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담대함으로 얻은 승리 -사스사태
나는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모험을 할까?’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담대할까?’ 하는 의문어린 시선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정해주셨고 나는 따르기만 했기에 담대할 수 있었다.
사스 전쟁
내가 주중대사로 부임한 후 가장 힘들었던 사건 중의 하나가 21세기에 최초로 등장한 신종 전염병인 ‘급성호흡기증후군’(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SARS 이하 사스)의 발생이었다.
사스는 2002년 11월 중국 광둥성(廣東省)에서 첫 환자가 발생한 후, 아시아를 중심으로 전 세계 30여 개국으로 퍼져나갔다. 이후 2003년 7월 5일에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가 정식으로 통제되었다고 선언하기까지 사스는 전 세계적으로 8500여 명의 환자와 8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고 퇴치되었다.
WHO는 사스가 강력한 전염력을 가지고 있는 신종 전염병으로 예방약이나 치료약이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전염병과는 달리 발병 초기에 진단이 쉽지 않고 항공기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퍼지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국가 간의 전파를 최대한 차단하고자 중국 광둥지역과 홍콩에 이어 베이징(北京)시와 산시성(山西省), 캐나다의 토론토에 대한 여행 제한을 권고했다.
이것은 WHO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강력한 조치였다. 이 여행 제한 권고는 중국의 화베이(華北)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 내에서는 사회 불안이 극에 달하여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휴교 조치가 내려졌을 뿐만 아니라, 사스가 발생한 주요 도시에 유입된 농촌 출신 노동자들이 여행 제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귀향하는 등, 사스가 중국 전역으로 확대될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급기야 중국 정부는 사스 통제를 ‘전쟁’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국외적으로는 많은 국가들이 중국으로부터 사스의 유입을 조기에 차단하고자 중국에 대한 출장이나 여행 자제 조치를 내리고, 중국인에 대한 비자 발급을 거부하거나 제한함으로써, 중국의 국가적인 위상이 크게 손상을 입었다.
동시에 중국에서 생활하던 외국인들과 유학생들의 본국으로의 귀국이 증가하고, 외국 정상들의 방중(訪中)과 국제회의의 개최, 유명 외국 공연 단체의 공연이 취소 또는 연기되는 등 경제 활동 뿐만 아니라, 국가 사회의 기능이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미국이나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의 중국 주재 기업들은 직원과 그들의 가족들을 대부분 본국으로 철수하도록 결정했다.
2003년 4월 3일에 미(美) 국무성은 ‘귀국허가지침’(Authorized Departure)을 발표하고, 중국 본토 전역과 홍콩 소재 미국 공관의 비(非) 필수요원과 가족 중 귀국을 희망하는 대상자는 전원 귀국하도록 했다.
그리고 4월 29일에는 일본 정부도 중국에 거주하는 일본 국민들의 사실상의 철수를 결정했다.
이렇게 되니 중국에 거주하는 우리 기업인들과 교민들, 유학생들의 불안도 점차 가중되었다. 대사관에서는 재중 한국인회, 진출 기업, 유학생 등과 협력하여 ‘사스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중국에 거주 또는 체류 중인 국민들의 보호를 위한 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황이 점차 중국 정부의 통제 여부를 예측하기 힘든 쪽으로 전개되자, 사스대책위원회와 교민 사회에서 교민 철수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철수 결정을 할 시기가 오고 있던 것이다. 철수 명령을 내리게 되면 기업인 등 한국에 본사가 있는 사람들은 회사로부터 항공료 등을 정식으로 지급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철수 명령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 오랫동안 이에 대한 기도를 해오고 있었다.
4월 중순 어느 날,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저도 다른 나라처럼 교민들의 철수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철수하지 마라.’
나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다. ‘교민들이 모두 불안해하 며 대사관에서 철수에 대한 지침을 내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이 땅에 있는 너희 국민 어느 누구도 그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할 것이니, 너희들은 이 땅을 떠나지 말라.’
