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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8일 오늘의 역사
2023 ‘178년 역사’ 미국 뉴욕경찰서 최초 한국인 총경 탄생
최초의 한인 미국 뉴욕경찰(NYPD) 총경이 탄생했다.
NYPD는 뉴욕시 퀸스 광역지구대의 허정윤 경정을 총경 승진자로 내정했다.
한인이 총경이 된 건 1845년 NYPD 설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NYPD는 3만6000명의 경찰관과 1만9000명의 민간 직원으로 구성된 미국 최대 규모의 경찰 조직이다.
허 내정자는 1998년 첫 한인 NYPD 여성 경관으로 임용됐다. 맨해튼과 퀸스 등 한인 거주 지역에서 근무했고, 지난해에는 한인 최초로 경정으로 승진했다
2023년 아이슬란드 남서부 레이캬비크 반도의 그린다비크 지역에서 화산이 폭발
2022년 대만 한파로 99명 사망
2022년 황선우 쇼트코트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아시아 신기록 금메달
한국 수영의 희망이 된 황선우(19·강원도청)가 손가락 부상에도 쇼트코스(25m)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자유형 200m에서 다시 아시아신기록을 세우고 대회 2회 연속 금메달을 땄다.
황선우는 18일 오후 호주 멜버른 스포츠 앤드 아쿠아틱 센터에서 열린 2022 국제수영연맹(FINA) 쇼트코스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마지막 날 남자 자유형 200m 결승에서 1분39초72의 아시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따고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그는 지난 16일 열린 이번 대회 남자 계영 800m 결승에서 한국 대표팀의 첫 영자로 나서서 작성한 종전 아시아 기록(1분40초99)을 이틀 만에 1초27이나 단축하는 역영을 펼쳤다. 단체전에서 첫 번째 영자의 기록은 같은 영법 및 거리의 개인종목 기록으로도 인정한다. 한편 이날 황선우는 2018년 중국 항저우 대회에서 다나스 랍시스(리투아니아)가 세운 종전 대회 기록(1분40초95)도 갈아치웠다.
2021년 알래스카주 대표 한국계 3세 미국인 에마 브로일스(20)가 ‘미스 아메리카’ 100주년 기념 대회에서 우승하며 영예의 왕관을 쓰다
2021년 중국 최고령자이자 비공인 세계 최고령자 알리미한 세이티 할머니 135세의 일기로 사망
2021년 대만에서 국민투표 결과 정부 정책에 제동을 거는 4개 안건이 모두 부결
2019년 미국 트럼프대통령 탄핵소추안 미 하원 통과
미 하원은 12월 18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트럼프 대통령은 제17대 앤드루 존슨, 제42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 이어 하원의 탄핵을 받은 세 번째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미 하원은 지난 9월 이른바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터지면서 탄핵 조사를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군사 원조를 미끼로 우크라이나 측에 대선 경쟁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과 그 아들의 부패 의혹 조사를 강요했다는 내부 고발이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공화당이 상원의 과반을 장악하고 있어 탄핵안이 최종 통과될 가능성은 없다.
2018년 손흥민 영국 가디언 지의 2018년 세계남자축구선수 톱100에 사상처음으로 뽑힘(78위)
2013년 영화관객 2억 명 돌파
2009년 영-불 해저터널에 고속열차 유로스타 4편 고립
2009년 12월 18일 밤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해 영국 런던으로 향하던 4편의 유로스타가 프랑스와 영국을 잇는 해저터널에서 고장 나는 바람에 2천여명의 승객이 해저터널에 갇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고장난 기차 가운데 2편은 난방은 물론 조명도 작동하지 않았으며 일부 승객은 밤새 바다 한 가운데 같혀 있다는 불안감에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유로스타 측은 사고가 발생하자 구조용 임시기차를 보내 19일 오전 승객들을 구조했으며 승객들은 2시간 남짓한 거리는 16시간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로스타측은 승객들에게 사과하고 기차 요금 전액을 환불해줬으며 보상 차원에서 1인당 150파운드와 왕복 유로스타 승차권을 제공하기로 했다.
