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가왕(歌王)이라 불리는 조용필이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만든 '서울 서울 서울'에는 어떤 구체적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때쯤의 서울은 메가로폴리스라는 말 그대로 너무도 덩치가 커져버린 도시였던 탓에 어떠한 특정 지역에 대표성을 부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서울의 송가(頌歌)라면 당연히 전체를 논해야지 어느 한 부분을 부각하는 것도 형평성에 어긋난다.
1969년에 길옥윤이 만들고 패티김이 부른 '서울의 찬가'도 '처음 만나고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하며 전체를 포괄할 뿐 실제의 지역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사정은 시계를 되돌려 1948년 해방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때, 희망을 찾는 내용의 노래 '럭키 서울'도 비슷하다.
'서울의 거리는 태양의 거리/ 태양의 거리에는 희망이 솟네/ 타이프 소리로 해가 저무는 빌딩가에서는/ 웃음이 솟네/ 너도 나도 부르자 희망의 노래/ 다같이 부르자 서울의 노래/ SEOUL...'
하지만 계몽성을 벗어나 대중가요의 본질이라고 할 개별적 정서표출로 초점이 맞춰지면, 그리하여 실감나는 고백이 되려면 구체성은 피할 수가 없다. 그 경우 서울의 대표지역은 과연 어디 인가에 관심이 모아진다.
세월에 따라 중력이 달라져 지금의 세대들은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이나 문희옥의 '서울의 거리'가 말해주듯 대뜸 남서울 영동, 이른바 강남지역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그 전에 패권을 쥔 곳은 분명 명동이었다.
1955년 이경희가 부른 곡 '서울의 거리'가 계몽적 찬가와 작별하고 대중가요 본연의 로맨티시즘을 드러내는 순간, 명동이 가장 먼저 불림을 당하는 것은 당연했다. 한국 제1의 번화가, 유행과 패션의 1번지로서 지극히 필연적인 예우였던 것이다.
'서울의 거리는/ 명랑한 거리/ 명동의 네온 불이 반짝거려요/ 아가씨 치맛자락 봄바람에 날리며/ 그 찻집 저 멀리서 손풍금 소리가 들려와요...'
고인이 된 고운봉이 '명동 블루스'를 발표한 때는 1958년. 이미 1950년대에 사람들은 명동을 통해 고된 일상의 바깥으로 피해 흐트러짐과 자유를 맛보았다는 것을 명동 블루스라는 곡목이 그리고 그 노랫말이 여실히 전해준다.
'궂은 비 오는 명동의 거리/ 가로등 불빛 따라 쓸쓸히 걷는 심정/ 옛 꿈은 사라지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이 밤이 다 새도록/ 울면서 불러보는 명동의 블루스여...'
패티김이 '서울의 찬가'를 노래한 뒤 몇 년이 흐른 1973년에 '서울의 모정'(하중희 작사, 길옥윤 작곡)을 불렀을 때도 전체 서울이 아닌 부분 서울이 거론된다.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는 저녁/ 네온의 바다에서 꿈을 꾸었네/ 물결에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아 행복한 명동의 거리...'
네온이 상징하는 것이 도시블루스라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고 유행과 패션이 몰리고 문화예술인이 정서를 축적하며 대중 공감의 소재를 찾은 곳은 바로 명동이었다. 명동의 그러한 대중정서의 중심적 측면이 가장 잘 그려진 노래는 아마도 현인의 '서울야곡'(유호 작사, 현동주 작곡)이었을 것이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엔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레인코트 깃을 올리며 오늘밤도 울어야하나/ 내가 문득 맘이 아픈 서울 엘레지...'
충무로와 종로를 거쳐 끝내는 명동이고, 또다시 네온이다. 명동의 네온은 실로 1960-70년대 도시 서울인이 갖는 애락(哀樂)의 상징성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같은 가수의 노래지만 과거의 '럭키 서울'과는 확연히 선을 긋는다. 애매모호함은 폐기되었고 드디어 리얼한 필링의 면적이 확보되었다.
어쩌면 우리 현대 대중가요는 명동을 접촉하고, 명동의 네온과 애무하면서 얻은 질펀한 감성의 산물일 것이다. 적어도 도시 서민의 노래는 오랫동안 명동의 유혹으로부터 탈피할 수가 없었다.
현인의 '서울야곡'이 '어디쯤 가고 있을까'의 가수 전영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1977년에는 유지인 주연의 TBC드라마의 타이틀이 되어 이은하가 부른 주제곡으로 또 한 차례 위력을 뽐낸 것도 그 증거가 아닐까. 심지어 이 곡은 2002년 화제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잠시 스치는 장면이었지만 주인공의 음악스승이 부르는 노래로 부활한다.
