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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정치
귀하도 알다시피, 본인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귀하 나라의 옛 예언서들과 하르마게돈을 예고하는 징표들에 눈을 돌리면서, 혹시나 우리 세대에 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 합니다.
귀하가 그 예언서들을 유심히 눈여겨보았는지 본인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거기에 우리가 살고 이 시대가 확실히 기술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로날드 레이건이 미국 이스라엘 공무위원회의 톱 다인에게 보내는 글, 1983. 10월 28일자 예루살렘 포스트)
1980년 초 미국을 통치했던 대통령이 이러한 발언을 했듯이, 성경이 우리 시대에 여전히 충격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지도자들은 레이건 대통령의 이런 성명 발표에 놀라움을 표했다.
이 성명서는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한 핵불가피론 주탕자들 가운데 일부가 꾀하는 정치. 전략정 의제와 연계되면서 나타났다.
핵불가피론은 현대가 사탄의 힘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로 인해 핵전쟁의 위기가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 같은 전쟁은 성경 여기저기에 예언되어 있는 만큼 인간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라고 역설한다.
레이건 대통령이 이런 집단들의 복안과 믿음에 영향을 받아 개인적으로 세계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주장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핵 위기에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매우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성경이 정치에 작용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남아프리카의 경우다.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자들은 다년간에 걸쳐 보어인(남아프리카 태생 네덜란드인)이 아프리카에서 히브리 민족의 이집트 탈출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논리를 각색해 냈다.
이 신학자들에 따르면, 영국의 식민주의에 시달리던 보어인은 케이프 식민지를 탈출하기 위해 새 땅을 잧아 나서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멋지게 정복하여 이른바 오랜지 자유공화국으 세웠다.
성경을 읽는 경건한 보어인이 볼 때 새롭게 출범한 자기네 나라에서 이전부터 살고 있던 흑인 원주민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쳐부순 가나안인들처럼 하느님이 정복하고 파멸시키도록 명령하신 이교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아프리카 태생 백인들이 내세우는 인종차별 정책의 논리는 부분적으로 성경에거 기인한 것으로, 그 정당성 또한 성경을 토대로한다.
그에 비해 원주민들을 동일한 탈출기 이애기에서 정반대의 부르심을 발견한다.
그것은 더 자유롭게 행복한 삶을 위해 투쟁하라는 부르심이다.
최근들어 '새로운 세계 질서'를 비판하는 사람이나 지지하는 사람 모두가 자기에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성경을 들고 있다.
예룰 들면 그레고리 바움은 걸프 전쟁 이후 '세계운 질서'에 대해 나름대로 심증을 밝히면서 탈출기 이야기를 거론한다.
하지만 바움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난 해방의 의미로 탈출기와 비교한 것이 아니라 광야를 떠돌던 당신의 도전과 난관에 초점을 맛추고 있다.
우리는 삼십 년이 넘도록 좀 더 정의로운 사회로의 전환이 우리 세대에 이루어질 수 있는 역사적 과제나 뒤는 듯 기도하고 투쟁하며 살아왔다.
내가 믿기로 이 시기는 이미 지났다.
내가 볼 때 걸프 전쟁은 십여 년 전에 시작된, 이른바 특혜 받은 소수의 물질적 안녕을 강화하고 나머지 인류는 가장자리로 밀어내는 새로운 정치. 경계적 입장을 피로 서명한 공인된 대량 학살과 다르지 않다.
네기 판단할 때 '카리로스'는 지나갔다.
우리는 현재 '광야'에서 살고 있다.
애통하고 탄식하는 광야 생활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에큐메니스트, 1991년 봄호 사설)
성경은 정치뿐 아니라 교회, 대학, 대중문화 같은 다른 상황에서도 중요한 역활을 한다.
이 상황들을 들여다보면 성경의 의미와 역활에 따른 문제점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갈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성경과 교회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그 중에서도 특히 루터교와 오순절 교파에서 성경은 줄곧 교의상 표현과 예배에 토대 구실을 했다.