우리 국민 어느 누구도 사스에 걸리지 않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듣자 나는 마음이 놓였다. 그 후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확신을 가지게 되면서 담대한 마음이 생겼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환상 속 총리의 눈물
하나님께서 우리 교민들을 중국에서 철수시키지 말라는 마음을 주신 이후, 내 마음속에는 ‘내가 들은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일까?’하는 일말의 불안함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기도를 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다 (환상을 보는 일이 내게는 아주 드문 일로 지금까지 몇 번밖에 본 적이 없다). 넥타이를 맨 점잖은 한 신사가 울고 있는데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중국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우연히 중국 텔레비전 뉴스에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나는 잠자리에서 사스로 고통받는 인민들을 생각하며 자주 눈물을 흘립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환상으로 본 신사가 원 총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교민들을 철수시키지 않은 것이 옳은 결정이라는 것을 확증시켜주시기 위해 환상을 보여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도 신문과 방송에서 원 총리에 관한 뉴스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사스가 한창일 때 그는 사스 발생 지역을 돌아다니며 중국 인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또한 베이징대학 학생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목이 메는 소리와 벌겋게 된 눈으로 사스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못 이루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지 않으며 도전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나는 4월 말 프랑스 총리를 환영하는 환영식에서 눈앞에서 펄럭이는 오성홍기(五星紅旗, 중국 국기)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나는 그때 중화민족이 지난 수천 년간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어도 한 번도 쓰러진 적이 없으며, 좌절을 겪으면 겪을수록 더욱 용감했고 고군분투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번 재난을 겪은 후에 우리 중국 인민들이 더욱 일심단결하고 강건해질 것을 믿습니다.”
나는 원 총리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중국이 앞으로 반드시 사스를 퇴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은 사스에 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보여주신 환상을 통해 사스 퇴치의 확신을 갖게 된 나는 직원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회의가 시작되자 직원들이 교민 철수에 따른 각종 준비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한 직원이 현재 상황과 전세기 운항 스케줄 등을 보고했다. 나는 보고를 중단시키고 물었다.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직원들은 도리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잠잠했다.
“대체 누가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까? 철수 명령 같은 중요한 결정은 대사인 내가 하는 것인데, 누가 이런 결정을 했습니까?”
직원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개인적으로 떠난다면 모를까, 나는 어떤 경우에도 교민들의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대사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교민들, 기업인들, 유학생들 모두 몹시 불안해합니다.”
“사스가 아무리 심해도 우리 한국인들은 단 한 명도 사스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모든 책임은 대사인 내가 질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어려울 때 놔두고 가버리면 나중에 돌아와서 어떻게 이들을 봅니까? 우리가 남아서 이들을 격려하고 도와줘야 이들이 감사하게 생각해서 우리가 여기서 뭘 하든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사님, 그래도 이건 허락해주셔야 합니다.” 직원들의 의견도 강경했지만 나 또한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신 일이라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특수합니다.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한국이 철수하면 다른 나라에 주는 영향이 큽니다. 우리가 움직이면 먼 데 떨어진 사람들에게조차 중국의 위험성을 더 부각시키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있는 중국 입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지 말고, 어떻게든 중국의 사스 퇴치 노력에 도움을 줘야 합니다. 나는 중국 정부의 능력을 믿습니다. 중국 정부는 틀림없이 사스를 통제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중국인들과 고난을 함께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어려운 시기를 한중 관계의 중요한 전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강조하고 회의를 끝냈다.
잠시 후 사스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조환복 경제공사(현 주멕시코대사)를 비롯한 몇몇 간부들이 내 사무실로 찾아와 말했다.
“중국을 사랑하는 대사님의 마음은 저희들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태가 아주 심각합니다. 만일 그러시다가 교민 중에 사스 환자라도 발생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나는 분명히 대답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만일 그런 상황이 오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며칠 후 다시 직원 전체회의가 열렸다. 나는 지난번과 같이 직원들에게 교민 철수가 안 되는 이유와 중국 정부에 대한 신뢰, 한중관계의 중요성과 금번 우리의 행동이 앞으로 양국 관계에 미칠 영향 등에 관해 다시 한 번 상세히 설명하고, 직원들의 이해와 협조를 당부했다.
나는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직원들의 마음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만지신 것이었다.
