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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arandel
*지금은 없어진 다음 세계엔에서 보고 갈무리해놨던 글들입니다. 즐감하세요.
남이장군의 가족들 [2] | covet 번호 205548 | 2008.05.01 조회 4026 | 추천 0
태종의 외손자로, 정선공주의 아들로 너무 유명하게 알려진 남이장군이긴 한데,
위인전 읽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내 손으로 책을 찾아 읽다 놀란 점이다.
정선공주가 시집간 남씨 집안의 제사 지낼 자손이었긴 했던 것 같은데
역사에 기록된 남이장군의 혈통은 어린애들에게 일러주는 이야기와는 너무 다르다.
역적으로 죽은 이의 혈연관계가 족보에 석연치 않게 기록이 된 건지 어쩐 건지.
남이가 역적으로 사사되던 무렵 기록에, 남이의 조모를 원래 있던 내수사 노비로
돌려보냈다는 언급이 있다.
남이는 내수사 노비의 손자다?
내수사 노비는 왕실 재산이니까 신하가 함부로 부릴 수 없고 자식을 낳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내수사 노비는 궁녀로 들어가는 비율이 높고, 궁녀였다면 박영효의 경우처럼 일찍 죽은
공주의 남편에게 첩으로 내려줄 수는 있다.
즉, 정선공주 사후에 그 부마에게 궁녀를 하사해서 낳은 손자가 남이라면 말이 된다.
정선공주는 별세 무렵에 어린 아들이 있다는 기록은 있지만, 이 아들이 자라지 못하고
죽었다면 공주의 제사를 지낼 자손으로 궁녀 첩의 자손을 받아들이게 왕실에서
선처해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선공주와 남이의 관계는, 철종의 옹주와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 정도에나 비할 법하다.
남이가 만약 공주의 친혈육이었다면 역적으로 몰려도 그렇게 즉시 처참하게 처형당하지는
않았을 거다.
공주의 친혈육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편하게 죽일 수 있었다.
어쨌든 남이 할머니는 내수사 노비라 치고,
그 내수사 노비가 낳은 남이의 부친은 역사에서 존재가 흐리다.
남이가 정선공주의 제사 지낼 명목상 손자라는 입장이라면, 남이의 아버지는
정선공주의 아들뻘이라 더 가까운 관계인데도.
정선공주의 친아들이 몇살에 죽었고, 남이의 아버지가 몇살까지 살았는지, 누구와
결혼했는지 등등 변수가 많을 것이다.
남이의 초고속 승진에서 주요요인은 공주의 명목상 자손이라는 위치보다 당대 권신인
권람의 사위라는 점이 더 크다고 본다.
권람은 세조 등극시 거든 공신으로서 역적으로 처단된 이들의 친척을 노비로 분배하는
과정에서 안평대군의 어린 손녀를 배당받을 만큼 급수가 꽤 있었다.
그리고 남이의 몰락도 유자광의 간계보다는 권람과의 관계가 더 큰 원인이라 본다.
유자광이 아무리 악독한 간계를 낸다 해도 먹힐만한 상대를 골라야 하니까.
지위는 높지만 공격받으면 방어해줄만한 뒷배는 약한 사람.
남이는 권람의 사위로 들어갔지만, 고부관계가 험악해서 이혼했다.
남이의 어머니가 어느 정도 집안 출신인지는 모르겠는데, 며느리를 용납할
정서적 여유가 없는 여자였던 것 같다.
공주의 명목상 아들이지만, 실제로는 내수사 노비의 아들인 남자에게 시집올
여자라는 건 짐작이 참 어렵다.
어쨌든 고부간 갈등이 급기야 아들부부 동침방해로까지 이어졌고 권신의 딸로 귀하게
자란 며느리가 친정으로 돌아가서 이혼당한 뒤로는 소문이 험악하게 나기 시작한다.
딸자식이 이혼이라는 망신을 당한 권람 입장에서야 더 참을 필요가 없어서
'남이가 친어미와 인간으론 차마 못할 금수 같은 짓을 하느라 내 딸을 쫓아냈다'는
말을 남이의 친척에게까지 한다.
역모사건때 남이의 주변인물이 줄줄이 엮였는데 친한 친척이라서 꼼짝없이 같이
죽을 처지에 있던 사람이 전에 권람에게 들었던 남이 모자에 연관된 추문을
고하면서 '그런 추문을 듣고는 남이와 교류를 끊었다'고 발언함으로써
권람이 최초에 발설했다는 이 추문이 공식적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남이의 죽을 죄상에
추가되는 대신 이 사람은 연좌를 면하고 살아남는다.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역적사건 이후 남이의 여러 명의 첩들은 다른 역적 처자들처럼
신하들에게 분배되지만, 남이의 어미는 특이하게도 저자거리에서 찢어죽이는
엄청난 형벌을 받는다.
죄목은 '국상 중에 고기 먹었고, 아들은 대역죄인에다 모자가 윤리에 어긋나는 금수같은
짓을 했다'는 거다.
세조시절에는 남이가 어미를 뵈러 간다고 해서 준마를 하사할 정도로 인정받던 효성이었는데
일단 권신세도가와 관계가 어그러져 역적으로 비난받자 인간으로서 받을 최악의 모욕의
대상으로 전락한 셈이다.
딸이 소박맞은 권람의 복수가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고 본다.
유자광이나 예종 입장에서야 남이를 처치하기만 하면 정권 안정이라는 목적은 달성되는 거니까
이런 과잉수까지 둘 필요는 없다.
이혼당한 권람의 딸은 남이의 딸을 하나 낳았었는데, 이 딸은 한명회에게 노비로 분배되었다.
이후 예종이 신하들에게 '권람의 공이 크니 그 외손녀는 풀어줬으면 좋겠다'고 먼저 말을
꺼내고 결국 풀어줘서 권람에게 보내준다.
남이의 어미는 찢어죽이고, 남이의 딸은 역적의 딸인데도 노비살이를 면해준 극단적으로 이례적인
두 처사를 보더라도 남이의 처분에 관련된 권람의 발언권을 짐작할 수 있고
남이가 죽은 진짜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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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모 이후 안평대군의 가족들 [0] | covet 번호 205562 | 2008.05.01 조회 6495 | 추천 0
사진은 안평대군 집터자리의 현재 모습이다.
뒤에 크게 나온 양옥도 안평대군과 연관이 없지만, 앞에 선 한옥도 안평대군 원래 집은
아니다.
원래 집은 역모사건이후 허물어 버렸으니.
안평대군이 남긴 건 일본에 건너간 몽유도원도 정도일 뿐, 역모로 몰려버렸으니
뭐 하나 남았을 리가 없다.
안평대군의 장남 의춘군 이우직은 단종과 동갑생이라고 전하는데, 그렇다면 9살에 장가가서
13살 정도에 은밀하게 목이 졸려 죽었다는 게 된다.
안평대군 본인이야 왕궁에 안 부러울 궁녀집단을 거느리고 마음대로 그 나이대로 살다
갔으니 그깟 무덤이야 없은들 뭐 대수겠는가마는,
십대에 죽은 아들 의춘군도 그렇지만, 나중에 공신 권람에게 노비로 하사된 안평대군의
딸은 만약 그때까지 아비 의춘군이 살아있었다 쳐도 16세밖에 안 될 무렵이니
이 딸이야말로 아무리 나이를 올려잡는대야 이제 제 손으로 숟갈 잡고 밥이나 떠먹으면
다행일 나이겠다.
의춘군의 부인은 먼저 관비로 배치되었다는 기록은 있는데, 역적 처자들의 경우 일단
관비로 돌렸다가 권신들에게 나누어줄 때는 원래의 신분이 아닌, 어디의 관비 아무개라는
식으로 신분세탁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후 추적이 어렵다.
이 어린 아이와 같이 권람에게 분배된 관비가 모친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아이만 이우직의 딸이라고 표시했으니까.
의춘군의 딸은 나이도 나이겠지만 이름부터가 눈을 끈다.
無心이라는 불교식 이름을 봐도 집안 다 망한 뒤에 여자들이 막막한 마음을
자기들 자유로 표현해서 붙여준 이름이지 싶다.
하기야 안평대군도 일찌기 불교에 심취해서 부모 형님이 죽을 때마다 불공을 하다가
불공해도 가족이 자꾸 죽어 지쳤다면서 사이 서먹하던 부인이 죽었을 때에야
불공을 접었다는 기록이 있다.
