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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은총을 가득히 받은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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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모님을 통해 우리의 신원을 새로이 확인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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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복음 말씀을 통해 성모님의 신원이 잘 들어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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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던진 인사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오늘의 복음입니다.
제가 고해성사 때 보속의 처방전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이 가득담긴 인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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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바로 이게 성모님의 신원입니다.
성모님뿐 아니라 우리 역시 은총을 가득히 받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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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거푸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분’으로서 마리아의 신원이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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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 또한 세례 받아 은총을 가득힌 받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성모님은 우리 신앙인들의 모범입니다.
성모님을 통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은총이 가득한 삶을 두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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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제자리에 충실한 정주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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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에 충실할 때 은총이 가득한 삶입니다.
은총이 가득할 때 저절로 순수한 마음, 단순한 마음, 진실한 마음입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제자리에 충실했던 마리아를 찾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촌 고을 까지 찾아간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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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는 대조적인 오늘 1독서 창세기의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는 보편적 용어가 의미심장합니다.
사람인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금한 나무 열매를 먹은 사람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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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
우리 모두를 향한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과연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는지 묻습니다.
이에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며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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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은 하느님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마리아처럼 늘 하느님 앞에 투명한 제자리 삶이었다면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나섰을 것입니다. .
마리아의 마지막 말씀이 제자리 정주의 삶의 충실성을 입증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이 두려워 피했던 사람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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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찬양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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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일 저녁기도 때 마다 바치는 성모님의 찬양노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평생 하느님을 찬양하는 삶을 사셨던 성모님이셨습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의 유일한 기쁨이 바로 하느님 찬양입니다.
하느님을 찬양할 때 풍성한 은총이요 마음의 정화입니다.
하느님 찬양의 빛 앞에 사라지는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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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독서는 우리가 매일 월요일 저녁기도 때 마다 바치는 에페소 찬가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바쳤던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진 은총에 대한 찬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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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말 본문에는 3절에서 14절까지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여 숨을 멈추지 않고,
감격에 벅차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내리 노래한 초대교회신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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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찬양의 기쁨은 믿는 이들에겐 절대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내리셨고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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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느님 은총에 응답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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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와 찬양은 함께 갑니다.
정주의 삶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양이요 찬양을 통해 계속 새로워지는 정주의 제자리 삶입니다.
매일 끊임없는 하느님 찬양을 통해 정주의 제자리 삶에 충실할 때
우리 또한 성모님처럼 은총 가득한 겸손과 순종의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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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한마음 한 목소리로 당신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내려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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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제가 아는 신부님 중에 쇼핑을 즐기는 분이 계십니다. 하지만 백화점 같은 곳을 가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터넷을 통해서 신기한 물건들을 구입합니다. 단, 여기에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절대로 비싸면 안 됩니다. 가장 값싸면서도 신기한 물건들을 찾아서 구입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신부님 방에는 별의별 것이 가득합니다. 물론 이 중에서 쓸모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특별한 무엇인가를 산다는 것은 사람을 설레게 하지요. 이 물건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가 궁금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정말로 나에게 필요한 것을 구입하는 경우는 아주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지요. 쇼핑이라는 건 쓸데없는 것을 사는 일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쓸데없는 것을 구입했다고 해서, 아주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입하는 순간에 가지는 기쁨과 설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꼭 필요한 것을 가져야만 행복하고, 생필품을 구입해야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밥을 먹기 위해 쌀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쌀 사러 쇼핑 가자고 말하지 않지요. 또 비누나 휴지 등의 생필품을 사러 가면서 어떤 생필품을 사게 될까 하고 기뻐하고 설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특별한 무엇, 그러나 이를 통해 얻게 되는 기쁨과 설렘. 이 물건이 내게 계속해서 중요한 물건이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어서도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만을 내게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그 어떤 것도 소홀할 수 없는 의미 가득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물건에도 이렇게 의미가 가득한데, 하물며 사람은 어떨까요? 필요 없는 사람, 의미 없는 사람 등등의 말은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들을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창조 때에 보여준 사랑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창조 때부터 계속해서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계셨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당신의 외아들까지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 사랑의 과정에 중요한 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축일을 맞이하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십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강생할 예수님을 맞이할 깨끗한 몸이 필요했지요. 그런데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잉태소식을 미리 알려줍니다. 그때 성모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 삶. 이 삶 덕분에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었고, 우리 모두가 구원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의 이 모습은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는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대조됩니다. 그리고 결국 중요한 것은 내 뜻, 세상의 뜻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주님의 뜻임임을 깨닫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성모님과 같은 순명의 마음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추어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될 때, 주님의 뜻이 이 세상 끝까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에덴동산 밖에서 다시 안으로>
(원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은 12월 8일인데,
올해는 주일과 겹쳐졌기 때문에 12월 9일로 이동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교리는
겉으로는 성모님에 관한 교리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에 관한 교리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님은
당연히 원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 ㅡ 천주의 성모 ㅡ 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원죄를 가진 채로 태어나면 안 되는 것인가?"