해저터널에서 기차가 고장 나 견인되기는 터널이 개통된 지 15년 만에 처음이며 이 사고로 브뤼셀과 파리를 각각 출발해 뒤이어 터널로 향하던 기차편은 다시 출발지로 돌아갔으며 19일과 20일에는 기차 운행이 전면 중단되거나 대부분 취소됐다.
채널 터널(Channel Tunnel)로 불리는 이 해저터널은 지난 1994년 개통됐으며 잉글랜드 남동부 켄트와 프랑스 북동부 칼레를 잇는 50㎞ 구간에 걸쳐있다.
유로스타는 시속 300㎞로 달리는 고속 열차로 런던과 파리를 2시간 15분에, 런던과 브뤼셀을 1시간 51분에 주파한다.
2008년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일방 상정
국회 외교통상통일위는 2008년 12월 18일 오후 박진 위원장 등 한나라당 의원 11명만 참석한 가운데 전체회의를 열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을 상정한 뒤 법안심사 소위에 넘겼다. 야당들은 이에 반발, 일제히 '상정은 원천무효'라고 선언했고, 민주당은 국회의장의 사과를 요구하며 국회의장실 점거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지도부는 동의안 상정을 계기로 한미 FTA와 '중점 법안' 등을 연내에 처리하겠다는 뜻을 확실히 해, 여야 대치로 인한 연말 정국 긴장이 한층 고조됐다.
한나라당 소속 박진 위원장은 이날 18대 국회 들어 처음으로 '질서 유지권'을 발동, 오전부터 국회 경위들을 외통위 회의장에 배치해 외통위원 외에는 회의장 출입을 막았다.
상임위에서 질서유지권을 발동한 것은 지난 2월 민주당 전신인 대통합민주신당 소속 김원웅 당시 외통위원장이 민노당 의원들의 점거에 대해 질서유지권을 발동한 채 비준안을 상정한 지 10개월 만이다.
민주당 측은 대형 해머와 배척(일명 빠루) 등으로 회의장 문을 뜯어내고 소방 호스를 사용하며 진입을 시도했으며, 여당 측은 외통위 회의장 책상과 의자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소화기를 뿌리며 저지하는 등 여야가 하루종일 격한 공방을 벌이는 과정에서 역대 국회 파행 때 등장한 장비와 수법들이 거의 한꺼번에 재등장했다.
국회는 이날 외통위 외에 행정안전위, 정무위 등에서도 여야 의원들 사이에 개회 문제 등을 놓고 몸싸움을 벌여 정상적인 법안심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한편, FTA 비준동의안은 이날 상정만 됐을 뿐, 외통위 법안심사소위의 심의·의결과 전체회의 의결, 본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2002년 정몽준의원, `노무현 후보지지 철회` 선언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2002년 12월 18일 대선을 하루 앞두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정몽준 대표는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국민 여러분께서 각자 현명한 판단을 하시기를 바란다”고 말해, 노 후보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김행 대변인은 이날 밤 10시 20분쯤 성명을 발표, “오늘(18일) 서울 명동 합동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썼다.”며 “정몽준 대표는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우방이며, 미국이 북한과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정 대표는 우리 정치에서 가장 나쁜 병폐는 배신과 변절이고 이런 현상이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다”면서 “정 대표는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고 말했다.
이후 노 후보와 민주당 정대철 선대위원장, 이재정 유세본부장은 이날 밤늦게 “오해가 있으면 풀 것”이라며 정 대표 자택을 방문했으나 정대표는 회동을 거절했다.