역적의 처자를 분배받은 공신들은 종으로 부리기도 하고, 명목만 노비고 실제로는 외가에
맡겨놓고 봐가면서 자신이나 친족이 첩이나 본처로 맞기도 했다고는 하는데,
종친 출신으로는 특이하게 무심이라는 이름을 받은 이 딸은 너무 고위급이라
아예 평생 결혼 못했을 확률이 높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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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 [1] | covet 번호 199658 | 2008.04.18 조회 5979 | 추천 1
효령대군하면 형님 양녕의 뜻을 받아 충녕에게 양보하고 절에 들어갔다는 걸로 유명한 양반이다.
그런데 사실 이 양반도 양녕 못지 않게 재미있는 양반인데
덜 알려졌다.
역사에 아직 양녕이 짱짱하게 세자자리 지키고 있을 무렵에 시중에 동요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다릿목에서 아이들이 모여 공놀이를 했는데, 아마 당구나 쿠션볼처럼 공 여러 개를 가지고
공 때리기 놀이를 했던 것 같다.
주상 공, 충녕군 공, 효령군 공을 정해놓고 놀았는데, 공 하나가 다리 밑으로 빠지면 뭐 이럴 수도 있겠지.
"효령군 공이 빠졌네." ㅎㅎㅎ
하필 지나가던 효령대군의 유모가 들었다는데, 진짜로 하필 그 순간에 지나간 건지
아니면 며칠 전부터 주위에서 정탐하고 있었던 건지는 모른다.
어쨌든 효령군 유모는 자기 젖아들을 물에 빠졌다고 노는 녀석들을 쫓아가서 다 잡아넣었다.
자고로 왕족의 유모는 친어머니보다 더 가깝고, 친어머니가 못하는 일까지 다 해주는
한 마디로 젖아이를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존재들이다.
동생에게 지고 다리 밑으로 떨어진 격이 된 효령대군 자신의 진노도 어느 정도 섞였을지 모른다.
어찌 되었든 중국, 한국에선 정치적 변동이 애들 노래, 즉 동요로 예고되곤 하는 법이라서
이 사건도 보고가 된다.
하지만 태종은 애들 장난인데 뭘, 하며 풀어줘버리고 만다.
이때, 이미 양녕, 효령, 충녕은 20세 전후로 한창 날카로운 청년기였다.
충돌을 피하고 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몇년 뒤 그 노래처럼, 양녕은 아예 없는 공이고, 효령은 아우에게 밀려 다리 밑창으로 빠졌다. ㅎㅎㅎ
그리고 그 노래의 속뜻을 세월을 앞서 읽었던 유모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효령대군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종조에 들어서서 양녕이 계속 말썽피운 거야 유명하지만, 효령도 공손하지는 않았다.
효령이 상소당한 경우는 감히 궁중의 간택절차를 자기 아들 혼사에 흉내냈다는 거다.
어느 처녀와 혼담이 오가면 매파가 오가고 사주단자가 오가는 정도라서
처녀 얼굴은 혼삿날에나 보던 사회에서 효령은 아들 신붓감으로 거론된 처녀를
집으로 불러서 자신이 선을 본다.
처녀를 불러오는 거도 파격인데, 얘는 안 이쁘니까 반품, 어디 쌈박한 애 없냐,
해서 부친상 입은 누구네 딸이 이쁘단 소리에 걔 데려오라고 한다.
부르는 넘이나 부른다고 대령시키는 년이나
처녀 어미는 얼른 딸의 상복 벗겨 고운 옷 입히고 화장시켜 선을 보였다.
사헌부에서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서 왕궁에서나 하는 간택을 어찌 일개 종친이 흉내를
낸단 말인가, 이는 임금을 우습게 아는 짓이다, 연일 난리가 났다.
하긴 차라리 양녕처럼 계집질하는 건 임금 권위하곤 상관이 없다.
세종은 이어지는 상소에 결국 벌컥 화를 내고 만다.
니네들이 옹졸해서 임금의 형제는 어떻게든 벌 줄 궁리만 하고,
임금의 아들은 뭔 잘못을 해도 다 봐주니 이래서 어찌 나라 꼴이 되겄냐, 이 논리셨다.
그런데 실록에 보면 신하들 상소가 좀 야박한 거 같아도 틀린 경우는 없다.
세종 승하 후 단종 시대에 양녕, 효령이 수양대군 왕위찬탈에 찬동하는 입장을
보인 거 보면, 자신들을 감싸줬던 아우가 그렇게나 보위에 앉히고 싶어했던 단종을
폐위시킴으로써 아우의 은혜를 묘하게 갚았다는 거다.
사진은 옛 혜정교 근처 교보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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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족결혼의 나이차이 제한은 6살까지 [1] | covet 번호 199597 | 2008.04.17 조회 5885 | 추천 0
일본 왕족들은 중세 이후 권력 없이 가난해서 결혼이 힘들어 독신으로 늙었다는데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말이 종친이지 좀 아랫대로 내려가면 고생이 마찬가지였다.
벼슬길은 막히고 남자건 여자건 평생에 짐은 무거우니 배우자 찾기가 고역이었다.
양반사돈집도 받들기 어렵고 경제적 원조까지 해줘야 할 종친사돈은 거북했다.
즉 혼담 넣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이를 반영하는 것이 성종조 기록에 있다.
당시 국법에 종친 혼사에 나이 차이가 6살 이상인 경우는 금지라는 조항이 있었다.
이 조항을 이용해서 양반들이 종친이 혼담을 넣으면 댁의 자제와 우리 애는 나이 차이가
6살 이상이라 안 된다고 아주 편리하게 거절들 했던 거다.
특히나 가난한 종친들이 혼담 맺고 싶어하는 벼슬아치 고관들은 이를 아주 적극 활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성종에게 종친들이 몰려가서 이 법을 없애든가, 아니면 고관들 자녀의 나이를
아예 국가에서 관리하는 장부에 올리자고 건의했다.
오죽했는가면, 종친과 약혼하고도 은근슬쩍 뒤로 다른 혼처를 찾아서 딴 데로 결혼하는
고관집안도 많았던 거다.
종친들은 이런 부부는 법으로 이혼시키라고 분노를 토할 정도였단다.
성종의 대답은 나이 차이 제한을 폐하면 강보에 싸인 애들을 혼인시키려는 자들까지
나올테니 안 된다는 거였다.
하기야 왕자공주들이 10대 초반에 결혼했으니 종친들도 그 분위기였다 치면
6살 나이 차이는 필수였는지도 모른다. ㅎㅎㅎ
그림파일은 종친부.
달바라기 덕흥대원군의 아들(선조)이 왕이된걸보니..덕흥대원군은 힘이있는 종친이였나보죠..ㅋ 08.0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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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의 우직한 아우 사랑 [1] | covet 번호 204075 | 2008.04.29 조회 6146 | 추천 2
문종은 우애가 지극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우애를 공평히 받았던 형제들 중 문종 사후에 은혜를 배반한 아우들이
더 많긴 했지만.
친동생들뿐만 아니라 첩동생들까지 끔찍히 챙기셨는데,
본인도 젊으신 나이지만, 부왕 세종 승하 이후 첩동생들이 어린 애들이
많았는데 친자식 돌보듯 물심 양면으로 정성을 아끼지 않으셨다.
신빈 김씨 소생으로 담양군이라는 왕자가 있었는데, 이 첩아우를
장가보내려고 준비 중에 덜컥 애가 죽어버렸다.
열두어살 된 애가 죽었으니 물론 슬프기야 하겠지만, 문종이 뼈저리게 서러워한 것은
조금만 있다 장가나 들어보고 죽지 그랬냐, 불쌍한 것, 쯤 되겄다. ㅎㅎㅎ
내 혈육이 끔찍하게 이뻐서 남의 혈육은 못 살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장가도 못 들고 요절한 불쌍한 아우를 생각하는 우애로 조정에서 며칠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납채라고 신랑 사주단자를 신부집에 보내는 의식 직전에 담양군이 죽었는데,
문종이 운 때린 건, 애가 그래도 육례를 차곡차곡 치르다 중간에 죽었는데
그 약혼녀가 상복 좀 입어주면 안 될까? ....였다.
물론 담양군의 친어미, 친형제들도 살아있지만, 그래도 어른도 못 되어 보고 죽은
불쌍한 내 아우, 정혼녀가 상복 입고 장례라도 좀 돌봤으면 싶은 욕심이었다.
담양군이 12살이면 신붓감도 딱 그 정도일텐데, 아우사랑에 세상 모르는 양반집 어린
계집애 하나를 평생 과부로 만들고 싶은 욕심인 거다.
그렇지만 납채를 안 했으니 혼인 완료가 아닌데, 상복 입게 할 도리가 없는 거다.
나중엔 이런 말씀도 하셨다. '상복 일단 입었다가 벗은 다음에 딴 데로 시집가게
허락해준다면, 걔 상복 입히게 해줄래?'
신하들이 당연히 반박한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상복이 장난이오?
