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이 올라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영화가 있다. 눈이 아니라 가슴에 울림으로 남는 작품이 그렇다. ‘비포 선 라이즈(Before Sun Rise)’로 유명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신작 ‘보이후드(Boyhood)’를 만난 소회다.
알려져 있다시피 <보이후드>는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다. 성장영화야 많았지만 이 영화가 특이한 점은 실제 아역 배우의 성장을 12년 동안 찍었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6살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가 18살이 될 때까지의 성장기를 다뤘다. 그가 커가면서 바뀌는 세상의 풍경도 놓칠 수 없는 장면이다.
제작진은 매년 15분 분량 가량을 12년간 찍은 뒤 총 165분의 장편으로 완성했다. 소년의 부모 역할을 한 배우 에단 호크와 패트리샤 아퀘트도 같은 기간 출연했다. 배우들은 매년 특정한 시기에 모여 마치 동창회를 하듯 촬영했다고 한다.
에단 호크는 많이 늙지 않는다. 패트리샤 아퀘트는 많이 늙는다. 특히 체중변화가 심해 보인다. 가장 많이 변한 건 물론 주인공 메이슨 역의 엘라 콜트레인이다. 처음엔 아역이었는데 영화 끝에는 성인 배우가 된다.
물론 21세기의 영화팬들은 '해리 포터'의 배우들이 조금씩 나이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바 있다. 이 역시 굉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해리 포터>가 10년간 시리즈로 나온 영화인 반면, <보이후드>는 그 성장기를 한 편의 영화에 담았다.
<보이후드>는 소년이 성장하면서 겪을 수 있는 일들, 즉 부모의 이혼, 재혼, 학교에서의 따돌림 혹은 텃세, 풋사랑의 감정, 성, 또래 끼리의 가벼운 일탈 경쟁, 심각하지 않은 반항, 재능에 대한 탐색, 진로 고민,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혼란 등을 두루 다루는데, 이건 미국이 아니라 어느 나라의 소년이라도 겪는 보편적인 인생 경험이다.
다만 대부분의 성장 영화는 이러한 소재들 중 한 부분을 강하게 극화시키지만, <보이후드>는 이 모든 주제를 이음새 없이 보여준다. 마치 햇살 가득한 언덕에 누워 느긋하고 아련하게 지난날을 회상하듯이.
싱글맘 올리비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이뤄내는 성격이다. 대학원생에서, 시간강사, 마침내 교수까지 된다. 학생들로부터 존경도 받는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순탄하지가 않다. 이혼이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자녀들의 성격이 바뀐다.
이사가 잦아질수록 작별 인사도 못 하고 친구를 창밖으로 바라보는 메이슨 주니어의 마음은 점점 내면으로 침잠한다. 누나 ‘사만다’(로렐라이 링클레이터 -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딸) 또한 엄마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으니 불만이다. 발랄했던 소녀는 어느새 말수가 적어진다.
반면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과 놀아주는 아빠 메이슨 시니어는 자유롭다. 아이들을 데리고 야구장도 가고 캠핑도 하면서 멘토와 같은 아빠라고 자부하는 것 같다. 물론 자식양육비는 법에 의하여 보내주고 있겠지만 그러나 실제 가족의 생계는 엄마가 책임지고 있다.
장면이 바뀔수록 메이슨 주니어의 키는 훌쩍 커지고 목소리도 굵어진다. 그와 함께 부모 또한 마음이 성장했다는 점이다. 가장의 역할을 못 해서 뒤늦게 반성하는 철부지 아빠나 자녀를 분가시키고 인생이 끝난 것 같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엄마의 모습 등이 그렇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은 학교가 아니면 학원으로 간다. 반면 메이슨 주니어는 아르바이트 한다. 점장으로부터 욕도 듣고 칭찬도 듣는다. 친구가 아니라 동료라는 관계도 겪는다.
서양에서는 자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독립한다. 혼자서 돈을 벌어서 대학교에 다니고 직장을 구한다. 부모가 자녀의 대학교와 결혼까지 보장해주는 한국과 다른 풍경이다. 어른아이로 나이만 먹을 것인가? 아니면 일찍부터 인생을 책임질 것인지? 우리는 영화에서 이런 메시지를 접할 수 있다.
또한 메이슨 주니어는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에 푹 빠져든 아들의 모습에 대해 부모는 뭐라고 그러지 않는다. 부러운 장면이다. 한 사람의 진로를 점수나 부모가 결정짓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메이슨 가족은 몇 차례 이사를 다닌다. 이혼 혹은 재혼에 의해, 경제적 요구에 의해서다. 이사할 때마다 소년은 자동차 뒤쪽 창으로 직전까지 살던 집을 돌아본다. 난 그렇게 멀어져 가는 옛집의 모습이 그렇게 아련할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겪고, 가진 것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없다. 오직 한때 소중했던 추억을 별 것 아닌 듯 잊어버리고, 한때 소중했던 인연을 내팽겨치고, 한때 공들였던 작품을 버리고, 한때 친했던 사람과 소원해진 뒤에만 성장할 수 있다. <보이후드>는 그런 진실을 말한다.
엄마는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 싸준 메이슨의 짐에 굳이 그의 첫 작품을 넣어둔다. 메이슨은 그걸 자꾸 꺼내 집에 놓아두고 가려한다. 엄마와 메이슨은 이를 두고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다. 난 메이슨이 옳은 것 같다. 섭섭하지만, 첫 작품 따위 잊어버려야 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도, 첫사랑도, 끌어안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던 장난감도.
작성 : 그린캐슬 Green Castle
인용한 글 출처 : 경향신문 블로그, 브레인미디어, Daum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