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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회개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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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대림 제2주일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대림 제2주일은 인권주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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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인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도 회개에서 시작됨을 깨닫습니다.
언젠가의 회개가 아니라 하늘나라가 임박한 바로 지금 여기서의 회개입니다.
우리가 살 길은 오직 하나, 회개의 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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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물론 예수님의 평생 복음 선포의 내용을 요악 하는 말씀입니다.
가까이 다가온 하늘나라에 대한 준비의 응답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우선적 화두가 회개입니다.
회개해야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평생 회개의 여정 중인 우리들이요, 부단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참 나를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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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말을 바꿔 ‘회개하여라. 주님 성탄이 가까이 왔다.’로 말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대림 제2주일, 주님 오실 날이 한 주 가까이 다가 왔습니다.
그러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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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겸손히 주님의 길을 마련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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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회개에 합당한 첫 열매가 겸손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세례자 요한이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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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가 상징하는바 우리 인생입니다.
광야인생입니다.
바로 이 광야인생에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이,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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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내지 말고 겸손히 하루하루 회개를 통해 새롭게 길을 내는 것입니다.
절대로 한 번에 내는 광야인생길이 아니라 하루하루 길을 내어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바로 이 회개의 길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며 마침내 주님과 상봉의 기쁨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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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풍모가 이채롭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바로 단순 소박한 삶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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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단한 회개를 통한 단순 소박한 삶으로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씀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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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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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자각이 진정한 겸손이요 바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일체의 기득권도, 그 무슨 특권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런 자각에 이르렀던 세례자 요한, 겸손한 사람입니다.
다음 말씀이 이를 확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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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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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주님을 통해 자신을 잘 안 겸손한 사람, 세례자 요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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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회개에 합당한 둘째 열매가 사랑입니다.
서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함께 하느님을 찬양할 때 이런 사랑의 열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역시 대림시기 우리 모두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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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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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랑이요, 한마음 한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 역시 인간적 사랑을 초월하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것도
하느님 찬양에서 오는 사랑의 선물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바오로 말씀도 참 심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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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나는 단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심을 드러내려고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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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 받은 이들뿐 세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신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사랑의 근거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회개의 열매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서로 사랑의 종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어느 사막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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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진정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모든 인간관계에서 죽어지내라(Be dead in relations to every man).
그러면 너는 평화를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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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죽어 지내는 것을 뜻합니다.
어느 형제의 고백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평생 화목하게 산 부부생활의 비결이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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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평생 나에게 죽어 살았습니다.
지금에서야 그걸 깨닫고 저는 아내에게 극진히 정성을 다해 잘 해 줍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아내의 죽어 산 사랑을 알기에 아내가 너무 고맙고 사랑스러워 지금은 싸우면 제가 늘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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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평생 사랑의 종이 되어 산 자매입니다.
참 아름다운 부부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회개의 열매인 사랑을 주님은 미사 중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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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서로 평화롭게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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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평화입니다.
우리는 방금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힘차게 화답송을 노래했습니다.
정의와 평화는 한 실재의 양면이자 한 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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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없는 평화는 공허하고 평화 없는 정의는 맹목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함께 할 때 온전한 정의요 온전한 평화입니다.
하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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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독서 이사야를 통해 펼쳐지는 평화의 비전이 참 경이롭습니다.
소주제는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입니다.
바로 이게 메시아인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이 꿈꾸시는 세상입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피조물과의 평화가 실현된 낙원입니다.
바로 정의와 평화가 완전히 실현 된 유토피아 이게 하느님의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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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름다운 평화의 꿈, 평화의 시라 그대로 인용합니다.
평화 운동가들에 샘솟는 영감의 원천이 됐던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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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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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사람과 온갖 피조물이 완전 평화 상태를 이룬 유토피아의 꿈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답게 평화에 대해 묘사한 글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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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던 위인을 소개합니다.
지난 12.5일 95세로 타계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만델라입니다.
12.7일자 모든 일간 신문 1면에 사진과 더불어 톱기사는 만델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만델라, 간디와 킹 목사에 비견될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입니다.
그에 대한 어록 중 둘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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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고통을 겪은 뒤에도 어떻게 증오심을 통제할 수 있느냐?-
“증오는 마음을 짓누른다. 생각을 방해한다. 지도자는 증오를 담아둘 여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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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1963년 중범죄로 기소된 ‘리보니아 재판’에서 만델라가 피고인석에서의 진술입니다.
“나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꿈꿔왔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동등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사회를 소망해 왔다.
이것이 내 삶의 목적이며, 필생의 목표로 삼은 이상이다.
필요하다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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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예언자들에 버금가는, 예수님의 제자 되기에 손색이 없는
진정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살았던 만델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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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대림 제2주일, 주님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 광야여정 중인 우리 모두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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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겸손히 주님의 길을 마련하십시오.
