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일요일), 도쿄는 연중에 가장 강한 폭우를 내리게 했던 짙은 구름이 걷히고 수십 일 만에 해가 뜬 아름다운 날씨였다. 습도가 90% 가까이 올라갔지만 수십만의 도쿄시민들이 근교에 있는 후지산 기슭의 언덕들이나 해변으로 쏟아져 나왔다. 모두가 오랜만에 화창한 여름의 첫날을 즐기려 했고, 나도 그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때 나는 라이프지에 기고한 '일본예술의 가장 흥미로운 하이라이트'에 대한 방대한 이야기의 첫 부분을 막 끝내는 중이었는데 이를 알고 있는 친구들이 국립박물관의 작업실보다 훨씬 더 매혹적인 바닷소리가 들리는 해변으로 나를 이끌었다. 한참 라이프지의 편집자들에게 일본예술을 이해시킬 수 있는 소재로서 적합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이국적인 청동 불상 사진의 주석을 어떻게 달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거의 9년 전의 다른 일요일 아침처럼(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있었던 해), 전쟁뉴스 최후통첩과 같이 간단한 성명으로 발표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일본에 있다는 점만이 달랐다. 일본이 내 근무지였다. 두 시간 뒤에 도쿄에 있는 맥아더 장군의 사령부로 돌아왔지만, 아직 우리 특파원 수준에서 알아볼 수 있는 전쟁에 대한 의미 있는 소식들은 없었다.
기자들을 태우고 한국으로 향했던 비행기가 한 시간이 지나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하네다 공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가는 발이 묶인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했다는 말이 들렸다. 또 다른 이들은 남한 측 인원이 파괴했다고 주장하는 소련제 탱크들로부터 소련군이 퇴각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먼저 집단적인 잔혹 행위 기사들이 널리 퍼져 나갔다가는 거의 모두가 아주 빠르게 사라졌다.
'라디오 도쿄'가 비중이 큰 오후 방송으로 누군가로부터 듣고 인용한 공격뉴스, 뉴스단신, 특별긴급통신 등을 내보냈다. 일본은 한국을 그들 고유의 작은 진주만으로 점유했었으나 이제는 한국이 더 이상 일본의 영역이 아니고, 지금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하는 한국 사람들은 일본이 최근까지도 적이었고, 그들이 현재 회복한 국권을 다시 쉽게 유린 할 수도 있는 적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잊은 것 같았다.
그 첫 일요일 저녁. 다른 비행기 한 대가 서울로 특파원들을 수송할 예정이었으나 나는 해변에서 너무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포함되지 못해 차선책으로 공산 침략군에게 폭격을 퍼붓는 전투기들을 준비시키는 미 공군기지가 있는 큐슈로 가서 맥아더 사령부가 제공하는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맥아더 사령부가 자정 직후에 서울행 비행기가 무기한으로 취소되었다고 알렸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첫 번째로 전화위복이 된 나의 행운이었다.
나의 차선 조치는 특파원 사이에서 갑자기 가장 뜨거운 카드가 되었다. 그런데도 내가 마침내 4명의 다른 특파원들과 이타주케 이착륙장과 인접해 있는 후쿠오카행 비행기를 탄 건 화요일 오전 중반쯤이나 되어서였다. 눈 아래 펼쳐진 빛에 반짝이는 논을 보면서 나는 남태평양의 섬들과 내가 항공사진을 찍을 당시 적의 대공포화에 유명을 달리하고 내 가슴에 어깨를 기대였던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을 떠올렸다.
나는 또 과달카날의 신비한 나비들, 해병대와 같이했던 3년, 장비들을 망치는 곰팡이 그리고 시체처럼 악취를 풍기며 우리 피부를 산성 물질같이 망가뜨리는 오물들을 기억했다. 나는 일본과 일본사람, 그리고 평범했던 최근의 수년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졌던 전쟁의 작은 덩어리를 기억했다. 자리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나는 그것들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일본은 이전에 다른 섬들이 나의 집이었듯이 내 인생의 5년을 지낸 나의 집이었다.
