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들께 부끄러웠던 서울 둘레길 제14회차(제4편) 길음역 부터 우이동까지 (기행 수필)
루수/김상화
아름다운 새소리가 우이동 골짝에 울려 퍼진다. 서쪽 하늘엔 뭉게구름을 빨갛게 물들여 호화롭게 장식해 놓았다. 우리 일행은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둘레길 산행이 만족스러운 듯 노을빛에 물든 것처럼 볼그스레한 얼굴엔 행복의 미소가 가득하다. 신께서는 맑은 공기까지 선물로 주시어 마음껏 마시라 한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마음에 맞는 사람이 모여 자연을 감상하고 노래하며 즐기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 했다. 그러나 둘레길 답사 중 미처 알지 못했던 애국선열들의 묘비문(墓碑文)을 읽고 숙연해지는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한편으론 애국선열들께서 나라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걸고 애국하셨다는 것을 비문을 통해 보았을 때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즐겁고 행복한 오늘이란 하루를 승화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추억을 한 보따리 만들어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 애국선열의 훌륭한 발자취를 따라 오손도손 이야기하며 걷는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기 시작한다. 땅거미가 찾아오기 전에 미쳐보지 못한 것을 발굴해 글을 좀 더 아름답게 쓰고 싶다. 또 아직 기록하지 못한 순국선열들의 훌륭한 업적과 4.19에 대해 간결하게 서술하고 싶다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선생에 대해 알아본다.선생은애국선열이시며(1879.7.10~1962.5.10) 경북 성주 출신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셨다. 선생은 독립운동가 이시며 교육자로서, 1905년에 을사조약 체결 반대와 매국 5적을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려 옥살이를 하였으며 1919년에는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내용(파리 장서)을 알리는 활동을 주도하였고 1946년에 성균관 대학을 설립하였다. 선생은 1928년 대구형무소 옥중투쟁 중에 변호사를 사절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대한민국 사람으로 일본법률을 부인한다.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으로 대한인의 자존심을 지키신 분이다.
애국선열 현곡 양일동(玄谷 梁一東) 선생에 대해 알아보자. 선생은(1912.12.30~1980.4.1) 전북 옥구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이시고 정치가였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셨다. 선생은 중동학교를 다니던 중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다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고, 무정부주의 단체인흑우연맹(1931)과 조선동흥노동연맹(1932)에 가입하여 각종 출판물을 통해 항일의식을 높이는 데 노력하였다. 광복 후 제3,4,5대 민의원 및 제8,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선생은 민주통일당 반유신 투쟁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교육은 민족의 영속적 발전의 원동력이고 문화는 그 아름다운 꽃이요 열매이다. 비록 시운의 변동에 따라 정권에 존망이 있을지라도 민족의 생명은 멈추어질 수 없고 교육과 문화가 정체될 수 없다. 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애국선열 동암 서상일(東菴 徐相日) 선생에 대해 알아본다. 선생은(1887.7.9~1962.4.18) 경북 대구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였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셨다. 1909년 나라의 권리를 다시 찾기 위하여 대동청년당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선생은 1910년 일본에게 우리나라 통치권을 빼앗기자 이를 되찾기 위해 광복 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5년에는 명절을 기리는 글짓기를 한다며 일본 경찰들을 속이고 조선국권 회복단 중앙총부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 헌법 기초위원으로 헌정의 초석을 놓았다. 1909년 조직된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활동 시 다음과 같음 말씀을 하셨다. 양심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비겁하다. 청년이 비겁해지면 나라가 위태롭다. 는 말씀을 하셨다.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선생에 대해 열거해 보자. 선생은(1886~1947) 경기도 양평군 신월리에서 출생하셨다. 신월 역에서 물소리 길을 따라 부용산 방향으로 500m 정도 가다 보면 몽양기념관이 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셨다. 