2.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3. 서로 평화롭게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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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겸손의 열매, 사랑의 열매, 평화의 열매를 선사하시어
남은 대림기간 주님의 길을 잘 닦도록 도와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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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하느님에게서 너에게 오는 기쁨을 바라보아라.”
(바룩5,5;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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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언젠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대형 마트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워낙 큰 매장이다보니 그 물건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지를 잘 모르겠더군요. 한참을 물건을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해서 제 근처에서 바쁘게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마트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죄송한데요. 혹시 이 물건이 어디에 있을까요?”
바쁘게 일하고 있었던 이 직원은 얼른 자신의 일을 멈추고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뭐가 죄송한데요? 저희는 원래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라면서 저를 끌고 물건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죄송하다고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죄송한 마음을 간직하고 말했던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습관적으로만 ‘죄송한데요.’라고 말했던 것뿐이었지요.
아무튼 마트 직원은 제게 장난삼아 그렇게 말했지만, 형식적이고 습관적으로만 또 입으로만 사과를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회개에 대해서도 이처럼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것은 아닐까요? 즉, 말로만 뉘우친다고 말하고 실제로는 전혀 뉘우치지 않는 위선자의 모습은 아닐까요?
대림시기에 우리들은 다가올 성탄을 준비하면서 고해성사를 봅니다. 그런데 이 고해성사를 들으면서 아쉬운 분들은 그냥 형식적으로만 죄 고백을 하시는 분입니다. 스스로의 깊은 성찰 없이 몇 가지 죄만을 쭉 나열한 뒤에 스스로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앞서 마트에서 그냥 형식적으로 말하는 ‘죄송한데요.’라는 말과 다를 바가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뉘우침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형식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차 있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를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하고 있지요.
여기서 독사의 습성을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독사는 사람을 문 뒤에 곧바로 물로 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물을 찾지 못하면 죽게 된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 점을 비유해서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즉, 물의 힘으로 죽음의 위험을 벗어나려는 독사처럼 죄를 짓고서는 부리나케 세례 받으러 왔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모습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진정한 회개 없이 고해성사만 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도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꾸짖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뉘우침이 아닌,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이번 대림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러한 회개만이 가까이 다가온 하늘나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판공성사>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이 말을 "판공성사를 보아라. 성탄절이 가까이 왔다."
라는 뜻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판공성사(고해성사)는 회개를 했다는 표시일 뿐이고,
회개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성탄절이 가까이 왔다는 말이 아니라,
종말과 재림과 심판이 가까이 와 있다는 뜻입니다.)
'회개'를 뭔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으로,
또는 어떤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회개를 너무 좁은 뜻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중심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는 한 번 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고, 죄가 없으신 분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출산하셨기 때문에
정결례를 거행할 필요가 없으셨는데도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 가서 정결례를 거행하셨습니다(루카 2,22).
신앙인은 오직 하느님 중심으로,
또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범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죄가 없으신 분이고,
회개를 할 필요가 없으신 분인데도
회개의 표시인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일도 역시 신앙인은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주신 일입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이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고,
요한은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마태 3,15).
따라서 대림시기를 맞아서 우리가 해야 할 회개는
성모님과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서
자신의 삶이 하느님 중심의 삶이 되도록 노력하는 일이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지금 자신이 하느님 중심으로 살고 있는지,
또 자신이 지난 한 해 동안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살았는지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나는 특별히 회개할 것이 없다." 라는 생각이 든다면,
또는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특별히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러니 판공성사를 안 보아도 된다." 라는 생각이 든다면,
우선 그 교만죄부터 뉘우쳐야 합니다.
그런 태도는 "나는 지금 차선을 잘 지키면서 운전하고 있다."
라고 하면서 한 눈을 파는 운전사와 같은 태도입니다.
자동차가 차선을 잘 지키려면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바로 그렇게 계속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회개입니다.
성모님 외에는 회개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모님도 스스로 늘 회개하는 삶을 사셨다고 믿습니다.
뭔가 회개할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자체가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십계명도 잘 지키고 죄가 될 일은 하나도 하지 않은 사람이
실제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던 부자 청년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십계명을 다 잘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했고,
예수님도 그 사실을 인정하시면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습니다(마르 10,2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만하면 되었다. 살던 대로 살아라.
그러면 네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고 하셨습니다(마태 19,21).
아마도 그는 계명과 율법에 죄라고 규정되어 있는 일은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재산을 버리기를 주저한 것은
그의 삶의 중심이 하느님이 아니라 재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직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사랑이 부족한 것은 계명 실천이 아직 불완전한 것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모든 계명과 율법 실천이 완성됩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 나는 고백할 죄가 없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성모님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해마다 판공성사 시기가 돌아오면,
무엇을 고백해야 하나, 라고 고민 아닌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하느님(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지를 반성한다면
고백할 죄가 없다는 말은 아무도 못할 것입니다.
