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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 경건한 성도의 사회생활(3)
엡 6:1-9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 설 교 >
자녀사랑과 교육
엡 6:1-4 / 이수영 목사
오늘은 교회가 어린이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어린이들은 한 가정을 위해서나 한 사회를 위해서나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복된 선물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제목입니다. 어린이들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기쁨과 희망과 기대감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랑해야할 대상입니다. 어린이들은 아직 자신의 삶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책임지고 보호해야할 대상입니다. 어린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생명들이고 각 가정과 사회를 책임질 미래의 일꾼들입니다. 따라서 바른 교육과 훈련으로 그 가능성을 최대한 현실적 역량으로 개발해주어야 할 인격자원입니다. 어린이들은 각 가정과 사회와 나라와 교회가 공동적으로 책임져야 할 지구촌의, 아니 하나님나라의 소중한 구성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위시한 세계 곳곳에서 어린이들은 무시와 착취와 학대와 납치와 매매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세상이 타락하면 타락할수록 어린이들은 성추행 또는 성폭행의 주된 희생이 되고 있습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아직 성년에 이르지 않은 자녀들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며 교육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중 자녀교육에 직접 관계되는 구절은 4절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먼저 부모들에게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앞선 1절에서는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부모들에게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게 하려면 부모에게 부모로서의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권위를 마구 휘두름으로써 자녀들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됩니다. 권위는 지녀야 하지만 그 권위를 휘두르기를 잘 절제할 때에 오히려 자녀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봅니다. 첫째는 과보호입니다. 아이들을 제일 짜증나게 하는 것이 과보호일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과한 것은 좋지 않지만 이 과보호는 정말 교육적으로 좋지 않은 것입니다. 과보호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녀의 정상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커서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며 난관을 헤쳐 나갈 능력을 키울 기회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과보호는 자유에 대한 바른 인식과 자유에 따르는 책임의식이 건강하게 자리 잡지 못하게 만들어 자녀를 정신적 장애자로 만드는 일입니다.
둘째는 편애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이며 그 창조의 손길 아래서 다양성을 부여받았습니다. 생김새의 차이, 성격의 차이, 재능의 차이, 능력의 차이, 기호의 차이, 성장과 발전에 있어서 속도와 방식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다양성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기준에 따라 자녀들을 판단하고 편애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맡기신 자녀들은 그 누구나 꼭 같은 부모의 사랑을 받을 가치와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중의 언행으로 표출되는 편애는 자기가 사랑받지 못한다고 여기는 자녀에게 얼마나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는지 모릅니다. 일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길 수도 있는 일입니다.
셋째는 자녀의 의욕을 꺾거나 찬물을 끼얹는 부모의 말이나 태도입니다. 어린이들은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아직 경험과 지식과 사물을 전체적으로 보는 안목이 부족한 연령입니다. 또 어른들의 고정관념과는 전혀 다른 발상을 할 수 있는 나이이며 그것이 오히려 어린이의 장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기존의 개념과 가치의식에 따라 자녀들의 생각과 제안에 단정적인 비판을 가함으로써 그들의 의욕을 꺾고 더 이상 부모를 대화와 상담의 상대로 여기지 않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 자녀가 멀어지게 만들고 부모의 즐거움과 기쁨의 기회를 박탈하는 일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일도 늘 긍정적으로 말해주며 칭찬하고 격려해주는 습관은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언제나 마지막 기댈 이해자요 위로자요 후원자로 여기며 무슨 일에도 낙심하지 않게 만드는 힘입니다. 밖에서 모든 꿈이 깨져 집에 돌아온 자녀가 부모 때문에 언제나 꿈이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그런 부모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 넷째는 아이들은 계속 자라며 변화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는 것, 자식들이 부모의 복사판이 되기를 바라는 것 등입니다. 어른들은 어린 자녀들을 현재보다는 미래를 내다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얼마든지 달라지고 좋아질 가능성을 안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커서 무엇이 될지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은 그들의 선택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부모의 꿈을 자녀들의 꿈으로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자녀들이 그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방식도 그들의 책임 하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변화된 여건 속에 사는 자녀들에게 반드시 옛날 부모가 살아온 방식으로 살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바른 삶의 정신을 가르치되 부모의 삶을 외형적으로 모방하기를 강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고유한 삶을 살도록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 각자가 자기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지 부모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부모는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해야지 부모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는 무시와 무관심입니다. 무시와 무관심은 사랑이 없는 증거입니다. 무시와 무관심은 멀쩡한 자녀에게 소외감과 고독감과 버려진 느낌을 안겨주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녀는 부모에게 존중의 대상이며 책임 있게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입니다. 자녀를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무관심 속에 방치하는 부모는 부모의 자격과 의무를 내동댕이친 사람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자녀에 의해 무시당하고 무관심 가운데 버려질 준비를 하는 일입니다.
여섯째는 난폭한 언사나 체벌입니다. 어린이들은 아직 스스로를 방어할 힘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른들과 꼭 같은 인격적 존재입니다. 어리다고 해서 비인격적으로 대하며 약한 존재에게 폭력을 자행하는 부모는 스스로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하며 교육하느라면 엄한 말로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매를 들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녀들 스스로 그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어야 합니다. 비인격적인 언사나 비상식적인 폭력의 행사는 아무리 부모라 해도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녀사랑과 교육을 포기할 뿐 아니라 파괴하는 일입니다. 자녀의 존경과 효행의 대상이 될 자격을 스스로 박탈하는 일입니다.
훈계와 교육은 부드러움 가운데 행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난폭한 언사나 체벌의 자제는 우유부단함과는 다릅니다. 부모의 자녀사랑과 교육은 부드러움 가운데서도 단호함과 일관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자녀에게서 부모의 사랑과 교육에 대한 이해와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들의 자녀사랑과 교육에 관해서 사도 바울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소극적인 형태로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곧 이어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적극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육한다는 말 속에는 한편으로는 칭찬하고 격려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하는 것을 질책하고 시정하게 해주며 훈련한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이 권면은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열심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를 양육하되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은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육하는 일 뒤에 주님 자신이 서계시게 하라는 뜻입니다. 주님 자신이 진정한 교사와 훈시자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를 가르치되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가르치고 부모는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의 모범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부모 자신의 생각을 따라 가르치며 또 스스로 본이 되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자녀들을 기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말이나 행동이 언제나 주님에 의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교육은 궁극적으로는 자녀의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자녀의 마음에 품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자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함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지 부모를 앵무새나 원숭이처럼 흉내 내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각각 고유한 인격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을 독자적인 인격체로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나 바른 판단을 하고 자기의 언행에 대하여 책임질 수 있는 성숙함에 이르게 해주어야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감시함으로써 무엇 하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할 수 없고 자기의 의지와 감정과 욕구를 스스로 표현하고 다스릴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른 자녀사랑과 교육이 아닙니다. 자녀로 하여금 주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부모자신의 욕심대로 자녀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거스르는 잘못된 자녀사랑의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사랑과 교육이 우리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의 마음을 심어주며 그가 인정하실 삶을 살게 하는 교육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에서 이러한 자녀사랑과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며 힘과 지혜를 모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학교의 모든 교사들뿐 아니라 우리 교회의 모든 교역자와 제직들 그리고 각 가정의 부모들이 다 우리의 참된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들이 되고 충직한 보조교사들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행복한 교회 되고 어린이들이 행복함으로써 미래가 밝고 희망이 가득 찬 이 교회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주님 안에서 부모님을 공경하십시오
엡 6:1-4 / 이일기 목사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생활을 하며 오늘 이 시간 저와 우리 여러분이 구원받은 자로서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어진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요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이 두 가지 일은 우리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은 사람이 사람됨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고 동시에 사람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을 배제하고서는 인간의 행복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근본이 되시고 부모님은 우리의 육적 근본이 되시기 때문이죠? 만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부모님을 부정한다면 이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지 않고는 삶의 의미를 말할 수 없거니와 어버이에 대한 공경함이 없이는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어버이를 업신여기게 되면 그런 사람은 곧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의 기본 도리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어버이를 공경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가정에서는 부모님과 자식간에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도 있으니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부모님을 잘 모시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25)는 말씀처럼 부모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당위(當爲)성에 속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무슨 공경할 만한 일이 꼭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낳아서 키워 주셨기 때문에 그냥 무조건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염려스러운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1. 점점 더 부모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난 번 T. V에도 방송이 되고 신문에도 보도가 된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대구에서 자식이 80이 넘은 어머니를 며느리와 사이가 나쁘다고 등산용 텐트를 하천가 외진 곳에 치고 그곳에다 내다 버렸습니다.
이틀 밤을 추위와 공포에 떨며 지내다 마침 경찰에 발견이 되었는데 그래도 그 어머니는 그 자식을 감싸주느라고 자기가 걸어왔다고 했습니다.
그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죽으려고 약방에 가서 약을 달라고 하니까 팔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지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있노라고 하는 말을 듣고 참으로 공경심이 사라져 가는 시대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스컴에서는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했습니다.
엡 06:01,0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 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골 0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바울은 자녀들에게 주는 말씀을 통해 성경 말씀에 위배되는 명령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에 있어서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말씀이 다 옳기 때문이 아니라 윤리적인 하나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①그러나 우리는 이 계명을 잘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이유는 있습니다. 공경스럽지 않은데, 어떻게 공경하며 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러분의 자녀들이 말을 잘 안 듣고 속을 썩이면 어떻게 말을 합니까?
요즘 젊은것들은 어른도 몰라보며 제 부모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안단 말이야 라고 합니다.
딤후 03:02에서 바울은 이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부모님의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명심보감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父兮生我(부혜생아)하시고 母兮鞠我(모혜국아)하시니, 哀厓父母(애애부모)여 生我句勞(생애구로)셨다. 欲報深恩(욕보심은)인데, 昊天罔極(호천망극)이로다.
아버지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가 나를 기르셨으니, 슬프고 슬프도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낳으시고 기르시느라, 얼마나 애쓰시고 수고하셨던가! 그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하나, 그 은혜가 하늘같이 다함이 없도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님이 나를 낳고 기르신 그 공로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안다고 해도 얼마나 지극한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자식을 사랑하고 기르며 가르치는 수고가 어떠한지를 통해 부모님의 사랑을 능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②빗나간 자식 사랑이 불효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부모 공경심이 점점 희박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오늘 우리의 잘못된 자녀 사랑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학교 공부만 강조하다 보니 인성 교육을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녀들을 공부만 잘 하게 해서 출세시켜야 하겠다는 부모님의 지나친 욕심이 정작 중요한 인간 관계나 공동체 생활에 대한 조화의 약점을 나타내고 맙니다.
그 결과로 인해 자기만 알고 부모님과 이웃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한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되면 부모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기가 낳은 자식까지도 쉽게 내버리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식들을 가르치되 부모님이 원하는 사람으로만 만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부모님을 잘 섬기게 되며 하나님을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 있는 첫 계명을 주셨습니다.
엡 06:0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출 20:12; 신 05:16절에서 언급된 십계명의 제 5계명을 인용한 것으로 인간 관계의 계명(05~10) 여섯 가지에서 첫 번째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를 첫 계명이라고 부릅니다.
고려장이라는 악습이 있었던 것도 우리 인간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언제까지나 늙지 않을 줄 알고 늙으신 부모를 갖다 버렸겠지요.
우리도 머잖아 늙어져서 잔소리를 많이 한다고 자식들로부터 구박을 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 생각할 때에는 잔소리를 안 할 것 같지만 나이가 들면 건망증이 심해져서 조금 전에 한 말도 금방 잊어버리게 되어 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노인은 입심으로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늙으면 다 그렇게 되는 그 길을 피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의 말씀을 들려주시는데 엡 06:03절에서,
①부모님을 공경하면 복을 받고 오래 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부모님을 공경할 수 있다면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부모를 떠나서는 행복을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늙으신 부모님의 형편과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사람입니다.
부모님은 하나님에 대한 그림자를 상징함이니 보이는 부모님을 잘 공경하지 못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공경할 수가 없습니다.
현대를 일컬어 다시 고려장제도가 오고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행여나 우리 성도 여러분들만은 이러한 소리에 해당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이 드신 분들이 망령 끼 섞인 푸념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자녀들에게 강요하다 시피 하면서 들어줄 것을 요구할 때 그 잔소리나 간섭을 곱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까지도 용서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데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늙어 죽을 때까지 완벽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그 누구에게도 주시지 않았으며 오히려 서로의 실수나 잘못을 용납하고 이해하며 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에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성장을 했으나 우리가 장성하고 보니 우리를 길러 주신 부모님이 연약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거꾸로 우리가 연약해진 부모님을 도와 드려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②자녀 된 우리는 부모님에게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부모님을 섬겨 사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며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녀들도 부모의 말을 듣고 순종하기가 참으로 힘들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 섬기는 일이 힘들다고 부모님을 업신여기게 되면 우리의 자식 또한 우리를 업신여기게 됨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3. 공경하는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면 상대방도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불평하게 되면 역시 상대방도 나에게서 잘못을 발견하고 비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모님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갖게 되면 우리의 자식들도 분명 우리에게 대해서 불평불만을 갖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식들에 대해서 섭섭한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 드린 일은 생각하지 않고 말입니다.
①우리는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해 준 일이 뭐가 있느냐? 다른 부모님에 비해서 우리 부모님은 형편없다고 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혹시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나의 대에서 그 불행은 끝나야 합니다.
이제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찾아보면 부모님께 감사할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생각났으면 마음으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쉬운 대로 감사하다는 말부터 해 보십시오. 의외로 부모님은 그 말 한마디에 눈물지으며 고마워 할 것입니다.
조선시대 송강 정철은 어버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 은혜를 잊고 살다가 그 은혜를 깨닫고 보니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더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생각만 하고 또 듣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면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②부모님을 공경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잘 섬기려면, 먼저 하나님을 잘 믿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부모님을 잘 섬기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녀는 부모님께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부모님을 동시에 잘 섬기는 일이 됩니다.
③자녀들을 가정에서 올바른 신앙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교육은 학교 교육과는 달리 행위를 본받는 교육의 장(場)으로서 부모님이 하는 대로 자녀들이 따라 행하기 때문에 소홀히 여겨서는 아니 되는 교육입니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세상 지위가 높을지라도 하나님을 모르고 부모님을 모르는 사람은 참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을 잘 섬기는 일은 가정에서 자녀를 신앙으로 지도하는 교육에서 나옵니다.
부모님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새로운 가정의 시작을, 예수님을 믿는 내가 먼저 열어 가야 합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말씀으로 거듭나고 변화되어야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새로 세울 수가 있을 것이고 그 전통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고 부모님 앞에서는 불효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잔소리로 알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은 채 듣지 않게 되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요 불효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심령에 새겨 실천에 옮김으로써 자식들로부터는 존중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는 귀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질서의 가치
엡 6:1-4 / 임덕순 목사
사과나무의 영광은 열매인 사과입니다. 그러나 뿌리 없이 줄기가 없고, 가지 없이 꽃과 열매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열매가 잘 맺히려면 뿌리가 튼튼해서 수분과 영양을 잘 빨아올려줘야 하고, 줄기가 튼튼해서 넘어지지 않고 지탱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무를 심을 때 땅을 깊게 파고 뿌리를 잘 펴서 심은 뒤에 버팀목을 세우고 거기에 붙들어 매어서 넘어지지 않게 해줍니다. 그래야 나중에 튼튼하고 곧은 나무로 자라서 열매가 맺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잘난 사람, 유명한 사람도 많고 똑똑해서 남들을 하찮케 생각할 만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혼자서 그렇게 잘난 것은 아닙니다. 가장 먼저는 그를 낳아서 길러준 부모가 있었고, 그를 가르쳐준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의 선생님들이 있었으며, 그 주변에서 그와 함께 자라주며 생활의 환경이 되어준 친구들이 있고 이웃들도 있으며, 그가 학교에 다니도록 책임져준 교통체계가 있고, 그가 자라는 동안 유괴나 상해를 당하지 않도록 치안을 담당해준 경찰이 있습니다. 직장에는 나를 고용해주고 경험을 쌓게 해주고 월급을 주는 사장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해준 정부가 있고 나라가 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라도 자기 혼자서 태어나서 혼자서 자라서 혼자서 강해지고 똑똑해진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도록 도운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그 대표가 부모님이고 선생님이고 나라의 지도자들이고 경찰이고 군인입니다. 이런 제도나 사람들은 나를 기르고 보호하고 살아가게 하는 환경이고 울타리이고 버팀목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어느 정도 자라고 배우게 되면, 자기 스스로 자란줄 알고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동안 자기를 길러준 부모를 무시하고 선생님을 얕잡아보며, 목사의 말에 콧방귀를 뀌고 나라의 지도자를 욕하는데 앞장서면서, 그렇게 해야 똑똑하고 의식 있는 사람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사회에 언제부터인가 어른과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못난 사람으로 취급하는 악한 풍조가 퍼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우선 자기를 낳고 길러주고 보호해준 사람과 제도에 대한 배은이고, 어른과 권위의 보호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호막과 지지대를 헐어버려서 보호받지 못하게 하는 악한 행동입니다. 그런 행동이 의식 있는 행동으로 여겨지게 되면 그 사회는 무너집니다. 학교의 선생님, 교회의 목사님, 나라의 지도자와 법은 나를 기르고 열매 맺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준 뿌리요 줄기요 가지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본문은 십계명 중에서 다섯째 계명인데,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라고 생각하게 하는 정도의 비중을 가진 계명이 아니라 천지를 만드시고 우리를 여기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으로서 이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신 것은, 각자가 자기 부모만 존경하고 남의 부모는 하찮게 여겨도 된다는 편협 된 계명이 아니라, 사람마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도리를 다하라는 뜻이고,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기를 양육하고 보호하는 질서와 권위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보호를 받으면서 살라는 아주 중요한 명령입니다.
권위라는 것은 영어로 Authority 라고 하는데,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어흠’하고 자기의 힘을 과시하는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르고 보호하는 시스템이나 사람을 말합니다. 그 권위의 대표가 부모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은 뒤, 어리고 약한 것을 위해서 헌신하며 사랑으로 기른 분입니다. 자식이 당연히 부모의 말씀을 순종하며 부모를 의지하는 것이 제게 유익이듯이, 하나님이 세워주신 여러 종류의 권위들도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보호자와 인도자의 역할을 하라고 세워 주셨으니 그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면 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권위자는 연장자이거나 선거로 뽑아 세운 사람이지만, 영적인 권위자는 하나님이 임명하여 세운 사람입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었지만 아론을 보호하고 인도하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은 동생인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아론은 모세에게 순종할 때 안전했고, 누나인 미리암이라도 모세를 비난했을 때 하나님께 무서운 벌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꺼떡 하면 반정부 데모를 하고 불법적인 시위를 해도 그게 잘못한 것인 줄을 알지도 못하는데, 만약 그렇게 법을 어기는 것을 일상화하면 나라의 법은 모두 무너지게 되고, 그러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무법천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국회의원들도 경찰이 쳐 놓은 노란 선을 넘어서거나 폭력적인 언행을 하면 즉시 수갑에 채워져 끌려가고, 국회의원은 경찰에게 호령하지 않고 순순히 경찰의 수갑을 받습니다.
4월 29일자 신문에 보니까, 미국의 여당 국회 원내부대표 존 루이스 하원의원을 비롯해서 5명의 국회의원이 수단 대사관 앞에서 수단의 인권탄압을 비난하는 시위를 하다가, 과격한 행동을 한 일도 없는데도 경찰이 쳐놓은 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즉시 경찰에 체포되어 수갑에 묶여 끌려가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들은 각기 100달러씩의 벌금을 물고 풀려났답니다.
미국의 국회의원들이 못나서거나 힘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시위하며 주장하는 가치보다 나라의 질서가 훨씬 중요하고, 내가 법을 어기는 것을 보여주면 국민들 전체가 법을 어기게 될 것이며, 그러면 내 가족과 내 후손이 살아갈 내 나라가 무법천지가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 국회의원들은 사회를 지키는 경찰의 권위에 순종한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제 5계명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조차 이것을 모르니 큰일입니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조차 자기들이 만든 법을 지키지 않고, 자기들이 뽑아 세운 국회의장을 끌어 내리고, 국민이 뽑아 세운 대통령을 욕하는 것을 늘 TV를 통해서 보여주면, 우리나라가 아무리 경제가 넉넉해진다 할지라도 장래가 한심한 것입니다.
