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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3년 전... 황벽의 무식함에 대한 방님의 파사현정 대화(..보다는 가르침) 입니다.
(당시 신세계를 보았다고 감탄했음에도, 13년간 제자리라는 비극은 안 비밀..)
근래 법무아님과의 논쟁 등에서 다뤄진 화제에 대한 방문객님 입장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겠다 싶어 끌어왔습니다.
(feat. 파사현정의 역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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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는) 고요한 마음"과 같은 특정 상태등을 중심점으로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요...
1) 그러한 그 상태를 "(알려지는) 고요한 마음"과 같은 상태등을 다른 상태와 차별하고,
2) 알아차림의 대상에 제한을 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알아차린다는 식의 시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 따르면,
"(나름) 고요한 마음"이 소멸하고 "화난 마음"이 발생하고, "화난 마음"이 소멸하고
또 다른 "(나름) 고요한 마음"이 생성되고 있을 뿐이거든요. 심적 자세의 문제입니다.
물론 "(나름) 고요한 마음"이 어느 정도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은요, "(나름) 고요한 마음"에 어느 정도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알든 모르든, 스스로 연료를 공급하고 있기에...
"(나름) 고요한 마음"이라는 불타는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것처럼 알려지고 있는 거예요.
알아차림은, 소위 통찰을 수반해야 합니다...
통찰은 알아차림의 과보이기에, 알아차림을 했다면 통찰이 수반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두요, 아주 얕은 상태의 "(나름) 고요한 마음"을 곧잘 형성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얕은 상태의 "(나름) 고요한 마음"이 알려질 때,
"(나름) 고요한 마음"을 "형성하고 있음(집중하고 있음)" 역시 알려집니다.
사사무애님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으로(에) 집중]이라는 표현에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바로 제가 "중심점"이라고 표현했던 겁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그 중심점은요...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아닙니다.
사사무애님의 중심점에 집중하려는 의도에 의해 비로소 형성된 겁니다.
물론 불교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 경우, 예로 요가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
구체적 자각기법에 따라, 그 중심점에 대한 설명이 달라질 겁니다.
어떻든 제가 아는 바로는, 요가의 자각기법은 "중심점"으로 행자가 사라지는 것을 추구합니다.
마음에 들어 중심점 집중을 하더라도, 권한 바 대로, 인과를 나름 살피면서 알아차림에 보다 용이한
다소간 고요한 마음을 형성하는 거라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중심점 집중을 다소 열심히 하는 분들 중 장애가 있는 것을 여러 차례 본 바 있습니다.
흔히 행해지는 방식은, 자각기법의 중요법문이 빠져 있어요.
그래서 그러한 흔한 방식으로 선정에 이르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현실에서 만남에 "상대방이 요가의 자각기법을 아는가?"를 판정하는 나름의 기준으로는, 적었듯,
"중심점으로 행자가 사라져야 한다는 점을 아는가?"도 있구요. 심장의 거론 유무도 기준이 됩니다.
<질문>
[일상의 알아차림에 상응한 수준의 집중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그냥 흔히 말해지는 방식...예로, 가만 앉아서 뭐가 발생하면 그런 줄 아는 거...]
언급하신 기법은,
'일상에 상응한 수준의 집중(=선정을 목표로 하는 집중에 못미치는 집중)'이면서 특정 타겟에 대한 집중이 아닌,
'대기 상태에 대한 집중?'(어떤 느낌,감각,정보가 일어날 때, 그것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갖고 대기 중인 상태) 인데요.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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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흔히 말해지는 방식의 문제가요... 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요...
그러한 설명을 접한 이들은, 거의 요가의 자각기법과 비슷한 것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황벽님이 "대기 상태에 대한 집중?"이라고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대상과 함께 드러나고 사라지는 마음이 아니라, 항상하는 중심점으로서의 마음에 기울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건 알아차림이 아니죠?
근데 요가의 자각기법도 아닌 것이요...
요가의 자각기법은, 황벽님이 "대기 상태에 대한 집중?" 즉 "중심점"으로 행자가 사라지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럴려면 어떤 정보의 발생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려고 해서는 안되요.
결국 흔히 말해지는 방식으로 행하는 이들의 대부분은요...
불교의 알아차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요가의 자각기법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삼매수행도 사띠수행도 아닌 거예요. 이도 저도 아닌 것을 행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그러한 흔히 말해지는 방식이 무용하지는 않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요, 어떤 기법으로 "마음의 평화?" 정도를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의 평화는, 황벽님이 거론한 '대기 상태에 대한 집중?'으로도 가능합니다.
