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흐릿한 방
막 내리고 불 꺼진 방
흐리멍덩한 그 방으로 가는 문 아직 있을까?
바다가 먼저 젖은 자의 것이 아니듯
앞선 이 뒤선 이 없이 흐릿한 방
말이 먼저 뱉는 자의 것이 아니듯
주인 없고 등수 ( 等數 ) 없는 방
새들의 노래가 새들만의 노래가 아니듯
집 지을 땅, 연명을 위한 곡식
주섬주섬 쓰는 대로 쓰다 어질러 놓는
얼뜨기들의 방
풀씨들 방향 없이 날다 저마다 자리 찾아 내리듯
셈 없이 공기 마셔도 시비에 말리지 않듯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는 흐리멍덩한 방
넘어진 이 일어나고 잃은 이 잃은 만큼 되찾는 방
별빛 달빛 햇빛이 어두운 구석부터 찾아들 듯
별빛 달빛 햇빛이 방향 바꾸어가며 어둠을 녹여 내듯
얻은 이, 못 얻은 이 걸어온 길은 달라도
먹을거리 누울 자리 고루 갖춘 방
일 이루지 못하면 다른 일이 찾아와 꼬리치는 방
은행도 주식시장도 냉장고도 없는 방
절창도 음치도 말재주도 없는 얼뜨기들
바닥에 떨어지면 으샤샤 불기둥 되어 함께 일어나 는 방
춥고 배고픈 놈부터 들이는 따시고 배부른 방
불 꺼진 그 방 흐릿한 그 방 가는 문 아직 있을까?
높이 쌓기, 앞서 달리기, 환히 밝히기 흉이 되고
자연으로 내주기, 흐리멍덩하기 몸에 익은 방
하찮은 몸놀림이 신명으로 어우러져
둘이 셋이 되고 셋이 다섯 여섯이 되는
나와 너 사이 너와 그 사이
내가 있어도 나는 없고 내가 없어도 내가 엄연한 방
없음으로 확고한 흐릿한 그 방
불 꺼진 그 방으로 가는 문 남아 있을까?
ㅡ 신진 시집--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ㅡ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