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도 언급한바 있는 발해건국과정과 연관하여 당이 실제 고구려를 멸하고 구 고구려지역에 지배력을 행사한 부분은 고구려영토중 평양에서 요동~중원으로 들어가는 라인축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 그곳과 거리가 먼 함경도 지역이나 동간도 동만주지역은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라는 점을 감안하여 이 지역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이 용이하게 일어났다면 발해건국이 과연 699년까지 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고구려멸망이후 상당후 고구려 성들이 여전히 당에 저항하고 있고 거기다가 당의 영향력에 거리가 먼 발해건국지역등 구 고구려 동부지역이 건재했다면 제 생각에는 발해의 건국시기는 699년보다 한 20년이상은 당겨질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발해건국에 관한 현 기록은 어디까지나 당나라등 중원왕조입장에서 서술한것, 그것도 세세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대충본 입장에서는 기록했스나 발해건국시기를 제대로 신뢰할수가 없습니다.
현재 발해건국관련한 중국측 기록만을 기준한다면 건국자 대중상 대조영부자는 영주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거란지역정세와 관련해서 도망쳐서 발해를 건국하고 또 그 당시 당나라와 거란 돌궐등간의 국제정세와 연관해서 발해건국을 연계해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인데 이러한 국제정세관련한 발해건국과정에 대한 시각도 비판재고할 사항입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우선 고구려영토중 당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한지역에서 수월하게 부흥운동이 가능하고 이미 중국측기록에 나오는 699년보다 한 20년정도 더 이전에 실제 발해가 고구려 동북부에서 건국을 하고 터를 잡았다면 690년대 요서지역에서의 국제정세문제와 발해건국과는 전혀 무관한 사안일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요서지역에서 국제정세라는 것은 발해건국후 요동지역으로 진출하는 것과 연관을 맺을수 있을 것입니다.
대중상 대조영 부자가 동만주에서 발해를 건국하고 보다 더 큰 세력확대를 위해서 요서 영주의 고구려유민에 대한 포섭기회를 찾던중 거란멸망을 전후한 요서지역정세를 잘 이용했다라고 보는 것이 합당한 해석일것입니다.
첫댓글 음..../함경도 지역이나 동간도 동만주지역....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이....일어났다면 발해건국이 과연 699년까지 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제 생각에는 발해의 건국시기는 699년보다 한 20년이상은 당겨질 가능성이 충분합니다/...라... 예, 아주 예리하게 보셨군요...그렇지요...그러나 현존 대부분의 중국역사서의 기년은 대체로 정확합니다...틀린 것은 장소입니다...그래서 20년을 앞당길 것이 아니라 발해의 건국위치를 약1,000리~2,000리 서쪽으로 옮겨 보시기 바랍니다...그곳에 대조영이 있었던 영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이 멸망시킨 고구려평양은 현,요하유역이고 그곳이 당나라의 고구려점령지의 동쪽한계입니다.
음 평양성이 요하 부근이라는 이야기는 많은데서 보긴했는데. 그 증거로 한서지리지. 신당서. 자치통감 등등 어려곳에 있다고 올려진 글들이 많더군요. 고구려가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성도 장안성이니... 중화사상으로 무장댄 황하족의 역사서에서는 늘상 주변 이민족 국가들을 깍아내리는경향이 있었고. 일제시대 불태워진 고문서 고지도만 해도 20만점이 넘으니 현재의 평양과 고구려가 망한 장안성이 동일한곳이라 저도 보고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머랄까 섣부르게 평양이 요하부근이었다 하는거보다는 대대적인 연구로 현 국사 교과서를 개정하는게 우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사교과서 개정에 개정을 거쳤지만 실직적으로 기본틀은 일제시대때 쓰이던 국사교과서를 그 기본 베이스로 두고 있는게 사실이잔아요. 현 평양은 오히려 백제의 수도 한성으로 봐야하지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