심지어 마음의 평화를 바라며 '대기 상태에 대한 집중?'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어요...
특히 그렇게 시도함에, 폼 잡고 앉는 등 특별한 자세까지 가미하면 더욱 효과가 좋아집니다.
특별한 장소, 함께 하는 동료가 있으면 아주 효과 급증이죠.
그 모두...어떤 마음가짐 자체가, 그에 연이어 발생하는 마음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의 효과에다가, 상대적으로 중심점에 마음을 두게 되어 잡다한 마음요소의 발생이
어느 정도 억제되는 효과가 합쳐져 상승효과를 어느 정도 거두는 거예요.
그러니 그처럼 흔히 말해지는 방식을 부정만 할 수는 없습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고, 고객이 할 수 있는 것을 알려주는 거니까요.
다만 그러한 방식으로 마음의 평화를 어느 정도 얻었다면, 그 정도로 만족해야죠...
좀 더 긍정적으로 적자면,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를 얻어 마음이 안정되었잖아요?
그러한 차분한 마음상태는, 본격적으로 수행하는데 보다 용이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의 이러저러한 효과로(인과로)...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어
본격적으로 수행하는데 상대적으로 유리한 상태라고 아는데서 그쳐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몬하니, 그러한 흔히 말해지는 방식의 폐해가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제가 볼 수 있는게 우리나라 사람뿐이라 그런지 몰라도, 거기서 그치지 몬하는 사람이 특히 우리나라에 많은 것 같아요...
위에서 적은 바와 같이, 알아차림이라고 흔히 말해지고 소개되는 방식은...
유효한 불교의 기법이 될 수도 없고, 유효한 요가의 기법이 될 수도 없습니다. 거의 절대적입니다.
결국 그러한 흔한 방식을 행하는 이들은, 알아차림을 행하고 있지 않은데, 알아차림을 행한다고 생각만 하는 겁니다.
요가의 기법조차 될 수 없으니, 삼매수행을 하는 것도 아니예요...
그냥 이런저런 준비작업 정도의 의미만 부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점을 정확하게 알아야 되요...
그리고 준비작업임을 정확하게 알면, 흔히 말해지는 방식은 행자에게 유용합니다.
< 질문 >
'의식에 떠오른 무엇'을 '생각'이라고 하는 전제에서 질문을 드려볼게요..
의식이나 마음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각각 제각각이라 비유가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네요.
*텅 빈 스크린 - 마음,의식
*오가는 영상 - 생각.
거칠지만 이렇게 도식화시켜놓고 말씀드릴게요
<생각이(=무엇인가) '문득''저절로' 일어난다... 일어나려 한다..
일어나려는 전조.징조.압력..이 포착된다..> -모두 언어화되기 이전의 상황.. '느낌'에 가까운..
(포착되면 사라지거나 하는 등의 그 다음의 작업이나 인식들은 생략..별 상관 없어 보여서..)
제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 이전을 도저히 이 이전을 볼 수 없었어요.
제가 본 책들에서도 이 이전에 대한 관찰은 없었구요..
[ 방문객님: 내적 표상"에 있어..."결과에 상응하는 관념"을 산출한 원인이 있습니다. ]
방문자님은 제가 '생각'이라고 한 것을 '관념'이라고 표현하시는 것 같은데..맞나요?
맞다면..그 관념(제 용어로는 생각)의 원인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 같은데 여기에 대한 말씀 좀 부탁드려요.
'한 생각 일어남'의 원인에 대한 추론..추정같은 것 말고
그 이전의 순간의 '관찰''포착'에 대한 질문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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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라면, '의식에 떠오른 무엇'이라는 표현을 즐기지는 않을 겁니다.
의식은 선행되지 않아요... '의식을 조건짓는 것(의식을 규정하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의식과 함께 하여, 의식으로부터 조건지어지면서도 동시에 의식을 조건짓는 것'이 되겠죠.
그리고 불교에서 의식은, 어떤 중립적 스크린이 아닙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 비유적으로, 중립적 스크린인 것처럼 서술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개괄적 이해등이 아니라) 구체적 알아차림과 같은 [정]의 요소를 개발하는 일에 있어,
스크린과 같은 비유를 사용해서는 곤란합니다.
모호한 판단(분별)은, 모호한 알아차림등을 가능하게 할 뿐이거든요.