중국을 감동시키다
이후 우리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대사관 전 직원이 개인적으로 돈을 모아 3900달러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사관 직원 부인회가 모금한 1000달러를 합쳐 4900달러를 베이징시위생국에 전달했다. 외국의 기업이나 교민들이 중국을 떠나는 시점에 한국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이 성금을 모아 전달한 것이 중국 언론에 보도되었으며, 많은 중국인들이 감동을 받았다.
나는 사스 사건이 그해 3월에 구성된 중국 신(新)정부가 처음 맞는 사회경제적 위기로서 모든 지도자들이 노심초사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서 우리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위로 또는 격려 전문(電文)과 정부 차원에서 성금을 전달할 것을 본부에 건의했다. 즉각 조치가 취해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에게 전화를 하여 사스에 관련해 위로를 하는 동시에 고건 총리 명의의 위로 전문을 원자바오 총리 앞으로 보냈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중국 정부의 사스 퇴치를 지원한다는 상징적 의미로 10만 달러의 성금을 보냈다. 대사관에서 중국 정부에 이 사실을 통보하자 민정부장이 이 돈을 직접 받겠다고 알려왔다. 나는 4월 30일 아침에 중국 민정부(民政府, 우리나라의 과거 내무부 성격의 부서)를 방문하여 성금을 전달했다.
그 자리에서 민정부장이 말했다.
“중국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김 대사가 친히 민정부를 찾아와 지원금을 전달해주어서 한국 정부와 대사관에 대하여 중국 정부를 대신하여 사의를 표합니다. 이러한 한중의 우정을 여러 경로를 통해 널리 알리겠습니다. 금번 일로 양국 간의 우의가 계속 발전해나갈 것으로 믿습니다.”
이와 함께 대사관의 조언을 받아들인 우리 기업들도 중국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면서, 사스 퇴치 운동에 참여했다. 이같은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행동은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사스가 퇴치된 다음, 나는 발행 부수가 230만 부 이상인 중국 최대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人民日報)》 사장(장관급)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언론계를 대표하는 인사로서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이 보여준 행동에 감동을 받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스에 발생했을 때 한국 정부와 국민 그리고 한국대사관이 많은 도움을 주어 깊이 감사합니다. 특히 대부분의 서방국가들은 자국민들이 언제든지 중국에서 철수해도 좋다는 지침을 내렸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전혀 그러한 동요 없이 일관되게 중국을 지지하고 중국의 입장을 이해해주어 더욱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편 당시 중국에서는 사스가 한국에서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고,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중에서도 사스에 감염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인들이 김치를 먹어서 그렇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래서 중국 친구들에게 김치를 선물하면 아주 좋아했다. 나는 대사관 관계관에게 지시하여 한국에 김치를 대량으로 주문하게 했다. 그리고 비행기도 공수된 김치를 중국 정부와 각계 지도자 수백 명에게 선물했다. 김치를 받은 수많은 중국 고위 인사들이 나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왔다. 사스라는 환난 속에서 중국과 중국인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이 모든 일을 치르면서 나는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모험을 할까?’,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담대할까?’ 하는 의문어린 시선을 많이 받았다.
내가 개인적으로 결정하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정해주셨고 나는 따르기만 했기에 담대할 수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담대할 수 있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 31:24)
너는 그를 따로 만날 것이라
외교통상부의 재외 공관장회의는 매년 2월에 개최된다. 2003년에는 예외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관계로 공관장회의 개최가 5월 21일부터 23일까지로 늦춰졌다. 사스가 한창이던 5월 초 외교통상부의 한 간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공관장회의 참석 기간 중인 5월 22일 저녁에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최 만찬이 있습니다. 거기에 참석하려면 사스 발생 지역에서 오시는 주중대사는 격리 기간이 필요하니 회의 시작 2주 전인 5월 9일까지는 귀국해주십시오.”
당시 중국에 살던 사람이 한국에 가면 사스 감염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이미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하나님께 청와대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서 서울에 일찍 들어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리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본부 간부에게 연락을 했다.
“대사관 일이 바빠 일찍 들어가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저는 예정대로 들어가겠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그는 내 말에 놀라는 것 같았다. 며칠 후 본부 차관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같은 이야기를 했다.
