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해야할 그 날이 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중국 뤼순 감옥에서 한 한국인 사형수의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 사형수의 이름,
"안 중 근"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
백범 김구 선생이 1946년 유해봉환을 고려해 삼의사
(이봉창,윤봉길,백정기) 묘 옆에 만들어 두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집행 16일을 앞둔 1910년 3월 10일 여순감옥에서 정근, 공근
두 아우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고 조국이 주권을 회복했을 때 고국으로 이장하라.
나는 천국에 들어가서도 다시금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생각이다.”
그러나 일제는 사형집행 후 아우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시신 인도를
거부하고 비밀리에 매장하였다.
안중근 의사 묘의 존재가 알려져 국외 한인들의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 했던 것이다.
당시 일제의 감옥법은 ‘유족이 요청시 시신을 교부’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으므로
시신 인도 거부는 중대한 법 위반이었다.
광복 후 고국으로 귀환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은 먼저 독립운동에
헌신한 의열사(義烈士)들의 유해를 모셔 오는 일에 착수하였다.
백범일지에는 1946년 7월 효창원에서 거행된 3의사 국민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제일 윗자리에 안 의사의 묘역을 잡아놓고 차례로 3의사의 유골을 봉장하였다.”
언젠가 안중근 의사 유해를 찾으면 제일 윗자리에 모시려 하였던 것이다.
또 1948년 민족의 분단을 막고자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구 선생은 김일성에게 안중근 묘의
발굴을 제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 모시는 일은
숭고한 선열의 후손된 도리로서 유언을 받드는 일이고, 또 김구 선생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안중근 의사의 사형과 매장이 언급된 문건은, 당시 여순의 관동도독부가
본국 외무차관에게 보낸 보고서와 여순법원 통역관의 기록 정도이다.
1910년 3월 26일 관동도독부 민정장관 대리 사토(佐藤)는 본국 외무차관 이시이(石井)에게
“安重根 本日 死刑執行, 遺骸 旅順 埋葬(오늘 안중근 사형 집행, 유해를 여순에 매장)”
라고 보고했다.
또 통감부 소속의 여순법원 통역 촉탁 소노키 수에키(圓木末喜)는
다음과 같은 전문(電文)을 썼다.
“(전략) 1910년 3월 26일 10시 20분 안의 사체는 특히 감옥서(監獄署)에서
조제한 침관(寢棺)에 넣어 (중략) 오후 1시 감옥서의 묘지에 매장했다.”
이 문건들은 안 의사 유해 매장에 관하여 소략(疏略)하게 다루고 있다.
특별히 비밀매장으로 처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기록과 보고를 중시했던 일인들의
습성과 그들의 지휘보고 체계를 볼 때, 여순감옥 또는 관동도독부에서 안 의사 유해의 비밀매장
결과와 증거사진들을 첨부한 별건의 상세 보고서가 본국 정부에 제출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100년 전 일제는 일방적인 재판을 진행하여 안중근 의사를 교수형에 처했고,
유해조차 돌려주지 않았다. 올해로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을 맞는다.
일본은 최후까지 동양 평화를 염원했던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뜻과, 유해로나마 고국에
돌아오고 싶어 하신 유지를 존중하여,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유해를 찾는데 협조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과거사에 대한 사과의 진정성을 보여 줘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정당한 요구이기도 하다.
황용해(국가보훈처 사무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그 영향에 대하여
1909년 10월 26일 오전 10시가 채 안된 시각,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두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주살(誅殺)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등박문은 일제의
한국침략 정책을 주도하여 을사늑약을 강행하고, 초대 조선통감으로 있으면서
온갖 침탈 행위를 자행하여 동양의 평화를 교란시킨 인물이었다.
안 의사의 의거는 겨레의 항일 정신을 격발시켜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게 되었고,
윤봉길, 이봉창 등 연이은 의열투쟁의 선구가 되었다.안 의사의 의거를 가장 격찬하고
영웅시한 것은 중국이었다. 중국 내 많은 도시에서는 안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이 끊임없이 상연되었다.중국 국민당 정부를 창건한 손문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감명을 받아, 1919년 상해에 대한 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적극 후원함으로써
이후 한중 항일연합전선의 토대를 쌓았다.
또한 진독수는 “나는 중국의 청년들이 톨스토이와 타고르가 되기보다 콜럼버스와
안중근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안중근 의사로부터 힘을 얻은 항일 독립운동은,
후일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 총통의 적극적 지원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호응을 얻어
카이로선언문에 한국 독립에 관한 사항이 특별 기록되고, 8.15 광복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유방백세(遺芳百世: 향기로운 이름 길이 남으리.)” 효창원 안중근 의사의 허묘와
3의사 묘 아래 새겨진 김구 선생의 친필 묘각문(墓刻文)이다.
첫댓글 겨례의 등불이며 평화의 횃불이신 님이시여 님의 나라사랑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부디 안식을 누리소서
어릴 때 이름이 응칠(應七)이었답니다.ㅋ
사형선고 받았을 때 그 어머니 조마리아님은 아들아 항소하지 말고 순국하여라 하셨답니다. 그 아들의 그 어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