그 옷 입으면 그 계집애는 담양군 부인으로 딱 박히는 건데 나중에 어딜 시집을 가요?
달거리도 안 한 나이에 평생 수절해야지?!!
사실 실세왕족 혼사에 흔히 그렇듯 신붓감 친정아비가 조정에서 세력도 좀 있고,
처세술도 좀 있어서 이 싸움은 예절논쟁으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문종이 이길 싸움이
아니었다.
신하들은 처음에는 문종 뜻대로 상복 입히는 쪽으로 기우는 듯 하다가 곧
예법에 안 맞는다고 맹반격을 펼친다.
이제 오줌 겨우 가리는 이 계집애한테 담양군 상복을 입힌다 치고,
그럼 얘가 담양군 부인이 되는 건데, 그럼 얘한테 평생 왕족부인네 예우를 해주고,
얘 죽은 다음엔 왕실 사당에 넣어줄 겁니까, 전하?
문종의 무리한 아우사랑이라는 인정과 신하들의 논리라는 이성이 맞부딪힌
기묘한 며칠이었던 것 같다.
문종 사후, 좀 지나 세조가 즉위하면서 문종의 혈육들은 일제히 몰락하지만,
담양군쪽 형제들이나 담양군의 장인이 될 뻔한 남경우는 줄을 잘 타서
세조 편에 선 덕에 대대로 번창했다.
그림은 납채 묘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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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평대군 부인 신씨-온천 한번 하려다 혼쭐난 여자 [1] | covet 번호 204070 | 2008.04.29 조회 6115 | 추천 0
세종의 며느리로서, 친정아비는 좌의정이었고, 남편 되는 광평대군은 세종의 총애가
끔찍히도 컸던 귀한 분이셨다.
다만 결혼하고 10년도 못 되어 남편 광평대군이 요절하는 바람에 스무살 남짓에 과부가
되고 만다.
지극히 높으신 왕족 부인이시고 하니 무슨 큰 흠이 있는 건 아니고,
온천욕 한번에 조선왕조실록에 친정아버지와 함께 죄인으로 취급받은 기록이 남은 분이다.
과부생활 10여년에 나이 많아야 서른 남짓이고, 왕족의 과부생활이야 죽을 때까지 끝이
없는 거니 심화성 병도 생길 만 하다. 신병이 있으시다고 온천행을 하신다.
단종조에 이 부인께서 이름난 온천을 누비시다 종래 왕족들이 흔히 가시던 온양온천보다
더 멀리 동래온천까지 행차하셨다.
당시 부인네들 심화병 푸는 데야 여행이 제격이고, 여행의 구실이야 신병치료를 위한 온천욕,
내지는 조상님네 은덕 비는 불공으로 절에 올라가는 정도였는데,
왕족부인에게는 이 어느 쪽도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모범 보여야 하니까.
이 젊은 과부께서는 도가 좀 지나치셨던 것이 동래온천에서 몇달을 머무르시고 만 거다.
당시에 무슨 호텔이나 모범음식점이 있던 것도 아니니까 높은 분들이 지방 내려오시면
그 고을에서 일행의 숙식이며 각종 편의를 보살펴 드려야 하니까 그 비용이 엄청났고,
또 이 동래온천이란 곳이 가까운 해안가에서 허락받고 영업하던 왜인들이 정기적으로
온천욕하러 찾아오는 곳인데 이 부인이 눌러앉는 바람에 언제나 가시려나 하고
왜인들까지 근처에 눌러앉아 순번 대기하고 있다는 거다.
조선조에 혼탕이야 안 될 말이니. ㅎㅎㅎ
조정신료들이 어린 단종에게 상소하기를 부인네가 문간 넘어 멀리 다니는 것도 흠이지만,
왜인들이 이걸 보고 본국 가서 뭐라고 소문을 내겠느냐, 나라 망신이다, 하필 동래온천에
여자가 왜 가느냐, 부인의 아드님이야 아직 어리니 가장의 위엄으로 어머니를 말릴 수
없었다쳐도 친정아비 신씨는 딸 단속을 게을리해서 조정과 왕실에 누를 끼쳤으니
자그만치 사헌부에 넘기십시오! 가 나와버렸다.
온천욕 한번에 친정아버지 국문당하고 파직당하고 시아버지 세종이 살아계셨다면 비빌 언덕이라도
있겠지만 막막했던 신씨는 놀라서 병이 났다고 드러눕는다.
이때 나선 것이 시아주버님 수양대군인데, 단종께 상소 올리기를
'광평대군 요절했을 때 울 아버지 세종대왕이 얼마나 애통해하시면서 수양이 네가 장차
광평이 어린 아들을 책임지고 돌봐주거라 했는데, 지금 이 불쌍한 과부를 닥달해서
병이 더 커졌다고 하니 이 과부가 덜컥 죽기라도 하면 세종대왕께서 뭐라시겄습니까?'
말인즉 '젊디 젊은 여자가 수절하고 참고 사느라 심화병이 생기면 온천이라도 해야지
이렇게 몰아쳐서 네 숙모 죽으면 조카 네가 책임질래?' 이거였다.
어린 임금 단종조에 신하들이 서슬푸르게 왕족들 기강을 잡던 시절의 일인데,
수양대군이 강력히 변호한 덕에 부인과 친정은 무사했고, 나중에 세조조부터
연산군을 거쳐 나중에는 중종조에 이르기까지 광평대군 집안의 위세와 부유함은
각별했다고 한다.
다만 젊어서 온천 때문에 조정에서 혼난 이 부인은 모범적으로 수절은 했으되
참고 사느라 쌓은 시름을 아들까지 요절하고 나선 이번엔 불공으로 푸느라고
며느리와 함께 머리 깎고 중이 되느니 재산을 절에 몽땅 시주하느니 해서
두어번 더 조정에서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그만큼 과부로서는 많이 참고 참으며 정절을 지켰다는 반증이 되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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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인간미 깊었던 영조대왕 [4] | covet 번호 204023 | 2008.04.28 조회 4355 | 추천 1
영조대왕하면 외아들을 뒤주에 넣어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 인식들 한다.
그 전에 사도세자가 과연 어떤 인간이고, 당시에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었나 되짚을 필요가 있다.
어느 정도였길래 가족 중에 사도세자를 감싸고 구명하려던 게
외아들 정조뿐이었을까?
만약 영조가 사도세자를 제거하지 않아서 사도세자가 왕으로 즉위했다면?
이 부분에서 광해군, 연산군이 폐위될 때 그 세자들이 어찌 되었나를 생각해볼 일이다.
사도세자는 당시 권신들과 최소한의 공감가는 관계도 형성하지 못했다.
사도세자의 정치적 방향은 자기 친아버지 영조대왕의 정권 출범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거였다.
내 생각엔 사도세자 즉위시키면 잘 되야 광해군, 잘못 되면 연산군, 모나 도나 폐위였을 거다.
그랬다면 정조는 즉위도 못 해보고 세자시절에 폐세자였겠지.
정조도 물론 권신들과 긴장관계였지만, 먼저 책잡힐 짓은 안 했고, 영조의 왕권성립에 도전하는
미련한 짓도 안 했다.
사도세자를 죽이고, 이어 어린 정조의 권위에 위협을 주는 첩손자들을 귀양보내 병으로 죽게 한 부분을
제외하면 영조의 정치는 비교적 온화하다는 인상을 준다.
왕 치고는 말이다.
차세대 왕위계승을 안전하게 하는 최소한의 권력구도 정리만 제외하면 영조의 평소 처신은
태종보다는 세종에 더 가깝다.
영조가 관절병인지 팔이 아플 무렵에 신하가 아뢰기를 고양이 가죽을 감으면 통증에 좋답니다
했단다.
당시에도 고양이는 신경통 특효약이었던 것 같다. ㅎㅎㅎ
영조의 대답은 '궁궐에서 고양이 지나다니는 걸 보긴 봤지만, 나 편하자고 불쌍한 짐승
죽여서 그 껍질 감겠냐? 냅둬라' 셨다.
백성에 대한 배려는 요괴소동에서 나온다.
지방관리 하나가 자기 관할에서 요괴가 나왔다는 상소를 올렸다.
여덟살된 계집애가 애를 낳았으니 요괴라 이거다.
요괴라면 모자를 함께 처형하는 게 위정자의 도리이며, 자칫 요괴 출현 자체가
정치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이때 영조는 그 관리를 비난하면서 차근차근 진상을 조사하라고 지시한다.
"내 덕으로 요괴도 이기겠다"는 게 소신이셨다.
요즘으로 치면 호르몬 이상인지 유난히 성장이 빨랐던 백성의 계집애를
그 어미가 관리를 잘 못해서 지나던 사내가 가끔 꼬여서 동침했다는 게 곧 밝혀진다.