라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원죄를 가진 채로 태어나셨다면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라는 신앙고백과 모순이 됩니다.
예수님은 원죄 이전부터 존재하신 말씀이신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성모님은 원죄가 있으셔도 상관없지 않은가?"
라고 물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성모님에게 원죄가 있으셔도 예수님은 원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그렇다면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에게 한 말들과 모순이 됩니다.
천사는 성모님을 "은총이 가득한 이,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이,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이" 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들은 성모님이 처음부터
특별한 선택을 받으신 분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택과 은총과 총애가
잉태 첫 순간에 이미 주어졌다고 믿고 있고,
따라서 당연히 성모님의 원죄 없으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원죄 없으심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원죄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죄'는 보통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게 된 죄로 정의되는데,
아담과 하와 이후로 모든 인간을 물들인 죄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죄와 죄는 다릅니다.
죄는 각자 자기 자신이 짓는 것이니까 자기 탓이지만
원죄는 자기 탓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좀 단순하게 표현하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처지를 물려받은 것이
(에덴동산 밖에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물려받은 것이)
원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 적도 없는 먼 옛날 조상의 죄를 후손들이 대신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로 생긴 인간의 처지는 어쩔 수 없이 물려받게 됩니다.
많이 억울하긴 하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에덴동산 밖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을
다시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원죄가 씻어진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교리입니다.
따라서 세례성사는 에덴동산으로(하느님 나라로) 들어오라는
초대장 같은 것입니다.
입장권이 아니라 초대장입니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었던 베들레헴의 아기들은 예수님을 몰랐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은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도 않았지만,
사실상 예수님 대신에, 또 예수님을 위해서 죽은 것과 같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그 아기들을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들 같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죄를 지을 틈도 없이 짧은 생애를 살다가 떠난 어린 아기들이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례를 받았든지 못 받았든지 간에...)
초대장을 입장권으로 바꾸는 것은
각자 스스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잘 나타내는 가르침이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혼인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마태 22,11-14).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오지 않아서
그들 대신에 길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새로 초대했는데,
그 가운데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밖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초대를 받았지만 참석하지 않은 사람과
참석을 했지만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의 운명이 똑같게 됩니다.
세례성사로 원죄를 씻어내더라도 누구든지 항상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또 죄를 짓게 만드는 욕망 같은 것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시고 태어나신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성모님이 하신 일은 죄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고,
"성모님도 한평생 죄를 멀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셨다."
라고 믿는 것이 옳습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 깨끗함과 받아들임 >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 2’ 중 ‘아버지의 생일’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사연입니다.
완섭 씨는 순대국밥 집을 운영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아침 햇살이 높아져만 갈 때 여덟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어른의 손을 이끌고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의 너절한 행색은 한눈에 봐도 걸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비를 맞아 땀과 뒤섞인 쾌쾌한 냄새는 완섭 씨의 코를 찔렀습니다. 완섭 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습니다.
“이봐요! 아직 개시도 못했으니까, 다음에 와요!”
“.......”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앞을 보지 못하는 아빠의 손을 이끌고 음식점 중간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구걸이 아니라 식사를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주기 싫고, 또 돈을 받을 확신도 서지 않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주는 것이 왠지 꺼림직 했습니다.
“저어, 아저씨! 순대국 두 그릇 주세요.”
“응, 알았다. 근데 얘야, 이리 좀 와볼래. 미안하지만 지금은 음식을 팔 수가 없구나. 거긴 예약손님들이 앉을 자리라서 말이야.”
아이는 주인의 말에 낯빛이 금방 시무룩해지면서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아저씨, 빨리 먹고 갈게요. 오늘이 우리 아빠 생일이에요.”
아이는 주머니에서 비에 젖어 눅눅해진 천 원짜리 몇 장과 한 주먹의 동전을 꺼내 보였습니다.
“알았다. 그럼 최대한 빨리 먹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말이다, 아빠하고 저쪽 끝으로 가서 앉거라. 여긴 다른 손님들이 와서 앉을 자리니까.”
“예. 아저씨 고맙습니다.”
아이는 아빠를 데리고 화장실이 바로 보이는 맨 끝자리로 가서 앉았습니다. 잠시 후 완섭 씨는 순대국을 두 그릇 갖다 주고, 계산대에 앉아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아이는 아빠에게 소금을 넣어주겠다고 하면서 자기 국밥 속에 있는 순대며 고기들을 떠서 아빠의 그릇에 가득 담아주었습니다.
“아빠, 이제 됐어. 어서 먹어.”
“응, 알았어. 순영이 너도 어서 먹어라. 어제 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
“나만 못 먹었나 뭐. 근데... 아저씨가 우리 빨리 먹고 가야 한댔어. 어서 밥 떠, 아빠. 내가 김치 올려줄게.”