2000년 미국 신문재벌 랜돌프 허스트 사망
미국의 신문재벌 ‘허스트 코퍼레이션’ 의 2대 회장이었던 랜돌프 허스트가 2000년 12월 18일 85세를 일기로 뉴욕 장로교 병원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랜돌프는 허스트 미디어 왕국의 창립자인 윌리엄 허스트의 다섯 아들 중 유일한 생존자. 하버드대를 나와 2차대전 때 공군 장교로 복무한 후, 허스트가 소유 신문인 콜 불리틴 기자를 거쳐 1973년부터 1996년까지 허스트 코퍼레이션의 회장과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지의 편집인 겸 사장을 지냈다. 허스트 코퍼레이션은 미 전역에 신문 12개, 잡지 16개, TV방송국 27개를 소유하고 있다.
랜돌프는 회장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1974년, 딸 패트리셔가 미국의 과격 도시게릴라 단체 공생해방군(SLA)에 납치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SLA는 랜돌프에게 캘리포니아의 빈민들에게 수백만달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랜돌프는 200만달러 규모의 빈민지원계획을 추진하면서 9만여개의 식품 상자를 빈민들에게 제공했다
2000년 세계 최고층 건물 부산 제2롯데건물 착공
세계 최고층 건물이 될 부산 제2롯데월드가 2000년 12월 18일 옛 부산시청 부지에서 기공식을 갖고 본격 공사에 들어갔다. 2005년 12월 완공예정인 부산 제2롯데월드는 지하 7층, 지상 107층에 건물 높이 464.5m로 현재 세계 최고층인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트윈타워(92층, 452m)보다 12.5m 높다. 또 2001년 완공한 중국 상하이 세계금융센터빌딩(94층, 459m)보다도 5.5m 높아 한국의 새로운 명물이 될 예정이다.
그러나 508.1m인 대만 타이베이 금융센터가 2003년 예정대로 완공한다면 당분간 세계 두번째 높은 건물로 기록될 전망이다. 건설공사에는 1조2,000억원이 투입됐고 연면적은 46만4,555평방미터이다. 107층 중 18층~58층은 특1급의 월드호텔로, 60층~87층은 특1급 톱그레이드의 타워호텔로 차별화 할 예정이며 건물 외벽은 심플하면서도 초현대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유리와 스테인레스강으로 장식할 계획이다.
1999년 스리랑카 폭탄테러로 대통령 부상, 3명의 장관 포함 32명 사망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1999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유세 도중 강력한 폭발사건이 발생,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대통령이 부상을 당했으며 사고 현장에선 재무장관과 법무장관 등 3명의 장관과 경호원 등 32명이 숨지고 170명이 부상했다.
연임을 노리는 쿠마라퉁가는 1993년 취임 직후 내전 종식을 위해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측과 평화협상을 시작했으나, 반군측은 1년후 회담을 파기한 뒤 그를 공격 대상으로 지목해 왔다. 스리랑카 북부의 독립 국가 건설을 추구하는 이들은 1983년 이래 정부군과의 무장투쟁에서 6만1000명을 희생시켰으며, 1993년 당시 라나싱허 프레마다사 대통령을 살해하는 등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테러도 감행해 왔다.
경찰은 LTTE 반군 소속으로 추정되는 한 남자가 여자로 가장, 대통령과 불과 수m 떨어진 지점에서 허리춤에 감춘 폭탄을 터뜨렸으며, 범인은 하반신만 회수됐다고 밝혔다.
1998년 북한 반(半)잠수정 여수 앞바다로 침투 중 발각되어 남해서 격침
북한 반잠수정이 1998년 12월 17일 밤 남해안으로 침투중 군 당국에 발견돼 7시간30여분 동안 1백여㎞를 달아나다 18일 오전 거제도 남쪽 1백㎞ 공해상에서 해군 함정에 의해 격침됐다.
반잠수정은 17일 밤 11시15분쯤 전남 여수시 돌산읍 임포리 육군 모사단 해안초소 2㎞ 앞에서 상륙을 시도하다가 해안초병에게 발각되자 동남해상으로 도주했다. 육-해-공군은 초계함과 고속정 등 함정 12척, P-3C 대잠초계기와 링스 대잠헬기 5대, 고속정, F-5F 전폭기, CN-235 수송기 등을 출동시켜 입체적인 합동작전을 벌인 결과, 18일 오전 6시50분쯤 첫 발견 지점으로부터 1백여㎞ 떨어진 거제도 남쪽 1백㎞ 지점 해상에서 잠수정을 격침시켰다. 격침 현장 인근에선 음독한 후 확인사살 흔적이 있는 시체 한 구가 잠수복을 입고 수류탄 한 발을 소지한 채 떠올랐고, 잠수정은 1999년 3월 17일 거제도 남쪽 해저에서 인양됐다.