가장 유행에 앞선 옷을 입으려 하든,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하든, 어떤 스타일의 음악이 트렌드인가 알려하든 명동은 그 모든 문화적 욕구를 충족(대리 충족)시켜주면서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였고, 동시에 무수한 대중가요를 토해냈다.
1970년대 음악역사를 말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세시봉', 생음악 무대였던 'OB's 캐빈'은 명동이 자긍하는 음악의, 젊음의 명소였다. 60세대가 음악을 하려면 가야했던 곳이 명동이었고, 70세대도 '꽃다방'과 같은 음악다방에서 열심히 팝송을 청취했다. 양희은이 대학에 들어가면 꼭 가서 놀리라 다짐했던 곳이 명동이었고 포크의 대부라는 조동진도 명동의 음악 감상실에서 친구를 사귀었다.
이제 명동은 고귀와 고급의 명성을 강남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에 빼앗겨버렸다. 여전히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지만 이 곳을 오는 사람들의 세대와 계층은 확실히 과거와는 다르다. '밀리오레'의 영향 탓인지 무엇보다 10대들의 발길이 부산해졌다.
'비 내리는 명동 거리/ 잊을 수 없는 그 사람/ 사나이 두 뺨을 흠뻑 적시고/ 말없이 떠난 사람아/ 나는 너를 사랑했다 이 순간까지/ 나는 너를 믿었다 잊지 못하고/ 사나이 가슴 속에 비만 내린다...'
아마도 요즘의 신세대들은 부모가 들었던 배호의 '비 내리는 명동거리'(1970년)가 전달하는 내용물이 왜 그리 진한 지 알 리 없고, 그래서 달라진 감성 때문에 공감하는 데는 상당한 부담을 느낄지도 모른다. '사나이 두 뺨을 흠뻑 적시고'는 확실히 뜨거운 정감의 격발이었지만 감각적인 그들에게는 유치하고 하찮은 과잉의 언어로 폄하될 수 있다.
그래도 명동으로 발길을 대고 부대끼면서 그들도 나중에는 명동정서의 포로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자신들도 미처 알지 못하는 순간에 추억의 흔적들을 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도 언젠가는 사나이 두 뺨을 적시는 흠뻑 적시는 눈물의 이유를 알게 된다.
크라잉 넛의 신보 타이틀곡이 '명동 콜링'이다. 우리 가슴의 뜨거움(日)과 서글픔(月)이 교차해 만들어낸 대중음악 '명(明)품의 거리' 명동의 구속력은 지금도 지속되고 또 반복된다.
(2004년12월 경향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2006/10 임진모(jjinmoo@izm.co.kr)
서울의 거리 - 은방울자매
https://youtu.be/QUHNblA0B2k
명동 블루스 - 고운봉
https://youtu.be/hb6dMJAoFTM
서울의 모정 - 패티김
https://youtu.be/6uDRB53Qxp0
서울야곡 - 현인
https://youtu.be/4EKXHVQ_AB4
비 내리는 명동거리 - 배호
https://youtu.be/XCJ_wcft5z8
혼자 걷는 명동길 - 이용복
https://youtu.be/HVrCKQrkLfk
명동 콜링 - 크라잉 넛
https://youtu.be/G2bVWTspzjY
첫댓글 판탈롱 입고 처덕처덕 댕기던 70년대 명동거리 그립네요~
명동극장에서 친구와 둘이 몬도가네 구경도 하고 ~ㅎ
국립극장앞 건물안쪽에 도너츠 만들어 파는 가게 있었는데 앙꼬가 듬뿍 들어 환상의 맛이였죠~
74년 겨울인가에는 썸씽이란 생맥주집 종종 갔었어요~
당대 기라성 같은 포크싱어는 다 나왔던 곳.. 최은옥이 무명시절에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와 something을 부르는데 정말 잘 부르드라구요~
나중에 데뷰하고나서는 성을 채씨로 바꿔나오더군요^^
https://youtu.be/HVrCKQrkLfk
이용복의 혼자 걷는 명동길 함께 들어봐요~ 원창자는 봉고리스트 유복성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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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졸업식 끝나자 마자 밀가루범벅교복입고 명동나이트클럽으로 함께갔던 단짝 친구는 미국으로 이민갔다는데 보고싶네요
코로나로 방콕하고 있을 절친들에게 안부 카톡이라도 해야겠습니다"친구들아 방콕이 지겨워 지면 베멍도 괜찮다고"
(베멍은 베란다에서 커피마시면서 멍때리는 저만의 암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