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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초상 | |
본명 | 이성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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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1392년 음력 7월 16일 ~ 1398년 음력 9월 5일 |
출생일 | 1335년 음력 10월 11일 |
출생지 | 함경도 영흥 흑석리 |
사망일 | 1408년 음력 5월 24일 |
사망지 | 창덕궁 광연루 별전 |
매장지 | 경기도 구리시 건원릉 |
배우자 | 신의왕후 신덕왕후 |
부친 | 환조 |
모친 | 의혜왕후 |
다음 왕 | 정종 |
왕조 | 조선 |
묘호 | 태조 |
시호 | 강헌 |
조선 태조(太祖, 1335년 음력 10월 11일 ~ 1408년 음력 5월 24일, 재위 1392년 음력 7월 16일 ~ 1398년 음력 9월 5일)는 고려 말의 무신이자 조선의 초대 왕이다. 성(姓)은 이(李), 본관은 전주, 휘는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晋), 호는 송헌(松軒)이며 몽골식 이름은 아기바토르(阿其拔都)이다. 사후 시호는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며 이후 존호를 더하고 대한제국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폐지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1]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상왕위(上王位)에는 약 10년 동안 있었다. 향년은 74세이고 능은 양주(楊州)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
목차 |
1335년 음력 10월 11일 원나라 쌍성총관부에 속해있던 함경도 영흥 흑석리에서 환조 이자춘과 의혜왕후 최씨의 적자로 태어났다. 어느 날 당시 쌍성총관부 만호 관리를 지내던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바느질에 사용하는 자)을 꺼내 바쳤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을 하였고, 13개월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은 용과 같았고, 눈은 봉황처럼 부리부리했다고 한다. 그 아기가 바로 이성계이다.
고려의 무신(武臣)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기가 그지없어서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훗날 그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여 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1356년(공민왕 5) 유인우가 공민왕의 명을 받들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공을 세웠고, 1361년에 상만호(上萬戶)가 되어 고려의 함주 지방(함경도 지역)의 경비를 맡았다.
1361년 음력 10월에 고려 정부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1362년 그는 선봉에 서서 말을 탄 채 장수만 골라 쏘는 맹공을 펼쳐 마침내 홍건적의 괴수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까지 참살하고 수도에 제일 먼저 입성해 탈환하는 큰 전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1362년 심양행성 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나라 장수 나하추 (納哈出)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고려 정부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나라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이를 막았고, 함주를 침공한 김삼선(金三善)·김삼개(金三介)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으며, 1370년 요동에 있는 원나라 동녕부(東寧府)를 원정하여 공을 세웠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약탈 또한 빈번하여, 고려를 괴롭혔다. 이처럼 왜구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고려 정부에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마침 1380년 이키 섬 출신 아키바츠(阿只拔都)라고 하는 소년이 왜구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여 지리산 일대를 약탈하며 북진을 하자 이성계는 삼도 도원수(三道都元帥)로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전라도 운봉에 도착한 이성계는 운봉을 넘다가 길 오른쪽의 험한 길을 보고 “적이 반드시 이 길로 우리를 갑자기 습격하려 올 것이니, 우리도 이 길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하고는 험한 곳에 들어갔는데, 과연 이성계의 예측대로 왜구가 습격해 왔다. 이에 이성계는 화살 70여 발을 쏘아 모두 얼굴을 맞히니, 왜구들이 활시위 소리를 따라 모두 쓰러졌다. 마침내 이성계의 군대가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와 대치하게 되었다.
아키바츠는 고려군이 토벌에 나선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힘만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에 왜구의 기세는 크게 꺾여져서 물러났다. 당시 이성계는 아키바츠의 투구를 활로 쏘아 맞히어 벗긴 뒤 벗겨진 이마를 향해 다시 활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화살 두 대를 연사하여 투구가 벗겨지자마자 다시 화살이 날아들어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이에 왜구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고려군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져서 왜구의 정예부대가 모두 죽었다. 기록에 따르면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마치 만 마리의 소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라고 한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때 이색, 김구용, 권근이 시를 지어 승리를 하례하였다.
이렇듯 고려 말기의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상황은 이성계를 변방의 무명 장수에서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계속되는 승전은 이성계의 무장으로서의 진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어 고려 내에서 입지를 굳히게 만들었다.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벼슬도 올라갔다. 군사력을 갖춘 신망받는 이성계에게는 자연히 신진 사대부들이 몰려들었다.