합동참모부는 1999년 3월 23일 북한 반잠수정에서 수거한 체코제 기관권총과 수류탄, 독약 앰풀 등 노획품 80종 724점을 공개하고 합동신문 결과를 발표했다.
1997년 김대중 후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
야당인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1997년 12월 18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이회창-이인제 후보를 물리치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부수립 후 50년만에 선거를 통한 첫 여야간 정권교체였다. 이날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총 유효투표 2천5백64만2천4백38표의 40.3%인 1천32만6천2백75표를 얻어 38.7%(9백93만5천7백18표)의 득표에 그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39만5백57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김 당선자는 1971년, 1987년, 1992년 세차례나 대통령 후보로 나섰지만 모두 실패한 경험을 교훈삼아 이번 선거에는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지지를 끌어내 당선되는 3전4기의 정신을 발휘했다.
김대중 후보는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95만표차로 박정희 후보에게 패한 후 반유신운동을 전개하며 온갖 시련을 겪었고, 1980년에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고 1987년 12월 선거에서는 야권후보단일화 압력을 뿌리치고 출마해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로 패배했으며 1992년 선거에서는 김영삼 후보에게 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1995년 이수성 제29대 국무총리 취임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 실시. 김영삼 후보 당선
1992년 12월 18일 실시된 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민자당후보가 당선됐다.
지난 1987년에 이어 두번째로 대선에 도전한 그는 2천9백42만여명의 유권자 가운데 81.9%인 2천4백9만명이 투표에 참가한 이번 선거에서, 유효 투표의 41.4%인 9백97만7천여표를 획득, 정주영후보는 물론 차점자인 민주당 김대중후보에게도 1백93만6천표 차이로 크게 앞서 승리했다.
그 개인으로서는 `미래의 대통령`이라는 중학생시절이래 40여년의 꿈을 이뤘고, 오랜 정적이던 김대중씨와도 최종 승부를 가린 것이었다. 정치사적으로는 이번 선거로 30년 만에 문민정부를 회복한 셈이다.
1991년 노태우 대통령 한국의 핵부재 선언
1989년 공군 RF-5A 도입
1989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 한양대 임종석 검거
1984년 구(舊)여권의원 민족중흥동지회 발족
1984년 대처 영국수상 중국방문
1983년 대전중앙시장 화재 115개 점포 전소
1983년 청소년 탁구, 중국을 5:0으로 완파. 아주(亞洲) 정상차지
1982년 국제축구연맹(FIFA) 북한에 2년간 국제축구대회 출전정지 명령
1981년 한국-페루, 경제과학 및 기술협정 체결
1980년 전 소련수상 코시긴 사망
1979년 통신시설 확장에 관한 임시조치법 제정
1973년 한국-방글라데시, 국교수립
1972년 한-미간 국제전화 반자동화
1971년 `스미스소니언 협정` 체결-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서 국제통화조정협정 서명
1970년 미국 네바다 지하에서 핵실험 중 핵먼지 지상 분출 600명 긴급 대피
1968년 대학입시 예비고사 시작
1965년 한일수교 협상시작 14년 만에 비준서 교환
1965년 12월 18일 오전10시36분,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일본 외무장관이 서울 중앙청에서 한일기본조약과 협정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한일(韓日)간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험난했던 여정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4년간의 흥정은 단 10분 만에 끝이 났고, 참석자 얼굴에는 착잡함이 배어있었다.
