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 시절 대통령 경호실장 등을 지내며 ‘부동의 2인자’로 군림했던 장세동(86)씨가 최근 “5·18 직전인 1980년 5월15일에 광주를 방문했다”고 밝혔다. 장씨는 당시 공수특전사령부(특전사) 작전참모(대령)였다. 5·18 직전 장씨의 광주 방문은 이상한 전 특전사 군수참모 등이 검찰 조사 등에서 진술한 바 있지만, 장씨가 직접 날짜를 특정해 방문 사실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광주에서 아직 특별한 소요 상황이 벌어지기 전 신군부의 핵심이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심복인 장씨가 광주를 찾은 것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대목이다. 장씨는 항쟁 기간인 5월21일, 24일, 26일에도 광주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에 머물며 계엄군의 진압 작전 계획 수립에 깊숙이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장씨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의중을 광주 현지의 계엄군 지휘부와 공수특전여단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씨는 “5월15일 C-54 수송기를 타고 광주 전교사에 잠깐 들러 이틀 뒤(17일) 7공수 특전여단 2개 대대가 광주에 도착한다고 알렸다”고 말했다. 그는 “전교사 실무자들 몇 사람 만나 ‘7공수여단이 배속된다는 명령 받으셨죠. 잘 좀 돌봐주십시오’ 하고 얼굴을 내밀고 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씨가 전교사를 방문한 5월15일은 2군사령부가 닷새 전인 5월10일 ‘학원소요에 대한 증원 계획’에 따라 전북 금마에 있던 7공수여단 4개 대대를 전북대, 충남대, 전남대, 조선대에 배치하기로 결정한 직후다.
7공수여단은 장씨의 광주 방문 이틀 뒤인 17일 밤 10시쯤 금마 주둔지를 출발해 18일 새벽 1시10분 광주에 도착했다. 장씨는 “거기(광주)에 대대장만 덜렁덜렁 보낼 수가 없잖나. 여단장은 혼자여서 4개 대대를 전부 다닐 수가 없었다”며 “내가 거기를 잠깐 들른 것은 내가 특전사 작전참모로 7공수여단장을 보조해준 것”이라고 했다.
장씨의 광주 방문은 전두환 신군부가 그해 2월19일에 수립한 ‘소요사태 대비 계획’과 관련이 있다. 육군본부는 특전사(5월6일)와 전교사(5월9일)의 탄약 확보 현황을 점검하는 등 시위 진압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했고, 2군사령부의 특별건의에 따라 7공수여단을 전주·대전뿐 아니라 광주에서도 ‘사용’하도록 했다. 5·18 때 7공수여단을 광주에 투입할 수 있는 근거가 이때 처음 마련된 것이다.
장씨는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던 5월21일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함께 광주에 있었고, 5월24일에도 광주 현장에 있었다. 장씨는 “5월24일날 서울로 돌아오려고 헬리콥터 시동을 막 걸고 있는데 광주 송암동에서 군부대 간 오인 사격이 났다”며 “그때 전교사 사령부에 있다가 그 헬리콥터를 타고 바로 현장에 가 부상자들 수송하는 것을 전부 보고, 서울로 왔다”고 말했다. 장씨는 5월27일 전남도청 등 시가지에서 이뤄진 최후 진압 작전 때도 광주에 있었다고 했다.
장씨는 5·18 항쟁 기간 중 각종 작전에서 상당한 구실을 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건 거의 없다. 전두환 신군부는 그동안 시위대 유혈진압과 5월21일 도청 앞 집단발포를 실행한 공수여단이 5월23일까지는 전교사와 31사단에 배속돼 있었다는 점을 들어 발포·학살 책임을 부인해왔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지휘계통에 속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5·18 당시 장씨의 광주 행적에 대해서는 1995~96년 12·12 및 5·18에 대한 검찰 수사 당시 별도의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장씨에 대한 검찰 조사는 12·12 군사반란에서 맡았던 역할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12·12 반란의 핵심이자 전두환의 심복이었던 장씨의 광주 행적은 당시 검찰 수사에서도 일부가 드러났다. 백남이 당시 전교사 작전참모는 1995년 12월27일 검찰 조사에서 “송암동 오인 사격으로 공수부대원 9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날 오후 장세동 특전사 작전참모가 전교사 작전참모실로 와서 저에게 ‘상황 전파를 잘못해 우군끼리 사고가 났으니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5·18 기간에 전교사 건물 1층에 있던 상황실과 별도로 2층 전교사 사령관실 옆에 ‘특전사 기밀실’이 설치돼 있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백 전 참모는 1996년 1월6일 검찰 조사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전교사 2층 감찰참모실을 전용방으로 썼으며, 그 앞 기밀실에 무전기 등을 설치하고”라는 증언을 한 바 있다. 신우식 당시 7공수여단장은 같은 날 검찰 조사에서 “전교사 2층 사령관실 옆에 평상시 사용하지 않는 소회의실에서 주로 머물렀다”고 진술했다. 그가 말한 ‘소회의실’은 기밀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5·18연구자는 “광주에 투입된 3·7·11공수여단장이 장세동씨 등과 함께 ‘기밀실’에서 수시로 회의를 하는 등 사실상 광주 투입 공수부대의 지휘부 역할을 했던 장소로 의심받고 있어 조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장씨의 광주 행적과 관련해 눈길을 끄는 부분은 장씨의 직속상관이었던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이 2021년 2월과 5월에 있었던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에 낸 조사 신청서에서 5·18 당시 장씨의 광주 행적을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점이다. 정씨는 당시 “5·18 당시 광주를 네 차례 방문했지만, 인사·군수지원만 담당했을 뿐 나에게 실질적인 작전 지휘권은 없었다”며 “1980년 5월10일께부터 27일까지 장세동 대령이 보고하지 않고 광주를 수차례 방문했지만, 지휘계통에서 배제된 나는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씨의 이런 주장에선 특전사의 5·18 유혈진압 책임은 당시 진압군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던 자기보다 모종의 임무를 띠고 광주를 여러 차례 찾았던 장씨에게 물어야 한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긴다. 물론 장세동씨는 정호용씨가 제기한 의혹을 일축한다. 장씨는 “예하 여단을 타 부대에 배속시킨 이상 절대 그 부대의 권한을 침범하거나 개입할 수가 없다. 사령관이 권한이 없는데 작전참모가 가서 뭘 한다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장씨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광주 상황을 보고했느냐’는 물음에는 “그런 데다 연결하지 마라. 전두환 보안사령관하고 특전사 작전참모하고는 아무것도 관계가 없다”고 부인했다.
장씨의 광주 행적은 5·18 당시 군 지휘권의 이원화 여부를 규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전두환씨 등이 5·18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는 것은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자신은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공수 특전여단장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 바깥에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복인 장세동씨가 특전사 작전참모의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며 진압 작전에 개입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신군부 실권자인 전씨가 대리인 장씨를 통해 광주 현장의 진압부대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방증이 되기 때문이다. 5·18 발포명령 책임을 규명하려면 장세동씨와 현지 보안부대장 등을 고리로 현장의 계엄군과 공수여단 지휘부로 연결된 비공식 지휘라인의 작동 양상을 집중적으로 파헤쳐야 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