그런 장면을 늘 보며 살아가는 국민들도 정부가 하는 일은 우선 반대 데모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되어버렸고, 시위대는 말리는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경찰차와 파출소에 불을 지르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이런 일들이 어디서 출발되었을까요? 가정에서 자식이 부모를 무시하고 불순종하며 폭행하는 5계명의 불순종에서 온 것입니다. 결과로 법관이 재판정에서 야유를 받고, 목사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몰매를 맞는 상황까지 갔습니다. 이게 민주화 된 것입니까? 민주화의 목표가 무정부상태를 만드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민주화된 세상은 어른이 없고 권위가 무너진 세상이 아니라 권위와 법을 스스로 세워가며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시 11:2-3에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 도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라고 탄식했습니다. 사람들이 악한 마음으로 권위를 부정하면 안전한 삶의 터전이 무너져 버린다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회는 무질서와 악이 판치게 됩니다.
제5 계명은, 이렇게 자신과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일하는 권위에 복종하고 그들을 존경하라는 명령입니다. 권위를 행사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높여주기 위한 명령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려는 하님의 배려입니다.
저는, 지난 5일 조선일보의 ‘양상훈 칼럼’을 읽고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에 비하여 우리나라 의료보험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비교하면서, 그 일을 이룬 사람들의 공에 감사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칼럼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작년 미국 대선 뒤 TV에 나온 한 꼬마는 "오바마 대통령님, 우리 할아버지가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고 돌아가셨어요. 우리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없도록 해주세요."라고 했다. 이 할아버지처럼, 돈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매년 수만 명에 달할 것이란 추정이 나오고 있다. 지금 미국에서 의료비 때문에 파산하는 가정은 연간 8만 가구에 달하고 있다. 의료비가 '살인적'이란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의료비가 '살인적'이라면 의료보험료는 '충격적'이다. 미국에서 괜찮은 건강보험에 가입하면 한 달에 1,000달러 이상을 내야 한다. 이는 보통 부담이 아니다. 당연히 미국인 5000만 명이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전체 인구 6명 중 1명꼴이다. 이 숫자는 무섭게 불어나고 있다. 한 달에 50만 명씩 늘어나는 실업자들과 그 가족은 곧장 의료 사각지대로 떨어진다. 그래서 미국 교민들 중 여유 있는 사람들 상당수가 한국에 가서 건강 진단을 받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도 다른 역대 대통령들처럼 건강보험 개혁을 최대 과제의 하나로 삼고 씨름하고 있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미국의 의료제도는 근본이 잘못됐다. 미국 건강보험은 엉성한 제도 아래에서 수많은 의료 관련자들이 온갖 구실로 환자와 환자 가족을 뜯어먹고 사는 거대한 시스템이나 마찬가지다.
워싱턴에 체류 중인 한국사람 한명이 이 시스템에 뜯어 먹힐 뻔했다. 그는 내장 문제로 두 차례 수술이 필요했다. 미국서 1차 수술 뒤 날아온 의료비 청구서를 다 합치니 '7만5000달러'였다. 당시 환율로 1억 원이 넘었다. 10곳 가까운 곳에서 청구서를 보냈는데 그중에 기막힌 한 케이스는 다음과 같다. 수술 뒤 입원실에 누워 있는데 한 여자가 오더니 "일어서서 걸어 보라"고 했다. 무슨 의료 관련 단체에서 왔다는 그 여자가 나중에 300달러를 청구했다. '뜯어 먹는다'는 말이 정말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이 한국 사람은 천만다행으로 미국에 올 때 들어놓은 여행자보험 덕에 3,500만원을 내고 이 사람 잡는 시스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고, 1차 수술보다 더 중요한 2차 수술을 한국에서 받았다. 수술과 입원기간이 미국과 거의 같았는데도 모든 치료비용을 다 합쳐 120만원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 모두가 "우리나라, 좋은 나라"를 되뇌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건강보험도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환자 부담비율이 유럽보다 10% 정도 높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30년 남짓한 기간에 의료의 질, 속도, 범위가 이만한 건강보험을 갖게 됐다는 것은 우리의 경제 성장 기적과 같은 '대한민국 사회 성장의 기적'이다.
모든 국민이 열심히 일한 결과지만, 국가의 기본 틀을 입안하고 만들어간 역대 대통령들의 공(功)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건강보험의 아버지와도 같다. 그는 집권 초기에 선언적 내용이긴 하지만 건강보험의 기틀을 잡았고, 1977년에 건강보험을 실질적 제도로 출발시켰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 건강보험은 농·어촌지역 의료보험, 자영업자 의료보험으로 확대돼 전 국민 의료 보장을 달성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직장과 지역으로 나뉘어 있던 건강보험을 통합시켰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암 치료비에 대한 지원을 크게 늘렸다. 우리는 작년부터 장기 요양이 필요한 노인들에 대한 지원도 시작해 가계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고 있다. 모두가 대통령들의 결단 없이는 이뤄지기 어려운 일들이다. 이제 우리 의료는 산업으로서도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이다.
어느 날 한반도가 통일될 때 북한 주민들이 가장 큰 축복으로 느끼게 될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건강보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건강보험은 자유민주체제를 지키는 요새와 같다고도 믿고 있다. 우리 대통령들이 많은 과오도 저질렀고 요즈음엔 그 중 한 사람의 위선이 국민을 분노하게 하고 있지만, 이들이 그래도 고마운 것은 이 튼튼한 요새를 짓고 지켜온 사람들 중에 그들을 빼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감이 가지요? 대통령들이 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분들이 다 국민을 위해서 일했다는 것을 지적한 말입니다. 이분들의 잘못한 것만 들추어서 우리가 욕한다고 얻을 이익이 무엇이며, 그런 환경에서 자식을 키우면 우리 후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난 봄 특별기도회 시간에 제가 공권력을 보호하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용산참사를 규탄한다는 시위를 하면서 시위대가 경찰을 폭행하는 사건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쓴 글입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고 시위를 해야 할 정당한 사유가 있다 할지라도, 질서를 유지하고 법을 집행하는 경찰을 폭행하여 다치게 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안녕을 지켜줄 사람을 빼앗은 것이요, 사회질서를 파괴해 버린 심각한 범죄입니다. 경찰을 폭행하는 일은 법의 보호가 필요한 이웃들을 무법천지에 밀어 넣는 일이며, 자신의 보호막도 걷어치우는 무지한 일입니다. 자기 집에 강도가 들면 누구에게 신고할 것이며, 자기 자식이 납치되어 끌려가면 누구에게 범인을 잡고 아이를 찾아달라고 할 것입니까?
사람이 어른을 존경하고 권위를 인정하며 법치국가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롬 13:1-4에서는 구체적으로 법과 권위에 복종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자기나라를 침략해서 동족을 포로로 끌고 간 원수의 나라의 법도 지키고, 그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렘 29:7에 보면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너를 잡아다가 포로 삼은 나라이지만 네가 거기서 사는 한, 그 나라가 평안해야 네가 평안을 누리고 살아남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물며,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입니까? 내가 선거로 뽑아 세운 내 나라 지도자를 비난하고 그들이 하는 일을 반대한다면, 나라를 허물기로 작정한 사람이고, 자신과 후대에게 화를 자초하는 짓이 아닙니까?
적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온다면 누가 막아 줄 것입니까? 나라에 질서가 잡히고 대통령의 말이 영이 서서, 군인들이 대통령의 명령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목숨 걸고 싸워야 나와 내 가족이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디서나 대통령 욕하고, 지도자들을 싸잡아 욕하며 비난이나 하면, 위기에 대통령의 명령이 힘이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무기력해지고 영이 서지 않으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당합니다.
내 나라 대통령을 지지하고, 내 정부를 믿어주고, 내 자식 가르치는 선생님을 존중하고, 내가 사는 동네의 치안을 지켜주는 경찰을 인정하고, 그가 설정한 선을 지키는 것이 내가 평안하고 안전하게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계명을 말씀한 다음에 사람들에 대한 계명 중에는 첫 번째 자리인 다섯째 계명으로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중요한 계명을 부모를 공경하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이 순종해야 할 권위 중에서 가장 가깝고 가장 피부에 닿는 권위가 부모님이니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대표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집에서 자기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기초가 바로 된 사람이기 때문에 더 볼 것이 없습니다. 당연히 세상의 권위에도 존중하고 복종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집에서 자기를 위해서 갖은 고생을 하며 키운 제 부모를 우습게 알고 거역한다면, 그 사람은 더 볼 것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에 고마운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고, 세상에 무서운 것도 없는 막된 사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이 부모를 공경하고 자기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까? 성경은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부모 공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해야 하고, 하나님은 그것이 가장 옳으니까 명령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게 옳은 것이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명령은 언제나 옳고 유익하다.” 이것을 알고 부모를 공경하고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의 경우, 그는 옳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의 기준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대로 자기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고, 의의 기준을 가진 사람이며,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항상 옳고 유익합니다. 제 5계명도 내게 가장 옳고 유익한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만드신 분이요 부모를 통하여 나를 만드시고 키우시고 관리하신 분입니다.
피조물에게는 창조주의 명령보다 옳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라는 대로 하면 보호할 가치가 있고, 거역하면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옳을 뿐 아니라 내게 절대적으로 유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를 낳고 길러준 부모를 하나님의 명령대로 공경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공경을 당신 향한 감사로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부모만 공경 잘해도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부모를 공경해서 하나님께 칭찬과 상을 받고 유익하고 안전한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어른들도 어른 노릇을 잘 해야 합니다. 4 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대통령이, 선생이, 목사가, 부모가, 연장자가 자기 노릇을 잘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얕은 경험이나 판단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보호할 사람을 휘두르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부모노릇, 선생노릇, 목사 노릇, 대통령노릇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아비는 아버지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권위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할지라도, 부모가 존경받지 못할 일을 저지르고 지도자가 지탄을 받을 문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사람은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저를 낳아주고 길러준 공은 그가 저지른 잘못의 크기보다 백배나 큰 것이고, 선생님이 잘못했다고 해도 제 지식의 체계를 세워준 공을 없앨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나 스승이 잘못했다고 해서 부모와 스승을 욕하면 그것은 패륜이고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절대로 옳은 행동이 아니고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기둥과 담과 같은 것이 바로 부모로 대표되는 권위, 즉 선생이고 경찰이고 재판관이고 대통령입니다. 기둥이 무너지고 담이 헐어지면 건물은 무너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요 우리를 보호하는 담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으로 옳고 유익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권위를 존중해서 옳은 삶을 사시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약속있는 첫계명
에 6:1-4 / 윤태성 목사
인터넷에서 본 짧은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쉬는 날이고 엄마가 일하러 나갑니다. 어린 아들은 평소에 밤늦게 들어오고 무뚝뚝한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합니다. 차라리 아버지가 낚시라도 가버렸으면 좋겠다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답답함을 참지 못한 아이는 비디오 가게로 갑니다. 동전을 털어서 자신이 볼 비디오를 고르다가 생각을 바꿔 아버지와 함께 볼 비디오를 고릅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함께 비디오를 보고 라면을 끓여 먹게 됩니다. 그 사이 아버지는 많이 달라진 듯 보입니다. 일하고 돌아올 아내를 위해 저녁엔 찌개 까지 끓입니다. 오붓한 저녁이 되고 아이는 편안히 잠이 듭니다. 아내는 남편이 달라진 것 같다 이야기합니다. 남편은 비디오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잠시 전으로 돌아가면 직장의 일로 절망한 아버지는 베란다에 나가서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던데 저 멀리서 어린 아들이 비디오를 들고 달려옵니다. 그 애가 달음박질하는 모습이 아버지의 가슴에 깊이 박힙니다. 아들과 함께 비디오를 볼 때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흐릅니다. ‘이 아이는 어디서 왔는가’ ‘아이의 작은 코 손가락이 자신을 닮았습니다’ ‘킥킥거리며 웃는 모습은 자신의 웃을 때의 모습입니다’ 비디오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서 작은 용기를 같아봅니다 ‘아이를 위해서는 어떤 것도 참고 이겨내야 한다는 힘을 얻습니다’ 아이가 가져다 준 것은 비디오가 아니라 가슴 가득한 봄볕이였고, 아니면 희망이였는지도 모릅니다.
짧은 글이지만 우리에게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주는 말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가장 가까운 사이라서 가장 영향을 많이 주기도 하지만 또한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관계입니다. 미얀마 속담에 “괭이의 날을 밟으면 자루가 얼굴을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괭이의 날과 자루는 하나로 묶여져있는 관계처럼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이러 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갈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가족의 의미가운데서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자녀를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은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남편과 아내의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22절에 아내들에게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28절에 남편들에게는 “네 아내를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먼저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자와 여자의 생리적 차이로만 생각하면 여자 분들이 억울할 일이지만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면 남녀의 특성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남자를 분해해서 보면 DNA 자존심, 명예, 공명심 주로 이런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을 대할 때 복종이라는 특성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에게 복종할 때 그가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와 반대로 여자는 남편이 사랑할 때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만든 제품의 기능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마찬가지 원리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도 흐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는 부모와 자녀을 양육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4절 “너희 자녀를 노엽게 말라” 노엽게 한다는 말은 자극하다, 약 오르게 한다, 격노케 하다는 뜻으로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무시하여 비난하거나 낙심케 하는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아이들은 희망을 가지고 자라야하는데 아이를 가장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 부모님의 정서적 학대입니다.
ex) 얼마 전에 9시뉴스에서 방송된 내용을 보면 자녀를 낙심케 하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가가 나왔습니다. 절망하게 하는 것을 오늘의 용어로 정서적 학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서적인 학대라고 하면 자녀들에게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고 위협하거나 통제지배와 같은 부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꾸중 책망 무관심을 이야기합니다. 어린 시절에 경험하는 아동학대가 있습니다. 성경 공부 반에서 나누기도하였지만 아동학대에는 부모로부터 매를 맞는 신체적인 학대와 혹은 성적인 학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세 가지 정서적, 성적, 신체적인 학대가운데 성인이 되었을 때 자살율이 가장 높은 것은 무엇일까요? 통계에 의하면 성적 학대는 2배, 신체적 학대 1.8배인데 반해 정서적 학대가 4배가 높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아이를 노엽게 하는 것은 우리의 아이를 절망하게 합니다. 아이를 너무 노엽게 하는 것은 자녀에 대한 지나친 무시 가혹 편애 등은 청소년문제와도 연결이 됩니다. 자기 비하나 자기 존중감이 상해서 사소한 스트레스에도 자살의 충돌이 높게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말라 소극적인 권면에 이어서 바울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는 적극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교양은 어린이를 양육함에서 비롯 되어 교육, 훈련, 징계 등의 뜻을 지닌다. 이는 자녀를 교육하는 데 있어서 책벌을 통한 훈련 즉 징계로 잘못됨 점을 교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한 훈계는 교양이 책벌을 통한 훈련인 반면에 훈계은 말을 통하여 자녀를 깨닫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양과 훈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면 삼상 2장의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으로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고 하나님께 드려야할 제물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자신이 취하는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럼에도 엘리는 자녀를 그의 자녀들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지 못하였습니다. “내 아들이 그리 말라 네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아니하니라” 그저 작은 꾸중으로 그쳐버립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그의 아들들과 엘리 제사장이 결국 멸족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시대에 가장 큰 문제가 부모가 권위를 잃어 가는데 있습니다. 특별히 아버지의 권위를 잃어갑니다. 모든 교육이 어머니에게 집중이 되다보니, 아버지의 위치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인 교육의 방법이 아버지가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야한다. 권위를 스스로 내려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옛말에 “손자도 귀여워하면 할아버지 상투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가 공부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됩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가는 것보다 시험 준비하러 학원에 간다 하면 불신앙도 용납이 됩니다.
ex) 부모의 권위가 무엇일까? 따라서 합니다. “지킬것은 지켜가는 것이다”얼마 전에 아시는 분이 통진에 입원을 하셔서 심방을 간적이 있습니다. 통진은 강화가는 곳에 있어서 불노동에서 한참 떨어져있습니다. 병실에 조금 있으니 그분의 대학생 아들과 고등학생 딸이 버스를 타고 아버지 문병을 옵니다. 잠시 후 저희가 일어서는데 방에서 인사하는 것이 아이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나옵니다. 현관에서 환자분에게 ‘따님 저녁에 야간 자율학습 안해요’ 그런데 그분이 자신의 원칙을 이야기합니다. “보통 보모들이 공부하면 다른 것도 열외를 많이 시켜서 부모가 아픈데도 찾아오지 않고 공부하라고 한다. 그것은 자녀를 망치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께 이야기하고 야간 자율학습을 중지하고 오게 하였다” 자식이 귀엽다고 부모를 찾아오지 않게 하는 것은 아이를 망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의 권위를 가져야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의 위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입장이기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대행자가 부모의 위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명기 21장에 보면서 놀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치 아니하면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을 합니다. ”우리의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여 술에 잠긴자라“ 그러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를 돌로 쳐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유심히 본 것은 자식의 불순종을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시면 정말 자식이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조사관이 와서 죽이거나 재판을 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즉결심판으로 돌로 쳐서 죽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부모는 가르침의 권세와 생명의 권세가 부모에게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에 권위가 상실이 됩니다.
ex)우리가 지난 정부를 거치면서 권위주의 청산을 외쳐왔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권위주의를 청산한다는 것은 중요한데 있어야 될 자리에 권위가 없어서 얼마나 많은 혼란이 빚어져왔습니까? 오늘 이 시대는 권위를 배격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도 총장님이 나와서 신입생 앞에서 젊게 하고 춤을 추는 것이 민주적이라 생각을 합니다. TV를 보더라도 중후한 연기를 선보여야 할 남자 중견 탈렌트들이 코메디언처럼 자신을 망가뜨리는 연기에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권위주의 혹은 권위적이다는 말은 배격이 되어야하지만 권위는 존중이 되어야합니다. 탈 권위는 마귀의 전략입니다. 권위라는 것은 지도력이고, 권위가 있어야 공동체가 든든히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권위는 지켜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나타나는 교회는 목회자의 권위가 세워진 교회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권위가 행사가 되어야 그 공동체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리더쉽의 약함을 겸손으로 가장하지 말라 이야기 합니다. 권위를 잃은 가장이 목회자가 나는 겸손한 리더쉽을 가지고 있다 말하지만 권위는 공동의 선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권위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하면서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자상하지만 자녀가 잘못하면 엄격하게 부모의 권위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해야합니다. 부모가 권위를 가지고 교육하라 이것이 첫 번째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2. 부모에게 순종하라.
