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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참판공파 행락동 가문의 역사 고찰(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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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문중은 필자의 외가라 할 수 있는데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셨지만 생전에 존경하였던 외삼촌을 통하여 가문의 역사에 대하여 전해 들었지만 당시에는 그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없었는데, 외삼촌 서거 13주년이 되는 해에 그 역사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기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완성된 것은 아니고 하나의 시작 단계라고 할 수 있으며, 앞으로 조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될 때 마다 추가로 기고할 것이며, 우선은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정리하여 연재할 생각이다. 평소에 하나의 결과보다는 그 과정을 중시하는 편인데 필자가 논하고자 하는 행락동 가문의 역사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간다. 외삼촌 생전에 통계공 강회중에 대하여 말씀하신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행적에 대하여 자세히 몰랐다. 그러나 증조부 탄생 150주년이 되는 2015년에 이르러서야 강회중이 얼마나 대단한 선비이었는지 비로서 깨닫게 되었다. 강회중은 한마디로 고려말의 거목(巨木)으로서 문무를 겸비한 학자였으며,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이라는 높은 벼슬을 역임하였다 강회중의 행적과 관련하여 주목하는 부분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두문동으로 들어가서 두문동 72현중의 일원(一員)이었다는 것이며, 태조가 형조참판을 비롯하여 병조참판을 두 번이나 권유하였으나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며, 세종도 도총제(都摠制)를 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렇게 뒤늦게나마 강회중의 진면목을 깨닫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강회중은 고려에 대한 충절(忠節)을 끝내 고수하면서 결국 조선에서는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며, 1421년(세종 3) 6월 서거하였으니 어느 덧 600주년이 되어 가는 시점에서 그 강직한 선비정신을 기억할 것이다. 강회중은 3형제를 두었으며, 차남인 참판공 강안복이 다시 9형제를 두었는데, 항렬이 이(利)자가 되어 흔히 9리파라 하였는데 행락동 가문은 이중에서 장파(長派)에 속한다. 장파(長派)가 되는 강이찬은 호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강지가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봉되는 연유로 영선군(永善君)에 추증되었는데 그 이전에 아들이 공신으로 책봉받을 때 군호도 영선군(永善君)이라는 점이니 참으로 특이한 사례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행락동 가문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영선군(永善君) 강지에 대하여 논하기로 한다. 강지는 호가 모암(慕庵)으로서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는데 있어서 공로를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이 되어, 영선군(永善君)으로 책봉되었으며, 토지를 하사받았다는 것인데 이는 사패지(賜牌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패지(賜牌地)를 여러 지역에 하사하였는데 그 중의 한 지역이 바로 평택에 있는 행락동 일대이었던 것이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작가.칼럼니스트.<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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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6 25 판도공파 지파 방문을 참판공 회관 건립에 마추어
다녀 왔지요 회관을 아주 멋있게 깔끔하게 지였더군요 고마워요 ~
판도공파 참판공 회관 건립을드립니다
@문암 판도공파 후손들의 지파 순회 방문 모임인데
서울 경기 충천지방 까지의 자손들 인데 참 존 모임 입니다
근데 이번에 난 불참 했답니다 ! ~ ㅎㅎㅎ
@등촌동 등촌동 종현님께서 올려 주신 덧글 감사합니다.
@문암 내게 도움이 되는 글 이기에 감사를 드렸을 뿐일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