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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6: 17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헛되다. - 고전 15: 19 우리가 바라는 것
고전 16: 17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헛되다. -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하나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사람들의 죄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문제로 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그의 부활로 확증되기 때문이다.
(1) 믿음도 헛됨.
14-15절의 같은 말씀 해석을 참조하라.
(2)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음.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이방인들이 사죄를 받은 것은 확실하였다.
* 행 10: 43 -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 행 11: 1-18 –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그들은 복음을 믿자마자 하나님에게서 사죄받은 증표를 많이 받았다. 그러면, 신자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로 하여금 사죄를 받게 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도 참되다.
고전 15: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 -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
또 하나는,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망했을 것이다.
1]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은 확실하다.
* 살전 4: 14 -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 되나니, 성령을 받은 자가 부활할 것은 확실하다.
* 롬 8: 11 -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는 가상(假想)은, 어디까지든지 성립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의 부활이 참되지 않다고 할진대 이런 불가능(不可能)한 가상도 성립된다고 하는 셈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이 참되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고전 15: 19 우리가 바라는 것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믿고 소망 가운데 죽었으나 그 소망이 헛되기 때문이며 더욱이 그를 위해 핍박과 순교를 당한 자들은 헛된 죽음을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全) 역사를 뒤엎는 일이 될 것이다.
1]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은 돈, 부귀, 영화, 명예, 권세, 쾌락 등 이생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소망은 부활과 영생과 영원한 천국에 있다.
그 소망 때문에 우리는 고난도 받고 순교도 감당한다.
2]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우리가 더욱 불쌍"함. 이것도 가상이다.
기독자인 바울은 얼마나 행복스러웠나!
* 행 26: 29 -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 빌 3: 7-9 –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러므로 이런 가상은 성립될 수 없다. 만일 우리의 소망이 이생뿐이라면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순교까지 당하는 자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이다.
3] 죽은 자의 부활과 성도의 삶
성경은 여러 종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족장 이야기나 모세와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전쟁 이야기는 별 생각 없이 읽어도 재미있다. 삼손이나 드보라같은 사사들 이야기도 재미있다.
다윗과 솔로몬 이야기나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벌어졌던 많은 이야기들은 흥미롭다. 그러나 구약에서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이들의 예언이나 신약에서 바울 같은 이들의 편지들은 그런 재미가 덜하다.
바울의 편지 중에서도 고린도전서 15장은 아주 까다롭기 때문에 우리가 따라가기 어렵다. 특히 12-19절 말씀은 부활 신앙에 대한 믿음을 단순하게 서술하고 강조하는 게 아니라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을 분석하기 때문에 따분하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난해한 말씀을 만나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충 지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건강에 좋듯이 따분한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먹어야 한다. 부활과 연결해서 2천 년 전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살펴 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고린도 교회는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그리스도파로 자처하는 이들로 인해서 분열이 심했고, 음식을 중심으로 한 우상의 문제, 도덕적인 타락, 지나친 은사주의 같은 문제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런 일들에 대해서 1-14장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한 다음에 이제 전혀 새로운 주제를 15장에서 언급한다. 죽은 자들에 대한 부활에 관한 것이다.
12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 말은 곧 그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부활에 대한 신앙적 견해가 서로 달랐다는 의미다. 예수님에게 직접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대에 이런 문제들이 벌어지는가?
이런 문제는 이상한 게 아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그런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고, 또 진리는 그런 논쟁의 방식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종교회의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완벽한 신앙체계를 갖고 시작한 게 아니라 교회 현장에서 불거지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교리를 형성했다.
그런데 교회 현장이 서로 다르기에 신앙에 접근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염려하였다. 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게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다면 아예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는 말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말이 결국 똑같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런 문제를 조금 깊이 생각하려면 그 당시 죽음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생각과 헬라인들의 생각을 참고해야 한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한 개념이 별로 강하지 않았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 지하의 세계를 가리키는 게헨나, 혹은 스올에 간다. 그들에게 죽음은 저주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수명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서 부활사상이 조금 엿보이기는 하지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헬라인들의 죽음은 영과 육이 완전히 구분되는 사건으로 죽음에 의해서 유한한 육은 사라지고 영원한 영은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들에게도 역시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 신자들이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은 영과 육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부활할 수 없고, 예수님이 재림할 때 살아있는 사람은 그 상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믿었다.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었다. 다만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여러분들은 그들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단정하지 마시오. 그들도 나름으로 바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했다.