오늘은 우리가 어버이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송강 정철 선생은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 같은 가없는 은덕을 어디 대어 갚사오리”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유교에서도 인륜의 기본으로써 효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은 단순한 윤리의 식이 아니라 주를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나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의 부모를 이야기합니다. 성경에는 순종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를 이야기하고 그 동일한 태도를 가지고 부모님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님께 공경해서 얻은 복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무엇인가 잘되려는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형통의 복이 있고, 십일조를 주님 앞에 드리는 사람에게 물질의 복이 있고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장수와 축복의 비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비밀입니다. 저는 이런 순종의 삶을 살아간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보라면 이삭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삭을 보시면 그의 다른 족장과는 확실하게 다른 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성경의 10장 이상을 차지하는데 반해서 이삭은 몇 장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게 나왔다고 해서 그의 비중이 작은 것은 아닙니다. 이 이삭은 순종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예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삭이 한일은 먼저 아버지 아브라함을 따라 모리아산에 갔고 그곳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결박하고자 할 때도 그냥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순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직업을 보아도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서 목자의 일을 감당합니다. 그는 하나님께로 복을 받아서 농사를 지을 때에도 백배의 수확을 얻게 됩니다. 백배의 수확은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말씀처럼 순종하는 자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이 땅의 최고의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나오는 말
저는 지난 월요일에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뵙고 왔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줄 것이 있다고 말씀을 하셔서 무엇인가 했더니, 집에 가서 고추를 심으라고 노란 두부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마대자루에 가져갈 흙을 담아주십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 불노동에 가면 흙이 더 좋아요” “그 공임이면 사서 먹는게 더 싸겠어요” 말씀드릴까 하다가 정성을 생각해서 무거운 흙을 트렁크에 싣고 왔습니다. 흙을 싣고 와서 기름값도 안 나오겠지만 자식을 위해서 그 흙을 담아주는 부모님을 마음이 참 감사했습니다. 저희 가족이 떠나는 자리에서 오랬동안 손을 흔들어주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한문의 친할 친 자가 생각이 납니다. ‘친할 친(親)’자는 ‘나무 목(木)’ 자 위에 ‘설 립(立)’ 자가 있고, 그 옆에 ‘볼 견(見)’ 자가 합성된 글자입니다. 즉 ‘나무 위에 서서 보는 것’이란 뜻으로, 장에 갔던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더 잘 보려고 동구 밖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살펴보는 애틋한 모정을 표현한 것이 ‘친할 친’자입니다. 그때 아들이 어머니를 만나 어머니를 지게 위에 업어드립니다. 그래서 ‘늙을 로(老)’ 자 밑에 ‘아들 자(子)’ 자가 합성된 자, 즉 아들이 늙으신 부모님을 업어드리는 뜻을 가진 글자가 바로 ‘효도할 효(孝)’자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섬기는 자세가 이와 같아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부모님을 자녀를 믿음으로 교훈하고 훈계하고 자식은 부모님의 가르침을 기쁨으로 받아드리고 순종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고향에서 부모님 곁을 떠나오며 제 자식을 바라봅니다. 조금 있으면 제가 아이들을 위해서 흙을 퍼주고 아이를 생각하는 제 마음을 기쁘게 받아주었으면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의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구원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흙은 천국의 모습입니다. 그 흙으로 우리는 지상에서 천국을 밟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식을 키우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부모님을 바라보며 은혜에 감사하고, 우리의 인생은 참 행복하다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이런 행복을 주신 주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이 여러분과 함께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약속이 있는 첫계명
엡 6:1-3 / 박인걸 목사
옛날에 한 시골에 내외가 비둘기처럼 살았습니다. 40이 훌쩍 넘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너무 귀여웠습니다. 늦둥이 아들이 어떤 짖을 해도 사랑스러웠습니다. 조그만 손으로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때려도 “잘한다. 잘한다.”고 하며 키웠습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 얼굴을 때려도 잘한고 하니까 수시로 엄마 아빠의 얼굴을 때렸습니다. 그래도 “잘한다. 잘한다. 내 새끼, 내 새끼”하며 키웠습니다. 이 아이가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었습니다. 외딴 시골에서 보고 들은 것 없이 자란 이집 아들을 청년이 되어서도 엄마 아빠의 얼굴을 때렸습니다. 이제는 때리는 것이 아니라 후려갈기는 것입니다. 어릴 적에는 아프지 않았는데 청년이 된 아들이 때릴 때는 아파 죽을 지경이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잘한다고 해 놓고 지금 와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아들한테 맞아 죽에 생겼습니다.
하루는 이 집에 점잖은 나그네 한 분이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자고 가게 되었는데 시름에 잠겨있던 부부는 손님에게 자초지종을 털어 놓았습니다. 아닌 게 하니라 조금 있으니 아들에 산에서 나무를 한 짐 짊어지고 마당가에 벗어 놓더니 다짜고짜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뺨을 후려갈기는 것입니다. 놀란 노인이 “왜 보무님을 때리느냐?”고 하였더니 이것이 효도라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은 그 젊은이에게 자신이 사는 도회지 구경을 줄 테니 며칠만 자신을 따라 가자고 하였습니다. 젊은이는 그 노인을 따라 나섰습니다. 노인의 집에 이르렀을 때 그 집 아들, 며느리, 손자가 노인한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딸과 며느리가 밥상을 들고 들어와 시중을 드는 모습을 보던 청년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젊은이는 “노인에게 댁에서는 왜 젊은이들이 먼 길을 다녀온 아버지한테 효도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지 이 노인은 젊은이에게 “자네가 부모 얼굴을 때리는 효도는 구식이고 우리 집 자녀들이 하는 효도는 신식일세.”깨달은 젊은이는 집에 돌아가 신식 효도로 부모를 잘 섬기는 착한 아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래 동화입니다.
성경에 불효한 두 인물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함’이고 한 사람은 ‘압살롬’입니다. 함은 노아의 아들입니다. 홍수 심판 후 노아 가족은 농사를 지었는데 포도주를 만들어 먹고 취한 노아가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모양으로 잠을 자는 모습을 발견한 함이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허물을 감추어 드리지 못하고 흉을 보며 다녔습니다.(창9:18-27) 이 일을 알게 된 노아는 아들 함을 저주하였고 그 후손은 대대로 불행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또 한사람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입니다. 그는 이복누이 다말을 욕보인 이복 형 암논을 살해하고 외갓집이 있는 그술 땅에 3년을 망명생활을 하다 요압장군의 간절한 요청으로 다윗의 진노가 수그러들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못 된 압살롬은 왕궁에서 대낮에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고(삼하16:22) 아버지 다윗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예루살렘 왕궁을 쳐들어가 아버지의 왕권을 찬탈합니다. 다급한 다윗은 아들에게 쫓겨 맨발로 한 밤중에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 비탈을 돌아 먼 길르앗 땅으로 피란을 갑니다. 전열을 가다듬은 다윗 군대와 아들 압살롬의 군대가 에브라임 수풀에서 최후의 접전을 벌리던 중, 압살롬 군사 20,000명이 죽임을 당하고 전세가 압살롬 쪽으로 불리해 졌습니다. 노새를 탄 압살롬이 다윗의 군대와 마주치자 급히 도망을 치던 중에 그의 묶은 머리채가 나뭇가지에 걸리는 순간 노새가 다리 밑으로 빠져 나가고 압살롬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습니다. 보고를 받은 다윗의 수장 요압이 압살롬의 심장을 창으로 찔렀고 아직 죽지 않은 압살롬을 무기를 든 청년들이 쳐 죽였습니다.(삼하18:9-15)불효한 자들의 최후가 한결같이 불행하게 끝나는 것을 성경을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본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가정윤리입니다. (엡5:22-33)에는 그리스도인 ‘아내와 남편의 윤리’를 가르치고(엡6:1-4)는 ‘자녀의 효도와 부모의 교훈’이며(엡6:5-9)는 ‘종과 상전’ 즉 ‘사장과 회사 직원의 윤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정의 중요성과 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부모에게 자녀가 효도할 것을 가르치면서 “약속이 있는 첫 계명”(엡6:3)이라고 하였습니다. 십계명 중에 약속이 있는 계명은 5계명 밖에 없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약속 있는 첫 계명을 지켜야 할까요?
(1) 하나님의 명령입니다.(출 20:12, 엡 6:3,신 5:16)
“네 부모를 공경하라.”아 말씀은 성경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에 공경은(카베드)“존경한다. 영광되게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카베드는 명령형으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듯 부모를 공경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는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우리 각 객체는 부모가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성도들 자녀를 보면 한결같이 아버지 닮고 어머니 닮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부모에게 주신 유전인자와 염색체가 자녀들에게 그대로 대물림된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피 속에는 부모님의 피가 골고루 섞여 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오늘의 나는 부모님의 일부입니다. 특히 어머니와 나는 탯줄로 10개월간 연결 되어 하나였습니다. 이 세상에 출생할 때 독립하였지만 어머니의 피가 내 심장에 어머니의 영양분이 내 몸 구석구석에 섞여 있으며, 어머니의 정신과 사상까지 내 몸에 배어 있고 어머니의 신앙심, 종교성이 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저의 모친은 옛날 민요를 잘 불렀습니다. 그래서 제가 노래를 그래도 좀 부릅니다. 어머니는 언변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논리력이 있고 설교를 할 줄 압니다. 제 어머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언제나 리더였습니다. 설득력이 있고,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주고, 싸우는 사람들을 말려 주고, 반목질시 하는 곳에 반드시 끼어들어 화해를 시켜 주었습니다. 중매를 열여덟 쌍을 맺어 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자기들 끼리 싸우고 중신어미한테 찾아와 “우리를 왜 혼사시켰느냐?”고 대드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피가 제 몸속에 일부 흐르고 있습니다. 저 뿐이겠습니까? 여러분들 모두에게 아버지나 어머니의 피가 흐릅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나는 각각 다른 인격체이면서 동시에 뿌리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잘 공경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부모 공경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과 일맥상통입니다.
기독교를 불효의 종교라고 왜곡 선전하는 불신자들이 있는데 이는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한국전통문화는 돌아가신 분에게 제사를 효라 하고, 기독교는 살아계실 동안에 잘 섬기는 것을 효도라는 차이점입니다. 전통문화는 체면과 과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기독교는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것을 중요하시는 차이입니다. 실제로 돌아가신 분이 제사를 지내면 그 곳에 옵니까? 죽은 분이 산 사람에게 복을 줍니까? 살아 계실 때 용돈도 많이 들이고, 옷도 좋은 것으로 사 드리고, 여행도 시켜 드리고, 마음도 평안하게 해 드리고, 갖고 싶은 것도 해 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룻기서는 효도의 책이라 합니다. 베들레헴에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 그리고 기룐과 말룐이 무서운 기근을 피하여 양식에 있는 이방 땅 모압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믿는 사람이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쉽게 신앙이 변절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곳에 가서 모압 처녀들을 며느리로 맞았는데 하나님의 징계로 가장인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함께 죽었습니다. 최악의 불행을 나오미가 만났습니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을 만난 나오미는 이방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남편 없는 두 며느리를 불렀습니다. “나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려 하니 너희들은 각자 살길을 모색하라.”고 하자 큰 며느리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작은 며느리 룻은 남편과 아들을 잃고 눈물짓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모시고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나를 따르지 말고 너의 백성과 신에게로 돌아가라”(룻1:15)룻의 설득을 뿌리치고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며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것에 나도 머물 것입니다. 어머니가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죽은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합니다.”(룻1:16-17)워낙 결심이 강한 룻을 본 나오미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고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모압 여자 룻은 그곳에서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였고 오벳을 낳았으며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습니다.(룻4:20-21)다윗은 훗날 그리스도를 낳으니 효성 지극한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 예수님 족보에 드는 자손만대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런 이유를 대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부모님을 공경하십시오.
(2) 주님께서 효도하셨기 때문입니다.(눅 2:51)
“예수께서 함께 나사렛에 내려가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열두 살 때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하며 잘 받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등장 때까지 18년 동안 나사렛에서 자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하였습니다. (마6:3)에 보면 예수님은 젊은 시절 집에서 부모님을 잘 봉양하고 동생들을 잘 돌봐 주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30세 되기 이전에 요셉은 어떤 일로 죽었고 예수님이 이 집안에 장남으로서 가정을 부양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중에 십자가 아래서 눈물 흘리는 어머니 마리아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7)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면서도 자신을 위하여 울고 계신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할 정도로 효심이 극진한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에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참석하였고 마침 포도주가 떨어지자 어머니가 예수님께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인 “여자여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2:4)하인들에게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하라.”(요2:5)는 어머니 마리아의 말씀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어머니를 배려하는 아들 예수님의 지극한 효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효도하는 것이 좋을까요?. 조선일보가 50대 이상 중·장년층 커뮤니티 동우회 회원 205명에게 설문 조사한 결과. (1)“평소 자식들에게 가장 상처받은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내 놓았습니다. ① 아버지(어머니)와는 말이 안 통해요"(36.2%)1위, ② 휴대폰, 인터넷 같은 기계 작동을 두고 자녀들이 흔히 던지는 "이것도 못 하세요?"(23.5%)2위, ③"바빠서 못 찾아뵙겠습니다."(21.2%)3위였습니다. (2)“어버이날 자식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①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41.2%)1위, ② "저희 걱정은 마시고 이젠 부모님만 위해서 사세요."(30%)2위. ③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18%)는 3위였습니다. (3) 어버이날 받고 싶은 선물은 ① 현금(48%) 1위 ② 임플란트·건강검진 등 의료서비스(20.8%)2위 ③ 휴대폰 등 최신형 전자제품(15%)3위순이었고, (4) 어버이날 자녀와 함께 하고 싶은 일은 ① 여행(38.4%)1위 ②오붓한 대화(28%)2위 ③ 외식(19.3%)3위, 순이었습니다.(조선일보 2009,5,8)
전문가들은 자녀들이 나이 든 부모와 대화를 나눌 때 자존심을 살리는 방식을 유념하라고 권합니다. 정신과 전문의 박진생씨는 "부모가 나이 들어 경제력 등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면 '이것도 못 하네' '말이 안 통하네.' 같은 사소한 말에 쉽게 상처 받는다"고 말합니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인 것은 "많은 한국 부모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을 '자식 잘 키운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효도를 말씀드리면 ① 마음에 근심을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식이 아파하면 부모는 아파하고 자식이 괴로워하면 부모 역시 괴롭습니다. 제가 자녀들을 키워보니 그렇습니다. 제가 자식일 때는 부모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였는데 제가 지식을 키워 보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생각이나 결정, 행동을 할 때 부모님을 염두에 두고 근심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② 잘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 되면 부모가 어깨에 힘을 주고 삽니다. 사회 어디에서든 그 분야에서 열심히 살고 성공하면 그 부모가 크게 행복해 합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강사 김미경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아침마당에 가끔 나와 강의를 하는데 얼마나 재미있게 하는지 모릅니다. 아주 미인은 아니지만 시청자들이 화면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매력 있는 강의를 하는 분입니다. 이분은 17년 동안 200만 명의 사람들을 만났고 국내 최고의 기업 전문 강사이며 10권의 꿈과 도전을 주는 책을 펴냈고 최근에는 “가족이 힘을 합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저는 이번 주에 이 책을 다 읽었습니다. 요즘 같이 경제가 안 좋을 때에 꼭 읽을 만 한 책입니다. 핵심은 가족 성공 학입니다. 이분은 충복 괴산 증평에서 양품점을 경영하는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음대를 졸업하였고 이화여대 정책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 여성신문사에서 “미래 한국을 이끌어 갈 여성지도자 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학부시절에 알바와 고등학생 과외공부를 시키면서 대학을 졸업하였고 동생들까지 모두 뒷바라질 을 하여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큰 힘이 되었으며 자신의 딸이 국내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자 부모님은 양 어깨를 활짝 펴고 딸 자랑하며 다닌다고 책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딸이 잘 된 것은 부모님이 잘 키웠고 무엇 보다 하나님이 도와주었지만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자녀들이 반듯하게 자라고 잘 되시기 바랍니다. ③ 부모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결혼하기 전 까지는 부모 밑에 살지만 결혼한 후에도 평생토록 부모에게 짐이 되면 안 됩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은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사업을 하다 사업자금이 필요하니까 부모님 시골 땅 단보 잡히고 은행 융자 얻어다 쓰고, 자금이 더 필요하니까 부모님 집 한 채 있는 것 마저 단보 집혀 대출받았다가 사업이 망하면서 80이 다 된 노인들을 오갈 데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건 불효입니다. ④ 형제간에 잘 지내야 합니다. 형제는 부모님 다음으로 가까운 사이입니다. 형제는 우열다툼하지 말고 서로 도와주고 격려하고 밀어주고 당겨주고 그래서 함께 잘 살아가야 합니다. 요셉의 열명의 형들은 요셉을 이방 사람들에게 팔아먹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로 요셉에 잘 돼서 아버지 가족을 구원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요셉이 애급의 총리가 될 때 까지 야곱이 얼마나 맘고생을 많이 했습니까? ⑤ 영적으로 기쁘게 해야 합니다. 자시 말하면 부모님을 예수 믿게 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이미 예수를 믿고 있거나 모태 신앙이라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전도하여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게 해야 합니다.
(3) 복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엡 6:3)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땅”구약 적 개념으로는 가나안 땅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애급에서 나올 때 영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를 잘 섬김으로 가나안 영토를 주시고 그 땅에서 잘 살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현대적 의미의 땅은 물질과 부를 상징하며 장수한다는 의미는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을 칭합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땅을 영원한 천국으로 묘사할 수 있고, 장수를 영원히 사는 개념으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경륜의 출발은 개인구원이며(엡1:7) 그 다음은 이상적인 가정생활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이상적 창조질서의 중심이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정의 하나 됨은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기초를 이룹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잘 섬기고 효도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물질과 장수를 주시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임금이 개성까지 행차를 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연변에 늘어서 임금님 행차를 구경하는데 어떤 총각이 꼬부랑 할머니를 등에 업고 길 가에 서서 임금님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신하들에게 그 청년이 늙은이를 업고 있는 연유를 알아오게 하였습니다. 이유인즉 이곳에서 30리 떨어진 외딴 산촌에 사는 노인인데 평생소원이 임금님 행차하는 것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 하여 아들이 새벽부터 이곳까지 업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그 소식을 듣고 천하에 훌륭한 효자라고 여기며 금전 1,000냥과 쌀 한 섬을 내렸다고 합니다. 속편이 있습니다. 제기보기에는 속편은 없었던 것을 사람들이 훗날 지은 것 같습니다. 같은 동네에 천하에 불효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효자 아들이 임금으로부터 돈도 벌고 쌀도 선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돈 벌기 쉽네.” 하면서 임금님 행차 소식을 듣고 가기 싫다는 어머니를 등에 업고 몫 좋은 곳에 서 있었습니다. 역시 임금님 눈에 띄었습니다. 신하가 그 아들에 대하여 알아보고는 임금님께 사실대로 보고하였습니다. “천하에 불효자식인데 지난 번 임금님 행차 때 한 효자를 시상한 이야기를 듣고 오늘 여기 오기 싫다는 어머니를 등에 업고 저렇게 서 있다 합니다. 벌을 내리소서.”그러자 임금님은 “그렇지 않다 어제까지는 불효하였어도 오늘은 효도 흉내라도 내니 저 아들에게도 지난번과 똑같이 상을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자녀가 효도하면 국가도 상을 주고 이웃으로부터 칭찬이 있고 그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를 배워 자신들에게 효도를 하게 되는 이중 삼중의 축복을 받습니다. 만약 내가 지금 자녀들로부터 효도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 자신의 부모에게 효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부모님께 효도해야 훗날 자녀가 자신에게 효도할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축복의 원리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부모님께 모두 다 효도하고 계신 불 알지만 본문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되짚어 본다면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이 효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효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잘 하겠습니다.”“오래 오래 사세요.”
자녀들아
엡 6:1-3 / 김영규 목사
순종하라
자녀의 첫 번째 의무는 순종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순종은 인간 사회 질서의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 사회에서 순종해야 될 관계들을 다양하게 말씀합니다. 첫째로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2:51)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딛1:6) 둘째로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3:22) 셋째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벧전 3:1, 엡5:22) 넷째로, 백성들은 공권력에 순종해야 합니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딛3:1) 다섯째로, 성도들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이 명령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 관계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엡5:23)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5:16)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3:22) 모든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사회의 질서입니다. 자연계에 자연 법칙이 있듯이 인간 사회에도 하나님의 질서가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머리입니다. 상전은 종의 머리입니다. 그리고 모든 관계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대한 순종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 한 사람 아담이 불순종 할 때에 전 인류가 망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불순종을 싫어하십니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실 때에 전 인류가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그만큼 하나님은 순종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본성에 부합하는 응답입니다. 본문에 보면 순종하는 것이 “옳으니라” 했습니다. “옳다”(divkaion)는 말은 법률적인 의미 이전에 바른 양심에 비추어서 옳다는 말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선한 양심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선한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한 양심에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양심의 법을 새겨 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순종해야 할까요? 첫째는 언제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의 아래에 있습니다. 이 위치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본문 1절은 헬라어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a; tevkna, uJpakouvete toi'" goneu'sin uJmw'n ((ejn kurivw/)): tou'to gavr ejstin divkaion. ” “Children, obey your parents in the Lord, for this is right.”(NASB) “순종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uJpakouvete”입니다. 이 말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uJpov”(아래에서) “ajkouvw”(듣는다)는 뜻입니다. 마치 임금님 보좌 아래 있는 신하가 왕의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순종하듯이, 자식은 부모 아래 자리 잡고 있어야 됩니다. 자식의 위치는 부모 아래입니다. 이 위치에 있어야만 순종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토를 달지 않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기 전에 “왜?”라고 묻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고 예의가 없습니다. 어른이 뭐라고 하면 그냥 순종하는 법이 없습니다. 뭐든지 설명을 해줘야만 순종합니다. 부모가 어려서부터 그렇게 만들어 놨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뭐라고 하면 대뜸 “왜요?”라고 되묻습니다. 왜요는 일본 놈 담요가 왜요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왜 모세에게 순종해야 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밤낮 불평만 했습니다. 왜 이 고생을 하면서 광야를 가야하는가? 왜 굶주리는가? 왜 물이 없는가? 왜 가나안에 가야 하는가? 결국 “왜요, 왜요?” 하다가 다 망했습니다.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토 달지 않고 순종하여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부모님이 뭐라고 하시면 묻지 말고 순종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입니다.
