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식탁> 전시 애국마케팅과 콜라
시원한 이 콜라 한잔이 미군의 사기를 높였다
“미군 병사가 어디에 있든 5센트에 코카콜라를 마시게 하겠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우드러프 사장, 애국마케팅으로 다국적 기업 키워내
음료 제조기 유통 어뢰 공격 등 난관 넘어
해외 보틀링 공장 10배 이상 늘려
전투 중인 병사에게 갈증은 생사의 문제, ‘콜라 한 병의 효과’ 극대화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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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미국의 코카콜라 한 병 값은 5센트였다. 현재 환율로 55원을 조금 넘는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자 당시 코카콜라 사장이었던 로버트 우드러프(Robert Woodruff)가 이런 발표를 했다.
“제복을 입은 군인이라면 그가 어디에 있든 5센트에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도록 하겠다. 비용이 아무리 들더라도 모두 회사에서 부담하겠다.”
미군 병사가 어느 전선에 있더라도 미국에서 파는 가격으로 콜라를 공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당연한 것 아니냐 싶겠지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남태평양 외딴 섬 정글에 콜라를 공급할 때도 제조 비용, 운송비와 관계없이 무조건 5센트에 제공하겠다는 뜻이다. 전선의 병사가 콜라를 마시면 마실수록 회사는 손실이 커질 수 있다.
어쨌거나 코카콜라의 장삿속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대답은 물론 예스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니 당연히 비즈니스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익을 떠나 미군 사기에 끼친 영향이 대단했다. 회사 역시 유형무형으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우드러프의 전시 경영 리더십이 돋보이는 이유다.
먼저 병사가 어디에 있건 콜라를 5센트에 제공한다는 발상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가격과 비용을 떠나 콜라 공급 자체가 쉽지 않다. 태평양과 유럽 전선의 병사에게 콜라를 제공하려면 현지에 공장이 있어야 한다. 콜라를 미국에서 직접 배에 싣고 운송하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이 일어나던 해인 1939년까지 콜라를 병에 담아 생산하는 코카콜라의 해외 보틀링 공장은 다섯 곳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전쟁 중 전선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보틀링 공장을 건설해야 했다. 그런 후 보틀링 공장 운영에 필요한 기술자 148명을 현장에 파견했는데 이 중 2명이 전쟁 와중에 사망했다. 전투 현장은 아니었지만 사망자가 생길 정도로 공장 운영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생산한 콜라를 전선으로 보내는 것도 문제였다. 특히 섬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남태평양 오지의 병사가 시원한 콜라를 마시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동식 탄산음료 제조기를 만들었다. 지금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볼 수 있는 콜라 자판기 같은 형태다. 태평양 전선에서 약 1100대를 만들어 공급했는데 그중 150대가 어뢰 공격을 받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코카콜라야 비즈니스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미군은 왜 전선의 병사들에게 콜라 한 병을 제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까? 전쟁터에서 콜라 한 잔의 위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다.
6·25전쟁 초기 다부동전투가 벌어진 것은 한여름인 8월이었다. 전사(戰史)에 따르면 갈증을 참지 못한 병사들은 수통을 들고 산 아래로 내려가 논물을 퍼 담아 마시다 적군의 저격에 희생되기도 했고, 혓바닥이 마를 정도로 목이 탄 병사는 바윗돌에 고인 핏물을 떠 마시기도 했다.
또한 6·25전쟁에 참전했던 한 미군 병사는 ‘미군의 생활’이라는 부제를 단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7, 8월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덥다. 고지마다 물이 부족해 갈증을 못 견딘 병사들은 논물을 그대로 마셨다. 인분이 널려 있는 물이다. 오염된 물을 마시고 부대 전체가 설사에 시달렸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 외에도 극한 상황이 아니라면 전쟁터의 군인은 보통 물을 정수해서 먹는다. 미군은 2차 대전 때 할라존(halazon)이라는 식수 정화제를 지급했다. 물을 소독해 마시는 것인데 쉽게 표현하면 수영장 물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상황이니 전투나 훈련이 끝난 후 마시는 시원한 콜라 한 모금에 병사의 사기가 오르지 않을 수 없다.
콜라 한 병이 가져오는 효과를 간파한 아이젠하워 연합군사령관이 1943년 본국에 코카콜라 300만 병을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현지에서 코카콜라를 생산할 수 있는 기계와 공장설비가 보내졌다. 그리고 신속하게 콜라를 공급할 수 있도록 전선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보틀링 공장이 건설됐다.
코카콜라는 워싱턴 당국을 설득해 전쟁 발발과 함께 공급이 제한됐던 설탕을 군수물자로 우선적으로 배당받았다. 또한 유럽에 건설한 보틀링 공장의 장비 대부분은 군수물자로 인정돼 거의 무료로 군용선으로 수송됐다. 이렇게 비용을 최소화해서 공장을 세운 것이다.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전 5곳에 불과했던 해외 보틀링 공장은 전쟁이 끝났을 때 모두 64곳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종전 후에는 그대로 이 공장에서 민수용 코카콜라를 생산했다.
군인이라면 어느 곳에 있건 5센트에 코카콜라를 마시도록 하겠다는 로버트 우드러프의 애국 마케팅은 성과가 엄청났다. 연합군의 사기를 진작했음은 물론 코카콜라를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으로 키웠고 미국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전시 기업인의 리더십이 만들어낸 결과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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