“대사관 일이 그렇게 바쁘면 늦게 들어와도 좋지만, 대통령이 주최하는 청와대 만찬에 참석하지 못할 텐데요….”
나는 잘 알고 있으며, 청와대 만찬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말씀에 순종해서 일찍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만, 사실 주중대사가 새로 취임한 대통령을 못 만나고 임지로 돌아오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하나님, 지금이라도 서울에 빨리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를 따로 만나게 될 것이라.’ 나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혼자서 대통령께 드릴 보고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5월 15일에 서울에 오니 본부의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말했다. “대통령이 새로 취임했는데, 주중대사가 대통령 얼굴도 못 보고 임지로 돌아가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글쎄, 무슨 방법이 있겠지요.” 나는 그저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5월 22일 만찬 당일 120여 명의 공관장들이 부부 동반으로 숙소인 신라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떠났다. 나와 아내는 방에서 룸서비스로 설렁탕을 시켜 먹었다.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기도해서 정했다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아요?”
나는 아내를 위로했다. “여보,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며칠 있으면 다 알게 되니까.”
다음 날 회의에 참석하니 다른 공관장들이 나를 아주 안됐다는 표정으로 위로했다. 그들은 내가 사스 지역에서 온 것도 억울한데 청와대 만찬까지 참석하지 못했으니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회의에 참석하면서도, 언제 연락이 오나 하고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 오후에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 주 월요일인 26일 오전 11시 30분까지 청와대로 들어오십시오. 대통령님이 별도로 보고를 받으시겠답니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대통령을 만나게 해주시는군요.’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다시 확인하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 5:29)
담대한 보고
그런데 청와대 의전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대사님! 상부 지시입니다. 중국에서 아직 사스가 심하니 대통령께 보고하실 때 중국 가시는 문제는 이야기하지 마시랍니다.”
나는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방중(訪中) 문제는 취임 이후 계속 검토되어 왔다. 그리고 중국 측에 7월 초 대통령의 방중 가능성을 타진하면서도, 사스의 심각성 때문에 최종적인 결정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하나님께 여쭈었다. ‘대통령 방중을 7월 초로 계획하고 있는데, 사스가 계속되고 있으니 11월쯤 추진하면 어떨까요?’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럼 10월에 할까요?’ ‘….’ ‘그럼 9월로 할까요?’ ‘….’ ‘그럼 8월은….’ ‘….’
‘그러면 원래대로 7월 초로 할까요?’ ‘그래.’ 나는 기도응답을 두고 곰곰이 생각했다.
‘대통령의 방중을 7월 초에 예정대로 하라고 하시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사스가 6월 말에는 진정된다는 의미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일을 추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대통령의 방중을 건의하기로 결심했다.
5월 24일 토요일 아침, 혼자서 외교통상부 동북아2과(현 중국과)로 갔다. 타자수와 한두 명의 직원들이 출근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혼자서 타자를 쳐서 보고서를 만들었다.
보고서에는 사스가 6월 중에는 거의 진정될 것임으로 예정대로 7월 초 대통령의 방중을 건의하는 내용과 당시 중국 정부의 한국에 대한 기대와 대통령 방중으로 예상되는 외교적인 성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틀 후 나는 청와대로 갔다. 의전비서실의 국장은 내게 상부의 지시를 강조하면서 대통령의 방중 문제를 거론하지 말아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청와대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현지 대사로서 대통령께서 예정대로 중국을 방문하시도록 건의할 겁니다.”
그리고 외교보좌관, 의전비서관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보고가 시작되고, 나는 준비한 대로 대통령의 7월 초 방중을 건의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보고서의 내용을 찬찬히 보시더니 내게 물으셨다.
“사스가 6월 말에 진정될 것이라는 것을 대사는 어떻게 알지요?” 내가 대답했다.
“대통령님, 저는 중국에 주재하는 대사이고 중국 전문가입니다. 현지 대사의 말을 믿어주십시오.” 대통령은 사스에 관해 더 묻지 않고 알겠다고만 말씀하셨다.