셋째는 빠른 순종입니다. 요즘 신령한(?) 신자들 보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데도 기도해 보고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누구에게 기도해 봅니까? 빠른 순종은 천사들의 특징입니다. 법궤 위에 놓여 있던 그룹(천사)은 날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언제나 재빨리 순종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순종에 가장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에 항상 이른 새벽에 순종했습니다.(창21:14, 22:3) 마찬가지로 자식은 부모가 뭐라고 하면 재빨리 순종해야 합니다.
공경하라
자녀에게 주시는 두 번째 명령은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2)
“tivma to;n patevra sou kai; th;n mhtevra h{ti" ejsti;n ejntolh; prwvth ejn ejpaggeliva/” 자녀는 부모님께 순종할 뿐만 아니라 공경해야 합니다. 공경 없는 순종은 참 순종이 아닙니다. 공경 없는 순종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순종이 소극적 명령이라면, 공경은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공경하라”는 말, “timavw”를 영어로 번역하면 “to value”입니다. 가치를 평가하다, 높이 평가하다는 뜻입니다. 영문 성경들은 이 단어를 “honor”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공경이란 부모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부모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부모가 내 생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부모가 내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그 가치를 알고 표시하는 것이 곧 공경입니다. 부모가 왜 중요합니까? 부모의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랍비들은 제5계명을 첫째 돌비에 포함시킵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제5계명을 둘째 돌비에 포함시킵니다. 첫째 돌비는 대신 관계의 계명이고, 둘째 돌비는 대인 관계의 계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 랍비들은 제5계명을 첫째 돌비에 포함시킬까요? 부모 공경은 하나님 공경의 한 부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모의 위치가 보통 인간들의 위치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자녀에게 부모는 하나님 다음의 위치에 있습니다. 부모는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부모가 하는 역할이 뭡니까? 첫째로 자식에게 생명을 줍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은 분들입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인간이 존재하게 하신 분입니다. 존재의 출처입니다. 둘째로, 자녀의 양육자입니다. 짐승은 낳자마자 곧 일어나 걷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일 년 넘도록 먹이고, 닦아 주고, 입혀 줘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성인이 되도록 보살펴 주지 않으면 생계가 불가능합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생존에 대한 빚을 지고 있습니다. 셋째로, 부모는 자녀의 신앙 교육자입니다. 부모의 최대 사명은 자식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주고, 섬기도록 가르치는 일입니다.(신6:4-) 솔로몬은 아들을 앞에 놓고 끝없이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잠언) 넷째로, 부모는 자식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통해서 자녀들을 축복하십니다. 부모는 가정에서 자녀들을 축복하는 제사장입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했고, 야곱은 열 두 아들들을 축복했습니다. 이 축복은 그대로 자녀들과 후손에게 실현되었습니다. 부모를 통하지 않고 자식에게 축복이 내려지는 법은 없습니다. 에서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울면서 매달렸지만 끝내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야곱을 축복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녀를 축복할 때에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야만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경해야 하나요? 영문 성경에 보면 부모를 명예롭게 해드리라고 합니다. Honour! 이 말은 공경이란 의미도 있지만, 명예롭게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공경이란 결국 부모를 명예롭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부모님이 자존감을 갖게 해 드려야 합니다.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 드려야 합니다. 부모님은 어떨 때에 자존감을 가지고 행복을 느끼실 수가 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두 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적절한 생활보장을 해 드릴 때입니다. 노년에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면서 품위를 유지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입을 의복이 없고, 거처가 없으면서 품위를 유지하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기본적인 삶이 보장 될 때에 자존감이나 자긍심을 갖게 됩니다. 자식은 당연히 부모님께 이런 삶을 보장해 드려야 합니다. 용돈을 드리는 것도 잊지 마세요. 액수가 얼마가 되었든지, 부모님이 돈을 쓰시든지 안 쓰시든지 정기적으로 정확하게 드리세요. 성인이 될 때까지 먹이고 입혀주신 부모님께 신세 진 것을 생각한다면 만분의 일이라도 갚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둘째로, 자식들에게 보고를 받을 때입니다. 부모의 자존감이나 자긍심은 자식이 자신의 신상을 얘기해 줄 때 느끼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령관이 별 달고 자리에 앉아 있는데 부하들이 영 보고를 안 합니다. 그 사령관이 자존감이 있겠습니까? 부모님의 행복은 자식들이 얘기를 잘 해주는 데서 생깁니다. 자식은 부모님께 자신의 움직임에 대해서 항상 보고를 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자식에게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그들의 거취와 움직임입니다. 어디를 가는지, 오는지, 무엇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항상 궁금해 하십니다. 자식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 큰 사람이 저 알아서 하는 데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으신가?” 저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식 낳아 기르고 시집 장가 보내니까 부모의 심정을 알겠어요. 부모는 죽을 때까지 부모입니다. 항상 자식이 걱정되고 궁금합니다. 자식들의 형편을 조금이라도 들으면 안심합니다. 그래서 보고를 해 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자식들은 사춘기가 되면, 특히 아들들은 문 닫아 걸고 일체의 교신을 중단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무엇을 물으면 “예, 아니요” 식의 단답형 대답만 합니다. 그렇다고 신문기자처럼 꼬치꼬치 묻기도 자존심 상하고, 더러워서 모른 척 합니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자녀들이여 부모님께 성실히 보고합시다.
공경은 계명(ejntolh;)입니다. 법입니다. 앞서 순종하라고 했지요? 순종은 “옳으니라” 했습니다. 옳다(divkaion)는 말은 양심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경하라는 말은 “계명”(ejntolh;, commandment)이라고 했습니다. 법적인 명령입니다. 순종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제재를 받는다면, 공경은 외적인 제재를 받는 법률입니다. 그만큼 의무적인 일이란 뜻입니다. 공경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되고 안 하면 처벌 받는 의무입니다. 오늘 자녀들은 결단하세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마음으로 부모님을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부모님께 대한 순종과 공경은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약속(ejpaggeliva/)이 있습니다! “h{ti" ejsti;n ejntolh; prwvth ejn ejpaggeliva/” 어떤 약속인가요?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3) “i{na eu\ soi gevnhtai kai; e[sh/ makrocrovnio" ejpi; th'" gh'"” “you will live a long life, full of blessing”(NLT)
첫째로, 지상에서의 WELL BEING입니다. “eu\”는 번역하면 “well” 혹은 “good”입니다. “givnomai”는 be 동사입니다. 문자 그대로 well being입니다. “IT MAY BE WELL WITH YOU”(NASB)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30:9)
가장 주목할 WELL BEING은 자식의 WELL BEING입니다. 즉, 자녀 교육의 성공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면 교육은 100% 성공입니다. 자녀는 100%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잘 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순종은 교육의 기본 틀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면 모든 교육이 잘 됩니다. 순종은 교육의 틀입니다. 순종이 없이는 어떤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요즘 아이들 왜 교육이 안 되는지 아십니까? 순종의 틀을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라는 것이 현대 교육의 중요한 이론입니다. 왜 사리분별을 못하는 애들의 말을 어른이 들어줘야 합니까? 당연히 어른의 말을 아이들이 듣는 것이 순리입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회교도들의 종교 교육과 기독교인들의 종교 교육에 대해서 비교해 봅시다. 왜 십대의 어린 회교도들 가운데 자살 특공대 지원자들이 수 천 명씩 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오늘날 기독교 자녀들이 주님을 위해서 죽으려고 줄 서서 기다리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회교도에 주일학교가 있습니까? 눈높이 교육이 있습니까? 계단공과가 있습니까? 제자 훈련이 있습니까? 그냥 어른들 하는 것 똑같이 하는데 100% 신앙을 전수 받습니다. 왜 교육이 잘 됩니까? 순종의 틀 속에서 교육하니까! 회당에서, 가정에서, 부모에게 절대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신앙교육을 받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교육의 틀입니다. 자녀에게 부모는 존경과 공경의 대상이며 순종의 대상입니다. 일단 어른에게 순종해야 모든 교육이 됩니다. 가정교육, 학교 교육, 교회 교육 다 마찬가집니다. “봉숭아 학당” 개판 교실 만들어 놓고 무슨 교육이 됩니까? 가정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할 때에 인성 교육이 제대로 됩니다. 인성교육이 제대로 된 바탕에서 신앙교육도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바르게 되면 사회생활도 바르게 됩니다. 인성이 바로 되면 인간관계도 바로 맺게 되니 성공적인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WELL BEING의 인생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둘째로, 장수의 복입니다. “장수”란 말은 “makrocrovnio"”인데, “긴 시간”이란 뜻입니다. 오래 산다는 뜻입니다. 헬스클럽 다니는 것보다, 병원에서 건강관리 하는 것보다, 매일 운동하는 것보다, 효도 하면 하나님이 오래 살게 해 주십니다.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경하면 지상에서 잘 사는 것은 완전 보장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약서입니다. WELL BEING에 장수 합니다. 이 원리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은혜와 책임
엡 6:1-4 / 이정익 목사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은혜를 입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 은혜의 대상이 많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를 보내심으로 구원을 받고 자녀 삼으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이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국가의 은혜도 큰 은혜입니다. 국가가 내게 무엇을 해 주었느냐고 말할런지 모르지만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손에 쥐어지는 것만 복이 아닙니다. 국가가 부강하면 내 삶도 내 인생도 부강해 집니다. 국가가 초라하면 내 삶도 인생도 초라해집니다. 나라없는 민족인 팔레스타인이나 내몽고족 그리고 티베트 족들을 보면 얼마나 초라합니까.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을 보면 나라가 초라하니까 국민들의 삶도 신분도 초라합니다. 그래서 남의 나라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느라 돌아다닙니다.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기 나라가 좋으면 사람들이 왜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겠습니까. 국가는 나의 삶에 많은 은혜를 입혀주고 있습니다. 스승의 은혜도 큰 은혜입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눈을 뜨게 해 주고 세상을 알게 해 주고 지성을 열게 해 줍니다. 학교는 참 중요한 곳입니다. 검정고시를 통해서 빨리 월반하려고 과정을 무시하고 빨리 끝내서 조기졸업을 하려고 하는데 빨리 마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디지만 과정을 거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한꺼번에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디고 느려도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습니다. 이웃과 친구의 은혜도 큰 은혜입니다. 그들이 있음으로 내 삶이 행복하고 그들과 나누는 교제의 은혜는 우리에게 삶의 질을 높여 줍니다. 이웃과 친구가 없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삭막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부모의 은혜는 더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부모는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양육하시고 사랑하신 분입니다. 사랑도 기막힌 사랑입니다. 자녀는 당연히 그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천안함 침몰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울부짖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울부짖음을 보면서 부모 말고 누가 저렇게 울부짖어 줄까를 생각하였습니다. 형제도 다릅니다. 삼촌도 다릅니다. 눈물의 질이 다릅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실신하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이제 나 혼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짓겠지만 그 점이 부모와의 다른 점입니다. 부모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이런 은혜를 기억하고 알고 살아가라고 성경은 강조하십니다. 오늘은 어버이의 은혜를 생각해 보는 주일입니다. 매년 어버이 주일에 설교하다 보니까 본문선정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금년 어버이 주일에는 또 어떤 본문으로 말씀을 드릴까 고민하며 성경에서 적당한 말씀을 찾으려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찾은 결과 그래도 가장 적합한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이었습니다. 이 본문은 여러 번 본문으로 선택하였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본문은 오늘 자녀들에게 그리고 부모들에게 짧지만 가장 적합한 말씀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부모를 알라고 강조하시고 그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계명이고 자식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결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이 당부의 말씀을 경청하고 소중히 받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부모들은 자식을 잘 훈련시키고 양육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은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잘 다듬어 양육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녀의 할 일
자녀에게는 자녀의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버이의 은혜를 아는 일입니다. 본문은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것이 최고의 계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길이 네가 잘되고 성공하는 비결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부모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불행하게도 이 은혜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말세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말세라는 말은 은혜를 잊어버린 시대라는 말입니다. 어버이라는 존재는 사랑해야 할 존재입니다. 특히 어머니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오늘은 이 특별한 존재를 잊고 사는 시대입니다. 오늘 어머니라는 존재가 잊혀지고 무시당하고 남편들로 하여금 박대받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이 잊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회복은 내 자신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믿음의 회복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사람은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후회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어버이들의 헌신과 희생은 엄청납니다. 특히 어머니들의 헌신과 희생은 처절할 정도입니다. 그 희생은 지극히 자발적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헌신이 소중한 것입니다. 이 헌신의 삶 과정에서 어머니들에게는 많은 스트레스가 주어지게 됩니다. 옛날 어머니들이나 오늘 어머니들이나 양상은 좀 다르지만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식으로부터 시부모로부터 남편으로부터 생활의 압박으로부터 각종 스트레스들의 도전이 많을 것입니다. 그 스트레스들은 마땅히 풀 수 있는 방안이 있어야 합니다. 여인들은 그 스트레스들을 풀 방안을 스스로 만들어 살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보면 온갖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 박소녀가 나오는데 이 주인공이 견디기 힘들 때마다 장독대에 올라가 못생긴 장독 뚜껑을 골라 담벼락에 던져 산산 조각을 냄으로서 자기 나름대로 스트레스 해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옛날 여인들이 남모르게 부엌에서 바가지를 깨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옛날의 어머니들이나 며느리들은 시부모를 모시고 아이를 기르며 매일 바쁜생활을 하였습니다. 밥하고 소여물 쑤고 빨래하고 농사일 하며 눈코뜰 사이없이 살았습니다. 며느리가 그렇게 분주한데도 아이를 받아주지 않고 시어머니는 안방에서 누워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때 며느리는 아이를 엎고 일하다 보면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라올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때 두 가지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하나는 등에 엎인 아이 엉덩이를 세게 꼬집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죽는 소리로 울게 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시어머니는 빨리 일어나 아이를 받아 엎고 이웃 마실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눈치없는 시어머니는 그냥 누워 있습니다. 그러면 부엌에서 2차 신호가 옵니다. 부엌에서 졸고 있는 강아지를 걷어차면 강아지가 죽는 소리를 하며 도망갑니다. 그러면 좀 늦었지만 시어머니는 빨리 일어나 아이를 받아 엎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감히 시어미를 걷어차다니” 하고 소리를 치게 되면 집안이 시끄럽게 됩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여자의 최대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어머니들은 이 며느리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며느리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남편이 아내를 이해하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머니 편만 듭니다. 그래서 남편을 내편이 아니기 때문에 남 편입니다. 그런 때 아내들의 스트레스는 배가로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자식들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 때는 또 그것이 팔자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오늘 시어머니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남편들도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아주 바람직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아내의 헌신, 어머니의 헌신, 어버이의 헌신과 희생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의 도리입니다. 그래야 부모를 사랑하고 섬기고 순종하는 삶이 따라오게 됩니다. 모성의 희생이 얼마나 숭고합니까. 그래서 성경은 한없이 그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성은 기대고 싶고 품에 안겨 울고 싶고 다가가 한없이 냄새라도 맞고 싶은 것이 모성입니다. 예수님은 낮고 낮은 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삶은 고난과 섬김과 수고와 100%의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해산하는 모성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은 마치 모성적인 모습입니다.
부모의 할 일
부모의 할 일도 있습니다. 성경은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교훈으로 양육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이것이 부모의 할 일입니다. 오늘은 자녀들을 양육하기가 참 어려운 시대입니다. 오늘 부모들은 오늘 세대들이 살아가는 문화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의 문화가 너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심한 괴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녀들과 부모사이에 갈등이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노릇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늘 어버이들도 상당히 변해버렸습니다. 오늘 자식들도 부모를 예전처럼 생각하지 않지만 부모들도 자식에 대해서 이제는 예전처럼 무조건적으로 희생하거나 헌신하려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부모들이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던 시대도 지나가고 있는데 이것도 시대적인 영향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아들 일념으로 살아가던 한석봉의 어머니에 대한 해석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옛날 한석봉의 이야기를 보면 아들 한석봉이 어느 날 집에 왔습니다. 어머니는 반가웠지만 또 한편 마음은 염려부터 되었습니다. 그래서 “왜 벌써 왔느냐”, “불을 끄고 글을 써 보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불을 끄고 떡을 썰고 아들은 글을 썼습니다. 불을 켜고 보니 어머니가 썬 떡은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데 아들이 쓴 글은 엉망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그 밤에 아들을 다시 스승에게로 돌려보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한석봉 어머니의 버전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석봉의 어머니는 그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왜 벌써 왔느냐”, “글을 써 보라”고 하자 한석봉이 “어머니 불을 끌까요” 그럽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불은 왜 끄냐, 내 손을 베면 네가 책임질래”하고 반문합니다. 이것은 오늘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노릇을 잘 하야 하는데 어버이 노릇하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부모가 부모노릇을 잘 못하면 그 영향이 자식들에게 그대로 미치게 됩니다. 그것은 더 무서운 일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술 중독에 빠져 매일같이 방탕하게 살아갈 때 가정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자랍니다. 그때 아이는 “나는 이다음에 결코 술을 입에도 대지 않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아들이 크면 그 아버지와 똑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노름에 중독되어 재산을 탕진하고 온가족에게 고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이 또 맹세합니다. “나는 이다음에 절대로 노름은 안하겠다”. 그런데 그 아들이 성장하면 그 아버지와 똑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아버지가 매일 술에 취해서 집에 오면 어머니를 구타하고 행패를 부리고 가정에서 폭군으로 군림합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이 또 맹세를 하지만 그 아들도 크면 그 아버지와 똑같이 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참 신비하고도 무서운 일입니다. 어머니가 장사를 했습니다. 초등생 아이가 늘 계산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랍니다. 그 아이도 매사를 값으로 계산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옆 친구가 좋은 필통을 가지고 오면 “그 필통 얼마짜리냐”하고 물었습니다. 좋은 연필을 가지고 오면 “그 연필 얼마짜리냐”고 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선생님이 “모든 것을 얼마냐 하고 계산하고는 것은 나쁜 버릇”이라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선생님에게 “죄송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충고는 100만 원짜리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식의 모델입니다. “아름다운 비행”이라는 영화를 보면 기러기 새끼들이 자기들을 부화시킨 소녀를 어미로 알고 졸졸 따라다닙니다. 기러기는 알에서 태어날 때 처음 본 상대를 어미로 알고 무조건 따라다니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 현상을 임프린팅(imprinting) 현상이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그 부모에게 영향을 받고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모두 24명인데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서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아버지가 선한 왕이었으면 그 아들도 선한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악한 왕이었으면 그 아들도 악한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100%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확률이 79.2% 로 아들은 거의 아버지를 그대로 닮게 되는 통계를 나타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비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아주 강하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가정 - 세상의 중심
성경 3절을 보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상줄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다른 프리미엄을 붙일 일도 아닙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이와 같이 상을 약속하고 부모 공경하는 일에 상당한 프리미엄을 붙여놓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점도 있지만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일은 이 세상을 가장 건강하게 만드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내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받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건강한 훈련과 연단과 양육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은 곧 인생의 훈련소입니다. 교관은 그 부모입니다. 가정은 세상의 중심이고 가정이 건강하면 세상도 건강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이루는 삶의 내용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뜻을 되새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엡 6:1-3 / 정필도 목사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면, 게임을 못하게 한다고 어머니를 살해한 아들, 일자리를 얻지 못해서 집에서 놀고만 있다고 핀잔을 주던 아버지를 흉기로 살해한 아들, 늙은 시어머니를 폭행하고 학대하는 며느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가정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붕괴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가정들이 왜 이렇게 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자녀들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는 결국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며「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고, 31절에는 「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라고, 34절에는 「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또, 38절에는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효도하고, 그리고 이와 같이 자기 부모에게도 효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효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을 하고 있습니다.