물론...님의 ['의식에 떠오른 무엇'을 '생각'이라고 전제]라는 표현에서...
불자라도, '의식' 그리고 '의식의 대상으로, 의식과 함께 하는 무엇'이라고 선해하여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이와 같다면, 님이 '생각'이라고 표현한 것은...기본적으로, 네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온, 행온, 수온, 색온이죠... 뭐...선택한 방편에 따라, 다른 것이 거론될 수는 있어요...
위와 같은 전제에서, 위의 본글과 관련하여 적어 봅시다.
언어적 생각을 해봅시다. 언어적 생각이므로, 단어들이 무자게 많이 등장하겠죠? 하늘, 땅, 자유등등...
그런 언어적 생각들은 어떻게 의식과 함께 하게 됩니까?
아주 어린 시절 교육을 통해, 즉 반복된 '행위(업)'를 통해...단어들과 언어규칙, 사고규칙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업력에 따라 발생한 후천적 직관에 의거하여, 단어들을 찾고 언어로 사고합니다.
직관은 산냐와 행온의 결합이라 지적했었죠?
그러한 후천적 직관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는 등의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닌 한, 저는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언어적 생각이 발생하려는 압력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압력에 보다 마음을 기울인다면(행온), 언어적 생각이 발생할 거라는 점은 안다는 거예요.
그 정도는, 누구에게나 어렵지 않아요.
그러면 언어적 생각이 발생하려는 압력은 그냥 있습니까?
이미 발생한 일상의 의식상태를 조건으로 있는 거예요.
"그 언어적 생각이 발생하려는 압력은 어떻게 있게 되는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압력을 붙잡아야 되요... 그 압력을 대상으로 집중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압력이 구체화되기 이전(여기서의 이전은 앞서 지적한 바 있는 논리적등의 이전임),
그 압력이 태동되는 과정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의 집중에 따른 알아차림을, 화두기법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직 행하지 못한 거죠...
그러한 압력들을 두고, 대승기신론은 생주이멸 중 이상이라고 합니다. 분노등과 마찬가지의 평면이란 거예요...
위에서 지적한 화두기법과 같은 것은, 일상에서 이상의 발현을 붙잡아서 들어가는 겁니다.
따라서 화두기법은, "이상이 어떻게 있는가?"
즉 "(일상에서) 식의 특성이 최초로 발현된다고 이름할 상태"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들이 있습니다.
현재 저에게 알려진 것은, 소리와 형상의 경우 밖에 없습니다만...
결국 ["언어적 생각이 발생하려는 압력"과 같은 이상이 어떻게 있고 없는가?]
내지 [(일상에서) 식의 특성이 최초로 발현된다고 이름할 상태]가 알려지지 않은 경우,
"언어적 생각이 발생하려는 압력" 정도만 아는 경우는...화두등의 출발점 정도죠...
특정 찰나의 의식 상태는, (상대적으로) 수직적 구조와 수평적 구조로 구성됩니다.
특정 찰나의 의식 상태는, '(상대적으로) 수직적 인과와 수평적 인과로 규정된다'고 말해도 같은 의미입니다.
구조는, 조건의 체계라는 의미이고...조건의 체계는, 인(연)과로 파악될 수 있으니까요.
수직적 인과가 알려지지 않은 경우, 수평적 인과만이 알려집니다.
수평적 인과는...언어적 생각이 발생하려는 압력에 따라, 언어적 생각을 하거나...
언어적 생각등의 움직임을 거부하려는 압력에 따라, '어떤 움직임 이전의 상태'에 있는 것등입니다
이러한 예에서, '압력'은 '의도'입니다.
언어적 생각등의 움직임을 거부하려는 '압력 내지 의도'를 스스로 느끼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적었듯, 마음은 대단히 빠릅니다. '자극(접촉)'이 있으면, 즉각적으로 상응한 의식상태가 있게 됩니다.
예로...소리가 들리면, 즉각 소리와 관련하여 특정 의식상태가 산출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하나만 산출되는게 아닙니다.
역시 적었듯, 우리가 사물을 보는 순간 뇌는 수십장의 사진을 찍는다고 했었죠?
위에 적은 글에서, '어떤 움직임 이전의 상태'는 황벽님의 표현을 그래도 가져 온 겁니다.
이와 관련된, 황벽님의 표현들을 정리해 봅시다.
'압력이 태동되기 이전의..어떤 움직임이 없는 상태'...