이러면 그 계집애가 요괴까지는 안 가고, 풍기를 문란하게 한 죄인 정도로 정리가 될 일이다.
영조대왕은 계집애와 상대 사내, 그리고 딸 감독을 게을리 한 계집애의 어미를
풍속죄인으로 판결해서 각각 따로 귀양보낸다.
계집애가 낳은 사내아기도 따로 격리해서 보내는데, 풍속죄가 아기에게까지 미치는 경우는
드물지만 이 사내아기도 보통보다 성장이 빠른 비슷한 기형이었기에 피할 수 없었던 판결 같다.
산모 계집애와 그 사내아기는 어린 나이에 낯선 땅에 귀양가서 고생한 탓인지 어른이
되기 전에 곧 죽었다고는 하지만, 거기까지야 어쩔 수 없는 일인 듯 하고,
영조대왕 아니었으면 당장에 모자가 요괴라고 그 동네에서 바로 죽임당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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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와 아들의 싸움에서 아들 편을 들었던 선조 [6] | covet 번호 207926 | 2008.05.06 조회 7925 | 추천 1 선조 35년에 선조의 아들 정원군과, 선조의 형수 하원군 부인 사이의 집안싸움에서 선조 임금이
아들 정원군의 편을 든 것으로 악명높은 사건이다.
그리고 성리학이니 뭐니 해도 실세구도 따라서 사람이 몰린다는 게 옛부터 이 땅의 진리였음을
보여준다.
조선이 성리학에 근간을 둔 만큼, 군신, 부자, 친척간 다툼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고,
만에 하나 발생하면 어린 자, 서열이 낮은 자가 책임을 몽땅 뒤집어 쓰고 귀양을 가든가
대대로 족보에서 파이고 벼슬길이 막히고 등등 보통 양반이나 서민 같아도 큰일이 난다.
그런데 임금의 과부 형수 하원군부인(백모)과 임금의 아들 정원군(조카)이 종놈들 싸움에 휘말려서
급기야 하원군부인이 정원군의 집으로 납치 감금되었다가 자정도 넘은 새벽에 풀려난 일대 사건이었다.
본래 하원군은 선조의 형님으로 다 같은 덕흥대원군 아들인데,
명종 사후 후사를 이을 재목으로 형님 제치고 아우인 선조가 선택되었었다.
임금의 형이란 신분 자체가 편한 자리가 아닌데 하원군도 아우에게 밀린 탓인지 원체 성격이 그런지
탄핵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하원군 사후에 남은 하원군 부인은 남편집안 세도도 별로에다가 부인 본인은 재취로 들어온
처지라 하원군의 아들들에게서 살뜰한 보살핌은 못 받았던 듯,
남편 사후 혼자 하원궁 지키며 시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돌보고 살았다.
이런 부인의 집 앞으로 시조카뻘에 해당하는 정원군의 종놈들이 기생을 끼고 희롱하며
지나가다가 부인의 집 종놈들과 시비가 붙었다.
여기까지는 종놈들 시비였는데, 임금의 아들로서 정원군 세도가 있었던지라 그 종놈들까지
나이든 과부가 혼자 집 지키는 하원궁을 우습게 봤는지 집안으로 들이닥쳐 세간 부수는 싸움이
붙어버렸다.
하원군 부인으로서는 황당했을 터인데, 상대는 세도 당당한 임금의 아드님 댁 종놈들이니
집안 종놈들이 맞아죽든 말든 부인은 안방에 피해서 나 죽었소 하고 엎드리고 있었다면
현명한 처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이면 성질이 있지, 조카의 종놈들이 백모의 집안에 쳐들어오는 판이 되었으니
부인이 야단치려고 나서 버렸다.
그리고 어찌된 건지 진상이야 폭행사건의 경우 그렇듯 설왕설래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원군의 종놈들은
애초에 다툼이 있던 하원군의 종놈 플러스 하원군부인과 그 시녀들까지 정원군의 별저에다 가두어 버렸다.
집에 집어넣고 대문 잠궈버렸다는 게 되겠다.
역시 혈육이 제일이라고, 부인의 친아우는 이 난리를 듣고 제일 먼저 달려왔고, 이어 부인의 의붓아들들인
하원군의 아들들도 달려왔다.
닫힌 대문 상대로 호통도 쳐보고 연좌농성도 하고 다른 집에 있던 정원군에게 찾아가서 빌어도 보고 했는데,
정원군이 문 따준 시간은 자정도 넘었고 문 열어보니 대문간에 부인과 시녀들이 서있었던 거다.
이때 어떤 이는 정원군이 깜짝 놀라 부인을 위로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경박하게 웃으며 부인과 하원군쪽 아들들에게 훈계하려고 했다고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부인이 '내 하인들이 나를 여기로 잘못 모셔왔는데 들어와보니 나갈 수가 없었다,
내 잘못이다' 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부인이 노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부인일행은 돌아가면서 정원군쪽 하인 하나를 잡아갔다가 나중에 풀어주었다.
그리고 진상이야 양측이 설왕설래하겠지만 조선이라는 사회에서는 조카의 종놈들이 백모의 집에
난입하고 백모를 잡아다 조카의 집에 감금했다 새벽에 풀어주었다면,
저지른 건 조카의 종놈들이라도 죽일 놈은 주인인 조카 정원군이 되는 게 상식이었다.
당연히 선조에게 아들 정원군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올라갔는데, 조선조에 종친들 비리나 태만으로
고발된 수많은 경우는 이 경우에 비하면 애들 장난인 셈이었다.
하지만!
임금 세조는 과부 재취 형수 편을 들지 않고 주변인물들을 하나씩 불러다 친히 심문하신다.
우선 하원군의 아들들과 하원군 부인이 친모자가 아니라는 점이 감안되어야 한다.
임금의 얹짢은 기색을 읽은 하원군 아들들은 계모가 경박해서 자기 하인이 잡혀가는 꼴을 보고
스스로 쫓아가서 그 집에 들어갔고 정원군이 나중에 이를 알고 크게 놀랐다는 식으로 고했다.
그리고 임금은 진술을 마친 하원군 아들들에게 귀한 표범모피를 하사했다. ㅎㅎㅎ
이어 임금이 이르시기를 , 하원군 부인은 덕흥대원군과 남편의 신주를 버려두고 밤에 집을 뛰쳐나갔으니
혼령을 놀라게 한 잘못이 크다고 하셨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후 처리과정에서 하원군 부인은 삶의 명분으로 삼고 있던 덕흥대원군 신주를 임금 명으로 다른 집안에
넘기게 되고, 친누이 편에 서서 사태에 개입했던 부인의 아우는 몇년 조정에서 찬밥을 먹었다.
정원군은 무사히 이 사태를 빠져나와 집안을 보전했고, 후일 그 아들이 인조임금으로 등극하신다. ㅎㅎㅎ
사관은 성리학윤리의 막장을 판 이 세력행사를 못마땅하게 여겨서 이후 선조 아들들의 세도자랑을 기회
있을 때마다 역사기록에 고발하고 있다.
사관은 하원군부인에 관해서는 드물게 여자를 감싸주는데, 워낙에 정원군과 선조의 처사가 괘씸해서였을 것이다.
하원군부인이 밤에 집을 나선 것은 잘못이지만, 여자가 글을 몰라 실수한 것일 뿐 정조를 해친 것은
아니고 글깨나 읽은 임금의 아들 정원군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임금의 사랑을 믿고
교만해서 그 종놈들까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논하고 있다.
사관이 선조에 대해 논한 바는, 하원군부인은 원래 과부라, 과부 시어미는 제사를 받들 책임이 없고
며느리들이 제사 차리면 앞자리에서 절만 하면 그만인데도 그간 제사를 모셔왔다 (아들들이 나쁜 넘들이란
소리의 간접화법 되겄다. ) 그런 부인에게 위패를 빼앗고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 처사는
부인을 집에서 쫓아낸 것과도 같다,
형이 생전에 쫓아내지 않았던 형수를 아우 선조임금이 쫓아내다니 이건 도리가 아니다. 등등.
이런 정원군의 아들로서 후일 등극한 인조로서 편한 생활은 아니었을 것이다.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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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초하루 깽판친 조선 왕족3총사 [2] | covet 번호 204072 | 2008.04.29 조회 4667 | 추천 1 신의군 : 세종의 5촌 조카. 방계지만 정부인 소생.
혜령군 , 온녕군 : 세종의 배다른 동생들. 각기 다른 후궁 소생.
왕실에 자손이 많으면 좋고 나쁜 사연도 많기 마련인데, 이 3명의 종친들은
세종에게 아주 가까운 사이면서 세종에게 집안망신이라는 고민거리를 안겨준
만년악동들이다.
