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진실의 이면
무슨 소리지 ?
컴퓨터에서 나는 소리에 기미히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며칠
째 컴퓨터만 만지고 있던 수아가 잠시 밖에 나간 사이에 컴퓨터
에서 계속소리가나고 있었다. 기미히토는 컴퓨터 앞으로 다가
가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그러나 화면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은
채 경보음만 울렸다.
따르르릉-.
전화벨이 울려 기미히토는 일단 전화를 받으러 갔다.
수아예요. 혹시 별일 없나요?
컴퓨터에서 계속 경보음이 울리는데요?
이런 하필이면 바로 올라가긴 하겠지만3분쯤 걸릴 거
예요. 해킹하실 수 있죠?
글쎄, 자신 없는데요.
알겠어요. 곧 갈게요.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아가 뛰어들어왔다. 가쁜
숨을 토해내며 컴퓨터 앞에 앉은 그녀는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빨리 해야 하는데~
수아는 쉴새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갑자기 멈추고는 발을
굴렀다.
이런 바보 같은 계집애, 하필 이 순간에 자리를 비우면 어떡
해 .
무슨 일인데 그렇게 흥분해요?~
그게 들어왔었단 말이에요.
수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거라니?
(묘제의 연구) 말이에요. 이쪽으로 넘어오기 직전에 저쪽에
서 컴퓨터를 꺼버렸어요.
(묘제의 연구)가 넘어올 뻔했다구요?
기미히토는 깜짝 놀랐다. 수아는 이제 절망한 듯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있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퍼뜩 고개를 들
었다.
맞아요. 어쩌면 흔적은 남아 있을지 몰라요. 넘어오는 순간
꺼졌으니까.
수아는 재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과연 화면에는 대학노트
한 장 분량의 글이 떠올랐다.
선생님 !
수아가 정신없이 고함을 질렀기 때문에 테드가 뛰어나오고 사
도광탄 역시 다소 놀란 표정으로 컴퓨터 앞으로 왔다.
(묘제의 연구)예요.
무슨 소리냐, 컴퓨터로는 찾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니?
그래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연구소의 컴퓨터에 (묘제의 연
구)가 뜨기만 하면 즉시 삐삐가 울리도록 해두었거든요. 그런데
하필 그 중요한 순간에 제가 자리를 비우고 말았어요.
수아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도 몇 줄은 살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이
죠?'
화면에 떠오른 것은 서문에 해당되는 글이었다
나는 평양 근교의 강동군에 있는 큰 무덤의 내력에 대해 예로부터
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것에 주목했다. 또한 이 무덤은 몇몇
믿을 만한 조선의 역사서 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어, 발굴을 해서 그
내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에 발굴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한바. 총독부
에서는 발굴의 조건을 심히 까다롭게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발굴의
발표 여부를 조선총독부에서 임의로 결정하고 발굴자는 그 지침에
따를 것을 요청했다.
또한 발굴자는 그 이름을 밝히지 못하고. 자료를 작성하지 못하며
누구에게도 발굴 사실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총독부
의 이러한 태도는 학문적 진실을 왜곡할 우려가 있어 나는 심히 못마
땅했으나, 일단 고분의 실체에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총
독부의 계약서에 서명 날인을 하고 발굴을 시작했다.
발굴은 야간에 조선인들이 나타나지 않는 틈을 타서 극비리에 진
행되었으며,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석실에서 떼어낸 벽화는 모
두 총독부의 파견관이 엄격하게 관장하여 비밀리에 반출했으므로 나
는 그 유물을 자세히 조사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후에도 조선총독부는 그 발굴에 대한 발표를 일절 하지 않았으
므로 나는 정당한 발굴사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침묵을 강요받았다.
그러던 중 나는 다시 만주에서 하나의 무덤을 발견했다 천운이었
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나 봉분도 없어지고 표석은 물론 그것이
무덤이라는 흔적을 보여주는 것도 전혀 없었다. 전문가의 눈에도 그
저 뜨일 듯 말 듯한 희미한 흔적을 더듬은 나는 이제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파들어갔다.
황량한 벌판에서 혼자 하는 작업인데다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
아야 했으므로 너무나 힘들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 묘실을 발굴
한 나는 기뻐 미칠 지경이었다. 강동군에서 보았던 그 선인화가 분명
히 벽에 조각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 선인화는 아무것도 아
니었다. 그 다음 내가 발견했던 것에 비하면
거기에는 신물이 있었다. 신물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조선의 천운이 다하여 여기에 신물을 묻노니 영원히 박달겨레를
지키리라:
나는 갑자기 온몸이 떨려왔다. 단 한 조각의 부장품에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신비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등뒤에서 누가 나를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지만
공포에 질린 나는 허겁지겁 능을 나오고 말았다.