'무심'(생각없음)',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는 상태'... 이 세가지는 꼬리말에 등장하구요.
본글에서는, ['의식에 떠오른 무엇'을 '생각'이라고 하는 전제]와 같은 말들이 등장합니다.
황벽님이 적은 내용과 문맥등에서, 황벽님은 늘 특정한 의식상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일이 찾아가며 적으려니 힘든데 말이죠... [하고 싶은 이야기] 게시판 464번 본글 꼬리말에서...
[선천적 직관이든 후천적 직관이든, 그리고 그 직관의 내용이 어떠하던간에...
그와 같은 직관 내지 인상이 "있다"는 점에서는 애시당초 다르지 않습니다]와 관련된 내용을 적은 바 있습니다.
거기서 나오듯, [있다는 인상이 전혀 없는 직관만 있다]는 상태는 있어요.
황벽님에게 그렇다는 거예요.
이상에서, 다음의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황벽님이 적은...['압력이 태동되기 이전의..어떤 움직임이 없는 상태', '무심'(생각없음)',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는 상태', '어떤 움직임 이전의 상태']는 모두 특정한 의식상태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상태"와 "언어적 생각이 발생하려는 압력 상태"는 모두 수평적 인과입니다.
즉 황벽님의 "어떤 움직임 이전의 상태"는, "언어적 생각이 발생하려는 압력 상태"와 마찬가지로...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생주이멸의 네가지 상 중 이상이라는 거예요. 동일한 평면이예요...
그리고 위에서 지적했듯...그 정도를 파악하는 힘은, 그 누구에게도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대승기신론의 표현에 따르면, 이상이 따로 있지 않다고 아는 것에 상응한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황벽님이 적은 내용상으로 볼 때..
황벽님은 "언어적 생각이 발생하려는 압력 상태"를 파악하고,
그러한 상태에 대하여 [있다는 인상이 전혀 없는 직관만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를 보면, "화두등의 출발점 정도"라는 지적이 있어요...
그리고 화두로 출발할 수 있는 상태는, 화두를 붙잡을 수 있는 상태예요.
이는 분명, 화두를 붙잡지도 못하는 것보다는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
화두를 붙잡을 수 있는 상태가 곧, 화두의 지속이 가능한 상태는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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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있다"는 직관]은...예로,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이 있을 때에도 함께 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을 보는 순간,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이 있다는 직관은 따라붙습니다. 이는 반드시 성립합니다.
물론 언어적 생각이 발생하려는 요동을 알아차리듯,
구체적 형상과 함께 하지 않은 상태로 막연하게 보는 행위를 하려는 요동을 알아차릴 수는 있습니다.
보는 행위가 최초로 발현하는 상태인데요.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무언가) 있다"는 직관]은 따라붙습니다.
그러한 직관은 반드시 성립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는, 위에 적었듯, 일상적 활동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이 있다고 아는 직관에서, 즉 있다고 아는 직관이기에...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 배후에 형상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고 보려는 경향성이 있는 거예요.
우리의 타고난 경향성 즉 본능이 그래요... 애기들은 스크린에 맺힌 상등을 보고 쥐려는 모습을 곧잘 연출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보는 행위가 최초로 발현하는 상태에서도...
그 상태를 규정하는 ["(무언가) 있다"는 직관]에 터 잡아, 그것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성을 가져요.
그래서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과 같은 구체적 형상도 '잡아내게 내지 함께 하게' 됩니다.
어떤 드러남이 있다면, 그 드러남이 있다는 직관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식과 함께 하는 한은요.
< 황벽 >
'있다'라는 직관이 없는 형태인식이 있을 수는 없는지요.
'있다'라는 '상' 혹은 '인상'이 없다고하면 조금 거친 것 같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잘 어울리는 표현같습니다.
아. 물론 ['있다'라는 인상...같은 것이 있긴한데 단순히 '언어화되지 않음']의 의미는 아니고..
그런 인상이 전혀 없는 인식을 의미합니다.
나름 안타깝지만, 위에 적은 대로입니다. 선천적 직관에서는, 있다는 인상에 따른 직관은 반드시 성립합니다.
무언가가 있으니 감지하는 겁니다. 감지했다면, 있다는 인상 내지 인식 혹은 직관이 반드시 성립할 수 밖에 없어요.
위에 적었듯...이미 있다는 직관이 있으니, 그 직관에 기초한 경향성에 따라 마음을 일으켜 현실이 드러나는 겁니다.