우리는 연료가 바닥나기 전에 착륙하려고 우리 뒤에서 굉음을 내는 두 대의 F-80 제트기와 함께 이타주케에 착륙했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나는 인접한 오른쪽 활주로에서 구경 50 대공포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나는 곧바로 이 새로운 전쟁에 대한 나의 첫 사진을 찍었다. 그때 또 두 대의 F-80 전투기가 쉭 굉음을 내고 내려오며 공중전 승리를 상징하는 이중 좌우 회전을 하면서 번쩍였다.
나는 충격에 찬 의문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미 연합통신사의 톰 햄버트를 발견하고 돌아봤다. 우리가 보는 조종사들이 그저 제트기로 멋 부리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아니라면 미국이 직접 살상전에 다시 개입됨에 따라 이들도 적을 사살하고 돌아왔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멋 따위를 부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화요일 밤 6대의 북한 전투기가 격추되었다는 전과 기록이 알려졌는데 그중의 3대는 바로 이 젊은이들에 의한 것이었다.
편대 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게시판 벽 가까이 앉아 있는 젊은 조종사를 알아보았다. 그의 얼굴의 무엇인가가 나에게 신속히 사진을 찍도록 만들었다. 다음날 나는 우연히 그 젊은이가 한국전쟁에서 첫 번째로 적기를 격추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직도 내가 그의 얼굴과 구부정한 몸에서 보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내가 첫 번째로 북한전투기를 격추한 그와 그 동료들의 사진을 찍고 돌아보는 바로 그 순간에 대형 수송기들이 활주로에 착륙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활주로 끝에 두 개의 격납고가 등록대, 급식줄, 적십자구호소 등을 갖춘 거대한 접수센터로 전환되어 있었다. 수송기가 활주로를 빙빙 돌아 멈췄을 때 소개민들이 그 장소를 가득 채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름한 옷만을 걸친 채로 한국으로부터 왔고, 단지 몇 사람만이 코트를 입고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지난 오리 사냥철의 잔재로 보이는 엽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화요일 즉 6월 27일 낮 동안 1,000여 명의 미국시민과 우방국가의 시민들이 단 한명의 손실도 없이 소개(疏開) 되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수송기의 흐름이 점점 줄어들더니 마침내 완전히 멈추었다. 미국 시민권자로 알려진 모두가 침략지대로부터 소개됐다. 거기에는 이 낯선 나라로 비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안전하게 데려와 달라는 축복을 빌었던 많은 기도가 밤마다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해가 빛났던 맑은 하늘과 고요한 달빛이 비쳤던 밤은 이들이 지난 저녁부터 날씨가 급변하여 먹구름이 내려와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작전상황실은 서울 가까이에 있는 김포비행장까지 수송해주라는 우리 특파원들의 요구사항을 알렸다. 그러나 김포가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비행은 없었다. 이러한 전쟁 상황은 나라를 지키는 데 이바지하고자 긴급으로 P-51 무스탕전투기의 조종법을 배우기 위해 바로 전날 한국을 떠나 이곳에 도착한 한국 공군의 젊은 조종사들이 어떤 기분일지 나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미국인 교관은 한국공군의 풋내기 조종사들에게 희망 없는 임무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이 매우 기본적인 기술에 숙달하도록 자신이 가르쳤기 때문에 앞으로 24시간 안에 공중에서 그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확신한다고 내게 말했다.
교관의 통역이 영어를 말하지 못하는 한국공군 조종사 중의 몇 몇이 녹색 불빛은 '착륙허가. 적색 불빛은 '착륙거부' 신호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관제탑과의 소통은 걱정할 게 없다고 설명했을 때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분명히 이것은 아주 수준 높고 민주적인 비행장이다! 날기만 해라! 말은 필요 없다! 적색! 녹색! 아주 간단하잖아! 나는 그들의 전쟁도 이와 같을지 궁금했다.
수요일 동이 틀 무렵. 우리는 두 번째 행운을 잡았다. C-47 수송기 한 대가 약 30분 뒤에 다른 비행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타게 된 것이었다. 이 수송기는 이제 막 설치된 맥아더 야전사령부를 위한 무전 지프들을 싣고 한국의 중앙에 있는 수원비행장으로 가도록 명령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는 곧바로 지프에 올라 비행기를 탔다. 비는 이륙하기에 충분할 만큼 걷혔고, 우리는 출발했다.