아빠는 조금씩 떨면서 국밥 한 수저를 떠서 들었습니다. 아빠의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음식을 다 먹을 때 쯤 완섭 씨의 마음도 따뜻해짐을 느꼈습니다. 밥을 다 먹은 아이가 돈 사천 원과 동전을 꺼내고 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그럴 필요 없다. 식사 값은 이천 원이면 되거든. 아침이라 재료가 준비되지 않아서 국밥 속에 넣어야 할 게 많이 빠졌어. 그러니 음식 값을 다 받을 수 없잖니?”
완섭 씨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천 원짜리 두 장을 다시 건네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아니다. 아까는 내가 오히려 미안했다.”
완섭 씨는 출입문을 나서는 아이의 주머니에 사탕 한 움큼을 넣어주었습니다. 좋아서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완섭 씨는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완섭 씨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고 있었습니다.
깨끗함. 우리는 무엇을 깨끗함이라 말합니까. 말끔한 차림을 하고 냄새나는 사람이 곁에 오면 코를 막고 몸을 피하는 사람이 깨끗한 사람일까요? 우리는 오히려 어린 순영이에게서 깨끗함이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감사하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나의 것을 쉽게 포기하며 남을 배불릴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처음의 완섭 씨 모습처럼 판단하고 받아들일 줄 모르는 모습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그리 깨끗하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수호자이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성모님도 시골의 보잘 것 없는 처녀였습니다.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에게 꼭 그 분을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하느님을 담을 유일하게 깨끗하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 깨끗함만이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아멘(Fiat)’ 하실 수 있는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깨끗함만이 여과 없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전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움은 마치 안 좋은 것들로 속이 막힌 수도관과 같이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오염시키고 맙니다.
저희 본당 신자는 손가락 두 개를 기계에 눌려서 잃게 되었는데도 바로 그 손을 들고 손 전체가 잘리지 않게 해 주셔서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모든 것에 ‘아멘!’ 할 수 있다는 뜻은 ‘하느님께서는 항상 좋은 것만 주신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마음이 더러운 사람에게는 생기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잘 받아들이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깨끗한 마음이고 그 마음이 온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성모님이 당신 깨끗함으로 봉헌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의 죄를 씻으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꼬마아이 순영이의 깨끗함으로 완섭 씨의 마음이 씻겨진 것과 같습니다.
죄책감이 많은 강박 환자들은 집안을 지독하게 깨끗이 닦거나 지나치게 정리를 잘 합니다. 혹은 손 등을 피가 날 정도로 닦기도 합니다. 그런다고 깨끗해지겠습니까? 참 깨끗함은 하느님의 모든 뜻에,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아멘’과 ‘감사’를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욥은 그래서 온갖 안 좋은 일을 겪음에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 비천한 인간들의 모습이 어때야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항상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께 이렇게 아룁시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이것이 하느님 뜻에 대해 깨끗함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응답입니다. 원죄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을 조금이라도 닮아가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오산본당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안 되는 것이 없다>
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이 하느님을 만나는데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겠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기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더군다나 천사는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며 명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늙은 나이에 임신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전하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마리아는 자유의지로 응답하였습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 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구세주의 잉태는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잉태되고 또 태어나셔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응답을 통하여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앞으로 닥칠 일을 고민했더라면 아마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배가 불러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어주기나 할까요?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쫓겨나든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에게 이루어 주소서” 한 것은 곧 자신의 모두를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을 차지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래도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순명의 모범을 보이시고 실제로 구원을 이루셨으니 우리도 일상 안에서 성모님을 생각하며 단호한 결단과 더불어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 한 발 나아가야겠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을 잉태 하셨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며,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다시 오실 것이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의 구원이 성취될 것입니다”(성 루도비꼬).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먼저 겸손과 순명의 어머니 마리아께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많은 사람이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으니 죄를 짓지 않으신 가운데 사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죄 없이 창조되었지만 죄를 지은 다른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하와입니다.
하와 역시 원죄 없이 창조되었고, 성모님께서도 원죄 없이 잉태되셨습니다.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뱀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반면, 성모님께서는 인간의 상식을 거스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굳게 믿으셨습니다.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반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반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종이라는 자리를 지키고자 ‘성자의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였으나, 인간으로서의 초라함을 겪었습니다. 그 반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비천한 종으로 살아가셨기에 천상 모후의 관을 쓰실 수 있었습니다. 하와는 모든 이의 어머니였으나 모든 이에게 죄의 흔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 반면, 성모님께서는 처녀의 몸으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예전에는 ‘무염시태’(無染始胎)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교만과 이기심으로 ‘오염’(汚染)된 이 세상에서 ‘무염’(無染)으로 태어나 죄짓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죄의 유혹을 받으시면서도 하느님께서 주신 ‘무염의 은총’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이미 세례를 통하여 원죄에서 풀려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오늘을 경축하면서 그 은총을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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