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청춘은 서울 광화문을 촛불집회 아니면 붉은 악마가 열혈을 분출하는 소재지로 여길지 모르지만 전에 젊은이들은 '모든 것을 여기서 구할 수 있는 곳'으로 알았다.
그 여기에서 굶주린 지성은 과거에도 핏발선 정치와 언론의 의무를 논했고, 제도의 위엄을 확인했으며, 엄연한 사회적 서열의 존재에 고개를 숙였어도 그 모든 것을 녹여주는 감성의 공간들도 많았다.
어린 만남의 공간 덕수제과, 술잔을 기울이고 싶으면 찾는 피맛골, 종로 초입에 늘어섰던 음악다방들... 분명 광화문에는 음악이 있었다. 아무나 갈 수 없었던 세종문화회관의 고매한 음악은 물론이요, 앞선 유행으로 마니아들을 꼬드기는 대중음악도 여기가 늘 첨단이자 선두였다.
해적판이 성행하던 시절에도 이곳은 원판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으며, 팬들은 자글거리는 불법음반 아닌 깨끗한 소리를 위해 여기서 열심히 원판녹음을 해댔다. 만약 어떤 노래가 광화문 거리에 흘러나왔다면 그 곡은 히트 또는 히트가 예약된 그것도 아니라면 음악적으로 우수한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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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성가신 별난 사람들은 그래도 영화를 얘기한다. 얼마 전 만난 한 40대 남자는 광화문 하면 이소룡과 크리스토퍼 리브가 떠오른다고 했다.
“이소룡 주연 영화인 '용쟁호투'와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이 여기 '국제극장'에서 개봉됐거든. 이소룡은 그때 벌써 고인이었고 크리스토퍼 리브도 막 세상을 떴어. 표를 사기 위해 영화관 앞에 늘어선 줄이 그립구만...”
사람은 그리움과 동격이라고 했다. 사람이 많다면 그리움이 넘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곳은 연인의 거리가 된다. 정동회관에서, 이화여고와 서울예고를 거쳐 겨울에는 시베리아로 통했던 법원골목으로 가면 이르게 되는 곳, 이순신장군 동상이 있는 곳에서 태평로 길 쪽으로 와도 3분 만에 올 수 있는 거리. 그 덕수궁 돌담길은 젊음의 사랑을 잉태시키는 감성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이 곳을 기피해야 했다. 이 곳을 걸으면 연인이 헤어진다는 비운의 속설 때문에. 논리적으로 성립되기 어려운 미신이었지만 연인들은 행여 사랑의 가변성에 희생되기가 두려워 덕수궁 돌담길의 낙엽을 밟고자 하지 않았다. 그런 관습은 아주 오래전부터였던 것 같다.
1966년에 발표된, 당시 최고 인기가수 중의 한사람이었던 진송남의 노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 곡은 제목 자체가 '덕수궁 돌담길'이다.
'밤도 깊은 덕수궁 / 돌담장 길을 / 비를 맞고 말없이 / 거니는 사람/ 옛날에는 두 사람 거닐던 길 / 지금은 어이해서 혼자서 거닐까 / 밤비가 하염없이 / 내리는 밤에...'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실패한 사랑이 된다는 일반의 속설을 애절한 곡조와 가사로 반영하고 있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당대 미모의 여가수 혜은이도 그런 노래를 불렀다.
'덕수궁의 돌담길, 옛 사랑의 돌담길...'
당시 음악 팬들은 공포와도 같았던 덕수궁의 돌담길을 용기(?)있게 노래 가사로 표현한 것에 놀라기도 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기억되는 덕분에 덕수궁 돌담길은 그렇게 대대로 오래도록 연인들의 가슴에 저장되었다.
덕수궁의 돌담길이 연애파국의 저주에서 벗어나 비로소 아름답게 기억되기 시작한 것은 최현주의 노래를 1980년대 중반 이문세가 다시 불러 크게 (리메이크) 히트한 '광화문연가'에서였다.