(정말로 몸이 아파서 주일미사 참례를 하지 못한 일은 죄가 아닌데,
사랑이 부족해서 주일미사 참례를 그저 형식적으로 했다면 그것은...?)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본능대로 살지 아니하고>
찬미 예수님 ,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태초부터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흔들렸지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시간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의 숨, 영을 불어 넣어주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보면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쩌 가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이사11,6-7).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사자나 늑대는 사나운 이빨을 가지고 있고 난폭합니다. 양과 염소, 송아지는 그들의 먹이가 됩니다. 더군다나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이 말씀은 사자나 늑대가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지만 제 본능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난폭한 습성을 버리고 오히려 양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 이루어졌느냐 하면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다음 수 백 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신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삶이 변했습니다. 몸을 파는 창녀가 제 습성대로 살지 않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을 때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둘 다 떠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는 더러운 습성을 버리고 주님의 자비를 입었습니다.
사납게 굴던 마귀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한마디로 온순하게 되었고, 남을 등쳐먹던 세리 자캐오가 자기습성이나 본능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네 곱절로 갚았습니다. 서로 미워서 등진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죽었던 나자로가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고 때로는 기적을 행하시며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은총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힌 일부를 제외하고는 본능이나 습성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리고 가족을 놔두고 그야말로 삶의 터전을 떠나 기꺼이 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능적으로 살았을 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가 “나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며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매달린 강도도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낙원에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3,20).하고 선포하였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본능대로 살지 않고 악습대로 살지 아니하며 잘못된 것을 버리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도 하나의 못된 습성이 생겼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도 모르게 컴퓨터 앞에 앉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눈을 뜨고 양치질을 하면서 컴퓨터를 켜는 겁니다. 그리고는 뉴스를 확인하고 이메일을 체크하고 있더라고요. 아침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기도하고 준비해야 하는데 성경을 읽으면서도 한눈으로는 컴퓨터에 눈이 가있어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미사 봉헌, 아침기도를 끝내기 전에는 컴퓨터를 켜지 않는다.
잠자기 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강론 테이프를 듣다가 자든지 묵주기도를 하다가 자든지 했는데 텔레비전을 보다가 자는 겁니다. 자다가 깨보면 텔레비전이 켜있어요.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자기도 모르게 좋은 것을 잃어버리고 나쁜 습성에 젖어 들 수 있습니다. 사실 드라마나 코미디프로를 볼 시간은 있어도 성경을 읽을 시간은 없습니다. 더더욱 좋은 시간을 마련하여 꾸준히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전에는 밤에 자다가 깨면 ‘조금 더 자야 하는데….’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주님께서 기도하라고 깨워주셨구나’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아주 편합니다. 새벽 3시가 되었든 4시가 되었든 성당에 갈 때도 있고, 성모자상 앞으로 갈 때도 있고.. 그리고 또 졸리면 잡니다. 어찌 되었든 좋지 않은 습성을 바꾸어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얘기를 하면 그래도 봐 줄 수 있는데 남 얘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남이야 상처를 받건 말건, 상대방을 위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온갖 것을 다 떠벌립니다. 그것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진실성은 사라지고 자기 본능대로 있는 말 없는 말 다 해요. 평상시에는 ‘저는 말 주변이 없어서…하고 꽁무니를 빼던 사람도 남 을 흉볼 때는 어찌나 그리 말을 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주님을 영접하려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사자와 늑대, 표범이 사나운 입을 다물고 새끼염소나 송아지와 함께 지내듯 사나운 입을 다물고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저 신부님께서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들으셨기에 저런 말씀을 하실까? 누굴 두고 하는 말씀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누굴 두고 하는 얘기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자기영혼의 상태를 비추어 보고 고칠 것을 고치면 되는데 남에게 먼저 관심을 두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폭음과 폭식을 하고는 탈이 나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요, 사촌이 땅을 사서 배아파하는 사람도 있고 시기와 질투로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열심히 노력해서 그보다 더 넓은 땅을 사면됩니다. 그런데 노력은 하지 않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런 마음이 있다면 오늘 그 본능적인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회개한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사도 26,20)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나의 좋지 않은 습관, 삶의 태도를 한 가지라도 바꿀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 3장 10절에는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 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도끼가 뿌리에 닿아있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은총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내일로 미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지금 좋은 일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선을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좋은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마태3,12). 하셨으니 여러분은 부디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벌써 두 번째 대림초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만큼 밝아 졌기를 희망하고 준비된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을 낳아드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콜로새서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함으로써 언제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온갖 좋은 일을 행하여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더욱 잘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박영식 야고보 신부님의 묵상글 *