로마 카톨릭의 경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1961-1965년)는 성경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고, 이 점은 특히 공적 전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현제 성경은 각 민족의 언어로 읽히고 있으며 미사에 사영하는 신구약성경의 선택 폭도 넓어졌다.
이제 성경 읽기가 권장되면서 다양한 성경 연구 모임이 생겨났고,
교구와 학계 양쪽에서 마련하는 성경 강의와 연수회의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아울러 다양한 기도 모임, 특히 로마 카톨릭 내부에서 성령 운동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는 기도 모임들은 성경을 독서와 성찰의 중심축으로 활용한다.
1993년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황청립 성서위원회가 제작한 (교회안의 성서 해석)을 출판하면서 떠 다른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 문서는 성경 해석을 위한 최근의 접근 방법들을 전개하고 평가를 담고 있으며, 가톨릭의 최고 성경학자들이 포함된 권위 있는 그룹이 교회의 성경을 읽고 해석하도록 이끌었다.
성경은 모든 공동체 안에서 어떤 역활을 하는데, 그 역활은 공동체 스스로가 결정한다.
결고적으로 우리는 '성경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성경이 어떻게 읽혀지고 이해된는지에 대한 교회내부의 갈등을 미디어를 종종 듣는다.
성경과 대학
학계에서는 고들교육을 통해 전인젇 성장을 도모하려는 노력으로 성경과 종교를 핵심에 놓았다.
1950년대 이래 몇백 개에 이르는 전문대학과 종합대학이 종교학과나 종교 과목을 신설하면서 학문적 성경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성경을 주제로 한 강좌와 간행물과 서적이 급증했고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교사와 학자들의 수도 놀랄 만큼 증가했다.
전문대학과 종합대학 수준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강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다양해면서 성경 본문을 일고 분석하는 데 필요한 개론과 방법론도 총체적으로 발전했고
이 같은 상황에서 성격이 지니는 역사적, 문학적 가치는 여전히 높았고, 고대 근동 세계를 연구하는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의 새로운 발견 덕분에 성경의 세계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지식이 엄청나게 중가했다.
학자들은 성경 언어)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랍어)의 문법가 어휘와 성경 속의 시가나 산문이 지닌 성격과 표현 형식에 대해서도 새로운 식견을 터득했다.
이 같은 접근 결과는 성경 본문이 성격상 독자에게 제시하는 신앙적 요구를 본인이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떠나 성경을 '중립적으로' 또는 '비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러한 성경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때때로 교회당국과 충돌하는 결과들 낳았다.
이는 19세기와 20세기 초반 성경 이야기들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전통적 교회 가르침과 어긋나는 해석들을 내놓으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성경과 대중문화
성경이 대중문화에서 차지하는 구심력은 여전히 강력하다.
이 점은 최근 몇 년 동안 다양한 면모의 텔레비젼 설교가들이 누린 엄청난 인기와 아울러 그들이 저지른 비행을 대충 살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들이(그리고 일부 카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읽는 방식은 근본주의(성경 창조설을 굳게 믿고 진화설을 전적으로 베척하는 교파)의 접근 방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접근 방식은 기본적으로 성경 본문이 독자에게 직접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성경 본문의 의미가 독자나 신자 개개인의 환경 속에서 그들의 생활에 개별적으로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 이미 '구원받았고' 또한 예수를 자신의 '개인적 구세주'로 모시게 된 만큰 자기가 성경 본문을 읽을 때 성령께서 몸소 비추어 주고 인도하신다고 생각한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이는 군인이 전쟁에서 시편137,8-9를 자신에게 적용되는 말씀오로 단정하게 하여 믿음이 없는 적에게 끔찍한 보복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정당화한다.
바빌론아, 너 파괴자야!
행복하여라,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너에게 되갚는 이!