그리고 몇 가지 보고를 마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배석자 중의 한 명이 말했다. “김 대사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스 때문에 대통령께 보고하지 말아달라고 미리 이야기했는 데도 내가 굳이 보고한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절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외교통상부로 돌아오자 간부들은 내가 대통령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고했는지 궁금해했다. “대통령께 중국 가시는 거 말씀드리셨어요?” “네.” “어떻게 말씀드리셨어요?” “7월 초에 오시라고 했습니다.”
“사스는요?” “6월 말에 끝날 거니까요.”
“안 끝나면요?” “끝납니다.”
“아니, WHO에서도 발표한 적이 없는데 대통령께 그렇게 보고드리셔서 방중을 추진하다가, 만일 6월 말에 사스가 진정이 되지 않으면 어떡하시려고요?”
내가 대답했다. “그야 현지 대사가 책임을 져야지요.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습니다.”
내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하니까 아무도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나는 본부에 7월 초 방중 준비를 위한 시간이 촉박하니 가능한 빨리 일자를 확정하여 지침을 달라고 요청하고 5월 30일에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사스가 진정되다
드디어 6월 4일에 본부에서 지침이 내려왔다. 대통령이 7월 7일부터 10일까지 중국을 국빈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이 사실을 중국 외교부의 고위 간부에게 전화로 통보했다. 외교부 간부는 노 대통령의 방중을 환영한다고 하면서, 지난 4월 말 프랑스 총리와 5월 중순 루마니아 총리의 방중이 있기는 했지만, 사스 발생 이후 외국 국가 원수로서는 최초의 방중이므로 중국 정부로서 국빈 방문에 소홀함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곧 대사관 내에 ‘대통령 방중 행사 준비를 위한 대책반’을 가동했다. 그러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말은 그렇게 담대하게 했지만 사실 마음으로는 걱정도 되고 초조했다. ‘하나님, 6월 말까지 사스를 어떻게든 꼭 진정시켜주십시오.’
만일 그때까지 사스가 진정되지 않아 대통령 방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어떤 형식으로든지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내에게 기도 부탁을 하며 말했다. “여보! 이제 기도밖에 없어요. 대통령의 방중이 잘못되면 우린 바로 소환(召還)이야. 반드시 그 전에 사스가 끝나야 돼요.”
나와 아내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6월 13일에 중국의 톈진시(天津市), 허베이성(河北省), 산시성(山西省)과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에 대한 여행 제한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24일에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베이징시에 대한 여행 제한도 해제되었다. 중국 정부가 사스를 완전 통제함에 따라, 사스가 진정된 것이다.
‘오,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 소식을 들으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는지 모른다.
드디어 7월 5일에 WHO에서 사스가 세계적으로 완전히 통제되었음을 선포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베이징에 도착하기 불과 이틀 전이었다.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베이징 수도공항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숙소인 따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 도착하니, 대통령께서 “김 대사는 가지 말고 잠시 나하고 차 한잔 하시지요” 하며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아무리 중국 전문가라고 해도 어떻게 사스 끝나는 것까지 아십니까?” 나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제가 현지 대사를 믿어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대통령은 또 한 번 크게 웃으셨다.
3박 4일간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상하이에서 대통령 일행을 전송한 다음, 나는 호텔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사스가 시작된 후 우리 교민들이 철수하지 않도록 하신 일과 내가 청와대 만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신 일, 대신 대통령과 따로 만날 수 있도록 해주셔서 대통령의 7월 초 중국 방문을 건의하게 해주신 일, 그리고 사스를 6월 말에 진정시키심으로 대통령 방중이 성사될 수 있도록 역사해주신 하나님의 세심한 이끄심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혹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들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던 나를 끝까지 지키고 보호해주셨다.
그리고 사스라는 환란을 통해 중국과 중국인들의 마음을 얻는 승리를 나에게 안겨주셨다. 나는 그와 같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중국 땅과 중국인들을 더욱 축복해주실 것을 간구했다.
또한 몇 달 동안 사스 관련 업무로 누구보다 많은 고생을 한 조환복 경제공사와 전은숙 식약관 (현재 식약청 위해예방정책국장)을 비롯한 대사관 관계 직원들을 위로하고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 29:25)
그(하나님)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 91:11)
'하나님의 대사' (김하중, 규장)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