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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역사가 있는, 클래식과 모던이 조화를 이루는,
모노에서 멀티로 나아가는 하늘을 여는 수직적 교회!
인간이 타락하면 모든 것을 자기 수준, 즉 수평적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한다. 심지어 하늘에서 내려오신 성령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교회의 탄생 장면을 기록한 사도행전은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 2:2).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오신 분은 바로 성령님이다. 그런데 수평적인 인간들이 수직적인 성령을 훼방한다. 그래서 지상 교회는 수직적으로 시작하지만, 자꾸 수평적으로 나아간다.
그렇기에 이 책에 ‘다시 수직적 교회로’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수평적인 교회에서 다시 수직적인 교회로 돌아가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교회의 목회 방향과 모든 프로그램이 ‘위를 바라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세상과 똑같이 서로 헐뜯고 험담하고 상처와 좌절감을 안겨준다. 교인들은 이런 모습에 지치고 신물이 나 있다. 그런 모습을 비난하면서도 어느 순간 자신도 그들 중의 일부가 되어 있음을 깨닫고 좌절한다. 그래서 그나마 의무감으로 다니던 교회조차 곧 발길을 끊으려 한다. 이런 교회의 모습을 보며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점점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상처를 입고 난 뒤에는 자신도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자가 되거나 아니면 믿음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버린다. 이것은 수평적 교회가 부딪힐 한계이다.
한마디로 인본주의가 수평적 교회의 특징이라면, 신본주의는 수직적 교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신본주의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허물과 약점, 허다한 문제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다 보면 인간들이 지닌 허다한 문제들과 약점이 모두 가려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수직적 교회로 가는 운동을 일으켜 교회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야 하는 것이다.
🏫 저자 소개
송재식
자신을 가리켜 “걸어 다니는 진흙 덩어리”라고 고백하는 송재식 목사는 위기에 처한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영성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다. 호남신학대학교와 전주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M.Div)한 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프랑스 복음주의신학대학 대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엑상프로방스 개혁신학대학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영성과 프랑스 위그노 경건주의를 연구하여 신학박사 학위(Docteur theol.)를 취득하였다.
특히 프랑스 유학 중 마피아의 총탄에 쓰러진 이후 세 차례나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저자는 이 사건들을 통해 깊은 영적인 체험을 갖게 되었고, 이후 근원으로 돌아가는 교회, 인간 중심의 수평적 교회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수직적 교회로의 회복을 꿈꾸는 목회자의 삶을 살아왔다.
호남신학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신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광주노회장, 서울여자대학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간증집 『걸어 다니는 진흙 덩어리』와 목회 수상집 『근원으로 돌아가라』 등이 있으며, 현재 광주광역시 임동과 수완동에서 두 날개로 비상하는 서림교회의 위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 목차
권두시 고 훈 ● 4
추천사 맹용길, 정삼수, 최이우, 최윤배 ● 6
프롤로그 ● 20
Part 1 애굽을 떠나
1.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교회 30
2.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42
3.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라 54
4.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64
Part 2 길갈을 지나
1. 담대하게 선포하는 복음 76
2.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86
3. 복음의 권위를 회복하라 98
4. 미움받을 각오 108
Part 3 가나안으로
1. 하나님의 수를 보라 118
2. 바다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 130
3.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142
4.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150
에필로그 ● 162
📖 책 속으로
지난 2천 년간 이어져 온 교회의 역사는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배가 부르고 부족함이 없을 때는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33년을 사셨던 팔레스타인에 살던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점을 아시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태복음 19:23-24) 예수님은 이 땅에 떡을 주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교회는 어려운 이웃을 구제해야 하고, 선하고 옳은 일을 위해서도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역사회를 위한 복지 사업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것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기반한 수평적 관계에 앞서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먼저입니다. 수평적 교회는 사람들의 만족을 추구하고 사람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높아지고 유명해집니다. 반면에 수직적 교회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냅니다. 수직적 교회는 사람의 소리는 잦아들고, 하나님의 음성과 그분의 뜻에 집중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찬양과 기도 소리가 더 커집니다. 바로 이런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 pp.32~33
호세아 선지자가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부르짖었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수평적 사고로부터 돌이켜야 합니다. 수직적 생각만이 인류를 살립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를 깊이 묵상할 때입니다. 지금은 캄캄한 세대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캄캄해져야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깊이 있게 주님을 만날 때입니다. 주님은 항상 내 곁에 계셔서 위기의 때, 캄캄할 때 확실하게 붙잡아 주십니다. 지금이 수직적 사고로 돌아올 때입니다.