1) 에베소서 6장 1절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효도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려면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부모에게 순종을 잘해서 효자의 본을 보이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이 땅에 내려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렇게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순종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 27살 된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칼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 장성한 아들이 120세 된 아버지에게 반항을 했다면, 아마 아버지를 이기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연세가 많아 망령이 들었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런 일은 없었고, 무조건 그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효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오래전에 미국으로 집회를 가셨는데,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과 어느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갔다고 합니다. 해변에 있는 아주 근사한 식당인데, 그 식당 입구에 어떤 여자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님께 그 식당 주인을 소개해 주시면서, 자기 교회 집사인데 신앙생활을 모범적으로 하는 분이라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입구에 걸린 그 사진은 그 집사님의 어머니인데, 남편이 일찍 돌아가신 후 플로리다로 와서 해변 도시에서 작은 식당을 경영했는데 정성껏 손님을 섬기다 보니 식당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랜 노력과 계획 끝에 저축한 돈으로 드디어 바닷가에 아름답고 큰 식당을 개업할 준비를 하게 되었는데 오픈 직전에 어머니가 병으로 눕게 되어 오픈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가 아들에게 두 가지 유언을 남겼는데 “첫째는 사업보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더 귀히 여기는 믿음의 삶을 살아라. 둘째는 이 식당에서 술은 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순종했는데, 처음에는 술을 팔지 않는다고 해서 협박을 받는 등 말썽이 있었지만, 그 협박하는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사진을 가리키며 그것이 어머니의 유언이라고 하니 그냥 가더랍니다. 목사님이 감동을 받아서 식사 후에 그 사진을 물끄러미 보니까 그 사진 밑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미소는 저의 추억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저의 용기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저의 등불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저의 능력입니다. 어머니의 주님은 저의 주님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어머니의 유언을 끝까지 지키는 이 아들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에베소서 6장 1절을 보면 부모에게 순종할 때 맹목적으로 순종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저버리면서까지 부모에게 순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상숭배를 하라고 하는 것, 예수 믿지 말라는 것, 교회에 다니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2) 에베소서 6장 2절「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효도는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공경하는 것은 부모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성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이 있는데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은 두 돌판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첫 돌판에는 1~4계명이 기록되어 있고, 둘째 돌판에는 5~10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4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명이고, 5~10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계명 중의 첫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계명이라는 것을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님을 높이는 것이고,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고, 마음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한 집사님은 다른 교회에 나가는 어머니가 계셨는데, 그 어머니는 앞이 안 보이고 연세가 많으십니다. 그 집사님은 불편한 몸으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잘 공경하였고, 자녀들 중에 한 사람도 그 어머니에게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공경을 잘하고 잘 모시는지, 그 교회에서 일등 권사님이셨습니다. 교회에 행사가 있으면 그 어머니가 헌금도 잘 내시고, 목사님에게도 잘하시고, 항상 존경받는 권사님으로 계시다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비록 눈이 안 보여도 자녀들에게 그렇게 공경을 받으시니 그렇게 늠름한 모습으로 사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분명히 그 자녀들에게 축복하실 것을 믿습니다.
효도는 늙은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늙고 병들고 허약해도 ‘공경’하고,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효도입니다.
3) 효도는 ‘부모님을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잠언 24장 25절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을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바로 효도입니다. 효도는 부모님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7장 21~22절에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25절에는「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잠언에서 보면 부모에게 걱정과 근심을 끼치는 아들을 미련한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에게 근심 끼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특별히 건강을 잘 지켜야 합니다. 몸이 아프면 부모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부모님에게 근심 끼치지 않으려면, 정직하게 살아야 하고,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서 신앙생활 잘하고 존경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면,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떤 권사님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굉장히 부자여서 큰 집에서 잘 살지만, 작은아들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은 큰아들 집에는 안 가고, 자꾸 작은아들 집에만 가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작은아들 집이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며느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어머니의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궐 같은 집이나 좋은 음식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음 편한 것이 제일인 것입니다. 작은아들의 손자들은 교회에서 먹을 것을 주면 할머니께 가져다 드리고, 사탕 한 알도 할머니 입에 넣어 드리고, 손녀딸이 할머니와 함께 자면서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서로 간지럼을 태우면서 장난을 치며 잠이 듭니다. 밤낮 웃음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특별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집에 가면 편안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효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개척 초기에는 심방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가정에 가면 참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시는 할머니 댁에 심방을 갔는데, 굉장히 크고 좋은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아주 구석지고 음지여서 햇빛도 안 드는 방에 계셨습니다. 그 방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연세 많으신 분이 습기가 많고 방이 차가운 그런 곳에 계셨습니다. 아들 내외는 양지에 쾌적한 곳에서 화장실도 붙어 있는 방에 있으면서, 그 노인은 화장실에 가려면 방에서 나와서 찾아가야 하는 곳에 계셨습니다. 노인이 밤에 스위치를 끄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새벽에 깨어서 불을 켜려면 더듬더듬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가깝게 해 드리면 좀 편하실 텐데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그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들만 잘살려고 하지 어머니는 돌보지 않는 것을 심방을 가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이 불효하는 성도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정말 불행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불효하는 사람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 중에 한 분은 치매에 걸려서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시아버지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 시아버지는 밤낮없이 대소변을 못 가리시는데 그것을 항상 돌봐 드리고, 틀니도 항상 관리해주니까, 치매에 걸린 이 할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엄마, 엄마’하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효부입니다. 그 권사님이 그렇게 하시니 남편과 자녀들이 감동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집에 가보니, 굉장히 부자이고 지식층인데, 그 집에서 냄새가 자주 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런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는데 그 어머니를 구석방에 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지낸 것입니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도 그런 방에 가둬 놓으면 미칩니다. 그런 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방치한 것입니다. 그 방에 들어가 보니 벽에 오물이 묻고, 엉망이었습니다. 그러고도 장례식 때는 호화롭게 하여 효자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인지 마음속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거듭난 신자라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너무나도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효도하면 복을 받습니다.
에베소서 6장 2~3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첫 계명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5장 16절에 보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하였습니다. 반드시 이 말씀대로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 효도하면 복을 받지만 불효하는 것은 큰 죄악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부인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불효하는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불효하는 죄에 대해서 얼마나 무섭게 말씀하시는지 모릅니다. 신명기 27장 16절에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훈련시켰습니다. 부모를 공경해야지 경홀히 여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1장 18~21절을 보면 아주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고, 심지어 징계를 해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자식이 있는 부모는 그 아들을 끌고 성문 앞의 장로님들에게 나아가서 말하고, 그 성문에 있는 사람들이 그 아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악한 일이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을 보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했고, 17절에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부모에게 손찌검을 하는 자식은 반드시 죽이라는 것입니다. 말로 부모를 저주하거나 악담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불효 죄가 왜 그렇게 큰 죄인지 아십니까? 사랑을 배신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이 효도라면, 부모의 그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 불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효자가 되어야 우리 자녀 중에 효자가 있어 효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효도하는 것을 보고 배워야 효자가 됩니다. 우리가 효도하지 않으면서 자녀가 효도하리라고 기대를 하십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 받을 자손을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복 받을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효도하는 자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에게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연세 많은 어른에게는 똑같이 순종하고 공경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7장 32절에 보면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했습니다. 흰 머리의 노인을 보면 벌떡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보면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 때 이 세상은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이 될 줄 믿습니다.
성경적 부모와 자녀
엡 6:1-4 / 임덕순 목사
예수님을 잘 믿는 성도들의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아이가 믿음 안에서 잘 성장해서 나중에 교회와 사회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이 되도록 교육을 잘 할 수 있을까요? 가정의 달과 어린이 주일을 맞아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자식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를 성경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시127:3에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식은 내 힘으로 낳았으니까 내 마음대로 길러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내가 맡아서 기르는 것일 뿐이지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아이가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신 6:4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식에게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일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의 피아니스트인 서혜경 교수는 미국 카네기 홀이 선정한 세계 3대 피아니스트로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는 낯설고 물 설은 땅에서 외로워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유학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친 원동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매주일 한번 씩 걸려오는 그의 어머니의 전화였습니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를 할 때마다, 늘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얘야, 공부는 열심히 잘 하고 있느냐? 밥은 제때 챙겨 먹고 있느냐? 건강은 어떠하냐?" 라는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매주일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오는데 어머니의 질문은 이런 거였습니다. “혜경아, 너 오늘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렸느냐? 너 오늘 빠지지 않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느냐?”
어머니는 사랑하는 딸의 육신의 안부보다 영혼의 안부를 먼저 물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삶을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늘 전화를 걸어서 딸이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렸는지를 먼저 물었던 것입니다. 그 어머니 때문에 서혜경씨는 유학 생활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의 믿음을 굳게 지킬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힘들 때마다 하나님이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유학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가 있었답니다.
잠언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자라기 전에, 어릴 때 신앙으로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서혜경씨의 어머니처럼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말씀으로 가르쳐서 자녀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치는 가정이 되시기 원합니다.
그러면 오늘 분문 말씀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성경은 먼저 자녀들이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경할 것을 강조합니다.
엡6장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자녀는 자기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여야 합니다.
순종은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반면에 공경은 안으로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처럼, 속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공경은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마음속에 공경이 없는 순종은 남들에게 보이는 외식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속으로 공경하고 순종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일은 자녀가 해야 할 일이지만, 사실은 부모가 가르치고 심어야만 열리는 열매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자녀들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므로, 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에게 순종과 공경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자녀는 저절로 부모에게 순종하지도 않고 부모를 공경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순종과 공경을 부지런히, 강력하게 가르쳐야만 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듯이, 부모가 자식에게 그런 삶을 가르치지 않고도 자동적으로 되는 법은 없습니다. 단감을 먹고 씨를 발라 심어도 똘감이 나옵니다. 좋은 가지를 접붙여야만 단감이 열립니다. 사람은 패역한 존재라서 가르쳐도 잘 하지 못하는데 가르치지 않고 보여주지 않고도 잘 될 리가 없고, 심지 않은데서 나고 가꾸지 않고는 수확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부모들은 자녀에게 순종과 공경을 행함과 훈계로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가르칠 때 “주 안에서”가르쳐야 합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부모가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을 자녀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주 안에서 자녀를 가르칠 때, 자녀도 자연히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부모 자신의 권위 때문에 순종하기보다 나를 낳고 길러준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기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세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는 사람은 부모를 주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기본자세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의 권위를 가지고 자식들에게 부모 공경과 하나님 섬기는 도리를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잠언과 전도서는 어떻게 지혜롭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잠언은 인생살이를 가정으로 비유를 들어서 지혜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내 아들아”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매우 가정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방법을 잘 배울 수 있는 책입니다.
잠언에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부모에게 순종하지도 않는 자녀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잠30:11-12) 부모를 공경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모를 저주하는 자식도 있는데, 그런 불효자들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스스로 잘났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부모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스스로 잘 살기는커녕, 더러운 몸도 씻지 않는 사람처럼, 타락의 길을 가다가 멸망할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부모의 말을 공경하지 않고 거역하는 자녀들에 대해서 모세의 율법에서는 엄중하게 처벌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5),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7)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21:18,21)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순종하지도 않는 자식은 반드시 죽이도록 명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는 자기 생명을 낳아 길러준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분일 뿐 아니라, 자기의 생명이 태어나게 한 자기의 뿌리입니다. 그런 부모도 공경하지 않고, 그 부모가 일러준 하나님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나중에 커서 어떤 짓을 하겠습니까? 나중에 부모는 그 자식 때문에 가슴 아픈 일을 겪게 될 것이고, 그 사람 때문에 사회는 크게 손해를 볼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나을 텐데 어차피 태어났으니 그가 벌을 받아 망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주어서 세상에 경종이라도 울리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사회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서 패역한 자식에게 엄한 벌을 주는 법만 시행했더라도 우리사회의 온갖 범죄가 반 이하로 줄었을 것입니다.
꼬부라져서 삐져나온 못은 반드시 남의 옷을 찢거나 남의 몸에 상처를 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삐져나온 못을 보면 장도리를 갖다가 얼른 뽑아버립니다. 그런데 잘못 박힌 못은 제 자리에나 가만히 있지만, 삐뚤어진 인간은 가만히 있지도 않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해를 끼칩니다. 그런 사람을 그냥 두면 세상이 크게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돌로 쳐라. 뽑아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삐뚤어진 사람인지 바른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아보느냐? 제 부모에게 공경하고 순종하느냐 안하느냐로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를 공경하기는커녕 거역하면, 그 사람은 볼 것도 없이 삐뚤어진 사람이니 그를 반드시 죽이라고, 그 생명을 주신 주인께서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는 자녀교육의 한 면입니다. 공자도 효가 백행의 근원이라 했습니다.
신약에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식에게 그렇게 혹독한 벌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의 도리를 벗어난 사람이요, 그런 사람이 세상에 도움이 될 리가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도 부모는 자식에게 부모공경과 하나님섬기는 법을 철저히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1) 먼저 자녀교육에 실패한 모델을 성경에서 보겠습니다.(대하33장)
히스기야와 므낫세의 이야기입니다. 히스기야는 유대의 13대 왕으로 다윗 왕 이후 300년만에 처음 등장한 믿음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범죄한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날 때도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여 특별한 예우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 훌륭한 히스기야 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12살짜리 왕자 므낫세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즉위하자마자 그 아버지와는 달리 악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헐어버린 우상의 산당을 다시 세우고, 하나님을 섬기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각종 우상을 세워서 유대백성들로 하여금 다른 이방족속보다도 더 심하게 우상을 섬기게 했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요? 말년에 므낫세가 회개하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지만,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나라는 므낫세가 죽은 후 56년 만에 바벨론에게 망하였고,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는 기막힌 운명에 던져졌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하면 자식이 따라 하리라고 생각하고 방치했던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가 자식하나 잘못 교육한 탓에, 나라가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역사의 오점을 남기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주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잘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았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부모는 자식을 잘 길러야 합니다. 믿음이 좋은 부모라고해서 반드시 믿음이 좋은 자녀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 한 것 같아도 자식을 잘못 키우면, 히스기야처럼 자식 망치고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하는 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사 시대의 엘리라는 제사장도 역시 아들들을 잘못 길러서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고 자식들과 나라를 망쳤습니다.
누구나 자기 자식이 귀하겠지만, 귀하게만 생각하고 따끔하고 강력하게 가르치지 않으면, 내가 기른 자식이 나 자신과 세상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2) 이번에는 자녀교육을 잘한 모델을 살펴보겠습니다. (창22장)
창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자기 자식을 잡아서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사람은 아브라함보다 그 아들, 이삭입니다.
그때 이삭의 나이가 10대 후반 정도였는데, 10대 후반의 남자아이는 110살이 훌쩍 넘은 아버지 아브라함보다 힘이 더 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목숨을 맡깁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잡으려고 할 때 아들은 아버지의 칼을 빼앗아 내 던지거나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목을 내밀어 아버지가 자기를 죽여 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순종합니다. 놀라운 장면입니다.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아브라함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창22:12절)라고 말씀 하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미 바친 것으로 인정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아브라함이 이런 극단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삭이 자기를 묶어서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 아버지한테 반항하지 않고 순종한 것을 보면,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을 공경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아버지를 정말로 공경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목숨까지도 아버지에게 맡길 수 있었습니다.
이삭의 이런 공경심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었을 뿐 아니라, 그런 믿음의 삶을 자식에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친히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가르치는 아버지를 공경했고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신을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반항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아서 히스기야의 가정처럼 신앙 교육에 실패한 가정이 되지 말고, 아브라함의 가정처럼 부모의 믿음과 인격을 존경하며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을 기르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모는 자녀에게 왜 ‘순종과 공경’을 가르쳐야 합니까?
바울은 본문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해야 할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옳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엡6:1절을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것이 옳다는 말은 당연하다, 마땅하다, 곧 자연의 순리이고 인간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을 강조하지 않는 문화나 종교는 없습니다. 또한 이것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자녀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자녀에게 순종과 공경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고 말씀합니다. 십계명은 본래 두개의 돌 판에 나누어 썼는데, 첫 판에 1-4계명까지, 하나님에 관한 계명을 기록해 주셨고, 둘째 판에 5-10계명이 쓰여 있는데 인간관계에 관한 법입니다. 이 둘째 돌 판의 첫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첫 단추가 바로 제 부모를 공경하는 여부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 계명을 잘 지키는 자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습니다. 첫째는, “네가 잘 되고”, 둘째는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다른 계명에는 별다른 약속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에만 특별한 약속이 붙어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네가 잘되고.”란 말씀은 “삶의 질”이 좋아진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말씀은 “삶의 양” 또는 “삶의 길이”를 말씀합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로 근근이 생명을 백 살까지 부지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것이 형통하여 즐겁고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복된 삶을 오래 살아가도록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삭은 아버지를 존경했고, 그래서 자기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는데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26장을 읽어보면, 이삭이 우물을 팔 때마다, 거기서 어김없이 물이 솟아났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 땅에 기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사하여 백배나 얻었고 거부가 되었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창26:12-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삭이 농사가 잘되고 거부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이삭은 땅에서 장수했습니다. 이삭은 180살을 살았습니다.(창35:28) 그에 비하여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175세, 그의 아들 야곱은 147세, 그리고 야곱의 아들 요셉은 110세를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 가운데서 이삭이 가장 오래 살았던 셈입니다. 이와 같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는 잘되고 땅에서 장수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자녀는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공경하기에, 당연히 하늘나라에서도 영광을 누리면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왜 이런 사람이 복을 받고 장수해야 합니까? 이런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샘플이 되기 때문이고, 그런 사람들이 오래 살아야 이 세상이 나쁜 방향으로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녀는 어떻게 됩니까? 패역한 자녀는 잘되지도 못하고, 땅에서 장수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런 사람들이 끝내 잘 되면 세상이 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인은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망하게 하십니다. 부모공경은 축복이 달려있는 아주 중요한 계명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들은 우리 가정의 희망이자 우리교회의 미래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이 진정한 희망이고 미래가 되려면, 그들이 어려서부터 말씀 안에서 자기 부모를 공경하면서 성장해야 됩니다.
우리교회는 아이들이 하나님 말씀을 바로 배우게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자녀를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하나님의 대리자인 부모를 공경하도록 일부러 열심히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한가람에 속한 모든 가정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이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약속을 다 받아서 누리게 되고, 그들 때문에 우리교회와 우리사회가 복을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아버지
엡 6:1-4 / 이필재 목사
미국 버지니아에서 26년 동안 한 교회에서 교사로 봉사하던 ‘잘 빅스’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제일 좋은 시간을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살아간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교회에서 추모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의 집에 심방 왔을 때 그의 딸 안나 양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모두의 가슴에 카네이션 한 송이씩 달아드린 것이 계기가 되어서 전국적으로 어머니 주일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는 1930년부터 어머니주일을 지키다가 이제는 어버이주일로 발전한 것입니다. 역사는 바뀐다고 생각됩니다. 불과 4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대한민국의 어머니는 희생의 대명사로 고난의 중심을 서있는 사람으로 통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나 자식의 성취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여인이 어머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 어머니보다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어머니가 대한의 어머니요 조선의 어머니였는데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보아도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이 제일 세월 좋은 엄마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진국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도 거의 부인들이 80퍼센트 이상 직장생활 맞벌이를 합니다. 그렇게 안하면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여인천하 같은 우월 문화가 생겨서 미국 역사에도 없는 여성 대통령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요즘에 재미있는 유머는 거의 다 남성 비하 유머 같습니다. 저도 70세가 되었으니까 거기에 속한다고 생각이 되는데 70세가 넘은 남자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부인에게 야단맞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편을 하늘이라고 받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 그리워라. 옛날이여!” 그래서 불쌍해진 아버지들을 위로하려고 어버이날, 어버이주일이 생긴 문화입니다.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한국이 인류 문화에 공헌한 것이 있다. 무엇이냐 하면 효 사상이다.” 절대 칭찬할 만한 인간 윤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정신문화를 지배해온 절대적 교육이 있었습니다. 삼강오륜입니다. 세 가지의 강령과 다섯 가지의 인륜을 말하는 것으로 나이 많은 분들은 절대 교육으로 훈련 받았습니다. 아마 한국인 정신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교육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삼강이라고 했습니다. “君爲臣綱(군위신강)이라”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父爲子綱(부위자강)이라.” 자식은 부모를 위하여! “夫爲婦綱(부위부강)이라.” 부인은 남편을 위하여! 이것이 삼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반대로 뒤집혀버린 문화입니다. “임금은 백성을 위하여,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남편은 부인을 위하여!”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난 남자들이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삼강은 낙동강, 압록강, 두만강이지!” 오륜은 맹자의 교육이었습니다. “천지지간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하니 소귀호인자는 이기유오륜야라. 온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이 있는데 그 귀하다는 내용은 인간이 다섯 가지 윤리를 지키기 때문이다.”, “시고로 맹자 왈 부자유친하며” 아버지와 아들은 친함의 도가 있어야 하며 “군신유의하며” 임금과 신하는 의리가 있어야 되고 “부부유별하며” 부부사이에도 구별이 분명하여야 되고 “장유유서하며” 어른과 어린이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붕우유신이라” 친구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얼마나 좋은 교육이었습니까?