행복하여라, 네 어린것드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
'하느님의 뜻'을 계시하는 '하느님 말씀'인 성경은 심지어 극단적 영웅 행위나 폭력까지도 촉발하고 정당화하는 힘을 지님으로써, 장구한 역사 속에서 선한 목족과 악한 목적에 두루 이용되었다.
이는 몇 세기에 걸친 유다 민족의 박해가 성경을 빌미로 우지되고 정당화된 일이나 일부 이스라엘 근본주의자들이 박해를 물리친다는 이유로 팔레스티나 민족들에게 박해를 가한 일에서 알 수 있다.
끝으로 위에서 언급한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자들이 성경 본문을 토대로 자기네 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을 정당화한 일만 보아도 확연해진다.
성경이 지닌 정치적 도구 또는 무기로서의 잠재력은 과거나 지금이나 통치자와 정치가들에게 매력을 준다.
우리 시대에 이를 입증하는 실례는 정통주의 텔레비전 설교가들과 우익 정치인들이 선거운동에서 제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회학과 성경
성경이 지니는 '정치적' 잠재력과 역활에 대한 인식은 장구한 역사를 지닌 성경이 기나긴 역사 속에서 탄생되는 과정에서 비슷한 정치, 경제, 사회적 과정을 거쳤다는 증거를 내포한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같은 과정을 다소나마 꿰뚫어 보려는 노력으로 최근 몇 년에 걸쳐 나타난 경향은 현대 사회학의 방법론과 그 결과를 성경 본문 연구에 응용하는 것이다.
성경을 가르치거나 성경을 바탕으로 셜교하는 이들은 설교가나 교사가 성경에서 하나의 주제나 이야기를 선택하고 이를 '현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익히 안다.
그들은 성경을 오늘날의 자기네 공동체 또는 전채 사회의 쟁점이나 문제점 또는 거기에 몸담은 사람들과 연결시켜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때로 특정한 성경 본문이나 이야기가 자신들이 설파하는 논점이나 상황과 별로 맞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이 논점이나 상황은 성경을 해당 공동체나 성경 모임 구성원들의 삶과 결부되는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데 '적합한' 도움이 된다.
이처럼 성경의 이야기와 주제를 현대 상황에 '재적용하는' 과정은 해묵은 것으로, 성경 해석의 역사를 어느 방향으로 연구하든 금방 드러나게 마련이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들은 2천년 이상 이런 저런 형태로 이 일에 종사했다.
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특히 가톨릭 신자들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범과 성덕을 기리기 위해 구약성경 본문을 활용하는 경우다.
중세의 유명한 찬미가 '토다폴크라에스(오 마리아여, 지극히 아름다우신 이여)는 원래 유딧기에서 유다인 여걸을 기릴 때 사용했던 찬사를 활용한다.
그대는 예루살렘의 영예고 이스라엘의 큰 영광이며 우리 겨레의 큰 자랑이오.(유딧15.9)
신약성경도 어법과 주제를 원용하기는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마태오복음서는 유다 광야에서 은거하다가 출현하여 예언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세례자 요한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요한은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마태3.4) 이 대목을 2열왕1.7-8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마태오가 세례자를 예언자 엘리야라는 구약의 인물에 대비하고자 했음을 알게 된다.
그러자 임금은 "너희를 만나러 올라와서 그런 말을 사람이 어떻게 생겼더냐?" 하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몸에는 털이 많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둘른 사람이었습니다."
임금은 "틀림없이 타스베 사람 엘리야다!"
구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옛날의 이야기와 주제와 본문들을 '응용하고 원용하는' 과정이 구약성경에서 얼마나 핵심적 역활을 하는지 잘 안다.
모두가 알다시피 구약성경은 몇 세기에 걸쳐 여러차례 '고쳐 쓰기를 거듭했다.
구약성경에 포함된 다양한 자료를 일원화하고 단일한 전망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끓임없이 이어졌다.
성경이 새로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세대에게 활력을 주고 뜻 깊은 호소력을 지니게 하기 위해 새로운 주제와 이야기들이 추가된것이다.