다만 그들의 세계관이 헬라 철학의 영육 이원론과 영혼 불멸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바울은 어떤 면에서 매우 극단적인 사람이다. 그는 이미 예루살렘의 핵심 세력인 사도들이나 예수님의 동생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교의 율법을 그대로 안고도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예루살렘 모(母)교와의 신학적인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바울에 의해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구별되는 새로운 복음 공동체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바울의 극단성은 본문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서 상당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었지만, 죽은 자의 부활은 믿지 않았다. 바울은 그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13-14절에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케뤼그마)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라고 증언하였다.
그 뒤에 나오는 15-18절은 13-14절의 반복으로 바울답지 않게 글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걸 감안하면서도 이렇게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이 문제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 문제는 그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문제에까지 연결되고, 결국은 기독교의 선포인 케뤼그마 전체에 연결된다는 뜻이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의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는 의미다.
여러분은 이런 바울의 논리가 조금 과장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여차하면 물러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그는 배수진을 쳤다. 죽은 자의 부활 문제는 실증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없다. 생물학이나 물리학이 그걸 증명할 수도 없다. 더구나 바울 시대의 헬라 철학은 오히려 영혼 불멸에 빠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교가 죽은 자의 부활 사상을 완벽하게 지지해주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죽은 자의 부활 문제는 접어두고 대충 그리스도의 부활만 믿는 것으로 정리하는 게 지혜로운 게 아닐까? 그런데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 문제를 그리스도의 부활 문제로까지 확대시켰다. 죽은 자의 보편적인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제 바울의 논리는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바울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 주장했다면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고전 15: 1-11절에서 증언하듯이 부활의 주님이 사도들과 5백 명의 교우들과 야고보와 자신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이제 아주 미묘한 문제인 죽은 자의 부활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켜 이를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그가 설명하는 기독교 신앙 전체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증명했나?
몸의 부활
고전 15: 35-58절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부활을 변증한다. 그중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42-44절 말씀은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그는 몸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육체적인 몸과 영적인 몸이다. “소마 피지콘” 즉 육체적인 몸은 썩지만, “소마 프뉴마티콘” 즉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말했다.
바울이 소마(몸)를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영지주의의 영육 이원론과 똑같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영지주의는 죽음을 통해 육체와 영혼이 갈라진다고 말하지만, 바울은 육체의 모습을 한 인간이 죽은 다음에 영의 모습을 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변형이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몸으로 살다가 죽고, 그 다음에 영적인 몸(소마 프뉴마티콘)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이런 걸 전제하고 51-53절 말씀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마치 씨앗이 땅속에서 썩어 잎과 꽃으로 변화하듯이, 그리고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우리는 전혀 다른 몸으로 변화한다. 이런 참된 생명으로 변화하는 부활의 첫 열매가 곧 그리스도이셨다. 지금 우리는 그런 변화된 몸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이 육체적인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변화한다는 그의 주장이 곧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에 대한 증명인가?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증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믿음과 증명을 구분해야 한다.
신앙의 문제는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명제처럼 실증적인 증명의 차원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를 물리학적인 차원에서도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창조과학회에 속한 사람들이 그렇다. 성경를 귀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태도야 칭찬받을 만하지만, 그것이 곧 기독교의 바른 신앙은 아니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 생명, 부활, 종말, 죽음 같은 가장 궁극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우리의 잠정적인 논리로 완전하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하루 이틀 안에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서 풀어야 할 종말론적 숙제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숙제를 푸는 중이다.
성경의 답변이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진리다. 다만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가 아직 완전하게 알지 못할 뿐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도 우리는 종말 때까지 그 숙제를 풀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바울이 왜 죽은 자의 부활 문제를 제기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영육 이원론에 빠진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이 문제였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 오늘 인간의 몸은 무의미했다. 그들은 극단적인 금욕이나 도덕적 방종에 떨어졌다.
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몸을 함부로 굴렸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을 책망했다. 이 몸은 육체와 영으로 분리되어 썩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다시 영적으로 변화된다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곧 영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로 설명한다면 우리는 지금 영적으로 신랑을 맞게 될 신부와 같다. 신부는 ‘아직’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긴다. 부활을 기다리는 오늘 우리의 마음은 신부처럼 새롭게 변화할 생명에 대한 설렘과 기쁨으로 가득하다. 이걸 아는 사람이라면 이 기쁨을 주변 사람들과 나눌 것이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웃음으로 시작 한다면
안될 일도 좋은 결과로 돌아 올수있다 합니다.
미소는 행복을 만들고 역경 속에서
탈출 할수있도록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오늘도 활짝 웃으시는 하루 되십시오.💖
설교 감사합니다.