양국이 처음 테이블에서 마주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 예상대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양국의 시각차가 너무 컸고, 구보다 망언, 휴전, 4·19혁명 등이 이어지면서 궤도이탈이 반복됐다. 하지만 갓 출범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고, 일본은 한참 달아오른 진무경기(神武景氣)를 이어갈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소련·중국에 대항하는 ‘반공블럭’이 절실했던 미국으로서도 양국 관계 개선은 시급한 과제였다.
논란이 됐던 ‘대일청구권문제’는 줄다리기 끝에 총8억달러(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로 매듭지어졌지만 양국 모두 불만이었다. 35년간의 피해보상액으로는 너무 적다는 것이 한국민의 불만이었다면, 일본의 당시 외환보유고(18억달러)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 일본인의 정서였다. 한일 수교 이후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지만 상습적인 대일무역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1964년 한국-이탈리아, 로마에서 문화협정 체결
1964년 브라운 주한미대사,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월남전에 한국군 파병 요청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일본 자민당 부총재 오노(大野)와 회담
1962년 브라질 이민단 17가구 91명 출국
1961년 근로기준법 개정 공포
1961년 인도정부, 포르투갈령(領) 고아를 접수완료
1956년 유엔총회, 일본의 유엔 가입을 가결
1955년 북한, 박헌영을 처형
1954년 국회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 선포
1954년 국회의원 집에 `남북평화협상 촉구 호소문` 투입사건
1954년 12월 18일 신익희, 곽상훈, 김상돈, 김준연, 정일형, 소선규 등 6명의 야당 핵심 국회의원 집에 `남북 평화협상 촉구 호소문`이 인민위원회 최고위원회 이름으로 배달, 문제가 야기됐다.
경찰과 국방부가 사건을 조사한 결과 헌병총사령부의 김진호 중령 등이 야당의원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제3세력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계획한 정치공작었음이 드러났다.
손원일 국방장관이 1955년 1월 13일 이 사실을 국회에 보고했지만, 국회는 1월 15일 별도의 국회조사단을 구성해 조사에 나섰다. 조사결과 원용덕 헌병총사령관 자신이 지시한 것으로 밝혀져 정가를 다시한번 놀라게 했다.
국회는 3월 3일 원용덕의 의법 처단을 요구하는 대정부건의안을 채택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3월 23일 오히려 원용덕을 비호하면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있는 김진호 중령 등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야당은 이 대통령의 조치가 불법이라며 강력 반발했으나 자유당의 다수 횡포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1950년 캐나다 육군, 한국전 참전
1950년 NATO, 유럽공동방위군 창설
1946년 북한,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결정 13호에 의거하여 교육 체제 개편.
1945년 러치 미국 육군 소장, 미군정장관에 취임
1944년 프랑스 ‘르몽드’지 창간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일간 신문 `르몽드`가 1944년 12월 18일 창간됐다. 르몽드는 프랑스어로 `세계`라는 뜻이다. 이 신문의 창간자는 위베르 뵈브 베리였다. 뵈브 베리는 1861년 창간돼 1942년에 폐간된 프랑스 최고급 일간지 `르탕`의 편집국장 출신이었다. 이 영향으로 르몽드는 논조에서나 편집에서나 `르탕`의 후신이나 다름없었다.
전후 새로이 발족한 드골정부는 나치 점령하에서 다소라도 독일에 협조했던 신문들의 복간을 허용하지 않았고, 히틀러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은 `르탕`도 예외는 아니었다. 드골 대통령이 뵈브 메리에게 당시 나치스에게 협력한 죄로 징계를 당하고 있던 `르탕`을 대신할 만한 민족적인 자유언론지를 창간해줄 것을 요청하자 뵈브 메리는 드골에게서 완전한 독립성을 확약받고서 그 제의를 수락했으며 곧 `르몽드`를 창간했다.