<왜 선을 하려는 우리의 본성을 죽이는가?>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되자 경기장을 확장하려고 지은 지 3년 된 건물을 허물어야 했다. 지붕을 벗기던 일꾼들은 꼬리 쪽에 못이 박힌 채 벽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했다. 집주인은 일꾼들에게 그 못을 언제 박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3년 전에 박은 것이 분명하다고 대답했다. 도마뱀이 3년 동안이나 못에 박힌 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기 짝이 없다고 하며 다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도마뱀을 지켜보았다.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이었다. 그 도마뱀은 3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못에 박힌 친구를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먹이를 가져다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어느 한 출판사에서 ‘친구’라는 말을 가장 잘 설명하는 글을 쓴 사람에게 상을 주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밤이 깊을 때 전화하고 싶은 사람,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 들 여러 가지 설명이 있었지만, 1등을 한 글은 바로 이런 글이었다. “사람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친구도 아무나 될 수 있지만 아픔과 슬픔까지 감싸 안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는 아무나 될 수 없는 법이다. 기쁨을 두 배로 하고 슬픔을 반으로 줄일 줄 아는 넉넉함을 가진 사람,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간 후 마지막까지 그를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가족들과 다정한 친구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나에게 맡겨 그들의 구원에 대해 책임을 지라고 이르셨다. 그들이 사랑과 정의를 지켜 당신과 하나 되도록 도움을 주라고 이르셨다. 회개는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다. 우리의 자아는 남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로마 7,15-20). 남에게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베풀면 자아를 실현하여 행복해진다. 선을 하면 기쁨이 온다. 기쁘게 사는 것은 습관이다. 웃는 데 습관이 된 사람은 아무리 가혹한 여건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감정이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뇌는 쉽게 기뻐하거나 걱정하는 경우 습관이 되어 일이 있을 때마다 기쁨이나 걱정을 유발하는 분비물을 내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삶의 목표는 기쁨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생의 비결이다. 당신이 기쁨을 느낄 수 없다면 당신의 생활 태도에 잘못된 것이 있음이 분명하다.”(톨스토이)
남에게 베푼 선은 곧 자신에게 한 선이다. 내가 먼저 이웃이 나에게 원하는 장소에서 그가 바라는 모습으로 그 곁에 있어줘야 그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나의 바람을 무시하는 것이다. 회개는 남에게 무관심하거나 피해를 입히는 것이 곧 자신에게 무관심하거나 피해를 입히는 짓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회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을 마련하는 데서 시작하여 악습을 좋은 습관으로 바꾸고 나쁜 성질을 좋은 성격으로 바꿔야 완성되는 것이다. “습관은 습관에 의해서만 정복될 수 있다.”(토마스 아 켐피스, <준주성범>) 악습을 고치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 되어 천성보다 열 배의 힘을 갖는다.”(웰링턴) 또한 습관이란 우리가 어떤 일이든지 하게 만들고 모든 일에 타협하게 한다. 예컨대 사랑을 좌우명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이 좌우명을 지키기 위해 다른 모든 일을 양보할 줄 안다.
그 도마뱀은 친구를 위해 3년 동안이나 먹이를 물어다 주어 그를 살렸다. 사랑이나 우정은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남에게 바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데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처럼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 의무가 있다.
“행복한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하고, 불행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기도한다. 평생 은혜를 입은 일만 마음에 두는 사람은 행복하고, 섭섭했던 일만 마음에 담는 사람은 불행하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축복하고 위로 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실패하면 통쾌해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부드러운 사람은 행복하고, 자기에게 후하고 남에게 가혹한 사람은 불행하다. 마음까지 화장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얼굴만 화장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 대구대교구 효목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오늘 복음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자의 말입니다. 고대에는 임금이 여행을 떠날 때 길이 잘 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곧고 평탄한 길을 닦고자 땅을 고르고 다듬어서 임금이 안전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은 바로 이러한 맥락입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를 제대로 맞이하려면 길을 잘 닦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요한 세례자야말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길을 닦는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배 속에 있는 아기는 스스로 영양분과 산소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소중한 생명을 유지하며 탄생의 순간까지 수개월 기다릴 수 있는 것은 탯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탯줄을 통하여 어머니에게서 영양분과 산소를 얻을 수가 있으니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는 탯줄이 있으며, 그 탯줄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얻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탯줄이 꼬여 있거나 막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아무리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려고 애를 쓰셔도 그 은총이 우리에게까지 제대로 전달되기 힘들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 복음의 주제인 ‘회개’는 그동안 꼬여 있거나 막혀 있는 탯줄을 곧게 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은총의 중개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도록 길을 곧게 마련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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