그러면 오늘 성경말씀은 구약의 십계명을 생각해서 부모 공경의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는데 왜 부모 공경이 첫 계명인가? 열 가지 계명 중에서 1번에서 4번까지는 하나님관계이고, 5번에서 10번까지는 인간관계인데 인간관계의 계명은 부모 공경이 첫째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위 있는 언론에서 발표했습니다. “앞으로 부모를 모시고 한집에 섬기면서 살겠느냐?” 젊은이들에게 물었을 때 25퍼센트가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75퍼센트의 부모들은 자식에게 버림을 당하고 노년에 자립을 해야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돈이 없는 부모는 지금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노년이 되면 국가가 연금을 주는 제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튼튼한 미국도 2035년이면 연금이 없어집니다. 계산이 그렇게 나옵니다. 왜냐하면 100세 장수 시대로 노인들이 많아지니까 국가의 재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나라나 은퇴 후에 30년을 살아야 되는 좋은 시대인지 나쁜 시대인지 견디어야 합니다. 앞으로 국가적으로 노인 일자리 문제가 시급한 국책 사업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면 나라가 튼튼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도 이제 노년이 되었는데 젊었을 때는 내가 젊었기 때문에 이 부분의 설교를 아주 강하게 했는데 노인이 되어서 노인 공경하라고 설교하는 것은 좀 쑥스럽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식들 앞에서 부모 공경 잘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쁜 반응이 나옵니다. 이제는 그런 말조차도 없어진 문화가 현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시대는 매우 지혜롭게 살아가야 되는 사람이 있다면 홀로서기의 훈련을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한국은 20년 안에 1가구 1인이 제일 많아진다고 이미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사실 이 효 사상 하나만은 온 세계 자랑할 만한 정신적 유산이라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틀렸습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이제 포기해야 할 것인가?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효 사상은 살려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변하지 아니하는 성경의 진리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에 오늘 말씀과 같은 진리를 기초로 기독교인의 자기 성찰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 지금 자녀에게 주는 말씀과 부모에게 주는 말씀 두 가지가 여기 다 나타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자녀들에 대한 기대치를 너무 심히 높게 갖는 것이 가정 비극에 대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가정마다 아이들을 무슨 세계적 인물 키우기로 경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부를 해도 전교 1등은 간에 기별도 안가고 전국 1등을 하라고 합니다. 성공한 사람을 롤모델로 인정하고 그를 따라가는 꿈을 키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생각해야지 어떻게 다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미국에서는 이 말이 아주 유행입니다. 공부 못하는 아들을 아버지가 막 꾸짖는 것입니다. “야! 링컨은 네 나이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너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 그랬더니 아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 나이에는 대통령을 했는데….” 내가 이루지 못하는 꿈을 자녀들이 성취하면 매우 기쁜 일이지만 그러는 사람이 있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게 우리가 자녀를 바라봐야지 너무 기대치를 부풀려 놓으니까 자녀들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서 비관자살을 합니다. 지금 한국에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1위입니다. 이것을 어떡합니까? 너무 기대치를 많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회 청년들과 이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부모가 가장 존경스러운 때는 언제인가?” 자기가 부모에게서 진실성과 거룩성을 발견했을 때라고 합니다. 반대로 “부모가 가장 미운 때는 언제인가?” 부모의 비리를 알게 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부모가 제일 고마울 때는 언제였는가?” 나를 믿어주었을 때라고 대답했습니다. “부모한테 제일 미안한 때는 언제인가?” 부모가 원하는 대학에 못 들어갔을 때라고 나왔습니다. 이제 취미활동을 하려고 학교에서 축구부에 들어갔는데 “너는 제2의 박지성이 되어라.” 이렇게 말하니까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축구도 하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겨우 스케이트 타고 재미있게 노는데 성도 이 씨인데 “너는 김연아가 되어라.” 그러니 이게 말이 됩니까? 저는 솔직히 좋아하지 않는 교인이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세계적인 훌륭한 목사를 갖다 대고 왜 그렇게 못하느냐는 분위기로 자꾸 말하는 교인은 싫어합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이지 어떻게 내가 그 사람입니까? 자기는 왜 그렇게 못하고 나더러 하라고 그러느냐 말입니다. 기대치라는 것이 한계가 있는 것이지 들볶는다고 뭐가 됩니까? 타고난 얼굴이 그렇지 못한데 미스코리아 같지 않다고 하면 그게 됩니까? 제가 신문에서 오려 놨습니다. 전국 1등을 하지 못하느냐고 들볶아서 엄마를 살해했습니다. 스트레스를 못 견딘 것입니다.
이 성서적인 자녀관은 아들딸이 내 아들딸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청지기 개념에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아비들아!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아버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가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다 사랑하는 관계이지만 진리를 벗어나지 말라. 그 안에서 사랑하라.” 아버지, 어머니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아들딸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소유권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신학의 기초에서 보면 내게 절대 책임이 하나 돌아옵니다. 그게 뭐냐? 내가 하나님의 자녀를 맡아서 잘 양육해야 됩니다. 제가 장애인의 부모들에게 늘 하는 설교가 하나 있습니다. “당신들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건강하지 못한 하나님의 자녀를 누구에게 맡겨야 훌륭하게 양육할까 생각하시다가 당신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맡긴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어서 맡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일평생 다른 아무 일을 안 하고 그 한 가지만 해도 훌륭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십자가”라고 하지만 제일 무거운 십자가가 사실 가족 관계에서 나옵니다. 왜냐하면 다른 십자가는 시간적 제한이 있습니다. 제가 갈보리교회 담임 목사라는 십자가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은퇴하면 없어집니다. 뭐든지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가장 오랫동안 계속됩니다. 평생 이 관계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일 무겁습니다. LA 사회에 알려진 불행한 사건입니다. 어느 아파트에서 어린 아이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밤새도록 나는 것입니다. 옆에 살고 있는 데이비스라고 하는 흑인 할아버지가 ‘이거 웬 어린아이가 밤새도록 우느냐? 어머니가 없나?’ 가봤더니 아파트 문이 열려있습니다. 들어가 보니까 아무도 없고 아기 한명이 울고 있는데 아기의 배 위에 이 아기의 출생날짜가 적혀있고 아무도 없습니다. 엄마가 버리고 도망간 것입니다. 그런데 출생 날짜를 보니까 3일 되었습니다. 그 흑인 할아버지는 한국 전쟁 참전 용사입니다. ‘이 아기가 한국 아기인데 엄마가 버리고 도망갔구나!’ 그래서 그 시간에 3일 된 그 아기를 데려가다가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이요 십자가이다.’ 그리고 자기 혼자 살면서 그 아기를 데려다가 키웠습니다. 지금 그 아기는 30세가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목회하는 교회에서 그분의 생활비를 도와드렸습니다. 그 엄마는 하나님 자녀에 대한 청지기 십자가를 버린 사람이 되고 데이비스 할아버지는 십자가를 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자녀관을 가져야 됩니다.
부모 공경이 성서적으로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는 아가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그림자입니다.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했는가? 그것보다 더 가까운 하나님께 대한 표현이 없어서입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뭐냐? 동물은 두 가지 본능만 채우면 됩니다. 식욕과 성욕입니다. 그 이상 불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정신적 요구가 더 중요한 존재로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필요가 사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애정과 보호, 관심과 참여를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정신적 조건을 가장 충족시켜주는 사람이 누구냐?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란 말입니다. 그 이상은 세상에 없다는 말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세상에 어떤 모습인가? 지금 우리들은 부분적 조각처럼 사랑을 하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너와 나의 조건의 합의점을 찾았을 때 피차 자기만족을 채우기 위한 사랑을 한 것입니다. 그 조각사랑은 내가 필요로 했던 조건이 무너질 때 그 사랑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너무 예뻐서 사랑했는데 늙어버렸습니다. 사랑도 식어져버립니다. 능력이 좋아서 사랑했는데 능력 상실이 오니까 그때부터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립니다. 젊은이마다 매력 포인트가 없어질 때는 사랑의 포인트도 없어집니다. 이게 조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룩쉴즈라는 처녀는 한때 미국의 모든 남성들의 우상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최고의 상품 가치가 되어서 광고 모델 1위였습니다. 최고의 매력 있는 신붓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약물 복용을 잘못했는지 화장품을 잘못 썼는지 하루아침에 얼굴이 상하기 시작하더니 환자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도 안쳐다봅니다. 왜냐하면 조건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버이 사랑은 조건이나 조각이 아니라서 귀하다는 것입니다. 영원성입니다. 하나님 다음으로입니다. 어버이 얼굴은 언제나 바라보는 소망의 빛이요 용기의 원천이요 안정된 쉼터요 돌아갈 고향이요 시원한 샘물이요 뭉갤 수 있는 안락의자입니다.
먼저 목회하던 교회 교인들이 하늘나라가면 제일 많이 장사지내던 묘지로 그리닐스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교인 80퍼센트가 그 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곳에 묘지 하나를 사두고 죽으면 거기 묻히려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항상 그곳에서 장례식을 하니까 그곳 장의사 직원들과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20년 이상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 가운데 여자분 한명은 ‘맥신 팔도라노’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50년 동안 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이 장의사 직업이 뭐가 그렇게 좋아서 50년 동안 옮기지 않고 일을 하셨습니까?” 허물이 없으니까 그렇게 물었더니 금방 눈물이 떨어집니다. “내가 결혼하고 신혼 초기에 내가 낳은 아기가 6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여기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아기를 버릴 수가 없어서 자진해서 월급을 조금 주어도 좋으니까 내가 이 직장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취직을 해서 50년 동안 한 곳에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아들 곁에 있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나도 죽으면 아들 곁에 묻히도록 묘지를 준비해놓고 거기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머니요 이것이 아버지입니다. 어떤 조건이 되어도 변함이 없는 어버이 마음의 영원성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런 어버이 주일을 교회가 지키는 거 아닙니까? 어느 날 다윗은 자기 생애 가장 위험하고 험악한 곤경에 빠지지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왕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진압을 하고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랬을 때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막 통곡을 하면서 “내 아들! 내 아들! 내가 일찍 죽었더라면 이런 비극이 없었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있기 때문에 네가 죽은 것이다.” 그 불효자 자식을 잊지 못하고 통곡을 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주중에 부산에 친구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가서 4일 동안 부흥회 인도를 하고 목요일에 왔습니다. 제가 그 친구 목사를 늘 부러워합니다. 아버지가 목사였습니다. 그 친구 목사 이름이 “이하영”입니다. 아버지 목사님이 “너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영”이라고 지어준 이름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목사가 될 때까지 지금도 평생 아버지의 목회 기도와 조언을 듣고 사랑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목회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친구들과 정 반대이기 때문에 너무 부럽습니다. 제 경우는 제가 아버지를 전도하느라 너무 고생한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식사기도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밥을 드셔야지 그냥 드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듣는지 말든지 큰소리로 강제로 식사기도를 해버리니까 가만히들 계셨습니다. 그때 제가 다니던 교회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목사님이 교회를 비우실 때는 주일학교 선생인 저더러 설교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 요청을 했습니다. “아버지! 아들이 이렇게 열심히 무엇을 하고 있는데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글쎄, 너는 날마다 교회에 가서 무엇을 하는 거냐?” “그러면 한번 가보세요. 아들이 그렇게 열심히 몸을 바치는데 우리 아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한데 가보세요.” “그러자.” 그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나왔더니 맨 앞자리에 앉으시는 겁니다. 그날 말도 안하고 있다가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저한테 함부로 못하십니다. 그때 제가 10대 후반인데 ‘아니, 저 어른이 이런 일을 하시는구나! 이야!’ 깜짝 놀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저는 목사가 될 것입니다. 아버지는 평생 예수님 잘 믿으세요.” 그래서 세월이 흘러 29살에 목사 안수를 받고 인사드리러 갔을 때 “아버지! 제가 목사가 되어서 왔습니다. 평생 저는 이 길을 갈 것입니다.” 그랬더니 저의 아버지께서 지난 과거의 모든 죄를 제 앞에서 회개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 나는 잘 한 것이 하나도 없어. 이 목사님이 목사가 되는데 도움도 하나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제가 아버지 도움도 못 받고 고학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더니 막 우시면서 머리가 땅바닥에 닿도록 절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손을 강제로 끌어다가 자신의 머리 위에 얹으시면서 “나를 위해서 한번 기도를 해주시오.” 그리면서 막 엉엉 우시는 것입니다. 일평생에 아버지의 가장 선한 모습이 그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과거의 나를 좀 잘 성장시키고 양육하고 학교로 보내주시지 못한 원망이 그 순간에 다 사라졌습니다. 저는 어버이주일만 되면 이 생각이 납니다. 마지막에 아버지가 모든 죄를 아들 목사 앞에서 회개하고 아들의 안수 기도를 통해서 청산하고 하늘나라를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아버지, 어머니 같은 분이다. 그것보다 더 좋은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간혹 근본적으로 DNA가 잘못된 나쁜 부모도 있긴 합니다. 그것은 아주 극소수이고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다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아들이, 딸이 아무리 나쁘다고 세상이 평가해도 아버지, 어머니는 끝까지 믿어주고 그래도 거기에서 0.1퍼센트의 가능성을 신뢰해주는 그것이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세상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내 자녀에 대해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가능성 회복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내가 너희 죄를 사해주사 기억도 하지 아니할 것이라.” 최대한의 나의 가능성을 믿어주시고 끝까지 내 손을 잡고 가시는 하나님! 그것이 아버지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하도 좋아서 그 물질을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립니다. 명예가 하도 좋아서 그런 것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그 자체를 좋아합니다. 건강이 좋습니까? 건강을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립니다. 자녀들이 좋습니까? 자녀들을 주신 하나님은 생각을 못합니다. 사랑이 좋아서 사랑 자체만 좋아하지 하나님은 잊어버립니다. 그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어버이주일은 그것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여러분! 이 어버이주일을 지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미가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효(孝)의 종교입니다!
엡 6:1-3 / 송수천 목사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성경은 가정의 의미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창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맨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인간을 위해 에덴동산을 창조하셨고, 마지막으로 가정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이 하나님의 창조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가정을 중요한 자리에 두셨을까요? 인간이 가정 안에서 천국의 행복을 미리 맛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출세해도 그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곳 가정이 없으면 그것은 기쁨일 수 없습니다. 또한 실패의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아무리 큰 실패를 겪고 더 나아갈 수 없는 사면초가의 위기를 겪어도 가정이 있으면 추스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클린턴 가드너'라는 사회학자는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가정이 있으면 아직 다 잃은 것이 아니지만 모든 것을 다 가져도 가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삶의 의미도 무너지고, 삶의 의욕도 무너집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돌아가고픈 곳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따뜻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한 가정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기 위해 물도 주어야 하고, 거름도 주어야 하고, 가지치기도 해야하고, 해충도 잡아주어야 하고, 잡초도 뽑아주어야 하고, 공들이는 노력이 끝도 없는 것처럼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합니다. /아멘!/
▶아름다운 가정!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먼저 몇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⑴사랑의 원리입니다.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이 동생을, 동생이 형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떽쥐베리'는 비행기 조종사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비행기를 몰고 상공을 날다가 난기류에 휘말려 도착한 사막에는 한 조각의 빵도, 한 모금의 물도 없었습니다. 그가 며칠 후에 기적적으로 구조되었을 때에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식량과 물이 없는 사막에서 당신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까?' 생떽쥐베리는 잠시 입가에 미소를 지은 다음 입을 열었습니다. '나를 사막에서 버티게 해준 것은 한 덩어리의 빵도, 한 모금의 물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사랑은 그리움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할/
⑵신뢰(믿음)의 원리입니다. 믿고 의지하며 맡기는 것, 가족 간에 이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⑶헌신의 원리입니다. 가족 서로간에 헌신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⑷감사의 원리입니다. 가족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부부가 서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자녀가 부모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아멘!/
⑸의사소통의 원리입니다. 서로 자주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⑹함께 하는 시간의 원리입니다. 함께 식사하고, 함께 교회에 가고, 함께 놀러가고,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이 가지면서 가족 간의 사랑을 키워간다는 말입니다.
⑺용납하고 이해하는 화목의 원리입니다. /할/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한국교회가 어버이 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의 은혜와 조국의 은혜, 이 3대 은혜 속에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뿌리 없이 자란 나무가 없듯이,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할/ ◀제목 소개!▶
①기독교는 효를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의 은혜와 조국의 은혜, 이 세가지 은혜 속에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뿌리 없이 자란 나무가 없듯이,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주제가 효도입니다. 성경을 보면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단순한 인륜의 차원에서 마땅한 도리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와 사랑의 차원에서 전하는 권고사항도 아닙니다. 지엄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기독교를 오해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몰아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몰라서 무식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기독교는 살아생전에 부모님을 잘 섬기라고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아멘!/
기독교가 불효하는 종교가 아닌 증거는 먼저, 십계명을 보아서 기독교는 불효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약 600여 가지의 계명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기본적인 계명이 십계명입니다.
이 10계명은 또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명령으로 1에서 4계명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명령으로 5에서 10계명입니다.
출20: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리고 신5:16절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이 말씀들은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의 말씀입니다. 1-4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리고 5-10계명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입니다. 이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엡6:2절에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할/
㉠이 계명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교훈이 몇 가지 있습니다.
⑴효도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 중에 첫 번째 계명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간다움의 우선적 요건이 효도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 오늘의 자기를 있을 수 있도록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그 은혜를 갚는 것이 인간다움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⑵효도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 중에 유일하게 적극적 계명이라는 점입니다.
십계명 중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다른 계명들은 다 '...하지 말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효도에 대한 계명만은 '...하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효도는 적극적으로 찾아서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효도는 잘하면 잘 할수록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
⑶효도만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다른 계명과 달리 약속이 있는 계명입니다.
다른 계명들은 '...하지 말라'고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포괄적으로 '이 계명들을 지키지 않으면...' 하고 경고가 붙어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효도라는 계명만은 하나님께서 잘 지킬 경우 장수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인센티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서라도 꼭 지키게 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십계명 외에도 효도에 대한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레19:3절을 보면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23:25절에 보면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잠16:31절에서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또 잠30:17절에 보면 '아비를 조롱하여 어미를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도 하셨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효도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힘주어 강조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효도는 반드시 해야 하고, 만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아멘!/
㉡세상에서 가장 큰사랑을 어버이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알기 쉽게 비유로 말씀한 내용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가 대표적인 비유입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외국에 가서 허랑 방탕하게 살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를 품꾼의 하나로만 써 주어도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생각 속에는 '아버지가 대문을 굳게 잠그고 나를 안 받아들일 수 도 있고, 하인들을 시켜서 내 쫓을 수 도 있고, 네가 오든 안 오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방치할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도 할 수 없다. 할 말이 없다. 그저 너그럽게 생각해서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 주신다면 그저 고마울 뿐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부모님은 그 아들이 생각했던 모든 가능성을 다 뛰어 넘어 아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탕자의 비유처럼 부모님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알기 어려운 하나님의 크고 무한한 사랑을 설명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바꿔 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사랑은 부모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다음은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할/
▶다윗의 자식 사랑을 보세요!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은 파란 만장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잘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다윗의 아들 가운데 압살롬이라는 정말 잘생긴 아들이 있었습니다. 다윗도 이 아들을 신임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못된 생각을 품고 아버지를 반역하여 난을 일으킵니다.
갑작스럽게 당한 일인지라 다윗은 우선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상황을 수습한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가 운명을 건 한판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도 다윗은 자기 부하들에게 '나를 생각해서라도 내 아들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합니다.
싸움이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압살롬이 말을 타고 숲을 빠져나가다가 그만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서 나무에 동동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다윗의 신하가 요압 장군에게 보고합니다. '죽일 수 도 있었지만 다윗 왕이 한 말을 들었기에 죽이지 않고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보고를 받은 요압은 뭘 지체하느냐는 듯 창을 던져 압살롬의 심장을 꿰뚫습니다.
전쟁은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다윗이 승리한 것입니다. 다윗은 왕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라는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이었습니까?
그런데 압살롬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하면서 하염없이 울기 시작합니다. '네가 죽지말고 내가 죽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우는데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군사들이 민망할 정도로 그렇게 심하게 울고 있었습니다.
효도한 자식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장래가 촉망되던 아까운 자식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배반한 자식이요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했던 배은망덕한 자식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안타까웠습니다. 내가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잘못 가르쳐서 저렇게 됐다고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우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부모님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무리 잘못하고 배은망덕하고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 하드라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돌아오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다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버이의 사랑보다 훨씬 크고 넓습니다. 그 가슴으로 품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할/
②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가?(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여기 '이것이 옳으니라'는 말이 원문에는 '왜냐하면 이것이 옳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모 공경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옳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의로운 말이다'라는 뜻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합당하다는 의미라고 했고, '칼 바르트'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라고 했습니다. 또 '옳으니라'는 말은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봄이 오면 눈이 녹고 꽃이 피는 것은 당연합니다. 5월이 되었는데 싹이 나지 않는 나무는 죽은 나무가 틀림이 없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멘!/
㉠그렇다면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가?