선생은 1919년 동경 제국호텔에서의 연설문 중에서 우리가 건설하는 새 나라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국이다. 이 민주공화국은 조선 민족의 절대적 요구일 뿐 아니라 세계 대세가 요구하는 것이다. 싸우지 아니하고는 인류가 누릴 자유와 평화를 못 얻을 것인가? 일본 인사들은 깊이 반성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몽양 유객문(夢陽 留客文)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여도 내가 기뻐할 바 아니요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여도 내가 노여워할 바 아니니라 내가 사람이면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여도 내가 사람이요 내가 사람이 아니면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여도 내가 사람이 아니니라 내가 사람이냐 아니냐를 알고자 할진대 나를 사람이다 아니다 하는 사람이 사람이냐 아니냐를 알아보도록 하라
우리는 잠시후 4.19탑을 향해 걸었다. 보광사(普光寺)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4.19 탑이 있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났다. 4.19 세대를 겪었지만 철없던 피 끓는 학생이었다. 근본과 취지를 제대로 파악도 못 하고 선배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서 데모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하룻밤을 유치장서 보내기도 했다. 그때를 회상해 보면 내가 무슨 애국 투사인양 군중심리에 얽매어 거들먹거리며 이리저리 날뛰고 다녔다. 민주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4.19 탑을 와보니 감회가 새롭다. 서울에 거주하면서 처음 와보는 곳이다. 1963년 9월 20일에 건립된 이 묘역에는 4.19혁명 당시 희생된 영령들이 잠들고 있으며 정부의 성역화 사업으로 1993년에 종전 약 13,000평의 묘역을 약 41,000평으로 넓혀 새롭게 단장하고, 1995년 4월 18일 국무회의에서 4.19 묘역을 국립묘지로 승격하여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관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현재 경관안내판이 설치된 이 지점은 북한산 둘레길 중 4.19 묘역의 조망이 가장 좋은 곳이다. 잠든 선열들의 혼을 경건한 마음으로 느껴본다.
4.19혁명(당시는 의거로 지칭함)은 이승만 정권이 4.19 부정선거를 시민들과 학생들이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였다.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걸 국민이 똑똑히 다시 보여준 혁명이다. 4.19혁명은 1960년에 3.15부정선거로 학생과 시민이 일으킨 반독재 운동이다. 이승만 정권의 3선 이상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정선거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이다. 4.19혁명을 촉진하게 한두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4월 11일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혀 사망한 사건과 깡패들이 4월 18일 고대생 습격 사건이다. 전에는 학생들 위주로 시위가 진행되었으나 이 두 사건으로 인해 전 국민이 이승만 정권에 분노를 느끼게 되어 4.19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4.19혁명의 의의는 이 혁명으로 인해 이승만 장기 집권과 독재정권이 끝나고 시민의 힘으로 민주정권을 탄생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둘레길 14회차를 4회에 걸쳐 나름대로 서술해 보았다. 인터넷과 비문에 새겨놓은 것을 토대로 적었습니다만 많이 부족한 듯하다. 10여 명의 둘레길 가족 모두 나를 도와줘 참으로 고마운 날이다. 특히 이상갑 회장은 끝까지 나와 함께 벗 되어 나의 고독함을 어루만져주었다. 선두에서 안내한 정상헌 대장과 후미에서 낙오자가 생길까 노심초사한 김영식 대장 수고 많이 했다. 모처럼 개그맨 뺨치는 김용관 회원이 참석해 반가웠다. 미인 심명자 부회장과 김형옥 회계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정해봉 대장도 수고 많이 했다. 끝으로 무역회사 다니는 미인 장필순과 정미숙 오늘 분위기를 띄워줘 즐거웠다. 이렇게 우리는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자연을 즐기며 저물어가는 가을의 하루를 마음껏 즐겼다.
둘레길을 도는 오늘 하루가 너무도 고귀한 시간이었다. 이곳에 와서 생각지도 못한 많은 애국선열을 한 자리에서 뵈올 수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준 축복 중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좀 아쉬운 것은 묘지까지 들려 참배를 드리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것이 마냥 죄를 지은 죄인같이 느껴젔다. 애국선열들께 정말로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와 꼭 큰절 올리겠습니다. 아마 해피 가족 모두 저와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아무쪼록 고이 영면하시어 잘못되어가는 이 나라 굽어살펴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