그러고는 신들린 사람처럼 내가 팠던 능의 입구를 흙으로 막았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른다. 다만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렸을 뿐이
다 이후나는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술 한잔
이라도 마실 수 있으면 행복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죽음
을 예감하고 있다.
나는 지금 하는 일이 잘하는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죽음
에 이르러 학자로서 내가 보았던 것을 기록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여
(묘제의 연구)라는 제목으로 남겨 역사적 진실을 지키고자 한다. 다
만 저급한 인간들이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을 막기 위하여 능의 위치
를 고조선의 역사와 만주의 옛 지명을 섞어 암호로 남긴다.
-마에다
눈으로 따라 읽던 사도광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수아의 손을 어느새 테드가 잡고 있었다. 기미히토 역시 긴장되
는지 침을 삼켰다.
(묘제의 연구)는 이런 것이었군요.
모두들 한동안 말을 잃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테드였다.
마에다라는사람이 강동군과 만주에서 같은 종류의 능을 발
굴했다는데 누구의 능일까요?
그래요. 강동군의 발굴에서 보았던 선인화를 북만주에서 다
시 보았다고 했어요. 마에다라는 사람은 거기에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아요.
수아가 덧붙이며 사도광탄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선인화가 뭐죠?
문자 그대로 선인을 그린 그림이지.
선인이요?
그래 .
선인화가 그 능의 주인을 말해 주나요?
그렇지 .
선생님은 그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죠. 지난번에도
얘기하려다 마셨잖아요. 이제 (묘제의 연구)를 보셨으니 얘기해
주세요.
사도광탄의 얼굴은 자못 엄숙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창 밖의
강을 내다보다 혼자말처럼 입 속에서 한 단어를 되뇌었다
단군릉.
사도광탄의 대답에 모두 놀랐다. 특히 테드는자신도모르게
큰소리로 다시 물었다.
네? 단군릉이라구요?그렇다면 단군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
물이란 말이에요?
그래 .
사도광탄은 침통함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눈을 감았다.
테드는 당황했다. 사도광탄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
음이기 때문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자 눈을 뜬 사도
광탄은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테드에게 물
었다
북한에서 최근에 단군릉을 발굴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
나?
네, 자세한 내용까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요. 김일성이 단군릉
발굴 현장에 가서 학자들을 독려하고 대대적으로 주변 환경을
조성했다는 정도는 기억이 나는데요.
그렇다면 자네는 아까 왜 단군이 실재했던 인물이냐고 물었
지?
저는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북한에서 단군릉을 발굴한 것이 그들의 거짓이라고 이해했다
는 건가
네 신문에서 그렇게 읽었어요. 북한이 정권의 정통성을 선전
하기 위해 단군릉이라는 있지도 않은 무덤을 조작해 낸 것이라
고 우리 나라의 학자들이 해설을 달았던데요.
음, 그 경우는 우리 나라라고 칭하는 것은 옳지 않아. 남한이
라고 하는 게 맞지. 항상우리 나라의 반쪽인 북한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통일도 앞당겨지는 거야.
사도광탄은 평소 같지 않게 엄격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
자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나. 게다가 남한 학자들의 그런 의
심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북한의 발
굴을 무조건 백안시하는 것은 옳지 못해. 북한에서 이루어졌다
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지.
그래요. 남한의 학자들이 북한에 가서 발굴 현장을 보고 맞다
틀리다 얘기했다면 신빙성이 있겠지만 가보지도 않고 무조건 조
작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선생
님, 진상은 어떤 건가요?
수아가 나섰다.
남한의 학자들이 북한의 단군릉 발굴을 조작이라고 얘기하는
가장 유력한 단서는 단군의 유골이 안치된 관에서 나온 못 때문
이야.
못이요?
그래 관 뚜껑을 박은, 녹이 슬 대로 슬어 삭아버린 철못이 고
구려 시대의 것이라는 거지 .
-그 못이 고구려 시대의 것이라고는 누가 판정한 거죠?
북한의 학자들이 지 .
그럼 말이 안 되는군요.
뭐가 말이냐?
남한 학자들의 주장이 말이에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없는 단군릉을 조작하는 마당이라면 굳이 단군의 관에서 고
구려의 철못이 나왔다고 주장할 바보가 어디에 있겠어요?~
바로 그렇다.