⑴생명을 부모를 통해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할/
⑵부모님이 나의 스승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높은 학위를 얻었다는 이유로 교수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그런 학위는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학문적 진리를 가르치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에게 생명의 기본 원리를 가르친 분들은 우리의 부모님이십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나에게 언어를 가르쳤습니다. 어린 시절 인간의 기본 됨에 대하여 부모에게 배웠습니다. /믿/
⑶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누가 나에게 아낌없이 주려는 분이 있습니까? 오직 부모님만이 자녀들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주고 떠납니다.
⑷부모는 사랑의 원천입니다. 에로스 사랑은 시기가 있고 질투가 있고, 거짓이 있습니다. 친구의 사랑에는 배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진실이요, 순수한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⑸부모는 나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입니다.
명절이나 어떤 일로 인해 부모가 계시는 고향 마을을 찾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왜 그토록 흥분하겠는가? 부모의 집에 머무는 시간이 왜 그토록 평안하게 만드는가? 아무리 어려운 역경, 환경 중에서도 부모의 품안에서 사람은 왜 위로 받고 소망을 얻을 수 있는가? 그 곳은 순수한 사랑의 보금자리이며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⑹신학적으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이 부모로부터 왔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생명 창조 역사에 함께 참여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⑺부모는 하나님의 계시자입니다. 아버지를 통하여 아버지 같으신 하나님을 배웁니다. 공의와 진노,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배웁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용서와 자비, 생명을 품는 성령이신 하나님을 배웁니다.
부모는 하나님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스승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거역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할/
㉡부모의 사랑은 네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⑴먼저사랑입니다. 사랑도 값이 있습니다. 먼저사랑이 더 고급사랑입니다. 부모사랑이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먼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⑵한 몸 사랑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자기 몸처럼 사랑합니다. 자식이 팔을 다치면 내 팔을 다친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⑶불변한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식에게 버림을 받은 부모들에게 인터뷰를 해 보면 마지막 한마디씩은 남깁니다. '그놈들 잘 살면 내가 보람을 느끼지요' 버림을 받았는데도 사랑이 변하지 않습니다.
⑷끝까지 사랑합니다.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이런 요소가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식이 아무리 부모를 사랑해도 부모사랑에는 비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성공하고 잘되면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자식들이 아프고 실패를 하면 그들의 불행을 안고 또 우는 눈물이 있습니다. /할/
▶성경에서 최고의 효자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고 아버지 뜻을 이루려고 자기를 부정하고 마음을 비웁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들려준 음성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경의 효자의 첫 사람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죽기까지 순종하면서 모리아 산에서 예수님의 모형을 이룹니다. 이삭은 성경에서 효자의 모형입니다. 두 번째 효자가 요셉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어린 시절부터 효자였습니다. 요셉은 그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인격을 보여주는 모형이 되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에게 효도한 며느리였습니다. 룻은 그리스도를 맞이할 신부의 모형을 계시해 주었습니다. 잠1:8-9절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부모를 공경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그 머리에 아름다운 금 면류관을 쓴 것과 같고 목에 금 사슬을 건 것처럼 빛나게 됩니다.
▶창9장에 보면 노아가 술 취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랜 홍수에 지친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에 벌거벗고 잠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본 함이 밖에 나가 흉을 보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겉옷을 가지고 들어가 뒷걸음질 쳐서 그 하체를 덮었습니다.
노아가 술이 깬 후 이 사실을 알고 함에게 저주를 합니다. 창9:25절에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합니다. 26-27절 에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 일로 함의 가문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후손이 되었고 셈과 야벳은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멘!/
③우리의 공경의 대상이 누구인가?(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이라고 했고, 2절에서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부모는 성경에 여섯 가지로 설명합니다.
⑴육신의 부모입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입니다.
⑵나라의 왕을 부모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나의 아버지여!'라고 불렀습니다.
⑶고용주나 주인에게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종들이 나아만에게 '아버지여!'라고 불렀습니다.
⑷주의 종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나의 아버지여'라고 불렀습니다.
히13: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⑸직장의 상관, 지도자들, 교회의 지도자도 아버지라는 개념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나의 자녀들아'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을 보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⑹인생의 삶의 무대에 있는 모든 연장자가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레19:32절에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라고 하였고, 딤전5:1-2절에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인생 역사의 무대 위에서 수많은 경험과, 수없이 많은 격전지를 통과한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왕상12:1절 이하에 보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솔로몬 왕이 별세한 후에 그의 나이 41세에 세겜에서 왕이 됩니다. 이때 신하들이 왕에게 찾아와서 선왕 솔로몬 때보다 고역을 경감해주기를 청원했습니다,
이때 늙은 신하들은 그것을 허락하라고 하고, 젊은 연소자들은 허락하지 말라고 하자, 이때 르호보암 왕은 늙은 신하들의 말을 버리고 연소자들의 말을 따랐다가 그 10지파는 배반하고 돌아서서 따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고 애굽에 망명해있던 여로보암을 맞이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리하여 르호보암은 남부에 있는 유다와 베냐민의 두 지파 만을 통치하게 되었고, 열 지파를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풍부한 경험이 있는 노인은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인들에게서도 지혜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욥12:12절에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을 출입할 때마다 경비들에게 정중히 경례를 하였습니다. 측근들이 '왜 대통령이 경비들에게 그렇게 정중히 경례하느냐?'고 묻자 트루먼은 대답합니다.
'나는 그들의 인격과 충성심에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을 존경할 줄 아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그런데 연로하신 부모님을 공경하는 사람을 어찌 축복하지 않겠습니까?
▶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가 목사님을 만나 개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병원에서 일하다보니 자식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자식이 아파서 병원에 온 부모들은 의사를 붙잡고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자식을 고쳐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그런데 노부모를 모시고 온 자식들은 얼마나 사시겠냐고 죽는 날만 묻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는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지만, 부모가 아프면 살려 달라는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주는 말입니다. /아멘!/
④공경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힘을 다해 순종해야 합니다(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그렇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순순히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순종은 계속 진행의 의미가 있는데, 한 번만 순종함이 아니고 계속해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틴 루터'는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말에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성도입니다.
▶어느 마을에 화목하기로 소문난 집이 있었습니다. 동네사람마다 그 집을 부러워합니다. 한번은 화목치 못한 집의 노인이 화목한 집에 방문하여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목한 집의 노인은, '우리 집이 왜 화목한지 보여주겠다.'며 큰아들을 불렀습니다.
'얘야, 내 앞에서 춤추고 노래 불러라' 나이가 40이 넘은 아들은 아무 대꾸 없이 아버지 앞에서 춤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둘째 아들을 부릅니다. '뒷마당에 가서 감을 따오너라' 하고 명하였습니다. 감 열매가 겨우 맺히기 시작하는 철인데 둘째는 이유도 묻지 않고 감 열매를 따왔습니다.
셋째 아들을 불러 '막내야, 외양간에 있는 소를 지붕에 몰고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셋째 아들은 소를 몰고 지붕에 올라가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야단법석을 하더랍니다.
그때 노인은 말합니다. '우리 집안의 화목은 자녀들의 순종에 있다네.'
▶한 소년이 바다를 정복할 꿈에 부풀어 뱃사람이 되리라 다짐했습니다. 소년은 배에 짐을 싣고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드립니다. 그 때 어머니는 아들을 붙잡고 눈물만 흘리며 만류합니다. 이때 소년은 생각을 바꿉니다.
'어머니 눈에 이렇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내 꿈을 좇아갈 수 없다.' 다시 짐을 풀고 어머니에게 순종합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으며 말합니다.
'성경에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는 복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가 근심하는 것 때문에 꿈을 포기한 너에게 하나님이 큰복을 주실 것이다.'
그 뒤로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였으며, 소년은 훗날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머니의 뜻을 저버리고 떠났더라면, 이름난 선장이 되었을지 몰라도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거둔 순종이 대통령이 되는 축복까지 얻게 만든 것입니다. /할/
여기 '순종하다'는 '휘파쿠오'란 단어입니다. '밑에서' 라는 '휘포'와 '듣는다'의 '아쿠오' 라는 말이 합쳐져 생긴 말로서 '아래서 듣는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진지하게 진솔하게 듣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부모의 말씀을 선택해 들어서는 안됩니다.
어버이의 말씀을 들었을 때 납득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버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납득하기 힘들 때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따를 수 없을 때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골3:20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모든 일에 순종하십니까? 힘을 다하여 모든 일에 순종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전심으로 공경해야 합니다(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공경은 순종 이상의 미덕이며, 부모에 대한 순종의 기초가 됩니다.
공경으로 번역된 헬라어의 원 뜻은 '높은 가격을 매기다. 소중히 여기다. 가치 있게 여기다'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카베드'인데 '간', '무거운 것', '영광된 것', '존경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부모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귀중히 여기라는 뜻이요, 자기의 간처럼 소중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할/
▶미국의 20대 대통령 '가필드'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날, 시간이 다 되어도 식장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참 후 대통령이 한 노인을 부축하며 식장에 들어섭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였습니다.
가필드는 늙은 어머니가 취임식장에 가지 않겠노라고 말하자, '어머니가 안 가시면 저도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설득하여 모시고 나온 것입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제가 이렇게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도 다 어머니의 은혜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라며 어머니의 은혜를 보답하며 말하자 참석한 많은 이들이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할/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침략해 들어갈 때였습니다. 농촌에 있던 한 영주가 나폴레옹 황제를 만찬에 초대했습니다. 나폴레옹과 부하들을 위해 식탁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런데 영주는 좌석을 배치할 때 나폴레옹을 상석에 모시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좌석에 나폴레옹 황제를 앉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하들이 화를 내며 '황제를 이렇게 대우할 수 있는가?' 말합니다. 그러자 주인이 대답합니다. '이 자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앉으실 자리입니다. 나라에서는 황제가 최고 어른이시지만 집안에서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제일 어른이십니다.'
이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영주의 효성에 감탄하고 오히려 칭찬했다고 합니다. /할/
㉢진심을 가지고 부모님을 '기쁘게, 즐겁게' 해 드려야 합니다.
▶82세의 노인이 45세 된 아들과 거실에 마주 앉아 있습니다. 그 때 우연히 까마귀 한 마리가 창가의 나무에 날아와 앉았습니다. 노인이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게 뭐야?' 아들은 말했습니다. '까마귀에요. 아버지!' 조금 후 다시 물었습니다. '저게 뭐야?' 아들은 다시 '까마귀라니까요.'
조금 뒤 또 물었습니다. 세 번째였습니다. '저게 뭐야?' 아들은 짜증이 났습니다. '글쎄 까마귀라구요!' 아들의 음성엔 아버지가 느낄 만큼 분명하게 짜증이 섞여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 다시 물었습니다. 네 번째였습니다. '저게 뭐야?' 아들은 그만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까마귀, 까마귀라구요! 그 말도 이해가 안되세요? 왜 자꾸만 같은 질문을 반복해 물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때가 묻은 일기장을 들고 나왔습니다. 펴서 아들에게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읽었습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세 살 때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은 까마귀 한 마리가 창가에 날아와 앉았다. 어린 아들은 '저게 뭐야?' 하고 물었다. 나는 까마귀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연거푸 23번을 똑 같이 물었다. 나는 귀여운 아들을 안아주며 끝까지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 '까마귀라고!' 아들에게 사랑을 준다는 게 기뻤다.'
어버이는 끝없이 우리를 기쁘게 해주셨는데 우리는 얼마나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잠23:25절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를 행하는 일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생명의 연장으로 생각합니다. 자식이 잘되면 자기가 잘되는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 자기가 성공한 것보다 더 좋아합니다. 자랑하고 싶어서 못 견딥니다. 그것이 자식을 낳은 부모의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의 퇴계 이황(李滉)은 효자로 유명합니다. 노년에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기 원했습니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고향에 내려가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의 여생을 보살펴 드리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이황을 조금이라도 더 옆에 두고 싶은 생각에 '어머니를 한양으로 모셔 오지요. 그러면 나라에서 잘 돌보아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이황은 정중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제 어머니는 시골에서 태어나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살아오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면 제가 고향으로 내려가서 어머니와 함께 흙을 밟고 흙과 더불어 살아야만 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할 때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할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 교포들은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효도관광을 보내드릴 때 주로 미국 북동부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보내드린다고 합니다.
좋은 곳이 많은데 하필이면 왜 나이아가라 폭포냐고 하겠지만, 나이아가라 폭포에 한번 갔다오면 10년 정도 더 젊어지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부모님들이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가서 '나이야 가라! 나이야 저리 썩 물러가거라!'하고 돌아오면 훨씬 젊어진다는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부모님에게 여행을 많이 보내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행은 즐겁습니다. 그리고 자식 자랑의 소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릴 수 있지만 부모님이 좋아하시며 기뻐하시는 일을 해 드려야 합니다. /할/
▶조선 영조 때 이양필(李陽馝)이라는 정승이 있었습니다. 그는 양반 출신도 아니고 부잣집 아들도 아니었습니다. 부모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 품을 팔았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하여 서당에 다닐 수 없던 그는 혼자 책을 보며 공부했습니다.
하루는 동네 어른이 지나가다, 마당 한복판에 자리를 펴놓고 공부하고 있는 여섯 살 난 양필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상의도 입지 않은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양필아,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공부하지 않고 왜 거기에서 하고 있느냐?' '예, 아버지 어머니가 지금 남의 집에서 고생하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시원한 그늘에서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고생하며 공부해야지요.'
그런 자세로 부모를 기쁘게 하던 그는 서민의 아들로서도 신분이 엄격한 시대에 정승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5남매 대학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켰습니다. 몸이 쇠약해지면서 중한 병에 걸렸습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자식과 며느리, 사위를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말을 꺼냅니다.
'사실은 내가 사업하다 빚을 졌다. 이자가 불어서 7억이 됐구나. 그렇다고 빚을 남기고 죽을 수도 없고. 그래서 너희들이 조금씩 갚아주면 좋겠구나. 종이에 갚아줄 수 있는 액수를 적어라.'
아버지의 말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보고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어렵게 사는 셋째 아들이 5천만 원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형제들도 마지못해 천만 원, 천5백만 원, 2천만 원 이렇게 적었습니다.
몇 달 후 아버지가 다시 소집합니다.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걱정하며 모였습니다. 아버지가 입을 엽니다. '그동안 고민 많이 했다. 유산 조금 남은 것 갖고 내가 죽은 후에 너희들이 반목할까봐 걱정하다 이런 생각을 해냈다. 지난 번 적은 액수에 5배씩 계산해서 주겠다. 이것으로 상속은 끝이다.' 그 때 자녀들의 얼굴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할/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새가 된다면 무슨 새가 되고 싶니?' 어린이들은 공작새가 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꾀꼬리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종달새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이가 말합니다. '선생님, 저는 까마귀가 되고 싶어요' 모두가 웃었습니다. 기이해 여긴 선생님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다른 새들은 예쁘기도 하고 노래도 잘하지만 부모에게 무관심해요. 그러나 까마귀는 모양은 흉하지만 자란 뒤에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대요. 또 어떤 일이 있어도 어미보다 높은 가지에 앉는 법이 없대요. 나는 그런 까마귀가 좋아요.' /할/
⑤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여기 '네가 잘 되고'라는 의미는 '행운이 깃든다', '형통하다', '복이 된다'는 뜻으로 이것은 곧 형통의 복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곧 범사가 잘 되는 복이요, 경영하는 일에 복을 주시는 물질적 복이 다 포함되는 말입니다.
또한 '장수한다'고 했습니다. 출20:12절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였고, 신5:16절에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했습니다.
장수란 당대에 자신이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장수는 단순히 수명이 긴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통과 불행 속에서, 또는 감옥에서 오래 사는 것을 복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 만족과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가운데서 오래 사는 장수, 곧 은혜와 평강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수명을 다 누리며 사는 것이 땅에서 장수하는 복입니다.
효자가 장수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음이 착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불효한 자는 마음이 악해서 명대로 못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보약 먹는다고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효자가 되어야 건강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장수도, 축복도, 형통도 효도하는데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서는 평생 후회가 됩니다. 부모의 마음을 불효하는 자식이 편안할 일이 없습니다.
▶영국의 여류 문학가 '매컬리'는 자녀들에게 충고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머니의 인자한 눈, 부드러운 손, 친절한 음성이 존재하는 동안 이것들을 존귀하게 여겨라, 사랑하는 어머니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를 특별히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일생동안 아무리 많은 친구들에게 사랑을 얻는다고 해도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만은 못 할 것이다.'
부모의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입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으로 부모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부모와 같은 사랑으로 부모를 귀히 여기며 존경하는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미국 텍사스의 한 남자가 아내와 네 자녀를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가서 30년 동안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돈 한 푼 없이 죽었는데, 시체를 고향 텍사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텍사스에 살고 있던 자식들은 그 소식을 듣고 분개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와 무슨 상관 있어?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해준 게 뭔데? 그 사람 때문에 어머니와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왜 우리가 시체에 수고와 돈을 들여야 하지?'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큰아들은 아무 말 없이 동생들의 불평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로 가서 아버지의 시체를 운구해 오기 위해 트랙터와 농기계들을 저당 잡혔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큰아들은 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씌어 있을 뿐 어떤 부모라는 말은 없단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약속 있는 첫째 계명이 됩니다. 부모님을 받들어 공경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는 방법이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 행복한 성도들은 위로는 하나님을, 아래로 부모님을 정성과 마음을 다해 순종하며 그 은혜에 보답하는 부모 공경의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014년 5월 11일 어버이주일설교)
좋은 관계
엡 6:1-4 / 이상호 목사
오늘은 참 좋은 날 입니다.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 또 한자리에서, 그리고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가장 많이 희생된 것이 가정 입니다. 모두 뿔뿔이 흩 렇게 살다 보니까 형제애도 멀어져 버렸고, 부모에게도 마음이 멀어진 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모처럼 이렇게 함께 모여서,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니까 어떻습니까. 오늘은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가정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특히 부모만을 생각해 보고, 자녀들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어떤 관계 입니까. 세상에 이 보다 더 좋은 관계, 더 좋은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은 다음의 몇 가지를 꼭 생각해 보시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부모는 나의 생명의 전수자입니다.
내 부모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각각해 보십시오. 생각이 이쯤되면 부모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부모님은 참 고마운 분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다는 것만도 축복이고, 행복이고, 기쁨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것은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없어봐야 부모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이름이 아버지고, 어머니라는 이름 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얼마나 정답고 소중한 이름입니까?
연산군은 어머니 없이 자랐습니다.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어린 연산이 하루는 밖에 나가서 놀다 들어왔습니다. 아버지 성종이 어린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밖에 나가서 무엇을 보고 놀았으냐" 그 때 어린 연산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송아지가 어미소를 따라 가면서 엄마하고 부르며 따라가는 그 모습이 그렇게도 부러웠습니다", 그 말에 성종은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관계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씀 하시기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첫째 가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마땅히 공경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모 공경함을 율법에 못을 박아 놓으신 것이며 그것이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 일이라는 것을 밝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도리이며 복된 삶입니다.
두번째는 자식은 상급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존귀한 존재라고 해도 혼자서는 존귀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있기 때문에 존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자식은 "상급"이라고 했고 "열매"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분명 상급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힘이고, 열매입니다. 자식이 있어야 어딘지 모르게 힘이 있고, 든든하고, 안정이 됩니다. 그래서 모두 힘이 들어도 자식을 낳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님들이 자식을 자랑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옛날에는 여편네 자랑을 팔불출이라고 했고 자식 자랑은 반병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내 자랑은 팔불출인지 모르지만 자식 자랑은 불출(不出/ 어리서고 못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견하게 여기고, 자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 여기는게 부모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아내는 남의 아내가 예뻐 보이고 자식은 자기 자식이 최고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귀하고 소중한 자식을 귀여워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있어서는 그만큼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관계는 좋은 관계로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이 관계가 수난을 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외면합니다. 어떤 자식들은 부모를 버리기까지 합니다. 또 어떤 부모는 자식을 버리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아주 슬픈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떤 관계인데 이렇게 까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부모와 자녀관계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이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두가지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는 자식은 부모 공경해야 합니다.
사람이 가장 값이 주어지고 권위가 생기는 것은 부모를 알고,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데서 발생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했고, 잘 살고, 출세했다고 해도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출세도 아니고, 성공도 아닙니다. 사람은 부모님과의 관계가 잘 되어야 떳떳하고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됩니다.
