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화지도를 그리다] <7> 해운대 ①
부산일보 기사 입력 : 2013-09-12 08:13:23 수정 : 2013-09-13 14:09:43
'어촌' 해운대에 사람이 살아 왔다, 그리고 영화가 있었다
부산 해운대 토박이에게 지금의 해운대는 참 낯설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남포동 골목을 오가며 영화를 보던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깨끗하고 화려한 지금의 해운대에서 굳이 이곳의 과거를 떠올리고자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는 삶과 늘 함께 산다. 사람이 있어야 영화가 있다. 바꿔 말하면, 사람이 있는 곳엔 영화가 있기 마련이다. 여기 해운대에도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었다. 그리고 영화가 있어 왔다.
1951년 댄스홀 개조 '해운대극장' 개관
'파도극장' 생기기까지 지역 유일한 극장
해수욕장 미군 '비치클럽'서도 주민 초청
50년대 당시엔 귀했던 컬러영화 보여 줘
개봉관 중구·서면으로 집중되며 사양길
1999년 설립 시네마테크서 영화와 소통
■사라진 작은 어촌, 해운대
"해운대? 그냥 촌이었지. 그라고 바다에 붙어 있으니 배 타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지. 우리 아부지도 어업조합장이었제."
4대째 운촌에 거주하며 '운촌 사람들'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송사웅(70) 씨의 기억에 해운대는 그냥 촌이었다. 지금은 복개 공사로 시멘트로 덮인 '춘천(春川)'이라는 강이 장산에서부터 해운대 해수욕장 앞까지 흘러 왔고 이렇게 바다와 강이 어우러지는 동백섬 앞에는 고깃배가 참 많았다. 여기서 잡힌 멸치가 부산 멸치의 70%를 차지하기도 했다. 당산제를 지내며 유독 사람들 사이가 끈끈했던 운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은 사라지고 호텔과 대형 빌딩이 들어섰다. 보상비를 조금씩 모아 세운 마을회관에서 40명 정도 되는 어르신들만이 옛 기억을 나눈다. 마을회관 마당 바로 앞으로 기차가 철컹철컹 지나간다. 운촌이 그랬던 것처럼 복선전철화로 인해 이제 사라질 동해남부선 철길 위로 기차 소리만 길게 달린다.
지금 해운대 구청 일대는 갈대밭이었다. 그 중 온천이 솟아나는 곳을 거북이가 많은 구남벌이라 해 해운대 온천은 원래 구남온천(龜南溫泉)으로 불려 왔다. 통일신라시대 진성여왕이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았는데, 이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나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대마도에서 온 왜인과 나병 환자들이 몰려들어 민폐를 끼쳐 천원(泉原)을 막아 버렸다고도 한다. 애초에 갈대밭이었던 까닭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던 곳이었으나 조선 말기에 온천이 솟아나면서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1927년 동래와 해운대 사이 도로가 확장되고 일본인 자본으로 관광지로 개발되었으며 광복과 한국전쟁 전후로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러면서 온천을 중심으로 해운대 시장이 형성되었고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온천 앞 연못은 사춘기 소년 소녀의 데이트 장소였고 시장과 해운대 출장소, 버스 종점이 있는 온천 일대는 해운대 사람들이 모이는 번화가였다. 그리고 그곳에 당연하게도 극장이 있었다.
'해운대극장'은 1951년 정상국 씨가 사재 7천여만 원을 털어 댄스홀을 사서 극장으로 바꿔 개관한 해운대 최초의 극장이었다. 개관 프로그램은 '창극계의 명화(名花)' 박녹주가 특별 출연한 '열녀화'와 '신라의 종'이었고,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특등을 한 정읍농악단의 흥겨운 합동공연도 있었다. 물론 이곳은 도심과는 거리가 있었고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해운대에 사는 사람들이 찾는 극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해운대역 앞에 파도극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해운대의 유일한 극장이었기에 해운대 토박이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이곳은 생생히 살아 있다.
■모래 위의 신세계, 비치 클럽
해운대 해수욕장에도 영화의 기억이 묻어 있다. 현재 팔레드시즈 콘도 옆에 해운대 관광리조트를 개발하고 있는 터에는 원래 한국전쟁 때부터 미군 609부대가 1971년까지 주둔했었다. 미군은 해운대 해수욕장 중간에 철조망을 치고 '비치클럽'이라고 이름 붙여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수영과 일광욕을 즐겼다. 동네 아이들에게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을 비키니 차림의 서양 여자들을 구경하고 맛있는 통조림과 초콜릿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부대 근처에 미군을 상대하던 소위 양공주들이 많아지면서 지역 주민들의 항의가 계속 이어졌고 교육상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이사를 가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그래서 비치클럽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말마다 사람들을 초청해 영화를 보여 줬다. 여기선 당시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한국 무성영화가 아니라 생생한 컬러영화가 상영되었다. '최후의 포장마차'(1956) 같은 서부영화나 '보물섬'(1950)과 같은 모험영화를 보고 나온 아이들은 '총 먼저 뽑기 놀이'를 하며 저마다 영화 주인공을 흉내 내곤 했다.
■전국 최초 영화 도서관, 시네마테크 부산
1970년대 컬러TV가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극장에 가지 않았다. 해운대도 그랬다. 경영이 어려워진 해운대극장은 결국 1986년 폐업한다. 해운대뿐만이 아니었다. 큰 개봉관이 중구와 서면지역으로 집중되면서 주거지에 있던 부산의 작은 극장들은 점차 사라졌다. 해운대극장과 함께 해운대의 마을들도 개발이라는 바람 앞에 하나씩 사라졌다. 운촌 위로는 그랜드호텔이 들어섰다. 그리고 '해운대극장'이 사라진 지 10년 뒤인 1996년 그랜드호텔 안에 있는 그랜드맥스극장이 개관했다. 1998년에는 지금의 벡스코 제2전시장 자리에 시네파크자동차극장도 개관했다.
그리고 1999년, 시네마테크가 전국 최초로 부산에 만들어졌다. 시네마테크는 프랑스어로 '영화 보관소'를 뜻한다. 하지만 시네마테크는 단순한 자료 보관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영화를 만나고 함께 나누며 호흡하는 공간이다. 부산국제영화제 계획의 일환으로 부산시 예산으로 만들어졌던 이곳은 매년 3만여 명이 다녀갔다. 수많은 감독과 비평가들과 영화를 사랑하던 전국의 관객들이 함께했던 곳. 이곳은 2011년을 끝으로 영화의전당으로 이관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개발이라는 바람 앞에 다시 또 사라질 것이다.
불완전한 개인의 불완전한 기억. 삶은, 혹은 이야기는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공간에 켜켜이 쌓이다 공간의 소멸로 결국 개인의 기억 속에 불완전하게 머문다. 작은 마을이었던 해운대에 사람들이 북적였고 다시 마을의 작은 집들이 철거되고 그 위로 말끔한 빌딩들이 하늘을 가리며 우뚝 올라선다. 영화도 그렇다. 북적이던 사람들 속에 작은 극장의 문이 열리고, 다시 옛 시네마테크 공간은 철거되고 장대한 영화의전당이 우뚝 섰다. 모든 것을 보존할 수는 없다. 사람의 몸이 그러하듯 공간도 결국 소멸할 것이다. 다만 소멸의 이유를 되짚지 않은 채 무차별적으로 생성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은 '나'와 '기억'에 대한 폭력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사람과 이야기가 없이 하늘로 뻗어 나간 빌딩은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공간에 대한 기억을 기록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우리가 영화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이유다.
글=변경난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betrue1020@hanmail.net
후원 : 부산영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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