구약성경 전문가들은 지난 백 년 이상에 걸쳐 성경 탄생의 역사를 거슬러 추적하고 특정한 이야기나 주제의 원래 맥락과 의미를 재발견하려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구약성경 '신학' 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이해를 넓혔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체험 속에 어떤 방법으로 현존하셨던가를 보여주는 주여 주제와 착상도 포함된다.
성경 전반에 걸쳐 '계약' 이라는 주제가 시종일관 중요한 맥을 형성한다든가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사회정의'가 중심축을 이룬다는 사실은 이처럼 생산적인 노력을 입증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구약성경 연구는 새로운 발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성경 본문에 현대 사회과학의 방법론과 성과물을 적용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학자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와 전승을 일원화하고 일정한 통일성을 부여하는 데 활용된 핵심 개념과 주제, 곧 '신학'을 발견하고 서술해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최근에는 이 신학이나 개념들을 선정하고 골격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친 사회, 경제, 정치적 힘을 발견해 내는 일에 관심을 돌린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오경' 이라 일컫는 처음 다섯 권이 예식과 희생 제사와 성전을 중요하게 역설하는 것은 이 다섯 권의 책이 최종 형태로 마무리되는 데 예루살렘 성전 사제들의 입김이 작용했음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그러나 면밀하게 연구하면 이 다섯 권의 책이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통일성'은 피상적일 뿐 아니라 때로는 불안하기까지 하다.
본문을 좀 더 자세하게 검토하면서 나타나는 '차이'와(기원전539-400년에)유다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진 충돌과 갈등을 일러준다.
현대 사회학의 방법론과 그 결과를 적용하는 일이 이 같은 충돌과 갈등에 작용했던 사회, 경제, 정치적 세력들을 일부나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되었다.
성경 연구를 위한 새로운 접근 방식에 핵심적으로 기여한 학자는 노르만 고트발트,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종교의 기원에 대한 기념비적 저서 (야훼의 부족들)은 현대판 고전이다.
'기원전 1250-1050의 해방된 이스라엘의 종교 사회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저서는 성경 연구에서 '페르다임 변화'로 알려졌다.
고트발트는 1960년대 초반에 사회학 방법론을 활용하여 이스라엘 지파들의 가나안 '정복' 역사를 재구성한 조치 멘덴홀의 선구적 작업을 토대로 삼았다.
그는 판관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를 연구했는데, 이스라엘 종교의 특수하고 독창적인 내용이 기원전 13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동안 가나안에 새로운 사회, 경제, 정치 질서를 창출하고자 한 노력과 어느 정도 결합되었는지 밝히고 있다.
해방신학과 성경
라틴 아메리카 교회에서는 사회학적 접근법의 발전이 성경 본문의 형성과 해석에 결부된 사회적 과정에 대한 관심과 어우러지면서 전개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인들은 우선 성경을 어떤 상황에서 읽는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어떤 성경 본문은 종교 예식에 참석한 교외 회중과 대학 강당에서 강의하는 학자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학자는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들을 다루면서 연대나 자료, 특정한 히브리어 낱말들의 정확한 뜻에 깊은 관심을 갖는데 비해, 교회공동체는 그 구절이 지니는 종교적 의미와 그것이 자신들의 삶과 믿음에 제기하는 요구들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라틴 아메리카 성경학자들은 상황보다 더 중요한 고려 사항이 성경을 읽는 이들의 '사회적 입지' 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회, 정치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은 성경에 제기하는 물음도 크게 다르다.
그러기에 그들이 성경 본문에서 찾는 의미 역시 아주 다를 수 있다.
한 예로 미국 남부의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들을 그리스도교로 교회시키면서 이 새로운 종교가 노예들을 한결 유순하고 충성스럽게 만들어 주리라고 기대했다.