비록 세종의 부왕 태종이 형제들을 좀 때려죽였을지언정 능력 하나는 걸출한
카리스마였는데, 이 3총사는 세종에게 신하 보기 민망하다는 지극히 원초적인
고민거리를 안겨 주었다.
세종 개인에게 있어 더 큰 망신거리가, 형제 때려죽인 친아버지냐, 아니면
이 3총사 같은 평생 끊이지 않는 소소한 악동짓거리냐, 현대인으로서는 판단이 아주 어렵다.
어느 설날, 지극히 엄숙하고 경사스러운 새해 첫날 화려한 정장을 하고 조정이며 종친이 모두
모인 그 날에 이 3총사가 치고 차는 싸움을 벌였다.
혜령군, 온녕군 이 두 명의 아저씨들이 뭔 연유인지 신의군이 쓰고 있던 모자를 때려서 상투를
흐트러지게 만드니까, 이 조카 신의군이 아저씨 온녕군의 모자를 발로 차서 벗겨 버렸다. ㅎㅎㅎ
일반양반가에서도 망신스러울 일을 종친끼리 벌여서 조정에 소문 좍 나고 상소가 올라왔다.
죄는 아저씨를 팬 조카에게 있다고 신의군을 귀양보내지만, 어느 결에 슬쩍 불러들인다.
사실 신의군이 그쪽 집안에선 제사 지낼 장손이었던 거다.
세월이 흘러 신의군이 이번엔 세종도 덮어줄 수 없는 대형사고를 치고 만다.
궁녀한테 관심가지는 게 조정 주변 나으리들의 고질병인데, 시녀 하나가 아프다고 휴가나가서는
신의군 저택에서 사내들과 어울려 연회를 벌이고 놀았던 거다.
임금 모시는 시녀와 사사로이 만나 시녀에게 술시중을 들게 만들었다면 역적죄에 버금가게
참형에 처해질 죄인데, 세종도 걔네 집안 제사지낼 애니까 죽이면 되겠냐고 덮어주려 했지만
결국 조정 여론에 밀려 이번엔 영구히 추방하고 왕실 족보에서도 파버린다.
조선시대에 궁녀와 친한 건 역적죄에 버금가지만 사실 임금이 남자를 죽이네 살리네 벌을
주려고 한 적은 없다. 신하들이 죽이려고 칼춤을 춘 경우가 대부분이지.
임금이야 궁에 가득한 여자 중 자기가 손댄 여자는 다 아니까 나머지 여자들이야 그냥
계집종일 뿐이라 나중에 궁살이에서 풀려나 누굴 만나 살건 개인적인 감정은 없는 셈이다.
외려 엄벌을 주창했던 신하들 쪽이 궁녀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ㅎㅎㅎ
3총사 중 나머지 세종의 배다른 동생들인 온녕군과 혜령군은 이런 대형사고는 안 쳤지만
평생 소소하게 세종에게 망신을 꾸준히 주었다.
종친들이 매일 출근해서 학문을 연구하는 제도가 있는데 결석률이 종친 중 제일 높았다든가,
나들이할 때 왕자로서 위엄을 갖추지 않고 덜렁 편안하게 하고 다니는 바람에
신하들한테 응당 받을 인사를 못 받았다든가.
이 경우는 인사 안 한 신하도 곤장맞을 죄인이고, 행차가 경솔했던 왕자도 돌아가신
부왕 태종 위신 상하게 한 불효죄가 있다.
세종은 숱한 첩동생들이며 첩아들들이 조정 신료들에게 작은 무시라도 안 당하게 하려고
상당히 신경을 썼지만, 이런 도로변 불상사는 가끔 보고가 되는데, 가장 원조가 이 혜령군, 온녕군이었다.
오죽하면 실록에 세종께서 '그 둘은 성격이 원례가 그 모양이라 포기했으니 할 수 없다 쳐도'
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신다.
성군도 일가친척 때문에 세간 신경쓰기는 보통 인간과 매일반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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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과 복잡했던 기생 탁문아 [0] | covet 번호 204078 | 2008.04.29 조회 15206 | 추천 2 조선시대 유명한 기생이 몇 있는데, 이들의 이름은 역사에도 기록이 된다.
여자 이름이 문학쪽이 아니라 역사에 기록된 건 추문이라는 거다.
기생의 경우에는 여러 남자를 전전하다 사건이 생기기도 한다.
탁문아라는 기생은 춤이 뛰어나 왕궁 잔치에서도 춤을 추었고 글도 잘 썼던 것 같다.
남이 장군의 첩으로 지내다 남이가 역적으로 처형된 뒤에 관비로도 갔다가
종친 강양군의 첩으로 정착해서 딸을 낳아 왕실족보 선원록에 자기 딸 이름을
올리는 영광도 얻는다.
(강양군은 앞서 소개한 문종의 어린 아우 담양군의 양자로 들어간 왕족이다.)
그런데 시절이 성종조에 해괴한 고발이 제기된다.
왕족의 첩으로 아기씨까지 낳은 멀쩡한 작은아씨 탁문아를 조정의 권신 윤은로라는
자가 강탈했다는 거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중전(나중의 중종의 모후)의 아우 윤은로는 강양군의 첩 탁문아를
빼앗고, 성종의 매제 당양위 홍상은 다른 종친의 첩으로 역시 유명했던 기생 연경비를
빼앗았으니 처벌하라는 이야기였다.
성종 입장에서는 처남, 매제가 한꺼번에 걸려든 사건인데, 당사자들을 불러 물어보니까
남자들은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기생첩들은 뺏고 빼앗긴 게 맞다고 반대진술을 했다.
남자들 논리는 종친들이 데리고 살던 기생첩들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버린 다음에
이 세도가들이 이 여자들 주워다가 데리고 살던 거니까 흠이 없다는 거였다.
애초에 소문이 나기를 나으리들에게 소실감을 중매서던 작자에게 '내가 아무개
대감에게 첩을 빼앗겨서 새 첩을 구하는 중인데 마땅한 여자 없냐?'로 이야기가
간 게 소문이 퍼진 거였다.
신하들 보기에는 아무리 첩이라지만 유부녀를 세도를 앞세워 빼앗은 죄, 특히나
아무리 어미가 기생에 관비에 역적떨거지 출신이라도 왕실족보에 이름 올라간
딸까지 낳은 탁문아를 빼앗은 죄는 용서가 어려웠다.
하지만 성종 입장에선 털어봐야 좋을 게 없어서 남자들 편을 들어서 사건을 덮는다.
신하들이 '탁문아가 술술 반대증언하는데 왜 안 들으십니까?'하자
'탁문아 말을 믿겄냐? 내 인척 말을 믿겄냐?"다. ㅎㅎㅎ
왕실의 사돈들이 종친에게 첩을 빼앗은 참으로 희귀한 사건이다.
하기야 빼앗았다기보다는 세도가들이 유명한 기생, 요즘으로 치면 은퇴해도 유명한
연예인 한번 데리고 놀려고 종친들에게 기브 앤 테이크로 뭔가 건네긴 했을 게다.
세월이 흘러 몇년 뒤 탁문아는 다시 한번 역사에 등장한다.
이번엔 새 남편 윤은로를 고발한 거다.
윤은로와 탁문아는 그간 몇년 살다가 더 젊은 첩이 생기며 탁문아가 이번엔
진짜로 이혼당하고 버림받는다.
문제는 재물욕심 많던 윤은로가 탁문아에게 주었던 집을 도로 빼앗으려 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제는 이름을 경이라고 개명한 과거의 탁문아는 조정에 고발한 사유를 애절하게
호소한다.
윤은로는 방납이라는 폐습을 활용해 재산을 모았다.
이는 지방에서 특산물을 바치긴 바쳐야 하는데 여러 사정으로 어려울 경우, 한양에서
그 특산물을 손에 쥔 자가 대신 바치고, 그 댓가를 2, 3배로 받는 희안한 장사였다.
탁문아가 고소한 바는, 윤은로가 이렇게 방납해서 번 돈으로 산 집인데, 방납에 들어간
밑천이 내가 노비 신분 면하려고 지불한 몸값이다, 고로 다 내 돈인데 윤은로가 치사하게
나중에 집 빼앗으려한다는 거였다.
성종 입장에선 차라리 탁문아가 어우동처럼 화냥질을 했으면 목 잘라버리고 끝내겠는데,
어째 등장할 때마다 왕실 인척 망신시키는 짓만 하니 더 미웠을 거다.
윤은로가 했다는 방납이란 당시 교통사정상 수요가 있는 만큼 지탄도 받던 일이었다.