르몽드는 제호에 걸맞게 국제뉴스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특히 프랑스의 중도 좌파적 시각에서 미국 주도의 세계화를 견제하고 유럽의 가치와 역할을 강조하는 논조를 펼치고 있다. 발행부수는 40여만부(2001년)에 그치지만, 여론 주도층을 이끄는 고급 정론지라는 창간 취지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영향력이 크다. 또한 르몽드는 전세계 독재정권의 인권탄압에 대해 국제여론을 환기시켜온 전통에 따라 북한 정권의 비정상성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탈북 난민 문제도 적극 보도하고 있다.
1932년 수정주의 사회주의 이론의 제창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망
1927년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소련 15차 공산당대회서 제명
1925년 소련공산당 14차대회,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를 채택
1925년 영국과학자 베어드 텔레비전 발명
1922년 조선호적령 공포
1914년 미국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선언
1913년 빌리 브란트 출생
1902년 영국 보통교육령 반포(의무교육 실시)
1890년 라디오 발명자 에드윈 H 암스트롱 출생
1865년 미국, 노예제 공식 폐지
노예제가 영국(1833년), 프랑스(1848년)에 이어 미국에서도 사라졌다. 노예제 폐지를 담은 미국의 수정헌법 제13조가 1865년 12월 18일 의회를 통과함으로써 인류는 인권 진보의 발걸음을 한번 더 내디뎠다.
수정헌법 13조는 말한다. ‘노예제는 합중국 및 합중국의 관할에 속하는 어떤 지역에서도 금지된다.’ 13조는 1619년 아프리카인들이 네덜란드 배에 실려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지니아에 처음 도착하면서 시작된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최소한 법률적으로는 추방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400만 노예들을 ‘인간’으로 되돌려주었다.
노예해방은 마치 링컨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알려져왔으나 사실 링컨은 적극적인 노예해방론자가 아니었다. 노예제가 주요원인이 된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노예폐지를 주장하지않다가 전황이 유리해질 때쯤인 1862년 9월에야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한다. 남부의 아킬레스건인 노예를 남부에서 이탈시킴으로써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킬 목적에서였다. 링컨은 “반란 중에 있는 남부가 90일 안에 연방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노예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겠다”고 발표한다. 거꾸로 말하면 반란 주(州)가 연방으로 돌아오면 노예제는 그대로 존속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링컨은 노예제 폐지보다 연방보존에 더 관심을 쏟은 내셔널리스트였다.
어쨌거나 1863년 1월 1일 공포된 노예해방령은 남은 전쟁 동안 18만명에 가까운 흑인들이 북군의 푸른색 군복을 입고 전선에 투입되는 효과를 보았다. 링컨도 이겼고 흑인노예들도 승리했다.
1859년 이준 열사 출생
1811년 홍경래의 난
1811년 12월 18일(순조11년) 평안도 농민전쟁인 `홍경래 난`이 일어났다. 1811년 12월부터 1812년 4월까지 발생한 조선시대 최초의 민란이었다.
당시 세도정권 하에 흉년과 전염병이 나돌아 조정은 민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또, 유언비어와 앞날의 길흉을 예언하는 도참설이 나돌고 조정을 비방하는 벽보가 붙기도 했다. 이 민란의 직접적인 이유는 서북인에 대한 차별 때문이었는데 당시 권문세가의 노비까지도 서북인을 멸시했다고 한다.
특히 평안도 출신인 홍경래가 생원진사시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서북인 임용제한정책에 불만을 품어 평안도 가산에서 지도층과 영세농민, 중소상인 등을 모아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처음에 홍경래군은 10여일 만에 주변 7개 고을을 점거하고 호응을 얻어 그들의 세력을 키워갔으나 정부군의 반격을 받아 패하여 정주성에서 3개월가량 끈질긴 전투를 계속했다. 그러나 정부군은 정주성 밑으로 땅굴을 파고 성벽을 폭파하여 정주성을 함락시켰다. 정주성에서 홍경래는 전사했고, 2천여명의 홍경래군은 처형되어 홍경래의 난은 끝을 맺었다.
1786년 독일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 출생
1593년 송강 정철 사망
1536(조선 중종 1)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 태어남(음력 12월 6일)
318년 중국 서진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