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은 자동 기계 장치가 아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 강론>(2024. 5. 19.)
(사도 2,1-11; 1코린 12,3ㄷ-7.12-13; 요한 20,19-23)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사도 2,1-8)”
1)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서는 어떤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될까?” 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지금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영어일까?
천주교에서 공식 언어로 사용하는 라틴어일까?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일까? 신약성경의 그리스어일까?
아니면 하느님 나라에서만 사용하는
어떤 특별한 하느님의 언어일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가장 먼저
그 나라의 공용어부터 배워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호기심과 궁금증일 뿐입니다.
실제 상황이 어떨지는 그날이 되어봐야 알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각자 사용하는 말이 달라도
아무런 불편 없이 사람들의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나라” 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것이 완성된 나라,
그래서 모든 점에서 완전하고 완벽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 강림 이야기’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데도 사람들 사이에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준 표징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2)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1요한 4,16), 하느님 나라의
언어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대화가 이루어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면 그 어떤 장벽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이 다 장벽이 됩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서 없앤 일이고,
마음의 벽도 허물어서 없앤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갈릴래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 같은 마음의 장벽.>
3) 그렇지만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성령은 자동 기계 장치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응답과 노력이 합해져야만 합니다.
오순절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배운 적 없는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사도들에게
갑자기 생긴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사도들의 설교를
저마다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능력이
그 자리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생긴 것인지......
결과만 놓고 보면,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기적은
사도들보다는 ‘듣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의 실현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야말로 진짜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고, 주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놀라거나
신기해하면서도 그냥 가버린 사람들의 수는 삼천 명보다
많았을 텐데, 똑같은 은총이 내려도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게 되고,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못 받게 된다는 것을,
그냥 가버린 사람들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에게 성령과 성령의 은사가 내렸을 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용기를 내서 사람들 앞에 나섬으로써
그 은사에 응답했습니다.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삼천 명은 그 설교에
귀를 기울여서 들으려고 노력했고, 알아들었고, 변화되었고,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은사에 응답했습니다(사도 2,41).
4)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소통이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일치와 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남 탓’만 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소통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장상들만의 탓인가?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만의 탓인가?
그게 정말로 ‘남 탓’뿐인가? ‘내 탓’은 없는가?
소통과 일치는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너부터 노력해라.” 라고 비난하는 모습 자체가
불통의 모습입니다.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내가 먼저’ 들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야 합니다.
<소통과 일치를 주장하면서도 ‘남 탓’만 하다가
더 큰 불통과 분열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외면하고
악령의 유혹에 넘어간 모습입니다.
“일치는 성령의 일이고, 분열은 악령의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겸손은 성령의 일이고,
교만은 악령의 일”이라는 것은 자주 잊어버립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하느님 나라는 각자 사용하는 말이 달라도
아무런 불편 없이 사람들의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나라” 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성령은 자동 기계 장치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응답과 노력이 합해져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