몇 개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 시민들의 성금과 국비, 시비를 모아 현재의 영호루를 지었다. 옛 영호루는 지금 자리의 강 건너편에 있었다. 이곳을 찾았던 다산 정약용은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남겼다.
태백산 꼭대기에 응축한 맑은 기운 이 누대 앞에까지 달려와서 펼쳐졌네 바닷물과 산맥이 삼천리를 에워싼 곳
흥성한 예악 문물 사백 년을 이어왔네 푸른 물 맑은 모래 아름답게 빛나고 드높은 성 거대한 집 빽빽하게 연이었네 하회마을 고택은 알괘라 어드메냐 딴 시대라 쓸쓸히 한번 슬퍼하노라
안동을 두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지런한 것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에 힘쓴다”라고 하였고, 『동국여지승람』 「안동도호부」편 「형승」조에 “물은 황지로 빠져서 1만 구렁을 흡수하고 산은 태백산이 가장 뛰어나게 뭇 봉우리를 통솔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안동 지역의 대표적 향토지 초고본(草稿本)인 『영가지(永嘉志)』를 편찬한 권기는 안동을 일컬어 “산은 태백에서부터 내려왔고 물은 황지에서부터 흘러온 것을 환하게 알 수 있다”라며, “산천의 빼어남과 인물의 걸출함과 토산의 풍부함과 풍속의 아름다움과 기이한 발자취”를 지니고 있는 고장이라고 표현하였다.
‘안동 상전(床廛) 흥정이다’라는 옛말이 있는데, 이는 옛날 안동 상전에서 여자들이 조용히 상을 사가듯 말없이 행동할 때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안동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얼굴과 끈질긴 인내심을 가졌다고들 말한다. 그 이유를 유교 문화권에서 찾기도 하지만, 이 지방의 열악했던 자연 환경과 독특한 역사에서 기인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안동 지방은 당쟁이 치열했던 조선 중기 이후 잠시 정권을 잡았던 남인 세력이 3백여 년 동안 묻혀 지낸 ‘야당 지역’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추 한 알 먹고 요기한다’는 선비 기질의 권위를 가졌고, ‘열 끼를 굶어도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체모가 이해관계에 앞섰던 가치관도 대물림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안동문화원장을 지냈던 유한상 씨는 이런 기질을 가진 안동 사람을 ‘안동 숙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실학의 대가이자 명재상으로 이름난 유성룡의 고향은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다. 서애는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1592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정치가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그의 학문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파직된 뒤에는 고향의 옥연서당에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과 『서애집』, 『신종록』 등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