성종이 일단 탁문아 입을 막은 구실은 아무리 헤어졌어도 한때는 남편이었는데
그런 윤은로를 고발한 죄는 윤리에 어긋나니 투옥하란 거였다.
결국 윤은로는 무사하게 살아서 연산군조에는 자기 마누라도 조카뻘되는 연산군에게
상납했다가 나중에는 반정으로 진짜 조카 중종 앉혔다가 해서 끝까지 잘 살았다.
어찌 보면 기생 탁문아는 참 열심히 평생 살았는데, 이처럼 왕실과 마주칠 때마다
역적 떨거지로 관비 전락, 겨우 종친녀의 어미가 되고도 팔려가고, 나랏님한테 억울한
거 고소했다 거꾸로 감옥 가고 등등 악연이었다.
탁문아의 다른 남편이었던 강양군은 탁문아를 버리던 비슷한 시기에 새로 앉힌 첩이
은퇴한 궁녀 출신이라서 지겹게 탄핵상소를 받았지만 역시 무사히 지위 보전해서
임금 바뀌어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사진은 재현된 궁중무용 뉴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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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빈 - 얼결에 화장된 조선 세자빈 [7] | covet 번호 236881 | 2008.06.20 조회 13454 | 추천 5 사진은 그 무덤 도굴미수사건때 무덤 파헤친 사진.
공회빈은 죽은 뒤 누울 자리가 편치 않던 여자의 대명사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뒤 휘발유로 소각되긴 했는데,
공회빈이란 여자는 스케일 크게 왕궁과 함께 불 속으로 스러졌다.
공회빈 = 명종의 외며느리, 즉 대장금 나오는 중종의 손자며느리의 죽은 후 칭호.
애초에 간택에서 외척가문의 세도에 밀렸지만, 처음 정해진 세자빈이
딴 데도 아니고 배가 아픈 병이 있어서 신방을 치르기 곤란하다고 ㅎㅎㅎ
얼결에 대신 세자빈으로 책봉된다.
(최초의 세자빈 후보는 외척세도를 업고 있어서 외삼촌을 경계한 명종에게
이미 찍힌 상태긴 했다. ㅎㅎ)
그런데 정작 남편이 십대초반에 죽는 바람에 신방을 치렀는지조차 의문스러운 나이에
얼결에 왕실과부가 된다. ㅎㅎㅎ
명종은 친척 선조를 후계자로 삼았는데, 명종비인 대비께서 유언을 내려
공회빈이 비록 과부지만 평생 궁 밖에 밀려나지 않고 궁 안에서 살게 해달라고 요구했었다.
마침 선조는 적자도 안 태어나서 30여년 공회빈은 애기과부에서 중년여인이 되도록
대궐내 동궁을 꿰차고 살았다.
선조는 명종의 떨거지들에게 입장이 약해서 이 여자는 살아 생전 상당히 자기 뜻대로
하고 살았던 거 같다.
단, 너무 어려서 과부가 되어 그런지 욕심이란 남편 위한 불공을 계속 드리는 것뿐인데,
이게 조선사회, 특히 왕족에게는 굉장히 욕 먹는 일이지만 선조가 걍 묵인한 덕에
평생 나무아미타불을 외고 살았다고 한다.
하기야 신방 치를까 말까 한 나이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나가서 편하게 살지도 못하고
여자 몸으로 딴 데도 아닌 동궁을 차지하고 사느라고 친정식구 불러다 만나는 것도 꺼릴만큼
체통을 지키며 살았으니까 종교열에 빠질만 하다.
그런데 죽은 때가 임진왜란 터지기 직전이었다.
왕실장례가 기간이 긴 만큼 아직 무덤에 갖다 묻기도 전에 적이 상륙한다 해서
끌고 갈 수도 없는 이 시체를 임시로 궐 뒷뜰에 파묻자 했는데,
조선왕실의 관이라는 게 또 예사 튼튼한 게 아니라서 어지간한 인력으로는
움직이는 거도 못할 만큼 무거워서 난리통에 숙직하는 관원들 몇으론 어림도 없었다.
결국 관을 묻지도 못하고 얼결에 다들 피난을 했는데, 단종 생모 관이 바다에 버려져도
안 썩고 둥둥 떠다녔다는 말처럼 튼튼한 관이니 몇년 끄떡없었을지 모르는데
왕궁에 백성들인지 왜놈들인지 불을 지른 바람에 얼결에 관도 건물과 같이 불탔을 거다.
수도회복하고 돌아와서 궁중 여인네들 하는 말이 '좋게 생각하자면 얼결에 화장한
셈이 되었으니 평생 불공하시던 분께는 바라던 바일지도 모른다' 했단다. ㅎㅎㅎ
남편 무덤에 빈 관 합장해놨는데, 몇년 전 도굴미수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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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치품에 연관된 조선 임금 기록 [9] | covet 번호 221573 | 2008.05.28 조회 5858 | 추천 3 사진은 중국의 선잠단.
조선시대에는 메이드 인 차이나라면 각종 비단으로 대표되는 사치품의 대명사였다.
요즘하곤 180도 반대다
중국에는 정교한 무늬의 광택있는 비단 종류도 다양하고, 은, 황금도 많았다 여겼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중국과 연관있는 자들이 이런 사치품을 독점했던 것이다.
세종때 이런 일이 있었다.
명나라가 조선침략을 않는 대신 각종 물자에 공녀까지 수시로 요구했다.
위로는 사대부 처녀들, 아래로는 반찬 만들고 노래 부르는 종년들까지 여러 번 바쳤는데,
사대부 처녀들은 텃세에 대부분 제 명대로 못 살고 비명횡사했고
몇년 뒤 따라갔던 종년들만 수십명 중국사신을 따라 귀환했다.
상전인 사대부 공녀들 대부분이 중상모략당해서 매 맞고 고문받아 죽고
나머지 목숨 부지한 공녀들은 나중에 황제 죽을 때 순장당해서 교수형 당했다.
세종께서 다 헤아리시기를 이국에서 상전들이 비명횡사하는 거 보며 얘네가 얼마나
마음고생했나 싶어서 무명 몇필씩을 하사하셨다.
조선은 세금을 무명으로 받으니 임금께서는 각종 경조사에 기껏 하사하신대야 무명, 쌀, 콩이다.
당시 관리들 월급으로 쳐도 상당한 값어치기는 했다.
그런데 세종께서 하사하신 무명을 받은 이 종년들이 답례로 내어놓은 것이 각종 중국 호화비단이었다ㅎㅎㅎ
임금 체면이 있지,
주상께서 하사하신 건 무명인데 종년들이 바친 건 비단이라. ㅎㅎㅎ
이국 궁정에서 음모의 지뢰밭을 헤치며 구사일생하긴 했어도 결국은 사치품이 흔한 중국이라
중국에서 종살이를 하면 조선 임금께 바칠만한 비단도 지니게 되는 거였다 ㅎㅎㅎㅎ
종년들에게서 귀하디 귀한 중국비단을 받으신 세종,
되로 주고 말로 받아도 체통상 그러했으니 다시 답례품을 내리게 하신다.
근데 내려봐야 뻔한 게 쌀, 콩, 아니면 메이드 인 코리아 가내수공업 무명이었을 거다. ㅎㅎㅎㅎ
비슷한 경우가 인조때 강빈사건.
소헌세자가 요절한 뒤에 강빈과 인조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며
급기야 강빈이 온갖 욕 다 들으며 사약 받고 죽었는데,
뭐 조정 중신들이야 거의 '강빈을 폐서인시키실 수는 있어도 죽이실 수는 없습니다'
어떤 분은 '저를 먼저 죽이시고 강빈을 죽이십시오.' 하며 엄청난 방패노릇을 하셨는데
그래도 기어이 인조는 강빈을 제거했다.
그 동기 중 하나로 짐작되는 것이 강빈의 개인 재산이다.
청나라에서 볼모로 고생하고 왔다는 여자가 죽은 뒤 개인재산으로 남긴 게 황금 1백냥, 은 1만냥이었다.
1냥은 10돈, 37그램 정도다.
은 370킬로그램, 순금 4킬로그램 정도. 그 외 다양한 비단이라든지 있었을 것이고.
은 1만냥이면 순조 생모 가순궁 수빈 박씨가 자신의 장례 비용으로 평생 모은 돈에서 조금 모자란다.
소헌세자, 강빈 일행이 중국에서 지낼 무렵 흉년이 들어서 생활고가 심할 거라고 추측한
조선 조정신하들이 1년 생활비로 은 5천냥을 보내주자고 나섰는데,
인조는 이미 보낸 황금도 많으니 그럴 필요 없다고 만류했었다.