한편 노예들은 이집트에서 억합당하고 마침내 해방을 맞은 히브리 민족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의 지유를 위한 몸부림과 직결되는 강력한 희망의 원동력을 발견해 냈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사목적 전략은 민중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의 자력을 토대로 발전했다.
평신도 지도자들은 교육을 받고자 외딴 벽촌이나 무질서한 대도시 빈민가나 산동네에서 신자들의 소공동체를 건설해 나갔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기초 공동체라 불리는 조식을 만들어 성경을 읽고 성찰하는 일을 기초 공동체의 핵심 활동 가운데 하나가 되게 했다.
기초 공동체를 구성한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무지하고 어눌했지만 별다른 자극이나 지도 없이도 자신의 생활과 체험이 성경 속 이야기와 노래와 등장인물 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근본주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 역시 성경 본문과 시사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라틴 아메리카 기초 공동채의 경우는 성경 읽기와 성경 해석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와 교회상황에 따라 조형되고 조건지워진다는 점에서 그들과 대조적이다.
이 집단에게 셩경에 나오는 사람과 이야기와 노래가 그들 자신의 사회, 경제,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은 자명했다.
성경은 그들이 억눌리고 수탈당하는 민중이라는 처지를 인식하게 하는 한편, 변화와 개혁을 위해 조직화하고 함께 일하려는 초보적 노력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강력한 도구였다.
기초 공동체 사람들은 개혁을 단순히 정치적 과정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성경 속 이야기와 인물들을 대하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그들 나름의 종교적 신앙의 본질과 성격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느님을 더 이상 개개인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의 하느님을 민중의 하느님, 민중이 억압받고 착취당할 때 그들의 편을 드시는 하느님,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을 종살이에서 구하고 해방시키기 위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했다.
구약성경의 핵심을 차지하는 탈출기는 기초 공동체에 몸담은 이들에게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
기초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피부로 느낀 신학자들은 이 소박한 주석가들이 성경과 맺고 있는 놀라운 친화력에서 새로운 안목과 전망을 발견했다.
이는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학의 새로운 방식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벌어지던 일은, 이미 고전이 된 페루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 번역 출판되면서 다른 제 3세계와 유럽과 북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해방신학의 핵심 요소에는 그것이 출현하게 된 사회적 입지가 포함된다.
해방신학의 발전은 학자와 신학교에 그다지 의존하지 않았다.
해방신학의 기원은 오히려 가난하고 수탈당하는 라틴 아메리카인한테서 유래한 그리스도인 기초 공동체에 있었다.
그뿐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어나는 이들을 심사숙고하기 시작한 이들은 성경에 어떻게 접근하든 그것이 해석자의 사회. 경제. 정치적 소임에 영행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시실을 깨달았다.
곧 해석자의 배경과 소임은 그가 성경 본몬을 어떻게 일고 거기에 대해 어떤 질문을 제기하느냐에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이 학자들은 성경을 연구하면서 성경 자체도 그와 동일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성경에는 저자 자신의 경제, 정치, 사회적 소임이 많이 반영되고 있다.
따라서 비교적 세밀한 검토에 들어가면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성경의 형태와 내용을 결정한 충돌과 갈들은 충분히 식별 가능하다.
이러한 식병은 현대 사회과학 방법론과 성과물을 좀 더 다름 아닌 두 가지 해석상의 주요 원칙을 정립하는 일이었다.
첫 번째 '가난한 이들의 해석학적 특권' 이고 두 번째 원칙은 '의문의 해석학' 이다.
가난한 이들의 해석학적 특권
'가난한 이들의 해석학적 특권'은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의 눈을 통해 성경과 역사를 대하하고 촉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의 의미와 메시지를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밑바닥에 있는' 이들과 각별한 친화력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게 한다.
이 점은 일단 성경 자체가 역사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는지 고찰하고 인지하고 나면 놀라울 것이 없다.
우리는 역사가 고대 사회를 다루면서 주로 주요 인물만을 부각시키는 것을 보아왔으며 그런 관점에 익숙해 있다.
