費閑歌
비한가
憨山德淸
감산덕청
其一
講道容易體道難 강도용이체도난
雜念不除總是閑 잡념부제총시한
世事塵勞常挂碍 세사진로상괘애
深山靜坐也徒然 심산정좌야도연
말하기는 쉬워도 살아내기는 어려우니
잡생각을 못 없애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세상일 온갖 번뇌 마음에 그대로 남아서는
깊은 산에서 참선을 해도 도로아미타불이다
其二
出家容易守戒難 출가용이수계난
信願全無總是閑 신원전무총시한
淨戒不持空費力 정계부지공비력
縱然落髮也徒然 종연낙발야도연
출가하기는 쉬워도 계율을 지키기는 어려우니
믿음과 발원이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청정계율 못 지킨 채 헛힘만 쓰고 만다면
머리를 깎았다 하더라도 도로아미타불이다
其三
修行容易遇師難 수행용이우사난
不遇明師總是閑 불우명사총시한
自作聰明空費力 자작총명공비력
盲修瞎煉也徒然 맹수할련야도연
도 닦기는 쉬워도 스승을 만나기는 어려우니
밝은 스승을 못 만나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혼자서 밝아지기 헛힘만 쓰는 꼴이 되어
머리를 깎았다 하더라도 도로아미타불이다
其四
染塵容易出塵難 염진용이출진난
不斷塵勞總是閑 부단진로총시한
情性攀緣空費力 정성반연공비력
不成道果也徒然 불성도관야도연
세상번뇌 엮이기보다 벗어나기 어려우니
번뇌를 끊지 못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본성에 따라 살다가는 헛힘만 쓰는 꼴이 되어
배움의 결실 못 거두는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其五
聽聞容易實心難 청문용이실심난
侮慢師尊總是閑 모만사존총시한
自大貢高空費力 자대공고공비력
聰明蓋世也徒然 총명개세야도연
귀로 듣기는 쉬워도 마음에 심기는 어려우니
존귀한 스승을 우습게 알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저 잘난 줄만 알아서는 헛힘만 쓰는 꼴이 되어
총명함으로 세상을 덮어도 소용 없는 헛일이다
其六
學道容易悟道難 학도용이오도난
不下功夫總是閑 불하공부총시한
能信不行空費力 능신불행공비력
空空論說也徒然 공고온설야도연
배우기는 쉬워도 깨닫기는 어려우니
공부에 게으르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실행 없는 믿음으로 헛힘만 쓰는 꼴이 되어
속 빈 말을 늘어놓아야 소용 없는 일이 되고 만다
其七
閉關容易守關難 폐관용이수관난
不肯修行總是閑 불긍수행총시한
身在關中心在外 신재관중심재외
千年不出也徒然 천년불출야도연
들어앉기는 쉬워도 이루기는 어려우니
수행하지 않는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몸과 마음을 안과 밖에 따로 두는 꼴이 되어
천 년을 절에서 살아도 소용 없는 헛일이다
其八
念佛容易信心難 염불용이신심난
心口不一總是閑 심구불일총시한
口念彌陀心散亂 구념미타심산란
喉嚨喊破也徒然 후롱함파야도연
염불하기는 쉬워도 마음으로 믿기는 어려우니
마음과 말이 달라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아미타불 입으로 외워도 마음속이 어지러워
목이 터져라 소리 질러도 소용 없는 헛일이다
其九
拜佛容易敬心難 배불용이경심난
意不虔誠總是閑 의불건성총시한
五體虛懸空費力 오체허현공비력
骷髏磕破也徒然 고루개파야도연
절하기는 쉬워도 공경하기는 어려우니
정성 없는 마음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온몸을 허공에 매단 채 헛힘을 쓰는 꼴이 되어
머리통 깨지게 절을 해도 소용 없는 헛일이다
其十
通經容易解經難 통경용이해경난
口誦不解總是閑 구송불해총시한
能解不依空費力 능해불의공비력
日誦萬卷也徒然 일송만권야도연
입으로 외우기는 쉬워도 뜻을 알기는 어려우니
뜻도 모르고 외워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아는 것에 그치고 말아도 헛힘을 쓰는 꼴이 되어
하루에 만 권을 읽는다 해도 소용 없는 헛일이다
번뇌를 끊어내고 계율을 잘 지키고
좋은 스승을 만나고 출가하여 결실을 거두고
사견私見 없이 배우고 배운 것을 깨치고
한마음으로 정진하고
몸과 마음을 하나로 지키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부처님을 공경하고
경전 속 가르침을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당부일 테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출가와 참선,
배움과 가르침이 모두 내실을 갖추지 못한 채
단지 시늉에 불과한 짓을 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제자들에게 스승이 들려주는 간절한 당부일 것인데
열 편을 한꺼번에 읽고 올리면서
한 편을 깊이 있게 읽느니만 못하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 감산덕청憨山德淸 [1546~1623]
명明나라 말기의 고승으로
속성은 채씨蔡氏, 자는 징인澄人,
호는 감산憨山, 시호는 홍각선사弘覺禪師이다.
안휘성安徽省 전초全椒 사람이다.
임제종 문하에서 선종을 부흥시켰고
자백진가紫柏眞可와 깊이 교유했는데,
두 사람은 운서주굉雲棲袾宏, 우익지욱蕅益智旭과 함께
명말明末의 사대고승으로 꼽힌다.
11세 때 보은사報恩寺
서림영녕西林永寧 법사의 문하로 들어가
불교경전은 물론 유교와 도교의 경전을 함께 배웠다.
19세 때 서하산棲霞山으로 가서
운곡법회雲谷法會 선사를 알현하고
《중봉광록中峰廣錄》을 배운 뒤,
참선을 결심하고 보은사로 돌아와 삭발하고 출가했다.
《화엄현담華嚴玄談》을 읽은 뒤
청량징관淸涼澄觀을 본받고자
스스로 호를 징인澄人으로 지었다.
신종神宗 만력萬曆 원년(1573) 오대산에 갔을 때,
감산憨山의 풍치가 마음에 들어 호를 삼았다.
만력 14년(1586)에는 신종이
《대장경大藏經》 15부를
천하의 명산 사찰로 보냈는데,
태후가 그 중 한 부를 동해
뇌산牢山(청도靑島 노산嶗山)에 있는 덕산에게 보냈고,
조정에서는 뇌산에 해인사海印寺를 건립하고
감산에게 주지를 맡아주기를 청했다.
만력 23년(1595)에는 조정의 정쟁에 연루되어
광동의 뇌주雷州로 쫓겨나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선법을 널리 퍼뜨리면서
선종과 화엄종의 융합 및 유불도 삼교의 합일을 주장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
그가 옛 오나라 땅에 머문 5년 동안
강남과 강북이 밝은 법으로 가득했다.
훗날 감산은 뇌산 해인사에서
《법화경통의法華經通義》,
《장자내편주莊子內篇註》 등 10여 종을 지었고,
그의 문도들은 《감산몽유집憨山夢遊集》(50권)과
《감산어록憨山語錄》(20권)을 엮었다.
천계天啟 3년(1623)에 세속 나이 78세로 입적했다.
사물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도를 말할 수 없다.
대저 만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도,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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