청나라 주재 외교공관 1년 운영비가 은 5천냥인데, 강빈 개인비자금이 황금 제외하고 은만 따져도
그 2배가 넘는 거다.
후대에 국고 조사한 보고서가 있는데, 각 관청에서 보관한 합계가 황금 1백냥, 은 45만냥 정도였다.
강빈 개인재산에서 황금은 각 관청 보관액 합계와 맞먹고, 은도 2% 정도는 되는 거금인 셈이다.
강빈이 개인자금으로 황금 1백냥 남기고 죽었는데, 인조는 청나라쪽 사신들 뇌물 줄 때 1번에 황금 10냥 정도가
고작이었다.
즉, 인조 시각에서 보자면 강빈이 청나라 사신에게 자기 유리하게 뇌물 건낼 수 있는 자금이 최소 10번이었다.
강빈을 살리려고 애썼던 신하들 상소도 인조 입장에서 보자면 중국에서 돈 벌어 얼마나 정치자금을
뿌렸길래 임금에 맞서는 신하들이 이리도 많은고, 정도였겠다.
강빈이 이 돈을 마련한 경로는 요즘으로 치자면 외교행낭 이용한 밀수다.
일반인은 허가받지 못하는 국경출입을 할 수 있는 공무 수행원을 활용해 밀무역을 해서 조선 임금에
맞먹는 비자금을 조성한 거다.
조선역사 보면서 제일 이해 안 가는 것이 강빈이 장사할 만큼 머리가 돌아갔는데,
어쩌자고 뭔 마음을 먹고 그런 큰 돈을 남겨서 조선으로 가지고 와서 딴 주머니를 찼을까, 이거다.
검소하신 임금 여러 분께서도 중국 외교사절이 가져온 사치품을 국고에 안 넣으시고
따님 결혼식에 쓰려 하시다가 신하들과 옥신각신하신 기록이 꽤 되는 거 보면,
임금에게도 중국 사치품은 자주 입수되는 물건은 아니었다.
조선 내부에서는 지존하신 조선 국왕을 한없이 작게 만들 수 있는 부를 쌓아 올 수 있는 땅,
당시에는 일반인의 왕래가 철저히 제한된 중국이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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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사대부들 관계의 샘플-효종비 인선왕후 [0] | covet 번호 220161 | 2008.05.27 조회 6577 | 추천 1 손윗동서 강빈이 너무 능력과시를 하다가 견제당해서 소현세자 사후
몰락한 뒤에, 어부지리로 남편 봉림대군이 세자 책봉되어 후일
중전에 등극한 인물이다.
강빈을 굉장히 부각시켜 묘사하는 것이 당시나 요즘이나 대세기는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강빈이 당시 격동기에 거쳐온 모든
시간, 장소에는 손아랫동서인 봉림대군 마누라 인선왕후도 함께 있었다.
강빈 혼자만 사선을 넘나든 거도 아닌데 죽기를 좀 별나게 죽지 않았나 싶다.
조선 사대부 핵심계층 여성들이 청나라 포로가 된 '강도의 변'으로 지칭되는
강화도 함락이나 심양에서의 포로생활, 귀국 후 조선궁정의 음험한 음모 지뢰밭을
인선왕후는 강빈과 똑같은 시기에 겪어냈다.
강빈도 명문가에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지만 남자형제들이나 외가로 딱히 직접 걸리는
당대 세력이 없던 반면에,
인선왕후는 친가, 외가 모두 이름 있고 세도도 있고 관계들이 복잡해서 당시 조선
사대부들 인맥관계 샘플이 될 만 하다.
병자호란 당시 강빈 포함한 핵심계층은 강화도로 먼저 피신하게 되어 있었는데,
전설에는 책임자인 김경징이 배를 자기 식솔들 옮기는 데 몽땅 징발해서 강빈 포함한
다른 사람은 강화도 코 앞에 다 와서 건너지를 못했고,
강빈이 분노해서 김경징 욕을 해댔더니 장신이라는 사람이 배를 얼른 대령했다고 전한다.
뭐 강빈이 열 받아서 욕 할 수는 있었을테고, 배를 준비하게 주선한 장신이라는 사람이
바로 강빈 손아랫동서 인선왕후의 친삼촌이다.
강빈 욕하는 소리를 듣고 배를 대령시켰는지, 아니면 자기 조카딸 인선왕후까지 피난시키려고
배를 대령시켰는지는 각자 추측할 일이다.
강화도 함락 당시 이 장신은 달아났다 해서 대군부인의 삼촌이지만 끈질긴 탄핵을 받고 사사된다.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여자들이 조정 전현직 대신들 가족이니 유례없이 지독한 탄핵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밀려드는 적군 맞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용기는 아무나 내는 게 아니니까 그냥 평범한
사대부라고 하겠다.
포로들 중 왕족 부인네들은 석방되고 사대부 부인들은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가 친정식구가
돈 많으면 구해오기도 했는데, 이렇게 구출된 여인 중 하나가 인선왕후의 올케였다.
인선왕후 친애비 되는 장유는 외아들 며느리는 이런 흠이 있으면 안 되니 이혼을 허락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던 선봉장이다.
당시 조정에서 환향녀들 이혼 문제를 실리파 대신 최명길만이 '여자들 죄가 아니고 임진왜란때도
다들 데리고 자식 손자 낳고 살았으니 그냥 살라'고 반대했다가 욕만 바가지로 먹고
환향녀는 이혼이 대세였으니, 인선왕후 친애비는 인간적으로는 좀 머해도 시류는 제대로 타는 사람이었다.
일단 친가쪽으로 보면 이렇게 평범하고 흐름을 제대로 타는 집구석이었다.
사실 인조반정때 한몫한 집안이다.
반면 인선왕후 외가쪽은 뼈대가 곧아도 너무 곧았다.
같은 강화도 함락 당시 성문에 올라가 화약에 담배불 붙이고 자폭한 김상용이 인선왕후 외할애비다.
당시 나이가 여든이 가까왔는데, 손자가 도망을 안 가려고 해서 동반자살했으니 참 독한 노인네다.
그러니 척화파의 핵심인물로 청나라에까지 끌려갔던 김상현은 인선왕후 외가쪽 작은할애비다.
당시 사대부들 자존심 세워준 이 형제들은 인기가 높았지만, 인조는 얘네 싫어했다.
자신은 숙이고 살아남았는데, 이것들이 그런 자신을 우습게 보이게 한다 싶었는지 모른다.
김상용은 담배 피우다 실수로 죽었으니 충신으로 기념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셔서
그 자식 김광현이 고인은 담배 냄새도 맡기 싫어했고, 담배불은 순전히 의심 안 받고 불 가져오게 하려는
속임수였다고 끈질기게 상소를 올려서 인조와 감정싸움을 벌였다.
김상용, 김상헌 모두 조선에서 충신으로 존경을 엄청 받았고 인선왕후는 이 외가쪽 이름 덕을
볼 만 했다.
하지만 인선왕후와 강빈이 동서 이상의 관계를 맺은 게 있는데, 바로 이 잘난 김상용의 아들 김광현이
강빈의 아우 강문명을 사위로 삼은 거다.
강문명은 악한 건 아닌데 교만하고 욱하는 성질로 누이 강빈 망칠 넘이란 세평을 받았는데,
과연 소현세자 초상때 인조측과 충돌하면서 강빈 인척중 인조의 노여움을 제일 많이 받는 대상이
되었다.
강씨일가 몰살당할 때, 인선왕후 외삼촌 김광현은 안 그래도 이전에 아버지 김상용을 충신
만드는 문제로 인조한테 미운 털 박힌 게 있는데, 사위에 연좌되어 언제 죽을지 몰라 걱정하다
일찍 죽었다고 한다. ㅎㅎㅎ 고지식한 사람이었던 거 같다.
외려 꼬장꼬장한 작은할아버지 김상헌이 심양까지 갔다오고도 팔순 넘겨서 조카 김광현보다
오래 살았다.
인선왕후 한 사람을 고리로 전형적인 세도가문 친가 장씨네, 고지식한 외가 김씨네,
눈치 모자란 강씨네가 이어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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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으로 이름을 남긴 양녕대군의 딸들 [15] | covet 번호 199460 | 2008.04.17 조회 10492 | 추천 2 양녕대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워낙 유명하다.
인간성이 너무 좋아 총명한 아우에게 왕위를 넘겼느냐,
아니면 권력욕이 너무 많아 새삼 다 늙은 나이에 수양의 왕위찬탈을 거들었느냐.
어쨌든 본인은 천명 다 하고 원없이 살다 갔다.
문제는 그 뒤에 남겨진 자손인데.
