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멈추는곳(110)
ㅡ칼국수 한 그릇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바닷가 뒷골목에 3층 건물 1층에 자그만 칼국수집이 있다. 아직 소문난 식당은 아니고 맛집은 더욱 아니다. 아는 사람들만 찾아오는 고만 고만한 칼국수집의 하나다.
5-60대 쯤 돼 보이는 부부가 2년 전에 문을 열었다. 부인이 주방 일을 하고 남편은 손님 서빙을 맡아한다. 목이 좋은 곳도 아니고 내부 장식이 화려하지도 않아 장사가 제대로 될까 오히려 손님인 내가 걱정이 들었다. 더구나 부부가 모두 독실한 신자여서 일요일엔 아예 문을 열지도 않는다.
그런데 2년이 채 안돼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모처럼 찾아간 오늘은 손님이 엄청 붐비고 있었다. 바깥에서 손님을 맞는 종업원도 한사람 더 늘었다.
점심을 끝내고 일어서는데 아주머니가 주방 일을 잠시 멈추고 나와 "언젠가 선생님께 우동 한 그릇이라도 꼭대접하려고 했는데 오늘 마침 연말입니다" 하면서 기어이 우동값을 받지 않는다. '내가 나이든 노인이라 그런가 보다'싶었다. 옥신각신하다 결국 꺼냈던 지갑을 도로 닫을 수 밖에 없었다.
돌아서 나오는 차 안에서 문득 일본에서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우동 한그릇'이란 소설이 생각났다. 일본 소설가 구리 료헤이(栗良平)가 1989년 처음 소개한 작품이다. 소설은 국민들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주고 눈물이 나게 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일본 국회에서까지도 국민 홍보에 나섰다고 한다.
일본 북해도에 북해정(北海亭)이라는 우동집이 있다. 남편은 주방에서 일하고 부인은 손님을 맞으며 우동을 나르는 일을 한다.
어느해 12월 31일 밤 10시 가게문을 닫으려고 바깥에 펄럭이는 안내 깃발을 걷어내리려 하는데 허름한 옷차림을 한 부인이 초-중등생으로 보이는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미안하지만 우동 한 그릇만 시켜도 될까요 모기소리로 묻는다. 가게 주인은 네 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1.5인 분을 담아낸다. 세 모자가 한 그릇 우동이 꽤 많다면서 오손도손 맛있게 나누어 먹는다. 어린 아들이 우동 한 가락을 떠서 먼저 엄마에게 드린다. 두 아들 모두가 '고학'(苦學)하면서도 엄마한테는 힘든 내색이나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그 뒤에도 몇 년간 그믐날이면 어김없이 세 모자가 찾아온다. 이들에겐 우동 한 그릇이 1년중 가장 맛있는 성찬(盛燦)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해부터 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10 여년쯤 지난 어느 해 섣달 그믐날 밤 10시에 두 신사가 귀부인 한 분을 모시고 들어왔다. 그때 그 큰아들은 의사가, 작은아들은 은행원이 되었고 어머니는 곱게 차려입은 초로(初老)의 부인으로 바뀌었다.
이런 줄거리의 소설이었지만 일본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감동을 불러내는작품이어서 .당시 전 일본열도를 뜨겁게 달구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설국'(雪國)의 모양세다.
우동 한그릇, 칼국수 한그릇은 정말 별거 아니다. 하지만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잔잔한 감동을 주고 때로는 시와 소설, 영화로 탈바꿈한다. 이 소설도 뒤에 영화로 다시 태어났다.
그때 두 아들에겐 가장 먹고싶은 우동이었지만 가난이 그걸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실수로 교통사고를 내어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험금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빚더미를 안기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걸 외면할 수 없었던 착한 부인은 그때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험한 일터로 나갔다. 큰아들은 신문배달, 작은 아들은 엄마 대신 집안일을 맡아하면서 빚을 4년이나 앞당겨 다 갚았다.
일본 자본주의의 따뜻한 한 모퉁이를 보여주는 조금은 의도적인 소설로 읽힌다.
하지만 경쟁체제로 작동하는 자본주의가 이런 따뜻함마저 갖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자본주의는 경쟁체제와 이윤추구 심리로 작동한다. 때로는 개인이나 소수 자본은 허허벌판에 맨몸으로 버텨야 하는 경우를 맞을 수 있다. 사회가 불안하고 윤리도덕이 무너지게 된다.
이런 현상이 심해지면 하버드대학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 교수가 일갈한 것처럼 민주주의가 무너진다.
그들의 말대로 선출된 민주주의 권력 또한 사법부를 존중하고, 상대편을 인정하고 포용해야 한다. 게임의 룰(rule)을 지켜 상대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게 한다면 민주주의는 존재가치를 잃는다고 지적한다.
권력을 잡았거나 부(富)를 누리는 사람들은 모두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따뜻한 '가슴과 손길'을 가져야 한다. 이건 한 개인의 심성(心性)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권력은 선심쓰듯 나랏돈을 나눠주고 베푸는 건 절대 삼가해야 한다.
국민이 스스로 삶을 꾸리고 넘어질 때 다시 일어서도록 힘을 북돋워주는 선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구성원들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바탕이요 첫 걸음은 바로 따뜻한 가슴과 손이다.
선출된 권력이라도 따뜻한 가슴을 늘 잊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선진사회는 권력이 민주적 통제를 받는 제도적 장치가 늘 작동되고 있다. 바로 따뜻한 권력을 일컫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일찍이 지적한 바 권력의 속성은 사실상 폭력에 가깝다. 칼날처럼 차갑다. 따라서 통제 받지 않는 권력은 결국 레드 라인을 넘어서게 되고 끝내는 무너지는 길로 간다. 사회나 국민은 물론 권력 자신도 불행에 빠진다.
칼국수 한그릇' 얘기가 좀 다른 길로 벗어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연말연시(年末年始)라 가슴에 손을 얹고 한해를 돌아보고 또다른 한해를 바라본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 얼마나 많은 웃음을 주고 '베푸는 삶'을 살아 보려고 애썼는지, 가슴 한켠에 따뜻한 불쏘시개를 지니고 있는지 한번 쯤은 물어볼 때다.
'어르신', '베풀다', '대접', '배려',와 같은 단어들이 여전히 쓰이고 또 남아있어 우리 사회는 아직도 건강하다.
2020.1. 9
묵혜(默惠) 김 민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