선천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겁니다.
물론 그러한 점을 외면하거나 알지 못하고,
후천적으로 형성한 직관에 따라서 [있다는 인상이 전혀 없는 직관만 있다]고 알 수도 있습니다.
요가행자 혹은 어떤 체험 내지 습관을 가진 이들 중 그런 이들 많아요... 그럴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럴 수 있어요. 저도 그런 적이 있어요. 그리고 저는, 타인의 그런 직관에 따른 행복을 빼앗고 싶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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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가 머리가 없어졌다고 주장하는 수행승의 머리를 때리는 선일화가 있거든요.
맞으면, 머리가 있다는 것을 알죠...
샹카라는 모든 것은 환상이라고 주장했는데, 왕이 샹카라를 원형경기장 같은데 데려다 놓고 성난 코끼리를 풀어놨다고 합니다.
샹카라는 겁나 도망갔죠. 그래서 왕이 "모든 것은 환상이라며?"라면서 비웃었는데요.
샹카라가 말하길, 지금 보는 모습도 환상입니다...
샹카라를 부정하는게 아니라요.
환상일지라도, 환상에서는 최소한 성난 코끼리와 자신이 있다는 판단을 샹카라도 했다는 거예요.
현실감이 결여되면, 궤변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죠... 그런 경우, 소변을 쭈욱 참아 보세요...
< 황벽 >
있다'....라는 것이 뭔지.. 전에는 공간을 점유하는 것들이나 생각 감정 감각들에 을 대할 때'의 '있다'고 느꼈었는데
지금은 '있다'는 느낌어 없어서(없다고 느껴져서ㅡ..ㅡ)좀 난감함..
기존의 글들 조금씩 읽어가면서 공부하고 모르는 건 여쭤볼게요
결국 위에서도 적었듯, 아무 문제는 없어요. 난감할 필요가 없죠.
황벽님이 부정하더라도, 이미 황벽님은 있다고 아는 직관을 조건으로 없다고 느끼는 거니까...
다만 역시 적었듯...황벽님 스스로 그러함을 긍정하지 않거나 외면할 필요성이, 황벽님에게 있을 수는 있어요.
샹카라처럼 말이죠...
첫댓글 20대 후반 즈음해서, 사주를 잘 보시는 분이
"너는 똑똑하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그닥 명석하지가 않다. 뭔가 뚝딱 결론을 낼 생각을 접고, 30대는 그냥 질릴 때까지 이것저것 끌리는 대로 공부하고 경험해라."
고 했거든여.
지나고 보니.. 진짜 오만가지 다 물고 뜯고 하다가
이제야 빈손으로 돌아왔슴미다.
~를 축적한 시간이 아니라,
~은 아니구나. ~을 하면 안 되는구나
를 몸빵으로 배웠다는 맥락에서, 빈 손..
다른 건 몰라도 우몽 경험으로도 멍충하면
수족도 고생이고 뭐 어쩌것습니까 멍충하면 몸빵도 저절로 기다리고 있고요
수족 고생이 몸빵이고 몸빵이 수족 고생이고 그말이 그말이네요ㅎ
전 황벽님이 나름 이해가 갑니다..
https://youtu.be/e7zJd_b9s4c?si=EkLV2XleHQW1y6GI
PLAY
자기 깜냥대로 사는 거죠~^^
그려요..그러니 옛말에
태산이 높다하나
하늘아래 뫼이로다
뫼이로니 처녀 임신
배가 남산
남대문이 열렸네
까르륵 까르륵
화엄을 지켜주시는 황벽님. 멋지십니다.
그토록 오만가지 다 물고 뜯고 하셨기에
오만가지를 다 채워보셨기에,
빈손이 될 수 있었겠죠.
"~은 아니구나. ~을 하면 안되는구나."
이제 진실로 비웠기에 이제 진실로 선명해지실 차례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투명하게 보이게 되실 그 날이 머잖은듯 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덕담 감사합니다-()-
저도 참 변한게 없구만요... 40 넘어서면서부터는 정체가 시작되었다는게 조금씩 느껴졌고... 50 넘어서면서부터는 "이거 뒷걸음질치려는 거 같은데?"라고 조금씩 느껴집니다.
왜 '조금씩'이냐... 철이 덜 들어서... 마음이 노쇠를 잘 수용 몬하는 거? 그런 거 일 수도... 발생한 것은 쇠하기 마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