창문을 통해서 나는 유리 위에 구르는 매끈매끈한 보석같이 미끄러지는 물방울과 소용돌이치는 회색 구름만을 볼 수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대략 2시간을 비행했을 때 구름이 갑자기 걷히기 시작했고. 우리는 땅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본 것은 남쪽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검게 보이는 길이었다. 다음으로 피란민으로 완전히 덮인 채 단선 철로를 따라 모두 남쪽으로 기어가고 있는 세 대의 기차가 나타났다.
수원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뉴욕타임스 기자이자 도쿄에서부터 오랜 친구인 버튼 크레인이 우리를 맞아 주었으나 우리는 그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의 머리는 붕대로 감겨 있었다. 그는 지난밤 한국군들이 북한 침략자들의 전진을 막기 위해 서울의 한강 다리를 폭파할 때 그가 타고 있었던 지프의 바람막이 창이 박살나는 바람에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가 우리 비행기로 뛰어와서 바로 직전에 두 대의 적 야크기로부터 막 폭격을 당했었고,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으나 활주로 끝에 유기된 미 전투기와 폭격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두 비행기는 여러 구멍으로부터 기름을 쏟아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못 쓰게 됨이 분명했다. 그것의 재활용 여부는 다음날 북한 공산군의 폭탄에 의한 두 번의 빗나간 폭격이 그들을 완전히 날려버렸을 때 더 이상 고려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6월 28일 오후,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마을 가까이에 있는 4천 피트짜리 비행장에 우리만 남았다. 이 비행장은 심한 폭격을 당한 상태였고 우리의 동반자는 그 두 대의 구멍 난 비행기뿐이었다. 우리가 막 야전사령부 본부를 찾았을 때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포격이 모두를 뒤덮었다.
미군 엄호 전투기가 일본으로 복귀하고 임무 교대 전투기가 도착하기 전 바로 그 순간에 4대의 적 야크기가 갑자기 공습해왔다. 바로 그때 C-54. 수송기가 막 땅에 내려앉았고, 2대의 야크기가 기총소사를 가하며 급강하해왔다.
C-54 수송기의 조종사가 적기들을 본 것 같았다. 그는 멈춤 없이 다음 계절이면 수확하게 될 벼가 자라고 있는 논을 가로질러 이륙을 했다. 맥아더 야전사령부 본부로 돌아온 뒤에 나는 그 조종사가 함정으로부터 무사히 빠져나왔고, 비행기는 손상을 입었으나 타고 있던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고 들었다. 다른 야크기가 활주로를 급강하 폭격했고 두 번의 폭발이 사령부 본부를 진동시켰다.
비행장의 피해를 확인하기 위해 지프에 올랐을 때 램버트와 나는 한 공군 대위가 활주로를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프 뒷좌석으로 기어 올라와 돌아보며 말했다. "제기랄! 포격을 직접 맞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는 활주로에서 야크기에 피격 당했던 다른 하나의 C-54 수송기 조종사였다. 어쨌든 그는 큰 무리없이 비행기로부터 빠져나와 반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우리는 비행장 활주로의 한쪽 끝에서 두 개의 꽤 큰 구덩이를 발견했고, 또 왼쪽 날개의 연료탱크로부터 휘발유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C-54 수송기를 보았다. 그 수송기 조종사는 지프로부터 깡충 뛰어내려 자기 비행기를 점검하더니 논으로 전력 질주해 달렸다. 그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비행기 앞부분을 지나고 있을 때 무언가가 오른쪽 날개 위의 햇빛 속에서 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낡은 구형 지프의 기어를 힘껏 당겼다.
날개의 앞쪽 언저리가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고무로 된 제빙장치가 주황빛으로 돌돌 말리면서 타고 있었다. 기총소사가 왼쪽 날개를 벌집같이 만들었고, 또 폭탄 파편들이 오른쪽 날개를 쳤다. 이 비행기는 운이 다한 것 같아서 나는 활주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진 찍기에 좋은 위치를 찾아 비행기가 폭발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비행기는 곧바로 폭발하지 않았다. 조종석의 창문으로부터 돌돌 말려 올라가는 작은 주황빛 화염과 연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아주 조용했다.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