사도광탄은 조금 전의 엄격하던 얼굴과 달리 흐뭇한 미소까지
띠고 테드를 칭찬했다.
내가 보기에 북한이 발표한 단군릉의 발굴 보고서는 매우 솔
직하게 씌어졌어. 그들은 유골의 연대를 확인하는 데 사용한 방
법까지도 자세하게 공개했지. 외부의 검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
겠다는 의사 표시일 뿐 아니라 사실 관계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
다는 얘기야.
과학적 연데 측정에 의하면, 그 유골은 언제 사람이라는 거
에요?
지금으로부터 약 3천 5백 년 전의 사람이라는 거지.
그럼 단군의 시대와 맞나요?
약간의 오차를 감안하면 들어맞아.
그럼 고구려 시대의 철못이 나온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
하고 있죠?~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요즘은 고고학이니 발굴 과학이니 하는
것들이 발달되어 뭔가가 발굴이 되면 그걸 박물관 등에 전시하
여 보전하지만 고구려 시대에는 유골을 꺼내 발굴한다든지 하는
과학이 없었어. 과학의 시대가 아닌 신앙의 시대였기 때문에 유
골에 깃들인 정령을 해치려 하지 않았지. 따라서 고구려 사람들
이 고분을 발굴했다 하더라도 그대로 관 뚜껑을 다시 닫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런 일이었을 거야, 고구려의 철못은 이런 관점에
서 이해해야 하겠지 .
그러니까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무덤을 고구려인들이 발굴했
다가 철못을 박아 다시 뚜껑을 덮었단 얘기군요.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자기공명측정에 의해 수천 년이나 된
것으로 밝혀진 유골을 고구려인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그렇군요 그렇게 보면 남한의 학자들이 무조건 북한의 단군
릉 발굴을 부정하는 것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아주 크겠군요.
그럴 위험도 크지만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미 단군을
마음속으로부터 지워버린 듯한 태도야. 역사학자들이 무서운 집
념으로 단군을 찾아내지 않으면 누가 한다고 실증이니 학문의
방법론이니 하면서 책상에나 앉아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
이번엔 수아가 물었다.
마에다와 북한의 학자들이 평양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는데 어
째서 마에다는 만주에서 단군릉을 또 발굴했다는 거예요?
단군은 한 사람이 아니다.
단군은 임금이라는 뜻의 보통 명사야. 즉 보통 알고 있는 단
군왕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
그렇다면 단군은 몇 사람이나 되죠?
규원사화 등에는 단군이 모두47명이라면서 1대 단군왕검
부터 47대의 고열가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을 전하고 있지.
이 서문을 보아서는 (묘제의 연구)는 단군릉을 발굴한 사람
이 총독부에서 유물도 내놓지 않고 발표도 하지 않은 사실에 불
만을 품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만든 자료집 같아요. 그런데 이치
로 교수가 도대체 무슨 연구를 했길레 토우는 그의 작업을 저주
했을까요?
사실을 그대로 밝힐 목적이라면 (묘제의 연구)를 그렇게 숨
겨두고 극비리에 작업을 추진할 필요가 없었겠지. 그냥 (묘제의
연구)를 세상에 드러내면 되는 일이니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도광탄은 잠
시 생각한 후에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에는 음모가 있어. 연구란 건 말뿐이고, 야마자키의 의도
는 이치로 교수를 시켜 능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신물을 파괴하
려는 거야.
네? 신물을 파괴한다구요?
사도광탄은 고개를 끄덕 였다.
왜 신물을 파괴하죠?
북악의 지기를 막고 팔만대장경을 훼손하려는 것과 같은 이
유에서 겠지 .
그래서 토우가 작업을 방해하고 이치로 교수를 해쳤다는 얘
기군요.
그렇지.
수아와 테드는 다시 한 번 사도광탄의 논리적인 추리에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이치로 교수도 죽었으니 까.
그게 그렇지 않다. 야마자키는 새로운 시도를 할 거야. 아니
이미 시작하고 있겠지. 이치로를 대신할 사람을 찾아서.
이치로를 대신할 사람이라구요? 그게 누구죠?~
도야마.
아, 어제 얘기하던 원로 역사학자요?
그래, 그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치로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을 부정하는 데 한평생을 바쳤고, 이 (묘제의 연구)가 드
러나면 일생의 학문적 업적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사람이지. 따
라서 야마자키에게 약점이 잡혀 있는 사람이야.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말을 잃었다. 이제 이 음모를
분쇄하는 일만 남은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갈 것인
가. 사도광탄은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