--- p.53
수직적 설교의 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입니다. 베드로는 수직적 설교의 꽃을 외쳤습니다. 불과 몇 주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끌려가신 가야바의 뜰에서 여종이 무서워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담대하게 변했을까요? 하나님의 영, 수직적인 영, 성령의 임재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그를 둘러싸고 심문합니다. 그러나 그 위협적인 상황에서 베드로는 오히려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가 불과 몇 마디만 했을 뿐인데도 그의 말은 고소인들을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 pp.83~84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더 좋아하실까보다 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불쾌해하지 않을까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수평적 교회의 대표적 특징입니다. 사람들의 느낌이나 기분에 민감하고 거기에 신경을 쏟다 보면,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은 희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믿음 없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어 전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회중의 귀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하나님의 귀에 거슬릴 수밖에 없습니다.
--- p.99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17-20) 예수님이 파송한 칠십인의 전도자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바로 복음의 권세입니다. 제자들이 보고한 내용이 한결같이 말씀의 권세입니다. 이 권세가 여기 이 강단에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서림의 강단에서 언제나 예수 이름이 높여지고 십자가의 보혈이 흘러가길 바랍니다. 동시에 우리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 권세 있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 대한민국과 세계 열방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메신저가 아니라 메시지가 울려 퍼지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메신저는 감추어지고 메시지가 드러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pp.106~107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갖고 계십니다. 인생이 내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어찌 짜증 내고 좌절만 하고 있을 수 있습니까?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회사에 못 들어갈 수 있습니다. 원하는 그 사람과 결혼 못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끔찍했지만, 세월이 지난 후에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가 알지 못하는 복을 더해 주시려고 아끼던 그것을 빼앗아 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수직적인 수를 믿고 기대하는 사람은 땅을 치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울다가 정신을 차리고 선하신 하나님의 수를 기다립니다. 여러분, 절묘한 수, 하늘 아버지의 수가 있음을 기대합시다. 하나님의 수, 수직적인 수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pp.121~122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길은 믿음으로만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기 때문에 못 믿습니다. 자꾸 의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믿다가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자꾸만 설득하려고 합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도록, 내 뜻에 하나님과 사람들이 동의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설득합니다. 그러면서 알고 보면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진짜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모르는 길을 보여주세요.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그러다가 하나님의 길과 내 길이 달라 서로 충돌하면 내 길을 양보합니다. 포기합니다. 왜 내 뜻을 포기합니까? 하나님이 더 위대하시니까요. 나보다 하나님이 더 탁월하시니까 그렇습니다.
--- p.134
참으로 슬픈 일은 심지어 교회의 중직자들조차 성경을 읽을 때 마치 전설을 읽듯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 모세는 좋겠다. 홍해를 가르다니! 여호수아는 좋겠다.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오늘날에도 여리고 성은 무너집니다. 오늘날에도 홍해는 갈라집니다. 모세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고, 여호수아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내 앞에서도 여리고 같은 성이 무너지고, 홍해 같은 바다가 갈라집니다. 이것은 전설이나 흘러간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부터는 부흥을 구경하지 말고 경험하십시오. 아무리 구경해도 그것은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경험해야 내 것이 됩니다. 경험하셔서 흥왕하기를 바랍니다. 부흥을 경험하려면, 흥왕을 경험하려면 이사야처럼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나를 보내소서. 지금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이면 내가 어디든 가겠습니다. 아골 골짝 빈들이라고 할지라도 주님 보내시면 가겠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겠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주님 의 증인으로 살겠습니다.”
이런 예언자적 영성, 선교적 영성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수직적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귀를 열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신앙입니다.
--- pp.148~149
🖋 출판사 서평
이 책은 수직적 교회로 나아가는 서림교회의 세 비전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테바 비전(TEBAH vision): 다음 세대를 끌어안는 비전이다. 테바는 히브리어로 ‘상자’를 뜻한다. 출애굽기에서 아기 모세를 담았던 갈대 상자이자, 창세기에서 노아의 가족과 온갖 생물을 담았단 방주가 테바이다. 테바는 그래서 미래를 준비하는 상자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아기 모세를 담았고, 대홍수 이후 지구를 가득 채울 생명을 담았다.
도무스 비전(DOMUS Vision): 가정 같은 공간, 가정처럼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비전이다. 도무스의 사전적 의미는 ‘집’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이 ‘도무스’에서 놀라운 사역이 일어난다. 사도 바울이 안디옥에서 가정교회를 시작했던 장소가 도무스이며, 로마에서는 가택 연금된 셋방이 도무스이다. 안디옥 교회는 번듯한 교회당 건물이 아니라 단순한 가정집에서 부흥을 일구었고, 로마에서 바울은 셋집에서 연금 상태였지만, 주눅 들지 않고 복음 전도의 기적을 일으켰다.
다운 비전(DOWN Vision):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비전이다. 초대교회는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안디옥은 매우 세속적이고 복음과 상관없는 도시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 선민이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안디옥 시민들의 눈높이로 자기를 낮추어 섬기는 자세로 전도했다. 마치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성육신하셔서 우리 사람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도 자존심을 버리고 낮아져 섬길 것이다.
오직 예수를 선포하며,
오직 예수 보혈의 능력을 증거하며,
오직 십자가를 노래하는 찬양과 말씀이
수직적 교회의 강단에 울려 퍼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