최영과 협력하여 이인임 일당의 전횡을 제거하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우왕 때(1388년)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요동을 정벌하러 갔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 당시 중국이 원나라와 명나라 교체기에 있어 고려에 친원파와 친명파 사이의 대립이 확대되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요동 정벌을 논하였고, 이성계는 그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이성계가 진군하다가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장맛비가 계속 내렸으므로 회군을 청하였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군사들을 설득하여 회군하였다. 회군하기 전에 장맛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강물이 불어나지 않았는데, 막상 회군하여 군사들이 강을 건너자 갑자기 강물이 밀려와 위화도가 물 속에 잠겨 버렸다고 한다. 회군한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때 어린 아이들이 “나무의 아들(木子)이 나라를 차지하리라.”라는 동요(참요)를 부르자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따라 불렀다고 한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삼군 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조준 등과 결탁하여 사전(私田)을 개혁하고 특권층의 세력을 좌절시키는 한편 신흥세력의 기반을 굳게 하였다. 우왕 때에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었던 신진 사대부도 속속 정계에 복귀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였다. 이색, 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실을 보존하여 그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쿠데타를 주장하였다. 점차 쿠데타가 시작되고 있었다.
급진 개혁파는 이성계와 연결하여 쿠데타파를 이루었다. 이들 혁명파는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마저 차지했다. 1392년 혁명파는 역성 혁명을 반대하고 고려에 충성을 바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였다. 뒤이어 정몽주가 숨을 거둔 지 4개월도 되지 않아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음력 7월 17일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다. 즉위한 다음날 개경 거리와 궁궐에 단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 끝에 모처럼 비가 내리자 사람들은 천지신명이 새 임금을 축복하여 내리는 비라고 떠들며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음력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쳤다.
태조는 조선의 3대 기본 정책을 내세워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니, 정치적으로는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고 국호 및 왕위의 승인을 받아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며, 그밖에 다른 나라와 교린하는 사대교린정책을 썼고, 문화적으로는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고려 말기의 부패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세웠으며, 경제적으로는 농본주의 정책으로 농업을 장려하고 전지(田地)를 개혁하여 농본민생주의에 따른 신분·사회 제도를 확립하였다.
1392년 개경(개성)에서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였다. 이어서 음력 10월에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였다.[2] 이는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으로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아울러 구세력의 뿌리를 뽑기 위하여 왕씨 일족과 구신(舊臣)들을 숙청하였다.
논공행상으로 창업에 공을 세운 이에게 개국공신의 호를 주고 전지(田地)와 노비를 내리어 왕권을 튼튼히 하였으며 관제(官制)를 비롯한 국가의 시설을 정비하고 《경제육전》을 찬집(纂輯)하게 하여 반포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에 힘썼다.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한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의 불만이 쌓였다.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방석을 끼고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이유를 들어 정도전 일파와 강씨 소생 왕자들을 살해했다.
태조는 이 사건에 몹시 상심하여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은퇴했다. 그러나 정종마저 곧 물러나고 이방원(태종)이 왕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성석린(成石璘)을 보내 서울로 모셔 왔다. 그러나 1402년(태종 2)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죽였다는 전설이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뒤에 무학대사가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다.
만년에 불교에 전념 하다가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그의 진영(眞影)이 영흥(永興)의 준원전(濬源殿) 및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建元陵)이다.
태종은 자주 차사(差使)를 함흥으로 보내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불화를 풀고 태조를 환궁시켜 옥새를 얻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족족 활을 쏘아 맞추어 죽였고, 그로 말미암아 보낸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야담 수필집 《노봉집시장》(老峰集諡狀), 선조 때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오산설림》(五山說林) 등의 책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나 야사일 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이 함흥차사 고사는 태조와 태종이 왕자의 난 이후로 서로 화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빗대어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함흥차사의 모티브는 신덕왕후의 친척인 조사의가 일으킨 조사의의 난이다
조사의가 동북면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당시 그는 그곳에 기반이 있지도 않았고 신덕왕후또한 그 지역과 관련이 없었으며 그 시기 태조가 조상들의 능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동북면에 들어간것으로 보아 배후에 태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태종은 박순을 보내 반군을 설득하게 하고 태조를 설득하기위해 이서와 설오대사를 보냈으며 이천우를 선발로 진압군도 파견했다. 하지만 박순은 반군에게 살해당하고 이서와 설오대사는 반군에게 가로막혀 돌아왔고 진압군은 패하며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 태종은 장인인 민제에게 수도인 개성을 맡기고 직접 출전하였다 그후 반군의 포로로 잡힌 김천우가 관군이 4만여명이라는 소문을 내어 그날밤 도망병이 속출했고 한 도망병이 지른 불을인해 하룻밤만에 와해되고 조사의등은 처형되고 그후 평양에 머물던 태조는 태종의 부탁으로 도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전 임 (왕조 성립) |
1392년 ~ 1398년 | 후 임 정종 |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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