자녀들은 이것을 잘 해야 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잘 안되면 아무리 오늘 잘 살아도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오늘만 날입니까? 먼 훗날까지 내다보면 불효자는 복을 받지 못 합니다. 오늘 심지 않은 사람은 내일에 가서 거둘 것이 없다는 것은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생의 질서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이것이 보통 단어입니까?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경쟁 세상에 나가서 노심초사하시는 아버지, 또 아이 다섯을 낳고 여섯을 낳은 어머니, 그것도 부족해서 여덟을 낳고 열을 낳은 어머니, 열번째 낳은 아이는 젓을 먹일 때 등에서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쯤에는 어머니의 젓이 사정없이 늘어져서 등에 엎힌 아이에게 직접 입에 물려줘도 충분할 만큼 늘어져 있습니다. 그 말은 몸이 몹시도 망가져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속이 모두 비어 있다는 말입니다. 알맹이는 모두 빼 내 주고 자신은 빈껍데기만 가지고 사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부모입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자식에게 이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잠23:22)고 했습니다. 또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첫째가는 계명이요 네가 잘 되고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그 고마우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부모는 삶으로 권위를 지켜야 합니다.
효(孝)가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그 효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들은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옛날에는 자식들에게 명령만 하면 들어 먹혔는데 오늘은 그게 잘 안됩니다. 오늘은 민주화 시대가 되다 보니까 대통령의 권위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이제는 명령해서 될 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님들도 오늘 권위를 지키려면 다음의 몇 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먼저 이 시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자꾸만 고부간에, 자식간에 불화가 잦은 것은 부모님들이 이 시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21세기의 입니다. 옛날 시집살이 하던 그 때를 생각하고 자꾸만 고집 피우지 마세요. 그것은 지혜스럽지 못한 행동입니다. 아들이나 며느리는 이 시대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 시대의 물을 마시고 성장한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에 들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또 노년에 이르게 되면 분별력이 상실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노년에 이르게 되면 쉽게 노여워하고, 서운해 하고, 자기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고집만 늘어나고, 이해력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들에게 쓸데없이 서운한 마음만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불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식들 하고 싸우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고, 또 서운한 것을 극복하고 살 수가 있습니다.
어떤 권사님이 아들 딸이 살고 있는 미국엘 갔습니다. 결혼해서 살고 있는 아들 집에 가서 밥을 먹는데 며느리가 밥상을 가져오더니 시어머니 하고 겸상을 해서 밥을 먹고 앉아 있고 아들은 밥상 옆에서 아이 우유병을 들고 앉아서 젓을 먹이고 앉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까 기가 막힙니다. 이 자식을 어떻게 키워서 미국까지 보냈는데 오늘 와 보니까 이 모양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 속에서 솟아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는데 그것을 참느라고 예수님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참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기분이 나빠서 딸네 집으로 갔습니다. 저녁 때 밥상이 들어오는데 딸은 어머니하고 겸상을 해서 밥을 먹고 앉아있고 사위는 밥상 옆에서 아이 젓을 먹이고 앉아있습니다. 이 장모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까 얼마나 보기에 흐뭇했던지 전날 기분 나빴던 것 그 저녁에 다 풀었다고 합니다. 권사님이 전날 같은 생각가지고 살면 마음 편안할 날 하루도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모르면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 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 시대, 그 사회를 알면 화낼 일 전혀 없는 일입니다.
또 노인이 되면 말이 많아집니다. 이것이 병입니다. 말이 많다보면 할 말만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말이나 마구 해 댑니다. 눈치도 없습니다. 이미 조금 전에 한 말을 또 합니다. 좋은 말이 아니고 푼수 없는 말씀도 자꾸 하십니다. 그것이 노화현상입니다. 사람이 노년이 되면 이렇게 말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떤 노인학자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연구를 했는데 이런 이유에서라고 합니다. 사람이 노인이 되면 몸에 있는 모든 힘이 모두 입으로 모인다고 합니다. 노인은 무릎에도, 허리에도, 가슴에도 힘이 없어지고 입만 힘이 있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이 많다는 것은 아직 힘이 있다는 증거 입니다.
젊은이들은 바로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이 말씀이라도 많아야지 그것 조차도 없어지면 그것은 거의 끝나간다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말씀이 너무 많으셔" 그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힘이 있으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이 어느 날 갑자기 말씀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합시다. 그것은 가실 때가 다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곧 돌아가십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젊은 며느리들이 유념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늙으신 부모님으로 하여금 이웃에 죽이 잘 맞는 할머니가 계시거든 두 며느리끼리 짜고 두 노인을 자주 만나게 해서 하루 종일 이야기를 많이 하게 해 드리십시오. 그러면 건강을 오래 유지해서 오래 사실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말씀이 많은 부모님이라도 계시면 좋겠습니다. 요즘에는 부모님이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도 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허전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나이가 들고, 늙어 갈수록 분별력을 잃지 말고 권위를 지켜 살아야 합니다. 오늘 가족들이 자꾸만 분산되고, 집안에 자꾸만 갈등이 생기는 것은 부모 책임입니다. 부모가 권위를 잃어서 구심점이 상실되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모두 늙습니다. 노인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노인은 힘이 없고, 능력도 없고, 분별력도 없기 때문에 업신여기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의 그 움푹 패인 주름살을 깊이 들여다 보십시요. 그 속에 지혜가 가득 들어있습니다. 그 속에 경륜과 역사가 들어있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에게는 힘도 있고 패기도 있어 좋긴 하지만 이같은 지혜와 경륜과 연륜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실패를 하고 경솔한 행동을 하고 그럽니다.
다만 오늘을 사시는 노부모님들은 노년의 삶에 권위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해도 다 큰 자식에게는 부모도 예의가 있어야 하고, 체통을 지켜야 하고, 권위를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앙드레 지드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아름답게 죽는 일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노년의 삶을 더 세련되게, 경건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유산이 따로 없습니다. 좋은 집을 물려주는 것만 유산이라고들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노년의 삶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볼 때 "나도 아버지처럼은 돼야지" 생각하게 하는 이것보다 더 좋은 유산은 없습니다. 며느리가 볼 때 "나도 어머니의 신앙 반만이라도 따라 가야지" 이 보다 더 큰 권위는 없습니다. 이것이 유산 중에서 가장 좋은 유산입니다.
여러분, 참 인생의 깊이나 무게는 노년에 가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값을 잃은 노년의 삶은 젊어서 아무리 화려했고, 성공했고, 빛이 났어도 초라한 법입니다. 그렇지만 젊어서 한때 방탕을 했던 사람도 노년에 가서 성숙한 인생을 살게 되면 젊었을 때의 방탕도 미담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권위 있는 인생입니다. 그런 부모는 젊은 자식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탁해졌어도 그런 부모는 무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년의 삶은 경건해야 합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부모와 자녀들에 대해서 생각 해 보았습니다. 부모는 공경의 대상입니다. 부모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공경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분부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힘주어 강조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있어서 권위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권위를 상실하게 되면 가정이 분산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노년의 삶이 초라해 집니다. 부끄러워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강조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 관계는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변치 않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라
에베소서 6:1-3 / 한태완 목사
제주도 어느 가난한 가정에 모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그만 중병에 걸렸습니다. 효자 아들이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써 보았으나 어머니의 병은 더 중해지기만 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들의 정성은 여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는, 『네 어머니는 요한복음을 먹으면 나을 것이다』하고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이라 요한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들은 약방을 모조리 다니면서 요한복음 약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제주도 어느 곳에도, 부산에도 그런 약을 파는 데는 없었습니다. 서울까지 와서 뒤져보았으나 헛수고였습니다. 크게 실망한 아들이 집으로 다시 내려가려고 서울역 대합실에 들어갔는데 바로 거기서 어떤 사람이 『예수 믿으세요!』하면서 나눠 주는 책에 『요한복음』이라고 쓴 것이 언뜻 보였습니다. 그 책을 한 권 얻어 가지고 온 아들이 거기에 무슨 약 처방이 있나 하여, 어머니 머리맡에서 날마다 읽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의 병이 스르르 사라졌고, 그 일로 인해 제주도에 처음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서울 인왕산 기슭에 지금의 경복궁 옆에 <효자동>이 있습니다. 그 동네가 효자동이 된 아주 유명한 전설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실수로 인하여 손자가 이불 밑에서 깔려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할아버지는 모르시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해서 죽은 아이를 안고 남편에게 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은 죽은 아이를 보고 『이 불효 자식아, 할아버지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하다니』하면서 죽은 아이의 뺨을 불이 나게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죽은 아들이 눈을 번쩍 뜨더랍니다.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져서 임금님의 귀에까지 전해지자 임금님은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 부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하였고,『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3:20)하였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얼마나 효성스러웠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효도하는 가정에 큰 축복을 주어서 룻은 나오미의 친족인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다윗 왕의 조부인 오벳입니다.(룻4:13-22)
어떤 목사님이 목사가 된 동기를 이야기했습니다. 이 목사님의 선친께서도 목사이셨다고 합니다. 가족 모두가 월남하여 무진 고생을 할 때에 이 목사님은 어머니의 처지가 몹시도 측은히 여겨졌다고 합니다.
『어쩌다 목사 부인이 되어서 저다지도 고생을 하신단 말인가! 아버지는 어째서 하필 목사가 되셔서 어머니를 고생시키시는가?』 회의와 원망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먼저 세상을 뜨시고 어머니도 그 후 나이 많아 임종을 맞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아들 넷을 불러 놓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 소원은 너희 아버지의 소원과 같다. 너희들 사 형제가 모두 목사가 되어다오!』 뜻밖의 말씀에 놀란 아들이 어머니께 여쭈었습니다.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목사의 아내로서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평생 겪으시고도 이제 자식에게도 목사를 바라십니까?』 『아니다! 너희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배고팠던 일, 어려웠던 일이 많았지만, 목사의 아내로서 맛보는 이 기쁨과 행복을 너희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발 내 아들들은 목사가 되어다오!』 이 마지막 부탁이 항상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끝내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효도관광 몇 번으로 효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뜻을 받들어 드리는 것이 참된 효도입니다. 그리고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재벌 2세를 바라고 있습니다. 부모가 좀더 많은 몫의 재산을 남겨 주기를 은근히 바랍니다. 그러나 유산은 물질만이 아닙니다. 생(生)자체가 유산입니다. 건전한 육체와 정신이 유산이며, 신앙, 교훈, 사랑, 명예와 덕이 유산입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을 바로 볼 줄 알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가히 효자라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을 잘 모신다고 하지만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섭섭한 일들도 많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고 살지만 연로하신 부모님들은 『장성한 자녀들에게 혹시 마음에 부담이 되지 아니할까, 걱정을 끼치지 아니할까』 하고 이런 염려 저런 염려를 한 나머지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시고 지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미리 읽어서 부모님을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부모님을 흐뭇하게 만들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잠10:1)
옛날 이스라엘의 다마라는 곳에 유태인이 아닌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금화 3,000개의 값이 나가는 다이아몬드 한 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랍비가 사원을 꾸미는데 쓰려고 금화 3,000개를 가지고 그의 집으로 다이아몬드를 사러 갔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부친이 다이아몬드를 넣어 둔 금고의 열쇠를 베게 밑에 넣고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난처해진 아들은 『낮잠을 주무시는 아버지를 깨울 수 없으니 다이아몬드를 팔지 못하겠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만큼 막대한 돈벌이가 되는데도 낮잠을 주무시는 아버지를 깨우지 않으려는 것은 대단한 효도라고 감탄하여, 랍비는 널리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알렸습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19:3)
한 잡지에 실린 기사가 생각납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아주 효성스런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연로하신 어머님께서 『얘, 논에 농약을 쳤느냐?』하고 물으니까 그 아들이 『예, 어머니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제가 깜박 잊을 뻔했는데요.』 하면서 농약통을 메고 논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실은 그 아들은 서너 시간 전 오전에 농약을 치고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말씀을 하시니까 어머니께서 흐뭇해하며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그 아들은 농약통을 메고 다시 논에 나가서 한두 시간 후에 돌아온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어머니가 한 말에 대해 어머니 스스로 흐뭇함을 느끼도록 해드리는 것이 좋겠다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자녀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찬송가 579장, <통> 304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 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1. 어머니의 넓은 사랑 귀하고도 귀하다.
그 사랑이 언제든지 나를 감싸줍니다
내가 울 때 어머니는 주께 기도 드리고
내가 기뻐 웃을 때에 찬송 부르십니다
2. 아침 저녁 읽으시던 어머니의 성경책
손때 남은 구절마다 모습 본듯합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함을 얻으리
외워 주신 귀한 말씀 이제 힘이 됩니다
3. 홀로 누워 괴로울 때 헤매다가 지칠 때
부르시던 찬송 소리 귀에 살아옵니다
반석에서 샘물 나고 황무지가 꽃 피니
예수님과 동행하면 두려울 것 없어라
4. 온유하고 겸손하며 올바르고 굳세게 어머니의 뜻
받들어 보람 있게 살리다
풍파 많은 세상에서 선한 싸움 싸우라
생명 시내 흐르는 곳 길이 함께 살리라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소년 때에 『장차 크면 배 항해사가 되어야지, 뱃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부도 선원이 되는 공부를 했고, 또 이를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젊은이로 성장했습니다. 모든 짐을 꾸려서 배에 옮기고 집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자식이 떠나서 바다에 나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또 실제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워싱턴의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해주면서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셨습니다. 이때 워싱턴은 『내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마음 아프게 하면서까지 뱃사공이 되겠다, 선원이 되어야 되겠다 하는 것은 잘못이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한 나머지 일꾼들에게 배에 싣고 있던 짐을 다 내리게 한 다음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다음 후대에 젊은이들에게 말하기를 『부모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시지 않도록 하라. 부모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사람치고 잘되는 사람은 없다. 부모를 기쁘게 해드릴 때 하나님의 축복이 이뤄진다.』라고 증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워싱턴은 자기 꿈마저 포기하면서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결과가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언제나 효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곁에 살아 계실 때 정성껏 모시기 바랍니다.
효도하는 자가 받을 복
엡 6:1-3 / 김영수 목사
우리가 부모님에게 효도하지 않아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부모님을 섬기는 효도가 완전할 수는 없지만,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계명입니다. 이것은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반드시 지켜야 할 십계명 중에 오계명이 바로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어떤 복을 받는지, 불순종할 때 어떤 저주를 받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모님께 어떻게 효도해야 할까요? 성경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3절에 보면,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을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부모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또 신명기 5장 16절을 보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말했습니다. 효도란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수상 처칠이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했을 때, 영국의 한 신문이 그에 대한 특집기사를 다루었습니다. 그 신문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처칠을 가르친 교사들을 모두 조사해서 ‘위대한 스승들’이란 제목으로 글을 실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난 뒤에, 처칠은 신문사에 짤막한 편지를 한 통 보냈습니다.‘귀 신문사에서는 나의 가장 위대한 스승 한 분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바로 나의 어머님이십니다. 어머니는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습니다.’자신의 어머니를 스승 중의 스승으로 그렇게 공경하고 존경하고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어머니날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해 어머니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나의 어머니 넬리 레이건입니다. 어머니는 가장 훌륭한 스승입니다. 오늘날 미국을 지탱하는 힘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강철 왕 카네기는 어렸을 때, 너무나 가난했다고 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였으나, 아버지의 사업부진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책상보를 만들어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파는 행상이었다고 합니다. 카네기의 어머니 또한 하루에 16시간 내지 18시간을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너무 가난한 카네기는 내의가 한 벌밖에 없어서, 속옷을 빨면 갈아입을 옷이 없었습니다. 카네기의 어머니는 자기 전에 속옷을 벗게 해서, 그것을 밤새도록 빨고 말려서 그 다음날 속옷을 입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고생하시면서 사는 모습을 보고 자라난 카네기는 22세가 되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 서약을 했습니다. “어머니, 저는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님께 비단옷을 사 드리고, 집 안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많이 두고, 어머님이 타실 마차도 사 드리겠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강철 왕으로 거부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한 약속을 지켰던 것입니다.
잠언 23장 25절을 보면,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라는 것입니다.
한 형제가 노모를 번갈아 모시며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살림살이가 넉넉했지만, 동생은 가난했습니다. 형은 어머니가 오시면, 좋은 옷과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동생네 집에만 가면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음식도 거칠고 잠자리도 불편한데, 도무지 형네 집으로 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습니다. 어느 날, 큰 아들은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옷과 음식이야 너희 집과 비교할 수 없지. 그런데 작은 아이네는 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등을 긁어 주는데, 그것이 어찌나 시원하든지 하루만 더 있다 가야지, 하루만 더. 이렇게 하다가 오래 머물게 된단다.”어머니는 정성과 사랑으로 자신을 기쁘게 해 주는 작은 아들 집에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효도는 돈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고 기쁘게 해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올 해 효도 상을 받은 칠십 노인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펴 상을 받았습니다. 시어머니의 연세가 구십이 넘었습니다. 비록 시골에서 가난하게 농사일을 하고 살지만, 이 며느리는 일주일에 두 번씩 시어머니에게 목욕을 시켜 드렸습니다. 어머니에게 정성을 다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효도란 이렇게 부모님을 즐겁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효도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종도 주안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우상에게 절하러 가자’는 말에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그 우상 앞에 절도 하지 말라고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모님의 말씀이지만 이런 일에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순종은 부모님을 지옥으로 가게 하는 불효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순종하며 효도하십시오!
미국의 중.고등학교에서 부모 공경을 가르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인물이 조지 워싱턴 대통령입니다. 워싱턴은 바다를 벗 삼아 세계를 항해하는 멋진 선장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선원으로 취직해서 먼 뱃길을 떠나기 위해 작별 인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아들과의 이별이 아쉬워 슬피 우는 어머니를 보고, 마음을 돌렸습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내 꿈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한 워싱턴은 항해를 포기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사람의 앞길이 평탄하리라.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실 것이다.” 결국 효자 워싱턴은 ‘선장’대신 ‘대통령’이라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에게‘장수’와‘명예’라는 이름의 복을 주십니다.
효도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굴종이나 복종이 아니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참 효도입니다. 이삭은 참 효자였습니다. 이삭의 나이 27세, 아브라함의 나이 127세였을 때,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뽑았습니다. 청년 이삭은 힘으로 아버지를 저지할 수도 있었지만,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며 순종했습니다.
효도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이 공경이란 부모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높여 드리며 자랑하는 것입니다. 비록 부모님이 부족하더라도 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모든 부모가 다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부모 노릇도 제대로 못하여, 자녀들을 노엽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부모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부모일지라도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며,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1. 눈에 보이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그것을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도 범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0~12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면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왜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을까요?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서로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형제들 중에는 큰 자도 있고, 작은 자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자도 있고, 내가 싫어하는 자도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도 있고, 내가 미워하는 자도 있습니다. 나의 은인도 있고, 원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 44~45)』
예수님은 이렇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부모를 공경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에게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자기의 가족을 돌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믿음을 배반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2. 인간의 죄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가 사랑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배신하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았습니까? 그 부모의 사랑을 배신하는 자는 죽어 마땅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부모님께 효도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무섭게 경고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5~17절을 보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20장 9절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했습니다. 잠언 30장 17절에는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21장 18~21을 보면,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고 했습니다.
3. 부모에게 효도함으로 받을 복이 많기 때문입니다.
1) 부모님께 효도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림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 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성경 말씀대로 효도하면 장수하고, 모든 것이 잘 되는 형통하는 복을 받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효도하는 사람이 오래 살고, 효도하는 가문이 장수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2)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면 훌륭한 인격자가 됩니다.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는 그의 대요리 문답에서 부모란 ① 낳아준 부모 ② 가르쳐준 선생님 ③ 나라를 지켜주시는 왕 ④ 영적으로 지도해 주는 목사 이렇게 네 분을 부모라고 했습니다.
낳아주신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경하면 효자, 효녀가 됩니다.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 말씀을 순종하고 공경하면, 모범생이 됩니다. 왕을 위해서 순종하고 공경하면 충신이 됩니다. 목사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성도는 축복을 받습니다. 따라서 교회에는 부흥을 가져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3) 부모에게 효도함으로, 효도하는 자녀를 갖게 되고, 효도하는 가문을 이루게 됩니다.
내가 먼저 효도를 해야 그것을 본받고, 내 자녀들이 효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대손손 효도하는 가문이 되고,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부모님께 효도하면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 되고,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사회, 행복한 교회, 행복한 세상을 만들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대로 효도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약속한 대로 반드시 축복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