사무엘기와 열왕기를 보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주로 왕정 시대의 주요 인물, 곧 사무엘, 사울, 다윗, 솔로몬과 이스라엘과 유다의 임금, 전사, 고관, 대사제, 여왕,모후들을 거론한다.
그러나 창세기 12-50장에 나오는 어머니와 아버지 이야기는 형태가 전혀 다르다.
이 이야기들은 개인과 집단에 관계된 출생과 죽음, 혼인과 이주, 희망과 두려움과 갈등에 대한 가족이야기다.
이런 일상사는 당사자들을 둘러싼 못 민족과 국가들 간의 갈등이 그들의 일상생활과 접촉하면서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심각할 만큼 충격을 주거나 위협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문명과 문화의 심장부에서 벗어나 변두리에서 생활하는 개인과 집단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와 추억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사실, 곧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어머니나 아버지로 뽑혀 기술된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 그리고 자신의 기원과 정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곧 그들은 '주요한' 인물들이 살연서 실질적 결정을 내렸다고 자부하던 중심부 바깥에 뿌리를 내린 민중이었다.
이 점은 탈출기라는 핵심 이야기에 이르면 훨씬 더 분명해진다.
탈출기는 당대의 가장 강력한 제국 안에서 실질적으로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한, 이집트 사회에서 밑바닥을 이루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것은 전쟁을 하고 동맹을 맺고 부를 누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규모 노예 집단이 겪은 고통과 가난과 투쟁의 이야기다.
훗날 이스라엘인들은 이를 한 민족인 자신들의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한 중요한 순간이자 기원으로 삼았다.
성경은 역사를 어떤 시각으로 대해야 하는지 암시한다.
그것은 '바닥으로부터' 곧 힘없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눈을 통해 억합받는 이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다.
성경 전승의 출발점을 이루는 탈출 이야기는, 말하자면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지적적으로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희망과 자유를 누릴 새 땅으로 향하면서 겪는 체험담이다.
그들은 해방의 과정에서 만난 하느님을 이 같은 해방을 가능하게 하신 분, 자신들을 새 땅으로 인도하신 분, 자신들에게 새 희망의 근거를 제공하신 분으로 묘사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놓고 넒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이제 너를 파러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탈출3.7-10)
따라서 이러한 성경 전승 안에 자리한 사람들의 후대인들 가운데서 자신 역시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성경의 구절구절에 담신 힘과 의미를 꿰뚫어 보고 엄청나게 깊은 친화력을 느끼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의문의 해석학
과거에는 성경 신학과 성경 해석을 철학과 역사와 성경 언어들의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해방신학자들은 전문가의 신학과 주석이 주로 전문가의 문제와 관심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에 비해 기초 공동체에 몸담은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와 관심사는 자기 나라의 가난한 이들과 수탈당하는 이들을 대변하는 것이었으므로 주석서나 신학서, 잡지, 토론장 어디에도 낄 수가 없었다.
아울러 해방신학자들은 그들의 성찰 결과가 성경 본문 자체에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경 본문은 특정시간과 장소 다양한 사회, 경제, 정치 계층에 속하면서 관심사와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집단에서 나온 산물이다.
해방신학자들은 '의문의 해석학'을 공식화했다.
의문의 해석학은 어떤 질문을 던져 성경에 접근하는 기술적 용어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의문' 이란 성경의 진리나 권위에 대한 믿음의 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접근법을 따르는 사람은 꾸준히, 그리고 체계적으로 질문을 제기한다.
이 이야기를 결정적 핵심 인물을 등장시켜 이런 방식으로 전개한 이유는 무엇인다?
어째서 다른 일화가 아닌 바로 이 일화를 기억하여 기술한 것일까?
다른 개인이나 인물, 사건들에 비해 특정 개인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선명히 드러나는 편경들은 무엇인가?
어떤 이는 창세 12-50장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남성들이 주역을 담당하는 이유에 대해 여성해방론적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의문의 해석학을 실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