정실부인도 애를 많이 낳았지만, 워낙 호방해서 첩자식이 숱하게 많다 보니
또 그 첩들도 유부녀, 기생 등등 출신들이 그렇다 보니 관리소홀이 필연적이다.
역사에 기록된 양녕의 아들들은 인품이 좀 모자라게 기록되는데 구두쇠, 남의 물건
탐내기 등이거야 권력구도를 염두에 든 승자 편들기라 쳐도 딸들, 특히 첩의 딸들의
처신은 가정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세종 실록에 양녕의 첩딸 건이라는 애가 말고삐를 화려한 자주색 비단으로 만들어
타고 다니다가 단속에 걸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자 이름이 나온 걸 보면 필시 미혼처녀에, 어미도 번듯한 집 출신은 아닐 것이다.
이후 건이가 펼친 로비 내역을 봐도 그렇다.
고관들의 기생첩들을 찾아가서 베갯머리 송사로 이를 은폐하려 했는데
대군의 첩딸을 단속했던 담당관원이 후환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강직했는지
이 로비활동까지 사헌부에 낱낱이 걸렸다.
사헌부에서는 건이와 고관의 기생첩들에게는 곤장 수십대씩, 그리고 첩의 베갯머리 송사로
건이를 봐주려 한 고관까지 처벌하도록 주청했다.
하지만, 법이 엄해도 세종이 형님의 첩딸을 엎어놓고 곤장 치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건이까지 포함한 여자들은 벌금형, 압력을 행사하려 한 고관은 파직된다.
그나마 다행인지 뭔지, 로비는 양녕의 첩딸인 건이가 혼자 벌인 것으로 나올 뿐 그 아비인
양녕대군이나 건이의 생모인 첩이 조금이라도 나섰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
임금의 조카딸이란 신분은 대단해서 양녕의 정실 딸이 죽었을 경우는 세종이 며칠 고기반찬을 멀리
했다가 신하들의 강권으로 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세종 하면 고기 없이는 수라를 못 드실 양반이라 태종이 승하하면서 주상은 고기를 먹어야 하니
나 죽더라도 육식을 권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단다. (물론 세종은 부친상때는 철저히
몇년 육식 안 했다지만)
양녕의 정실 딸이 시집갈 때는 예법대로 곡식, 포목 등을 후하게 내리고, 양녕의 첩딸이 시집간 거도
예법에 정한 바는 없지만 준마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다.
그런 대단한 신분의 여자가 혼전에 볼기 맞을 뻔한 거다.
이건 귀여운 축에나 들지만, 성종실록에 가면 더한 사연이 나온다.
이미 양녕이 저승길 들어서고 한참 뒤인 성종조, 건이의 로비사건으로부터 장장 50여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전라관찰사 김종직이 현지정보로 상소하기를 양녕대군의 첩딸 이씨가 남편 사후 자그만치 종과 사통하여
딸을 낳아 시집까지 보냈다는 것이다.
처음에 상소에는 이씨라고 그나마 점잖게 지칭하지만 곧 죄인취급받으며 구지라는 이름이 기록되는
이 여자는 권가 양반과 결혼시켰더니 품행이 요상해서 남편 생전부터 추문이 많았다고 한다.
남편은 같은 지붕 아래서 안 살려고 했고, 종실 떨거지에다 유부녀인데도 옆집 선비들 모이는
자리에 찾아가서 교태를 떨어댔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사회가 재미있어서 선비들은 이 여자를 종년인 줄 알고 어떻게 해보려다가 이웃들
귀띔으로 양녕의 첩딸인 걸 알고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갔단다.
남의 종년을 데리고 자는 거야 뒤탈없는 놀이지만, 종친의 딸과 어떻게 했다간 나란히 사형이니까.
종실의 딸이면 첩딸이라도 양반의 정실 딸과 같은 대우를 받고 그래서 물론 정실자리로 시집가고
그래서 또 양반의 정실과 같은 수준으로 유교사회에 맞는 부덕을 지키도록 요구받는다.
남편 죽으면 재혼도 말도 안 되는 건데 종과 사통해서 애까지 낳아길렀단 거다.
이중삼중으로 말도 안 되는 것이 간혹 양반의 딸은 과부가 되어 재혼하는 경우가 없잖아 있지만,
종실의 딸은 약혼자가 사망해도 왕실 체면을 위해 청상으로 수절해야 했다.
또 양반여자와 종이 통하는 경우는 최소한 천역으로 떨어지는 벌이었다.
종과 통하고도 여자가 죄를 안 받으려면 강제로 당한 경우 뿐이라서 이 경우는 사내종은
상전을 강제로 범한 죄로 백주 노상에서 육시를 당한다.
성종이 본인 바람기는 좀 있어도 양반여자들 바람기엔 또 엄한 양반인데,
어우동 죽일 때완 또 다르게 상대가 첩딸이라도 항렬로 따지면 왕의 한참 위다.
사내종만 죽어라고 팼는데, 이 종넘이 모나 도나 죽을 줄 알고 사내답게 입 다물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왕실에서 입 열 틈도 안 주고 죽을 때까지 팬 건지,
하여튼 종넘은 고문받다가 죽었다.
그래도 해산을 도운 산파며 등등 증인들이 수십명이라 이들을 또 형문하다가
왕이 결론을 짓기를 명색이 종친 떨거지인데 형벌을 줄 수도 없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도
없으니 형벌 줘서 심문하지 말고 그냥 죽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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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가장 시끄럽던 대비 정순왕후 [7] | covet 번호 205565 | 2008.05.01 조회 11609 | 추천 2
모르는 이 누가 있겠나만 이 분 기록을 보면 참 해도 너무하다는 감이 든다.
역사에 대비의 발언이 직접 기록된 예가 거의 없는데,
이 분은 수렴청정도 아니고 멀쩡히 정조 통치 기간 중에도
직접 발언문인 전교를 여러 차례 발표하셨고 그 대부분이 정조의 공식 입장과
정면 배치되는 거였다.
물론 형식이야, 미망인인 내가 오직 주상을 보필코자 병과 싸워가며 이 목숨을 잇고
있는데 내 수명이야 몇년 안 남았지만 이것만은 반드시 통과시키고자 주상에게
내 정성을 보이느니라, 너희 신하들은 대신만 아니라 모두들 내 전교를 돌려읽으라, 였다. ㅎㅎㅎ
언문으로 작성하시다 보니 말투까지 명령체로 그대로 남은 이 전교는 참 시기도 적절하다.
예를 들면 의빈 사망시, 정조가 은연중 죽음의 사유를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발언을 하면서
정국의 운을 떠본 두달쯤 뒤 대비가 전교를 발표한다.
'문효세자가 죽고 한 가닥 희망이던 의빈까지 죽었는데, 병세로 보아하니 온갖 나쁜 의심이
들어서 나도 그간 기력을 보하느라 들었던 미음, 탕약을 먹지 않고 봉해서 날짜별로
모두 모아두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다. ㅎㅎㅎㅎ
감히 궁중에서 왕이 주관해서 올리는 탕약이 의심스러워 안 먹고 다 모아놨다는 전교가
뒤에 이어질 때는 '임금을 해치는 원수를 너희가 잡아죽이거라'로 맺는다.
정조가 운 한번 떠보니까 정순왕후가 당할세라 '나야말로 독살이 무서워 조심하고 있다,
딴넘들 많이 죽이거라. 네 배다른 동생이며 죽일 넘 많더라'로 나가는 거다.
이후 정순왕후가 정조 생전에 언문전교에서 주된 표적으로 삼은 건 정조의 배다른
아우 가족들이다.
정조는 어떻게든 살려주려고 애를 쓰는데, 대비는 그때마다 탕약을 물리거나
전교를 발표해서 '내가 먹고 입는 것을 줄여서 내 의지를 표현하니 주상의 동생 가족을
싸그리 죽여야 한다, 안 그러면 돌아가신 영조대왕 뵐 면목이 없다'로 일관한다.
그들을 살리려고 생전에 애쓴 게 영조인데 말이다. ㅎㅎㅎ
정조로서는 자신의 아우들을 죽이네 살리네 하는 건 이미 자신의 위엄에도 연관되는
거라 그때마다 명목상의 할미인 이 여자에게 명목상 효도를 표시하며 무마하느라
신경을 많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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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다 잘읽고가용~~~♡ㅋ
재미있게 읽긴했는데 진짜 예전글이라 그런지 워딩 더럽다.. 종친년 종년.. 여자무시.. 와..
재밌게 잘 읽었어 ㅎㅎㅎ 다만 강빈에 대한 평가가 아주 지독하네ㅋㅋ 무슨 딴주머니를 차요..^^; 이미 심양에서 조선 올 때 죽네사네 했는데
흐갹갹 재미있게 읽었어ㅎㅎㅎㅎ!!!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