광화문연가라는 제목이지만 이 곡의 주된 소재는 덕수궁 돌담길이다. 하지만 여기서 덕수궁 돌담길은 연인들에게 던져졌던 저주의 돌팔매를 피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 '이루어지는 사랑'의 거리로 복권된다.
어쩌면 이러한 반전(反轉)은 '광화문연가'가 히트되던 시점의 민주화운동이 낳은 반(反)미신적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관습에 대한 은근한 도전, 공포를 벗어나려는 문화적 의지...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 언덕 밑 저 눈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 눈 덮인 조그만 교회가 / 향긋한 오월에 꽃향기는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이 남아있다는 것은 그 곳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과의 이별을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듣고 덕수궁 돌담길의 미신에서 탈출했고, 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편하게 그곳을 거닐게 되었다.
이것은 '남들은 그래도 우리 커플은 굳건한 사랑으로 인해 비록 여기를 걸어도 사랑은 깨지지 않는다!'는 개별적 사랑의 의지가 아니라 '이제 왜곡된 감성으로 사람들을 옭아매온 속설은 끝났다!'는 시대의 의지가 살며시 드러난 것 아니었을까.
게다가 부산한 광화문 네거리는 향긋한 오월을 기다리는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로, 아름다운 추억의 공간으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새롭게 다가선다. 모든 것이 있었어도 왠지 모르게 이성에게 감성이 밀려있었던 광화문이 향기롭게 남아있게 된 것은 '광화문연가' 덕분이다.
억압된 시대에 대치하며 민주화를 위해 뛰던 시절도 어느덧 추억이 됐다. 광화문이 가슴시린 추억이 아니라, 가슴 벅찬 추억의 장으로 변모했음은 신세대들도 이 노래를 즐기고 있다는데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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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발라드 여가수 이수영은 '광화문연가'를 리메이크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것은 월드컵과 촛불시위의 현장에서 얼마든지 잉태할 수 있는 청춘남녀의 당당한 사랑으로 읽힌다. 이문세 때와 외관은 약간 바뀌었을지라도 기본 감성은 궤를 함께 한다.
이제 광화문 네거리도 많이 변했다. 국제극장이 없어진지는 오래고, 법원도 이미 딴 곳으로 이동했고, 피맛골도 자취를 감추었다. 오랜 역사의 체취도 현대의 도도한 진군에는 도저히 이겨내지를 못한다. 곳곳이 속속 모던으로 환골 중이다. 광화문의 낭만을 지키고 싶은 사람한테는 결코 가볍지 않은 고통이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아직도 얼마든 사랑과 추억을 확인하고 재생산해낼 수 있다. 먼저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광화문 네거리를 나가보면 된다. 그리고 아직도 덕수궁 돌담길에 떨어진 낙엽을 밟는 소리는 찰지고 투명하다. 거기를 걸으면서 만약 '광화문연가'의 가사가 떠오른다면 더 좋다.
2006/01 임진모(jjinmoo@izm.co.kr)
덕수궁 돌담길 - 진송남
https://youtu.be/jCQokLeR_X0
덕수궁의 돌담길 - 혜은이
https://youtu.be/Mfyyk1C03qg
광화문연가 - 이문세
https://youtu.be/t3PNwN4z29I
광화문연가 - 이수영
https://youtu.be/MM8Nvgf0JRY
첫댓글 광화문 4거리 ㅡ인연이기 깊지요
69년 무작정 상경하여
6f 건물인 세종학원에서
재수생활하던 때가 그립습니다
3층 원장실에서 밤에
자며 광화문 4거리에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조선일보 ㅡ동아일보
국제극장ㅡ이순신장군동상
2년간 바라보며 ㅡ웅지를 품었지만
말장꽝 ㅡ
그래도 그 때가
좋았습니다
국제극장&덕수제과&시민회관&당주동 학원가..태어나고 자란 광화문과 신문로길..기억속에 훤하네요~~♡♡
70년도 국제극장 러브스토리 개봉.. 그당시 거금이었던 550원..
거기서는 못보고
재개봉관에서 봤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